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 장
::선몽::
옛사람이 말하기를
꿈에 내가 선인이 되었는데
선인이 나를 꿈꾼 것인가
아니면 내가 선인을 꿈꾼 것인가.
내 오늘 술 한 병을 마시고
꿈에 내가 되었는데
나는 나를 꿈꾼 것인가
꿈꾸는 체하며 살아가는 것인가.
ㅡ시선 이보.『만년송』
24-1.
화영은 초조하게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본래 이 명행묘 안에는 탁자 같은 건
없어야 했다. 그런데 탁자가 놓였다. 탁자뿐이 아니라 의자도 많이 옮겨왔다. 사람도
지나치게 많았다. 하무린의 영원한 잠자리인 명행묘가 이렇게 북적거리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의 잠이 고요하고 평화롭기를 바라는 화영에게 이 상황은 당연히 못마땅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화영의 시선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수하린, 화가 가라앉지 않는지 계속 흰
불똥을 바닥에 뚝뚝 떨구고 있는 수안니, 사방이 닫힌 묘실의 벽 너머 어디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천군, 그들 사이에 놓인 탁자 위, 찻잔과 다구들 가운데 올려진 태극도를
지나, 연화봉의 상아각에 정식으로 명행묘를 짓기 전까지 임시로 하무린 옆에 눕혀둔
미사린에게로 옮겨갔다. 그의 시선이 마지막 머문 곳은, 그가 지금껏 궁주로서 상대했던
어떤 외부인보다도 더 난감함 손님의 얼굴이었다. 그 얼굴은 치가 떨리도록 사랑스러운
눈, 코, 입을 갖추고 있었다.
"커다란 인형 두 개가 나란히 누워 있는 것 같아."
남화궁 태상노군의 특사 자격으로 보천궁을 방문 중인 자무린이 명행에 든 두 상아를
갸웃갸웃 바라보며 입을 오물거렸다. 그녀의 품안에는 전보다 더 털이 빯갛게 변한
한입이 안겨 있었다. 자무린은 고개를 돌리다가 화영과 눈이 마주쳤다.
화영이 움찔 놀라며 시선을 피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넌 어느 쪽이 더 예뻐 보여?"
무거운 마음들이 명행묘 안에 가득 차 있어 숨조차 쉬지 못할 만큼 다들 침묵하고 있는데
자무린의 목소리만이 혼자 날개를 단 듯이 가벼웠다.
"대답 안 할래?"
못 들은 척 시선을 피하는 화영을 보고 자무린이 실눈을 하고 노려보았다. 피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화영은 제멋대로인, 그러나 무시할 수도 없는, 그래서 더욱
난감한 상아를 향해 정중히 말했다.
"초승달과 보름달의 아름다움이 저마다 다르듯이 상아들의 아름다움을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지요. 게다가 지금은 그보다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할 때인 듯합니다.
자무린상아."
"응? 무슨 이야기?"
화영은 명행에 든 두 상아보다도 더 인형처럼 굳은 표정으로 벽 너머 먼 곳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천군을 힐끔 쳐다보았다. 망후봉의 복구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지만 여전히
보천궁은 혼란스러웠다. 가스라기로부터 비롯된, 혹은 비롯될 것이라고 믿어지는 모종의
일들에 대해 누구도 모든 걸 알지 못했다. 천계는 늘 그랬듯이 뭔가 확실히 결정하기
전에는 알려주는 것이 거의 없고, 그 결정은 언제나 느렸다. 천계의 입장이 완전히
정해지기도 전에 내려와 소동을 피운 파라천선이 고마울 지경이었다.
"과묵한 천계와, 할 일 많은 선계 사이에 중재를 해주시는 것이 남화궁의 일이니, 노군의
특사로 오신 만큼 가르침 주실 것이 많으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왜 왔느냐고 묻는 거구나?"
화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자무린은 타박타박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천군 앞에 섰다.
"그야 당연히 이 아이를 돌려주러 왔지."
자무린은 안고 있던 한입을 천군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천군의 눈동자가 조금 움직였다.
