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화 (98/109)

제 25 장

::은하무궁::

뭇별이 흐르는 강, 은하는

지누린상아와 우랑선인을 나누고 있는 하늘강이다.

그 강은 삼라의 긴 강과 통하며 명계의 삼도천에 이어진다.

삼라가 명행에 들고 무량과 무극이 끝나는 날까지

은하는 마르지 않으니

모든 것의 어머니

태황성모에게 돌아가는 강이다.

ㅡ천문박사 고염.『천관서』

25-1.

선계의 궁에는 문이 없다. 방과 방 사이는 촘촘하게 혹은 성글게 드리워진 주렴으로 경계를

긋고 있을 뿐이다. 막는 문도 없고, 가두는 진도 없고, 지키는 사람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스라기는 방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았다. 그녀는 완벽하게 홀로 갇혀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선녀들이 들어와 걱정스러운 얼굴로 살펴보고 갔다. 가장 많이

찾아온 건 설화선고였다. 다른 선고나 선녀들은 모두 낯선 얼굴이다. 주황색 옷을 보니

광명정에 속한 선녀들이었다. 몸이 괜찮은가 묻기도 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잠시 바깥바람

이라도 쐬지 않겠느냐 권하기도 했다.

가스라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편해 보이는 침상이 있었지만 거기 눕지도 않았다.

방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돌처럼 차갑게 식어갔다.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도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보천궁에 돌아오게 된 그날로 고정되어 있었다. 지한과 화영 사이에 

날카로운 언쟁이 오갔던 일, 언쟁이 곧 싸움으로 번질 만큼 달아올랐던 일, 수하린이

만월륜을 꺼내 든 일, 수안니가 지한과 가스라기 어느 쪽을 향해서인지 이빨을 드러내며

포효했던 일들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날, 그 순간에 일어났던 일 중에 가스라기가 가장 

또렷하게 기억하는 것은 말없이 바라보던 하늘님의 얼굴뿐이었다. 다가오지도 않고,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바라보던 얼굴. 화를 내는 것도, 반가워하는 것도 아니던 

그 얼굴.

언쟁이 어떻게 끝났는지, 어떻게 피를 보는 일 없이 타협이 이우러진 것인지, 어떻게

보천궁으로 돌아왔는지 모두 아득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녀는 광명정의 한 방에

남겨져 있었다.

가스라기는 내내 생각했다. 마약 하늘님이 그때 불렀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 달려갔을까?

주저앉았을까? 지한에게로 갔어야 할까? 아니, 하늘님에게로 갔어야 할까? 그녀는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만약 실제로 부름을 받았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그녀는 웅크리고 앉아 돌처럼 굳어 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천군도 지한도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하염없이 감사했다. 

그들을 보는 순간 쩡쩡 갈라져버리고 말았을 테니까.

며칠이나 흘렀을까. 주렴이 걷히고 누군가가 가스라기 앞에 와서 섰다. 고개를 들지 

않고서도 달빛처럼 흘러내리는 치맛자락을 보고 수하린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내가 왜 왔는지 알겠지?"

한동안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던 수하린이 물었다. 가스라기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녀는 수하린이 자신을 죽이러 온 것이기를 바랐다. 그리고 가능한 한 아무 말 없이

죽여주기를 원했다.

"대답 좀 해보렴."

할 말이 없었기 때문에 가스라기는 그냥 침묵했다.

"날 좀 봐."

수하린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 

수하린의 한숨이 그녀의 목덜미까지 와 닿았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구나."

몹시도 기운 없는 목소리였다. 하염없이 슬픈 목소리였다.

"전에는 네 마음의 소리가 모두 들렸는데."

주렴이 굳히는 소리가 들렸다. 힐끔 눈을 들어 바라보니 수하린이 주렴 밖으로 멀어져가고 

있었다. 힘없이 처진 어깨, 바닥에 끌리는 치맛자락이 모두 슬퍼 보였다. 가스라기는

수하린을 잡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수하린의 슬픈 목소리가 어이없기만 했다. 왜 수하린이

슬픈 척한단 말인가. 그녀가 지고 있는 짐 중 어느 하나만큼의 무게도 짊어지고 있지 않은데.

천계에서 태어나, 시키는 대로 선계로 내려와서, 시키는 대로 죽이려고 했던 상아가 아닌가.

한때 선량하게 그녀를 감싸 안아주던 마음 씀씀이조차도 이제는 믿을 수가 없었다.

하늘의 사람이든 땅의 사람이든 그런 면에서는 똑같았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 때만

남을 안을 수 있다는 것은.

수하린이 결국 말 한마디 나눠보지 못하고 떠난 뒤, 또 며칠인가가 흘렀다. 

문득 주렴 밖에서 응응 목소리가 들렸다.

"말을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지금 만나보셔도‥‥‥."

공손하게 만류하는 것은 설화선고의 음성이었고,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잃어버렸겠지. 그리고 나한테는 말을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태평하게 말하는 것은 가스라기가 처음 들어보는, 어린 여자아이의 음성이었다.

