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7화 (97/109)

24-4.

가스라기는 이제 저 혼자 힘으로 굴 밖까지 걸어 나올 수 있었다. 벽을 짚고 비틀비틀

걸어 굴 입구에 털썩 주저앉는 것이 한계였고, 그만큼 움직이는 동안 빨빨 흘린 땀이

흥건하게 온몸을 적셨지만, 어쨌든 혼자 움직일 기력은 되찾은 것이다. 배의 상처도 이제는

전처럼 욱신거리지 않았다.

가스라기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때는 해질녘이었다. 그리 높지 않은 산이었지만 저 멀리

휘경의 불빛이 보였다. 어스름에 잠긴 관도를 따라 성문이 닫히기 전에 들어가려고 서두르는

말과 마차,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유민촌 이곳저곳에서 솟아오른 밥 짓는 연기가 

꾸물꾸물 하늘로 올라가는 것도 보였다. 마치 수십 개의 선흔처럼.

지한은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땀을 식혔다. 가스라기는 

무척이나 오랜만에 편안하게 숨을 내쉬었다.

"살 만해 보이는군."

불쑥 나타난 지한이 옆에 앉았다. 어딜 갔다 온 걸까? 그가 들고 있던 물건을 아무렇지

않게 내려놓았다. 대나무 마디 하나를 잘라낸 작은 물통 안에 맑은 물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땀을 잔뜩 흘린 뒤라 목이 말랐지만 가스라기는 물통을 못 본 체했다. 지한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결심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네가 듣고 싶어 했던 이야기를 들려줘도 되겠지?"

"아직 요구할 게 남은 거 아냐?"

가스라기가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두 가지밖에 요구하지 않았잖아."

"무슨 바람이 불었지? 내 말을 받들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처럼 보이는 걸."

빈정대는 말투였으나, 지한의 눈에는 약간 기대의 빛이 드러났다.

가스라기가 피식 웃었을 때, 그 기대는 깨졌다.

"어차피 짜낼 수 있는 거면 다 짜낼 거잖아. 미리 들으면 놀라지도 않고 좋지 뭐."

지한은 입술을 비틀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럼 호락호락 넘어가줄 수는 없지. 제일 지독한 요구를 생각해낼 때까지 기다려.

나중에 받아줄 테니까."

사실, 그는 더 이상 요구할 것도 없었다. 세 가지를 말한 건 그저 셋이라는 숫자에 

익숙하기 때문이었다.

"먼저 이야기나 들어."

이번에는 가스라기 쪽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봤다.

"먼저 해주게? 무슨 인심이야? 내가 다 듣고 도망가버리면 손해잖아."

"그러게 내버려둘 만큼 만만한 놈으로 보였나?"

가스라기는 지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해줘."

"옛날‥‥‥."

지한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마치 옛날, 한 옛날 하는 이야기의 시작

같아서, 지한의 목소리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가스라기는 생각했다.

"하계에 내려온 천선은 시간이 지날수록 인간에 물들었어."

그것은 지한이 울지세가의 서고에서 만난 이야기였다.

"인간을 어여삐 여기기 시작했다는 것이 바로 물들었다는 뜻이야. 무엇인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무엇인가에 물든다는 거니까."

이야기가 잠깐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졌다.

"그러나 천선은 물들어서는 안 됐어. 인간에 물들면 그의 불멸성이 사라질 테니. 하지만

물들었지. 그래서 천선은 불멸을 유지하기 위해 시해를 했어. 인간에 물든 부분을 

벗겨냈지. 뱀이 허물을 벗듯이, 낟알의 껍질을 털어내듯이."

시를 외듯이 중얼거리던 지한이 가스라기를 향해 말했다.

"그것이 가스라기다."

가스라기는 지한의 말을 멍하니 입속으로 반복했다. 그것이 가스라기다. 

천선이 시해를 통해 벗어던진 최초의 껍데기.

"가스라기란 낟알의 껍질이며, 그것을 벗겨내고서야 비로소 낟알은 제 역할을 다하게

되는 것. 선인의 시해도 이와 같다‥‥‥."

글자들이 알려준 바를 읊조리다가, 지한은 다시 설명했다.

