25-3.
정신없이 뛰어간 가스라기는 광명정의 본각에서 떨어진 외딴 누각 앞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그 누각은 마치 천도봉의 상아각처럼 생겼는데, 불도 밝혀지지 않았고 인기척도 없었다.
가스라기는 그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어둡고, 사람이 없고, 외딴 장소.
그녀가 지금 가장 있고 싶은 장소였다.
컴컴한 주랑과 몇 개의 빈 방을 지나, 달빛 같은 주렴을 걷고 들어간 곳에서 가스라기는
죽은 듯이 잠자고 있는 두 명의 상아를 발견했다. 미사린을 알아보고 그녀는 움찔
물러섰다. 그러나 미사린도, 그 옆의 또 다른 상아도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가스라기는 조심스럽게 그 앞까지 나아가, 미사린과 그 옆의 이름 모를 상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미사린이 잠든 모습은 무척이나 편안해 보였다. 보일 듯 말듯한 그녀의 고른 숨결을 따라
뽀얀 달빛이 굼실거렸다. 무척이나 뒤늦게, 가스라기는 미사린이 그녀의 방식으로 지한을
사랑했음을 깨달았다. 아랫배에서 무엇인가가 치밀어 목으로 올라왔다. 가스라기는 입을
틀어막았다. 미사린의 얼굴은 더는 볼 수 없어서, 그 옆에 누운 상아에게고 눈길을
돌렸다. 비슷한, 아니 그보다 더 오래되고 깊은 평화가 그 얼굴에서 배어나왔다.
가스라기는 이 상아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화영의 천수배필이다."
등 뒤에서 천군의 음성이 들려왔다. 가스라기는 차마 돌아보지 못했다.
"미사린보다 더 오래전에 명행에 들었지."
가스라기는 입을 틀어막은 채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었구나."
혼자 보낼 수 없어 쫓아오기는 했지만 무슨 말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던 천군은, 잠시나마 말할 거리가 되어준 하무린에게 마음속으로 감사했다.
그러나 그것뿐. 천군은 다시 또 말을 잊었다. 끊어진 말의 다리를 다시 이은 것은
가스라기였다.
"수하린상아님한테 들어어요. 선인이 울지 않게 하려고, 태세가 되는 걸 막으려고
안았다고. 그래서 영원히 잠자게 되었다고‥‥‥."
처음에는 입을 틀어막은 채로 시작했다가, 점점 그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
"나도 그러고 싶었어."
사시나무처럼 떨리던 가스라기의 어깨가 우뚝 멈추는 것을 천군은 말없이 바라보았다.
"나도 하늘님한테 그런 여자가 되고 싶었어. 그런데 난 안 돼. 왜? 왜 안 돼?
왜 난 못 그래? 난 왜 상아가 아니라 가스라기지? 왜! 왜!"
가스라기는 두 주먹으로, 하무린이 누운 돌 침상을 내리쳤다. 한 번, 두 번, 세 번.
왜냐고 외쳐 물으면서, 그녀는 자신의 키로는 닿을 수 없는 하늘을 두드리는 대신
딱딱하고 차가운 영원한 잠의 침상을 내리쳤다. 돌은 깨지지 않고, 하무린의 잠도 깨지
않았다. 가스라기의 주먹에서 피가 흘렀다. 천군이 달려와 그녀를 안았다.
가스라기는 그 손을 뿌리쳤다.
"미안해‥‥‥. 미안해, 하늘님. 난 상아가 아냐. 변하지 않는 마음 같은 건 없어‥‥‥.
나, 나는 더러워. 얕아‥‥‥. 나한테는, 무량하고 무극한 건‥‥‥그런 건 없어."
천군의 손앞에서 가스라기는 무너졌다. 그녀는 무릎을 감싸고 그 위에 머리를 숙였다.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울더라도 하늘님 앞에서는 울 수 없었다.
눈물로 용서를 구걸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하늘님의 마음을 괴롭혀서는 안 된다고
마지막 남은 인내가 목을 조였다. 할 수 있는 말은 다 했기에, 이제는 하늘님이 그녀를
두고 돌아서서 가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천군은 그녀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한동안 그녀를 내려다보며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의 입에서 한마디가 불쑥 튀어나왔다.
"잠깐 같이 가자."
가스라기는 못 들은 척했다. 그러자 천군은 팔을 뻗어 대뜸 그녀의 허리를 낚아챘다.
반항할 틈도 없이 가스라기를 옆구리에 끼고 한달음에 명행묘를 빠져나왔다.
"수안니!"
깊은 밤, 산 공기를 타고 그의 목소리가 쩌렁 울렸다. 가스라기는 버둥거렸다.
"하늘님, 이러지‥‥‥."
"수안니!"