들썩이는 화톳불처럼 발그스름한 토끼가 천군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화영이 기가 막혀 물었다.
"토끼를 돌려주러 오셨다고요?"
"그래. 이 아이가 경황이 없어서 두고 가버렸거든. 내가 그냥 가져버릴까 했지만
할아버지가 돌려주라고 했어. 이 신수, 참 이상해."
선인을 죽인다는 여자에, 그 여자를 감싸는 선인에, 그 와중에 풍비박산이 난 하계의
한 세가와 장원 식솔들에, 왕재를 망쳐버렸다는 환공 기백의 무시무시한 항의까지 받아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된 상태에서 왜 내가 이런 질문을 해야 하는 걸까, 한심하게
여기면서 화영은 물었다.
"뭐가 이상하다는 겁니까?"
"계열로 보면 분명히 화염신수 같은데 말이지. 그 불을 어디다 쓰는 건지 모르겠어.
보통 토끼보다 조금 더 따끈따끈하기는 하지만 뭘 태울 만큼 뜨거운 불을 뿜는 것도
아니고. 음, 밤길을 갈 때 들고 다니면 빨간 등불 대신 쓸 수 있으려나?"
"쓸데없는 소리!"
화영이 하고 싶었던 소리를 대신 버럭 질러준 것은 수안니였다.
"지금 이 한입거리도 안 되는 토끼 이야기나 하고 자빠져 있을때냐? 엉?"
"그럼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지?"
자무린이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수안니는 기세 좋게 외쳤다.
"그야!"
거기까지가 수안니의 한계였다. 뒷말이 나오지 않자 자무린은 웃음조차 짓지 않고
수안니의 화안금정을 향해 똑바로 말했다.
"멍청이. 수신대전 때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뒤로 점점 바보가 되어가는 신수가
있다더니 너였구나?"
"누구야! 그런 소리를 한 놈이? 응? 남화궁 그 늙은이지? 그렇지? 내가 수신대전에서
펄펄 날고 있을 때 그 늙은이는 선골에 물리도 덜 마른 애송이였다고!"
어린애와 멍청한 짐승이 옥신각신 설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화영은 어째 머리가 뜨거워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손을 이마에 대고 눈을 감았다. 재잘재잘 으르렁대는 소리의
틈바구니로, 귀울림처럼 기묘한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ㅡ정말 한가하군. 아니,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거리고 있는거겠지? 그럴 바에는 왜 나를
가뒀나? 내 손으로 충분히 처리해줄 수 있는데.
소리의 진원지는 탁자 위의 태극도였다. 자무린이 수안니와의 언쟁을 그치고 돌아섰다.
화영은 신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천군이 금제를 풀어준 바 없는데 어째서 저 목소리가 들리는 겁니까?"
"할아버지가 직접 가둔 것이 아니라 아무래도 불완전해. 이대로 두면 저 녀석 혼자 풀고
나올지도 몰라. 무식하게 힘만 센 녀석이거든."
ㅡ동생한테 너무 심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누님.
"넌 더 심한 소리를 들어도 싸. 어째서 네 멋대로 내려온 거야?
천계의 결정이 내려지기를 기다렸어야지."
ㅡ흥, 그 결정이 언제 내려질 줄 알고? 가스라기 하나가 분탕질을 쳐서 보천궁의 후계자
둘을 전부 삼켜버린 뒤에? 보천궁의 선기가 바깥으로 술술 새어 나가 선계 자체가 다
흩어져버린 뒤에? 난 그렇게 못해. 저 멍청한 궁주 녀석이 또 등천 못할 상황이 되면,
하무린은 어쩌란 말이야! 천계는 매사에 너무 느려 터졌어.
"너 혹시 하늘의 맷돌은 천천히 돌지만 곱게 갈린다는 말 아냐?"
ㅡ알지. 제일 싫어하는 말이니까. 하! 이 무슨 바보짓이야. 날 어서 풀어줘. 늦든 빠르든
천계도 가스라기를 내버려두지는 못해. 그렇게 결정을 내릴 수는 없다는 거 알고 있잖아.