"하지만 천선이 계산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지. 그렇게 벗겨낸 시해의 잔재, 가스라기는

천선을 시해할 힘을 가지고 있었어. 자신의 일부이므로 죽일 수도 있었던 거지. 

가스라기는 애초에 하늘이 만든 존재가 아니라 천선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찌꺼기다.

필요 없어서 버려진 껍데기야."

가스라기가 흐, 하고 웃었다.

"나랑 똑같네."

지한은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던 말을 눌러 담고, 설명을 이어갔다.

"그러므로 가스라기에게는 수명이 따로 없고 천수의 자세한 흐름도 정해지지 않았어.

최초의 가스라기가 그러했듯이 가스라기의 천수에는 세 마디만이 정해져 있어."

"세 마디?"

"가스라기가 선인을 만나지 않는다면 단지 버려진 야인에 불과해. 그러나 선인을 만나는

순간 가스라기로서 첫 마디를 내딛게 되지. 그다음에, 선인을 만난 가스라기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선인을 죽일 최적의 방법을 찾게 된다. 이것이 두 번째 마디다. 그리고 세 번째

마디. 가스라기는 선인을 죽인 후 인간들 속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제 가장 가까웠던

인간들 중 하나에 의해 죽는다."

그래서 나는 너를 죽일 수 있는 자들을 죽였어. 너를 위해서. 그러니까 나를 그렇게

비난하지 마. 세상 모두가 나를 비난해도 너는 그래서 안 돼‥‥‥.

지한의 얼굴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가스라기는 그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선인을 만나고‥‥‥선인을 죽이고‥‥‥인간에게 죽는다. 그게 가스라기의 천수."

가스라기는 자신에게 씌워진 천수의 굴레를 중얼거렸고,

"그래."

지한은 긍정했다. 가스라기가 킥, 웃음을 흘렸다.

"그럼, 내가 하늘님을 만난 것이 첫 번째 마디."

"그래."

"하늘님을 만나고 싶어서 그 고생을 하며 무한계를 올라가‥‥‥선계에 들어가 선녀가

되려고 애쓰고‥‥‥그랬던게 모두 두 번째 마디."

그놈의 눈에 들고, 그놈의 마음을 얻은 것도 모두 두 번째 마디의 일부겠지.

지한은 생각했지만 말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중에는 선계에서 쫓겨나서, 나랑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 귓도리골 사람들이니까,

그 사람들한테 죽게 되는 거야? 그렇게 정해진 거야?"

"안 죽어."

지한이 약간 갈라진 음성으로 말했다.

"안 죽게 할 거야. 그놈들은 이제 널 못 죽여. 아무도."

가스라기가 하아, 웃음과 한숨을 토했다. 어이없다는 듯한 지한을 바라보며 그녀는 말했다.

"왜? 왜 날 안 죽이려고 해? 당신도 선인이잖아. 내가 꼭 하늘님만 죽일 것 같아?

당신을 죽일 수도 있어. 사실 더 죽이고 싶은 건 당신인데."

웃음과 목소리가 점점 잦아졌다. 지한은 가스라기의 팔목을 잡았다.

"그래도 상관없어."

"상관없어? 왜!"

지한의 얼굴이 바싹 다가왔다. 둘은 서로의 눈을 몹시도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아무것도 가리지 못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넌 나와 같으니까."

"뭐가?"

되묻는 가스라기의 목소리가 몹시 딱딱하고 날카로웠다.

"나도 역시 너처럼‥‥‥."

지한의 목소리가 잠시 떨렸다.

"너처럼, 무한계를 걸어 올라가서 선인이 되었으니까."

"뭐?"

"나도 선골은 아니었다. 내 힘으로 선계에 올라갔어. 다른 놈들은 절대 이해 못해.

업을 밟고 올라간다는 것의 의미, 그 고통. 나도 그걸 알고 있어. 

똑같은 걸‥‥‥. 그걸 아는 건 너와 나뿐이야."