어둠 속에서 미끄러지듯이 수안니가 튀어나왔다. 천군은 가스라기를 수안니의 등에 태우고,
그 뒤에 자신도 탔다. 도망치지 못하게 꽉 움켜잡은 채로 명했다.
"올라가."
수안니가 히죽 웃고는 땅을 박찼다. 달을 향해 쏘아올린 신궁의 화살처럼 수안니는 단숨에
희박한 공기 속으로 날아올랐다 광명정이 발아래로 멀어졌다. 텁텁한 흙냄새가 멀어졌다.
풀벌레의 울음소리가 멀어졌다.
"더."
버둥거리는 가스라기를 뒤에서 꽉 끌어안은 채로 천군은 수안니를 재촉했다.
"심하게 부려먹는군. 좋아. 오늘은 원하는 대로 부림당해주마."
수안니의 불꽃이 맹렬하게 이글거렸다. 한 번 대기를 박차고, 두 번 구름을 밟고, 세 번
휘몰아치는 바람의 계곡 사이로 몸을 비틀어 뛰어오른 아흔아홉 척. 보천궁이 멀어졌다.
황산이 멀어졌다.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본 가스라기는 이제 무서워서 버둥거리지도
못했다.
"더 올라가."
천군이 다시 재촉하자 수안니는 밭은 숨을 내쉬었다.
"뭐? 더? 도대체 어디까지 갈 생각이야?"
"벌써 숨이 가쁜 거냐?"
"젠장, 누가 숨이 가쁘다는 거야!"
으르렁, 울부짖고 수안니는 다시 바람을 딛고 도약했다. 딛을 바람이 없을 만큼 대기가
희박한 곳에서는 스스로 바람을 일으키기 위해 둥근 고리처럼 몸을 휘며 재주를 넘었다.
하늘과 땅이 뒤집히자 가스라기는 그대로 떨어진다고 생각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크고 단단한 팔이 그녀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내장이 다 거꾸로 쏟아질 것 같은 충격
직후에, 다시 하늘과 땅이 제자리를 찾았다. 거꾸로 쏟아지던 내장이 도로 아래로 털썩
털썩 떨어지며 비명을 질러댔다. 그 충격에서 간신히 벗어난 뒤에야 가스라기는 겨우
눈을 뜰 수 있었다.
눈언저리를 빙빙 맴돌던 아지랑이가 가신 뒤, 가스라기가 본 것은 바람 한 점 없는
고용한 밤하늘이었다. 아래는 감히 내려다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헉, 헉, 헉, 어, 어떠냐? 제, 젠장, 볼 것도 없는 하늘에는 대체 왜 오자고 한 거야?"
수안니가 헐떡거리며 물었다.
"아직 아냐. 더 올로가."
차분한 천군의 재촉에 수안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진짜 미쳤구나? 여기서 더 올라가면 있는 거라고는‥‥‥."
수안니가 말을 멈췄다. 그 눈이 '설마'라고 물었다. 천군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통행부도 받지 않았잖아. 게다가 더 올라가면 그 계집이 숨쉬기 힘들 텐데?"
가스라기는 이미 호흡 곤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천군이 그녀의 등 뒤 명문혈에
손을 댔다.
"걱정 마."
따뜻한 손이 닿는 순간, 가스라기는 답답하던 숨이 확 트이는 것을 느꼈다. 코와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천군의 손이 닿은 명문, 생명의 입구를 통해 숨이 들어오고 있었다.
"통행부는 어쩌고!"
천군은 대답하지 않았다. 수안니는 에잇 하고 몸을 웅크렸다.
"미친 놈. 늙은이가 무슨 성질을 부리든 난 모른다. 천문을 지나는 순간에
불타버려도 난 몰라!"
말을 마치고 수안니는 다시 뛰어올랐는데, 이제는 더 이상 격렬하게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가 없었다. 수안니의 비행은 마치 강을 따라 흐르는 배처럼 느릿했다. 별들이 점점
가까워졌다. 새털구름이 수안니를 스치고 지나갔다. 가스라기가 한사코 흘리지 않으려고
애써 눈시울에 가둬두었던 눈물이, 끈이 끊어진 구슬 목걸이처럼 알알이 떨어져 나가더니
강물을 탄 듯이 둥둥 옆으로 흘러갔다.
대기는 부드러우면서도 축축하고 차가웠다. 뿜어낸 숨이 모두 차가운 물방울이 되어 둥둥
떠다녔다. 이 추운 천공에서 하늘님의 품은 너무나 따뜻했다. 거기 마음 놓고 기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스라기는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천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를 안은 팔에 좀 더 힘을 주었다. 그 힘이 가스라기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누가 너에게 자격이 없다고 하느냐고. 그것이 가스라기에게는 더욱 서러웠다.
땅을 딛고 사는 사람은 숨쉴 수 없는 진공의 하늘, 꿈처럼 느린 비행, 머리끝까지 차오른
눈물의 출렁임이 가스라기를 점점 몽롱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천군에게 몸을 기댄 채,
수안니의 등 위에서 꾸벅꾸벅 잠으로 미끄러져갔다.