독초는 뽑고 독충은 짓눌러 죽이는 게 당연해. 더 분탕질 치기 전에 내가 먼저 손을
쓰려는 것뿐이야. 어차피 나중에는 천계의 정식 명에 따라 집행하게 될 일이야.
너희들은 직접 손을 쓰기 힘들겠지. 내가 해주겠어. 그럴 리야 없겠지만 나중에 천계에서
책임을 묻더라도 내가 다 덮어써주겠어. 그러니까 어서 이걸 풀어.
"호, 너그러우신 제안입니다."
화영은 반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어쩌면 그것이 이 혼란을 끝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자무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우스운 소리를 다 하는구나."
ㅡ우스워? 늙은이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시시한 내기로 개벽의 권한을
모아들이는 것부터가 수상쩍어. 혹시 무슨 꿍꿍이가‥‥‥."
웃음 짓는 일이 드물던 자무린이 생긋 미소를 짓더니, 태극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천계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보패인 태극도를, 그녀는 장난감처럼 구겨댔다.
파라천선의 비명 소리가 함께 구겨지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할아버지가 시킨 일이 하나 더 있지. 이럴까 봐 나더러 회수해 오라고 했어."
힘껏 구겼던 태극도를 다시 편 다음 돌돌 감아 소매 속에 넣고 나서,
자무린은 화영을 돌아보았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천계의 결정을 기다려. 거기에 모두의 천수가 걸려 있으니까."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기다리라고 하니 기다릴 뿐. 그것이
만사를 위해 가장 좋은 일이라고 알고 있으므로. 층층시하의 우주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그것뿐. 지금 이 세상을 이대로 간직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최선이니까.
화영은 어쩐지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때, 찻잔이 바닥에 떨어져 깨졌다. 천군의 자리 앞에 놓인 찻잔이었다. 천군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탁자 위로 엎드린 것이다. 무릎 위의 한입이 후다닥 뛰어내리더니 수안니의
배 밑으로 숨어 들어갔다. 깜짝 놀라 무심코 천군을 향해 손을 내뻗는 수하린을 호통으로
말리고, 화영은 천군을 부축하고 맥을 짚었다. 그는 금세 진단을 내렸다.
"선몽이다. 갑작스럽게 시작되었어."
신열이 불덩이 같았다. 천군의 의식은 이미 꿈속으로 접어든 모양이었다. 입술 사이에서
신음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화영은 그 말을 드문드문 알아들었다.
"어째서‥‥‥대답‥‥‥가스라‥‥‥."
삶이 깨어 있는 것이고 죽음이 잠이라면, 가스라기 역시 그 순간 꿈과 현실의 경계에
있었다. 그녀가 완전히 한쪽으로 건너가지 못하는 이유는, 집요하고도 뜨거운 목소리가
계속해서 그녀를 불러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지 마. 가지 마. 이렇게 보낼 수는 없어. 그 목소리는 그렇게 말했다. 넌 이렇게 갈 수
없어. 네게 정해진 천수는 이게 아니잖아. 네 가장 가까운 선인을 죽이고, 네 가장
가까이 있던 인간에게 죽는 것이 너의 천수잖아.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것이 가스라기, 너희잖아. 이대로 죽지 마. 나 때문에 죽으면 넌 가스라기가 아냐.
네가 가스라기가 아니라면 죽을 이유가 없어. 죽지 마.
가스라기는 웃었다. 소리가 터져 나오지는 않았지만 기분 좋게 웃었다. 싫어. 난
죽어버릴 거야. 아무 짓도 하지 않고 죽어버릴 거야. 그러면 내가 가스라기가 아니라는 걸
모두 알게 될 거야. 내가 선인을 죽이지 않았다는 걸 그때 다 알게 될 거야. 난 죽어버릴
거야. 그녀는 정말 오랜만에 기분이 좋았다. 그 무겁던 팔다리가 깃털처럼 가벼웠다.