원래 그가 하려던 이야기는 그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할 수 없었다. 가스라기

역시 지한이 다른 말을 하려다가 별안간 무한계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

챘다. 그러나 그가 무한계를 올랐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놀랐다. 잠시, 지한을

바라보는 가스라기의 눈에서 적의가 사라졌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도리질을 했다. 아무리 이렇게 엉망진창이 되었다고 해도 지한을

마음속에 들여놓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었다. 그건 결국 하늘님을 담았던

마음이 정말로 그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천수가 정해놓은 가짜 마음이라는 걸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스라기는 지한을 밀어내려고 했다. 그녀의 표정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보고 있던 지한이 먼저 손을 놓았다. 여느 때처럼 빈정거리는 웃음을 지으면서.

"비슷한 처지라서, 불쌍히 여겨줬다는 뜻일 뿐이야."

그는 자신이 가져온 대나무 통을 들고 물을 마셨다. 가스라기를 쳐다보지 않은 채 물었다.

"그래, 앞으로 어쩔 생각이지? 몸이야 슬슬 나아가겠지만 선계로는 돌아갈 수 없을 텐데."

가스라기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지 않을 거야."

"그럼?"

"몰라. 어디로든 갈 거야. 떠돌다가‥‥‥."

엄마처럼 하계의 어느 남자를 만나서 딸을 갖게 될지도 몰라. 그 딸도 가스라기가 되고,

어느 날 선흔을 보게 되면‥‥‥.

가스라기는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손으로 눌렀다. 그리고 힘껏 두 주먹을 쥐었다.

"어차피 미련 같은 거 없어. 아무 데나 떠날 거야. 혼자서도 살 수 있어."

비록 억지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처음 만났을 대 기세등등하던 모습을 조금 

되찾은 것 같아서 지한은 피식 웃었다.

"정말 미련이 없나?"

'없어!'라고 씩씩한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어쩐 일인지 잠시 조용했다.

가스라기가 허공을 빤히 바라보다가 서글프게 웃었다.

"하나 있어."

"뭐?"

"한 번도 불러보지 못했어."

가스라기는 입술을 우물거렸다.

"하늘님 이름."

지한의 가슴이 시큰 아파왔다.

"내가 부른 이름은 진짜 이름이 아니라 가짜야. 그게 미련이야. 하지만 할 수 없지 뭐.

선어를 발음하지 못하는 것도 내가 가스라기이기 때문일 테니까‥‥‥."

"부르게 해줄까?"

불쑥, 지한이 말했다. 애써 웃는 얼굴로 미련을 털어버리려던 가스라기가 놀라서 돌아보았다.

"어떻게?"

그는 말없이 품에서 가스라기의 뼈칼을 꺼냈다. 그리고 약지 끝을 칼로 그었다.

가스라기가 놀라 벌떡 일어섰다.

"뭐 하는 거야?"

핏방울이 맺힌 손가락을, 지한은 가스라기의 입 앞에 내밀었다.

"이걸 마셔."

"왜?"

"선인의 피를 입 안에 머금고 있는 동안 잠시 선어를 말할 수 있어."

가스라기는 손사래를 치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난 가스라기라서 그걸 마셔도 아마‥‥‥."

"덜어지기 전에 얼른 마시라니까."

지한이 앞으로 다가왔다. 가스라기가 고개를 돌려 피하기도 전에 그의 손가락이 입에

물렸다. 순간, 가스라기는 아찔해졌다. 

땅에 떨어지면 그 땅을 병들게 하는 선인의 피를 입에 머금자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독한

독약이자 영약이 되었다. 눈앞이 하얗게 변하고 대부분의 감각이 사라졌다. 가스라기는

자신이 서 있는지 누워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향긋하고 맑고 화한 선향에

취한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온 세상이 그 향기에 감싸인 것 같았다. 

향기의 근원지가 입에 머금은 선인의 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삼켜버리면 끝나. 입 안에 머금고서 불러봐."

지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보였다. 은가루를 풀어놓은 것처럼 온통 하얗게 

꿈틀거리는데 한쪽에서 푸르스름한 연기가 피어났다. 그 연기가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지한의 색은 붉은색인데. 가스라기는 의아해하면서도 그가 시키는 대로

피를 머금으려 했다. 혀 밑에 피를 머금고 조심스럽게 혀를 굴렸다.