완전히 잠든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는 비몽사몽간에 천군과 수안니가 주고받는
몇 마디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곧 천문이다."
"계속 가."
"후회하지 않을 거냐?"
"그런 거 몰라."
"그 계집, 잠들었냐? 속도 편하군."
그때, 가스라기는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주는 손길을 느꼈다.
"보름뿐이었어."
"갑자기 무슨 소리야?"
"편히 잠들게 해주었던 것이."
웃음 섞인 탄식 뒤에 말이 이어졌다.
"내 능력으로는 그게 끝이었던 모양이다."
수안니는 침묵했고, 한동안 고요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다시 수안니가 입을 열었다.
"천문이다. 간다."
가스라기는 자신을 더욱 세게 끌어안는 팔을 느꼈다. 눈을 감고 있어도 부신 빛의 소리를
들었다. 귀가 먹먹해지고 피의 흐름이 멎는 한순간이 영원처럼 아득하게 지난 뒤, 놀란
수안니의 목소리가 울렸다.
"결계가 풀려 있었어. 늙은이가 상당히 봐주고 있는 모양인데? 그 꼬맹이 상아가 연통이라도
넣은 건가? 헤, 네놈 이럴 줄 알고 있었던 거지? 불길에 휩싸여 유성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르는데 잘도 그냥 가자고 한다 싶더니만."
"몰랐어."
천군은 짧게 대답하고 가스라기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부스스 눈을 떴다. 천군은 그녀를
부축해 수안니의 머리가 향하고 있는 곳을 보게 했다. 고개를 돌린 순간, 가스라기는
눈이 부셔서 움찔 했다. 캄캄한 밤하늘을 가르는 별의 강을 향해 그들은 날아가고 있었다.
다가갈수록 그 빛은 태양만큼이나 밝았다. 태양의 빛은 작열하고 비산하지만, 별의 빛은
흐리고 차가우면서도 날카로웠다. 수안니는 몸을 움찔거리며 조심조심 그 빛을 향해 나아갔다.
"은하다. 하늘에서는 은하, 땅에서는 장강, 명부에서는 삼도천이라고 하는 아주 긴 강이야."
천군이 가스라기의 어깨에 고개를 내리고, 그녀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언젠가 한 번, 네게 이 강을 보여주고 싶었다."
어째서‥‥‥.
"저 강 속에 반천계가 있다. 오는 제석에 지한과 내가 싸울 곳이야."
가스라기는 움찔했다. 점점 다가오는 하늘강의 부신 빛이 불길하게 느껴졌다.
어째서, 이런 곳을 내게 보여주려고‥‥‥.
강을 향해 곧장 날아가던 수안니의 몸이 주춤거렸다. 은하로부터 보이지 않는 힘이
그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수안니는 방향을 틀어 강과 나란히 날면서 조금씩 접근해갔다.
눈부시고 커다란 빛의 덩어리라고 생각한 그것이, 무수히 작은 조각들이 뭉쳐 흐르는
거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수천 마리의 귓도리들이 울어대는 것 같은
기묘한 소리가 그 강으로부터 흘러나왔다.
"더 이상은 가까이 못 가. 이게 한계야."
수안니가 강을 다라 평행으로 날면서 헉헉거렸다.
"너만 태웠다면 모르겠지만 그 계집까지 싣고는 강에 뛰어들 수도 없어.
밀어내는 힘이 너무 세."
"됐어. 이대로 쭉 나란히 가."
천군은 가스라기를 붙잡은 채로 수안니의 등 위에서 옆으로 몸을 기울였다.
수안니는 기겁을 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가스라기는 잠자코 그의 손에 몸을 맡겼다.
어째서 이 은하를 보여주려 한 것인지 알아야 했다.
"들어봐."
강 속에 손을 담그지는 못했지만, 힘껏 뻗으니 은하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빛의 가장자리에
닿을락 말락 했다. 가스라기는 한껏 손을 뻗었고, 그녀가 떨어지지 않도록 천군이 굳게
잡아주었다. 손끝이 은하에 닿았다. 파직. 불꽃이 손가락을 타고 흘러 들어왔다.
그리고 수억의 벌레들이 우는 것 같은 소리도 함께.
윽
안돼
배고파
갖고싶어
할테면해봐
움직일수있어
한번이라도제발
거기있는사람누구
조금만더가면될거야
전하의허락만떨어지면
애써배운들쓸모가있을까
아직도기다리고있을지몰라
이제살날이얼마남지않았는데
복수는십년을기다려도늦지않아
그때그렇게하지말았어야만했는데
................................
무수. 무량대수만큼의 생명들이 울부짖는 소리. 무량하고 무극한 강이 근원을 향해
세차게 흐르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