주렴이 걷히고 그 어린 여자아이가 방으로 들어왔다. 가스라기는 수하린 때와 마찬가지로

고개도 들지 않았다. 나비 날개 같은 치맛자락이 방 이곳저것을 얼씬얼씬 가볍게 

떠돌아다녔다.

"와."

가스라기를 보고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게 가스라기구나. 처음 봐."

일부러인지, 아니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서인지 마치 물건처럼 그녀를 불렀다.

가스라기는 들은 척도 안 했다. 따라 들어온 설화선고가 민망한 음성으로 말했다.

"남화궁에서 오신 자무린상아님이시란다."

또 상아로구나. 가스라기는 하나뿐인데 왜 이리 상아들은 많지? 가스라기는 잠깐 그렇게

생각을 깜빡였지만, 이내 그것도 꺼졌다.

관심이 없었다.

"내가 널 이리 데려오라고 했어."

가스라기 주변을 빙글빙글 돌던 자무린이 불쑥 말했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보천궁이 아주 박살이 날 것 같아서. 아직 천계에서는 아마 결정도

내리지 않았고 아마 올 제석회가 지나야 판결이 내려질 테니까, 예정대로 신임 궁주를

뽑고 그 신임 궁주가 직접 천계의 명을 받들 것인지 항명할 것인지 결정하게 하자고

말이야. 그때까지는 천도봉에서도 연화봉에서도 네게 손대지 못하도록 이곳에 두자고

했지. 다행이 둘 다 납득을 한 모양이야."

듣거나 말거나 뒷짐을 지고 오락가락하며 찬찬히 설명을 마친 자무린이 가스라기를 향해

빙글 돌아서며 물었다.

"그런데, 넌 어느 쪽이 이기기를 바라니?"

도발하는 듯한 말투가 자꾸만 두터운 바위 틈새로 가스라기를 쿡쿡 찔렀다.

"둘 다 네게 홀렸으니 어느 쪽이 이기든 너한테는 불리할 게 없을까? 아니, 안 그럴지도

몰라. 천군이 이기면? 그 아이는 무척 다정하지. 하지만 그 다정함은 너만을 향한 게 

아냐. 그는 보천궁에도 다정하고, 환주에도 다정해. 아마 삼라 전체에 그는 다정할 거야.

천도무친이 깨졌을 때를 보면 알지. 그러니까 그 아이, 어쩌면 너를 희생시킬 수 있을지도

몰라. 너를 희생시키면 너와 자신만 아프면 되거든. 지한이 이기면 어떨까? 그게 너한테는

더 유리할지도 몰라. 그 녀석은 저 좋을 대로만 하니까. 삼라가 어떻게 망가지든 상관없이

너에게 유리한 쪽으로 행동하겠지. 천계에 거역한 선계로 낙인 찍혀 보천궁 전체가 

괴멸되더라도 신경 쓰지 않을걸. 오호, 통재라. 남녀 한 쌍이 맺어지기 위해서 도대체

얼마나 많은 피가 흘러야 할까?"

가스라기는 무릎 사이로 얼굴을 깊이 묻었다. 두 팔로 머리를 감쌌다.

"으음, 그런다고 내 소리가 안 들리지는 않을 거야. 대답 좀 해봐. 어느 쪽이 이기길 원해?

어느 쪽이 되었든 제석에는 둘 중 하나가 죽을 거야. 그러면 너는 가스라기로서의 소임을

다하는 거지. 너로 인해 선인 하나가 죽는 거니까."

아냐. 아냐. 나 때문이 아냐. 내가 없었어도 어차피 싸웠을 거잖아.

"네가 없었다면, 제석의 결전은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거야. 설령 이루어졌다고 해도

한쪽이 압도적으로 강하니 누구 하나가 죽을 정도로 싸우게 되지도 않았을 테고. 애초에

그렇게까지 올라올 수 없었던 녀석이 설마 중극에 도달할 줄은‥‥‥."

자무린은 하던 말을 멈추고 생긋 웃었다.

"아무튼, 말해봐. 넌 어느 쪽이 살아남기를 원하니?"

가스라기는 귀를 틀어막았다.

"고쳐서 물어볼까? 어느 쪽이 죽기를 원하니?"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가스라기는 고개를 쳐들었다. 인형처럼 예쁜 여자아이의 얼굴과

마주쳤다. 하지만 가스라기에게는 전혀 예뻐 보이지 않았다.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었다.

그러려고 했지만 며칠 동안이나 열지 않았던 마른 입 안에는 침도 고이지 않았다. 

가스라기는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무서운 표정으로 자무린을 노려보았다.

자무린이 검을 뽑아 든 것은 그때였다. 설화선고가 화들짝 놀랐다. 가스라기는 놀라지

않았다. 그래, 말로 후벼 파지 말고 차라리 죽여. 너희들 상아는 나를 죽이기 위해 

선계로 내려온 거라면서. 자무린의 검이 무방비 상태로 젖혀진 가스라기의 목에 닿았다.

가스라기는 눈을 감지 않았다. 검의 날이 너무나 차가워서 이가 시릴 정도였다. 

