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화 (95/109)

24-2.

그것이 위협을 실은 강한 목소리였다면 가스라기는 어떻게든 그를 멈추게 했을 것이다.

지한의 음성은 몹시 떨리고 있었다. 말의 내용을 제치고 듣는다면 위협이 아니라 애원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을 정도였다. 표정도 그랬다. 가스라기는 그가 한마디 한마디 말을

뱉을 때마다 엄청난 힘과 인내를 쏟고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원망은 나중에 마음껏 들어줄 테니까."

두어 번 숨을 고른 뒤에, 그는 다시 말했다.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지 마. 그냥 받아들여. 알아들었지?"

대답을 요구하는 그 말에, 가스라기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생각만큼 증오에 찬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싫어."

감정은 고사하고 이것이 자신의 목소리가 맞나 싶을 정도로 가늘고 힘이 없어서 가스라기는

제풀에 놀랐다. 지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싫어도 해."

그러면서 확인이라도 하듯이 거칠게 한 번 몸을 밀어붙였다. 가스라기는 헉 숨을 

들이켜면서 몸을 움츠렸다. 몸속 깊이 숨어 있던 예민한 신경을 지한이 단번에 두드린 것

가아서 그녀는 두려웠다. 다행히 그는 한 번 움직이고 다시 멈췄다.

"넌 거의 죽었었어."

갑자기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기 위해 가스라기는 턱을 조금

들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네 몸에는 생기가 없어. 그러니까 내게서 빨아가야 해."

"무슨‥‥‥어떻게‥‥‥."

"넌 알아. 본능으로 알고 있을 거야."

지한은 엷게 웃었다. 그 웃음이 몹시 쓰게 보였다.

"‥‥‥때처럼 하면 돼."

입 밖으로 뱉어내지 못한 말이 무엇인지 가스라기는 한 박자 후에 알아차렸다. 목구멍으로

뭔가가 울컥 밀려 나왔다.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하늘님과 할 때처럼? 

아무리 얼굴이 같아도 다른 상대였다. 그럴 수는 없었다.

"살기 위해서 하는 거야. 아무 소리 하지 마."

"살기 싫어."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목소리를 짜냈다.

"죽게 내버려둬."

지한의 얼굴이 고통과 분노로 일그러졌다가, 다음 순간 무표정하게 가라앉았다. 

그 무표정이 분노했을 때보다 더 무서워서 가스라기는 움찔 몸을 떨었다.

다시 하체를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지한이 말했다.

"살고 싶게 만들어주지."

가스라기는 혀라도 깨물려고 했다. 하지만 지한의 손가락이 먼저 입속으로 들어왔다.

그는 손가락을 깨물리고도 빼지 않았다. 재갈이 필요한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미약한 울부짖음이 그의 움직임과 박자를 맞춘 신음으로 바뀌어갔다. 억지로 다물려고

애쓰던 가스라기의 입이 무방비하게 벌어지고, 목이 젖혀졌다. 머리카락 한 올만 한

생기로 간신히 명을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가스라기의 몸은 그의 모든 움직임에 반응했다.

그래도 지한은 한동안 그녀의 입에서 손가락을 빼지 않았다. 몸이 합해졌다 떨어져 

나가기를 반복할 때마다 점점 가스라기의 호흡이 또렷하고 거칠어졌다. 생기를 찾아가는

눈동자가, 죽음의 기운이 아니라 황홀경에 물들어가는 것을 보고서야 그는 손가락을

뺐다. 하지만 언제든 그녀가 혀를 깨물려고 하면 다시 막을 수 있도록 입술을 쓰다듬으며

그 자리에서 기다렸다.

하계 여자의 몸이 끌어당기는 것보다 수백 배 수천 배 더 강하게 선인을 끌어당기는 

가스라기의 몸속에 들어가 있으면서도 그의 눈은 회색 막이 한 겹 덮어씌워진 것처럼

무표정했다.

상대의 고통이나 생사는 아랑곳 않고 마음껏 탐닉하기에는 가스라기의 생명줄이 너무

가늘기 때문에 자칫 지나치게 몰두하다가 다치게 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탓이었고,

자신의 생기를 일방적으로 그녀에게 쏟아 붓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이유는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외침이었다.

안고 있어도 그녀는 자신의 여자가 아니라고, 살려주어도 결국 돌아오는 것은 원망뿐일

거라고, 그렇게 외치는 마음의 바로 아래층에서, 더 낮고 강한 목소리가 속삭이고 있었다.

그래도 이럴 수밖에 없노라고, 이 여자는 심장에 꽂힌 비수와 같아서, 뽑아내버린다면

피분수를 뿜으며 자신도 죽는 수밖에 없노라고.

급한 대로 광명정의 침소로 옮긴 천군의 몸이 격렬하게 뒤틀리고, 입에서 뜻 모를 비명이

흘러나왔다. 오랜 세월 화영의 선몽을 지켜보았지만 이토록 통증이 심한 경우는 본 적이

없어 선고들조차 당황할 정도였다.