"천‥‥‥."

하마터면 피를 삼켜버릴 뻔했다. 그녀는 겁이 나서 혀를 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안심시켜주는 듯한, 용기를 북돋워주는 듯한 녹색 연기가 보였다.

"괜찮아. 어서."

가스라기는 다시 혀를 움직였다. 소리를 밀어냈다.

"천, 군. 천군."

뱉어낸 그 말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향기를 내뿜으며, 푸른 입김이 되어 밀려 나가는

것이 보였다. 은가루로 채색된 풍경 위에 그 선어가 퍼져갔다. 머금고 있던 피가 목구멍

속으로 넘어갔다. 화악, 모든 풍경이 제 색을 되찾으며 아찔한 감각이 다시 한 번

몰아쳤다. 그리고 방금 제 입으로 뱉어낸 이름의 여운이 뒤늦게 가스라기의 귀를 울렸다.

"천군."

가스라기는 멍하니 서 있었다. 그토록 불러보길 소망했던 이름이 방금 그녀의 입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다시 귀로 돌아왔다. 막상 뱉어놓고 보니 그것은 더할 수 없이 짧은

이름이었다. 또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기도 했다. 균형을 잃은 그녀의 몸을

받쳐준 것은 지한의 손이었다.

"잘했어."

지한의 입가에는 착잡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가스라기는 비로소 눈동자를 움직여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미소는, 너무나도 하늘님과 똑같았다. 가스라기가 빤히 노려보자 

지한은 쓴웃음을 지었다.

"잡아먹을 것처럼 구는군. 걱정 마."

지한은 그녀의 몸에서 손을 떼고 물러서려 했다. 그때 갑자기 가스라기가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지한은 놀라 발이 미끄러질 뻔했다. 가스라기가 뒤꿈치를 들어올렸다.

목에 감기는 따뜻한 두 팔의 감촉, 실려오는 체중. 지한은 반사적으로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입술이 와 닿았다. 지한은 눈을 껌뻑였다. 보천궁에서 가장 황음무도한 선인인

그가, 첫 입맞춤에 놀란 소년처럼 몸을 굳혔다.

늦가을 숲. 떨어진 낙엽들은 누가 밟지 않아도 저들끼리 살을 비비며 바스락, 바스락

삶이 부서지는 소리를 냈다. 맞닿은 입술 사이에서도 그렇게 바스락거리며 부서지는 

것들이 있었다. 미움, 아픔, 죄와 악연들. 모든 것이 부서지고 녹아내렸다.

입술이 떨어지고 나서도 한동안 지한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가스라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군가가 등을 떠밀어 엉겁결에 서로를 안고 만 사람들처럼 둘은 놀랐다.

팔과 허리를 잡은 손이 나뭇가지처럼 떨렸다.

그 탓이었으리라. 지한조차도 그들 가까운 하늘에 무엇인가 나타난 것을 늦게야 알아차렸다.

그사이 이미 해가 지고 어두워진 하늘에 노란 월륜교가 떠 있었다. 그 위에는 당연하게도

수하린이 앉아 있었다.

"무량무극."

수하린이 차분한 음성으로 인사했다.

"예의를 차리실 거라면 오기 전에 미리 기별이라도 하시지 그랬소."

지한은 가스라기를 붙잡아 뒤로 돌려세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 것은 수하린뿐만이

아니었다. 화영이 와 있는 것을 보고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번에는 좀 쉽지 않겠군.

"많이도 몰려왔군. 사냥이라도 나오셨소, 궁주?"

지한이 빈정거리며 묻자, 화영은 피식 웃었다.

"영접을 나온 거라고 여겨주게."

가스라기는 지한의 등 뒤에서 고개를 빼고 내다보았다. 숨이 멎었다. 저녁 하늘을 낮처럼

밝히는 화안금정수. 그 옆에 서 있는 하늘님. 가스라기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아직도

입 안에는 선혈의 향기가 남아 있었다. 지금까지 그 피가 입 안에 머금어져 있다고 해도,

그녀는 지금 천군의 이름을 부를 수가 없었다. 절대 그럴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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