그뿐이었다. 그 검은 가스라기의 목을 베지도, 찌르지도 않았다. 가스라기는 손잡이에

달의 문양이 새겨진 검을 빤히 보라보다가 자무린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자무린은 콧등을 살짝 찌푸리더니 검을 도로 거둬들였다.

"아직도 빛나지 않네."

뜻 모를 한숨을 내쉬더니 자무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돌아섰다.

"내 힘으로도 어쩔 수가 없구나. 이 아이의 입을 열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어.

할 수 없지. 그쪽을 불러오는 수밖에."

가스라기의 눈동자가 커졌다. 지금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천군과 지한이었다. 지금은 그들을 도저히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안 돼. 지금은 안 돼.

가스라기는 자무린을 붙잡고 애원이라도 하려고 했다. 그러나 마른 목구멍에서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오랫동안 쓰지 않아 굳고 녹이 슨 팔과 다리는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녀가 꺽꺽 소리를 내며 무릎으로 기는 사이에 자무린과 설화선고는 주렴 밖으로

멀어져갔다.

그 후로 며칠 동안 가스라기는 웅크린 채 두려움에 떨었다.

언제 저 주렴을 걷고 천군이나 지한이 들어올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둘과 보느니

차라리 두 눈알을 후벼 파내는 쪽이 낫다고 생각했다. 시도도 했다.

그러나 제 혀를 이로 단숨에 끊어내는 것 이상으로, 자기 손으로 자기 눈을 파내는 것은

어려웠다. 한번 제 배에 칼을 찔러 넣어본 적이 있는 가스라기지만, 손톱을 세워 눈두덩을

누르다가 차마 더 하지 못하고 손을 떼고 말았다. 그녀는 자신을 비웃었다. 선인을 

죽이는 가스라기. 하지만 제 손으로는 몸에 상처 하나 내지 못한다.

잠을 못 이루고, 말을 끊은 채로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근 나날이 거듭 쌓여, 이제는 

아파도 비명을 지를 수 없을 만큼 혀가 굳었고, 굳이 빼려고 하지 않아도 금세 눈이 

빠져나올 것처럼 눈 주위가 퀭해졌다.

자무린이 천군과 지한을 불러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또한 조금씩 무뎌질 정도로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주렴 밖에 인기척이 들였다. 나무껍질에 싸인 것처럼 감각이 둔해진

가스라기는 뒤늦게 그 소리를 듣고, 벽을 향해 몸을 웅크리고 머리를 박으며 눈을 감았다.

싫어. 싫어. 아무도 만나지 않을 거야. 지금은 보기 싫어. 볼 수 없어. 오지 마. 오지 마.

한숨 소리가 들렸다.

"이게 다 무슨 꼴이냐."

천군도 지한도 아니었다. 놀란 가스라기가 뻣뻣해진 목을 돌려 바라보는 사이에도 

여진은 한심천만이라는 투로 연방 혀를 찼다.

"그 머리 꼴하며, 상판대기는 왜 그짝이야? 무한계를 걸어올라 왔을 때도 지금보다는

나았다. 에구, 선녀 망신도 유분수지. 안 되겠다. 이년 땟물부터 벗겨내고 종아리를

치든지 말든지. 백화야, 운교야, 얼른 목욕통 준비해라."

여진은 아예 소매까지 걷어붙이면서 앞으로 나섰다. 뒤따라온 운교와 백화가 머리를

조아리면 '예'하고 대답했다. 가스라기는 주먹을 불끈 쥐고 다가오는 여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 대 맞으면 몹시 아플 것 같은 단단한 주먹이었다.

"아이고, 두 눈 똑바로 뜨고 노려보는 것 좀 보게. 한동안 선계 나가 있더니 이젠 내가

네 스승으로 보이지도 않는단 말이냐? 응? 눈 내리깔지 못해!"

여진이 가스라기의 얼굴 앞에서 주먹을 흔들어댔다. 가스라기는 손을 들어 

그 주먹을 감싸 쥐었다.

ㅡ사, 살려달라고 빌든지, 도망을 치든지 하지 않고! 어서! 이 바보 같은 것아!

황건역사가 나타났을 때 그렇게 외쳐주던 사람, 그렇게 호통치던 목소리였다. 

그녀가 살기를 바라주었던 선계의 사람이다. 뻑뻑하게 마른 눈물샘에서 한 방울 두 방울

물이 솟아났다. 가스라기는 그 물을 여진의 주먹에 비볐다. 목구멍에서 마른 울음이 

조금씩 새어 나왔다. 여진의 눈썹이 아래로 처졌다.

목욕통을 들고 들어오던 운교와 백화는, 여진의 품에 안겨 꺽꺽 대는 가스라기를 보고

잠시 걸음을 멈췄다.

"통만 가져오면 뭐 하니. 어서 뜨거운 물도 가져와."

잠시 후에 여진이 둘을 향해 버럭 성을 냈다. 아마도 빨갛게 달아오른 눈시울을 뜨거운

김으로 가려보려는 얄팍한 수작일 거라고 운교도 백화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착한 제자였기 때문에, 기꺼이 속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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