뒷짐을 지고 입술을 깨문 채 천군을 지켜보던 화영이 잠시 방에서 물러났다가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보검이 쥐어져 있었다. 그가 검을 뽑는 순간, 수안니가 천군 앞으로 뛰어들었다.

"뭘 하는 거야?"

"보다시피, 검을 뽑았다."

"왜?"

"부탁받았으니까."

화영은 또박또박 대답했다.

"태세가 되기 전에 베어달라고."

말을 끝내면서 그는 뽑아 든 검을 던졌다. 그 속도는 수안니가 알고서도 막을 수 없을

만큼 빨랐다. 날아간 검이 침상의 기둥에 꽂혔다.

"저대로라면 곧 기둥에서 검을 뽑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의 이마에 검은색 선어가

나타나거든 나를 불러."

화영이 휙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 수안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도로 주저앉혔다.

그러나 천군의 신음은 점점 고통스러워졌다. 그 순간이 조금 미루어졌다고 안심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수안니는 천군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네놈, 누구의 꿈을 꾸는 거냐? 누구 때문에 그렇게 아파하는 거야?"

듣지 않아도 답이 뻔한 질문이었다. 수안니는 가는 불꽃같은 탄식을 뱉었다.

"선인 놈들 신세도 곱지는 않구나."

그 순간이 왔다. 가스라기의 다리가 그의 허리를 꽉 조이며 엉덩이를 끌어당겼다. 순간

지한은 눈앞이 하얘질 만큼 욕망이 폭발했지만, 입술을 깨물고 간신히 참아냈다.

가스라기가 절정에 이르렀다가 온몸을 늘어뜨리는 것을 지켜본 뒤에 그는 천천히 몸을

빼냈다.

생기가 빨려나갔다고 해도 큰 바다에서 한 바가지의 물을 퍼낸 것이나 다를 바 없어 

단 한 번으로 티가 날 리 없는데도 그는 묘한 피로를 느꼈다. 넓게 펼친 천의 자락 위에

벌거벗은 몸으로 나란히 누운 채 둘은 숨을 몰아쉬었다. 가스라기의 가쁜 호흡이 점점 

가라앉아가는 소리를 귀로 들으며 지한은 이제 들려올 분노와 자책, 그리고 원망의

말을 잠자코 기다렸다. 그러나 들려온 목소리는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이상해."

허공을 떠도는 먼지 같은 목소리였다. 지한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 몸이 아닌 것 같아. 멋대로‥‥‥. 이게‥‥‥ 뭐지?"

"가스라기."

가스라기도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가스라기다. 네 이름이 아니라, 네 존재."

지한은 상체를 조금 일으키고 팔꿈치를 바닥에 기댔다. 그리고 담담하게 설명했다.

"보통 여자의 몸은 선인의 몸과 합해치면 생기를 빨리지만, 가스라기의 몸은 거꾸로

생기를 빨아가지. 더할 수 없는 쾌락과 함께."

"누구라도?"

"그래. 선인이라면 누구하고든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잠깐 머뭇거리다가 그는 고개를 돌리면서 뱉듯이 말했다.

"자책 마라."

잠시 동안 가스라기는 아무 말이 없었다. 지한이 그 침묵을 불안하게 여기고 

돌아보았을 때,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또."

"또라니?"

"또 아는 거."

"뭘 더 알고 싶은데?"

"나에 대한 모든 것‥‥‥. 당신이 아는 거 전부 다."

눈물도 말라버린 것 같은 퀭한 눈동자가 가슴을 후벼 파서 그는 더 이상 마주 보지

못하고 시선을 내렸다.

"그렇게 쉽게 줄줄 말할 만큼 짧은 이야기가 아냐. 선어 한 글자에 한 나라의 백 년

역사가 담기는데 어떻게 그걸‥‥‥."

그는 멈칫했다. 잠깐 생각해본 뒤에 결심하고 그녀의 눈을 마주보며 말했다.

"말해주지. 대신 세 가지 조건이 있다."

가스라기는 그리 오래 생각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상처입고 망신창이가 되어 이제는

분노하거나 자책할 기력마저 잃은 작은 짐승 같은 모습에 지한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는, 가장 마지막에 내밀려던 조건을 제일 먼저 요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 소리 없이 그는 팔을 그녀의 머리 밑으로 집어넣었다. 가스라기는 잠자코 그의 요구를

기다렸다. 팔을 접어 그녀를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역시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고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말라붙은 입술의 자잘한 상처들을 핥아주고 싶은 충동이

울컥 일었지만, 그는 꾹 눌러 참았다. 뒷머리를 눌러 가슴에 얼굴을 기대게 하고 

그는 말했다.

"자. 아무 생각 말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응응거리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두 번째는?"

"자고 일어나면 말해주지."

가스라기는 더 이상 요구하지 않았다. 잠시 후, 고른 숨결이 그의 맨살을 간질였다.

지한의 뜻에 따라 천의 자락이 가스라기의 몸을 살포시 덮었다.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심하며 어깨와 뺨을 어루만지던 지한의 입에서 짧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천장을

바라보며 그 자리에 없는 누군가를 향해 중얼거렸다.

"네놈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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