옷의 무게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이제 보니 실오라기 하나도 안 걸치고 있었다.
벌거숭이 팔다리를 파닥거리며 가스라기는 끝없는 어둠을 향해 다가갔다. 그녀는 자신이
날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나는 것이 아니라 헤엄치고 있었다.
물고기처럼 능숙하게 뜨거운 물속을 가르고 있었다.
문득 이 뜨거운 물의 감촉이 무척이나 낯익다는 생각을 했다. 가스라기는 곧 이유를
깨달았다. 그 물은 명계의 물이었다. 그녀가 헤엄치는 것은 명계의 바다였다. 아니,
바다라고 생각한 것이 사실은 그녀의 몸 하나 담그기도 좁은 샘이었다.
물속은 좁고 따뜻하여 무척이나 아늑했다. 마치 하늘님을 치료하기 위해 함께 들어가
있던 귓도리골의 그 샘 속 같았다. 하지만 이제 귓도리골은 없다. 귓도리골 사람들도
없다. 그 사실이 떠오르자 불현듯 오한이 들었다. 가스라기는 푸드득 몸을 떨었다.
그러자, 물보다 더 뜨거운 팔이 그녀를 보듬어 안았다. 좁디좁은 샘 속에서 그녀를 꽉
부둥켜안고 빈틈없이 얽어매는 단단한 팔과 가슴과 다리가 느껴졌다. 그녀를 물보다 더
부드럽게 안고, 물보다 더 빈틈없이 감싸는 그 촉감이 한없이 좋았다. 가스라기는 이대로
영원히 잠들었으면 딱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걸 방해했다. 그 목소리는 때로는 탄식하고, 때로는
화가 난 듯이 울부짖고, 때로는 느릿느릿 주절주절 어떤 불행한 왕의 이야기를 늘어놓기도
했다. 가스라기는 그 이야기들을 듣느라고 깜빡깜빡 가야 할 길을 잊었다. 그녀가 가야 할
길로 다시 가려 하면 목소리는 또 다른 이야기를 쏟아내며 한사코 그녀를 잡으려고 했다.
그녀를 안고 있는 팔다리의 주인과, 그녀를 못살게 구는 목소리의 주인이 같은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저승을 향해 걷는 것보다 멍하니 앉아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
길어진 어느 순간이었다.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아득하게 들리던 목소리가 한순간, 귀 바로 가까이에서 들렸다. 그 목소리로 인해
가스라기는 자신의 육체를 느꼈고, 자신에게 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속삭임 뒤에,
목소리는 긴 숨결을 내뿜었다. 숨이 귓불에 닿았다. 입술이 귀를 무는 감촉, 그리고
감각을 되살리려는 듯 잘근잘근 씹어대는 감촉이 느껴졌다.
감각의 세계를 되찾은 순간 가스라기는 배에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그녀는 짧게 신음을
내뱉었다. 느낀다는 것이 고통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서둘러 무감각의 세계로 도망쳤다.
탈출은 성공적이었다. 그녀는 다시 꿈속을 부유했다.
가스라기가 꿈의 수면 밖, 감각의 세계로 다시 부상한 것은 오랜 시간 후였다. 그녀는
원하지 않았으나, 갑자기 그 따스한 물의 감촉이 사라졌다. 양수 밖으로 내팽개쳐진
아기처럼 놀라 그녀는 깨어났다. 누군가가 팔다리를 열심히 주무르고 있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배의 통증이 느껴졌다. 전보다는 조금 덜했다. 대신 추웠다. 그녀는 추워, 라고
말하고 싶었다. 말이 뜻대로 뱉어 졌는지, 아니면 뱉으려고 생각만 한 건지는 모르지만,
잠시 후 따뜻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얇은 천 같은 것이 몸에 둘러졌다. 잠시 후 따뜻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얇은 천 같은 것이 몸에 둘러졌다. 몹시 기분이 좋았지만, 배의 통증이
점점 또렷해지는 것 같아서 그녀는 다시 무감각의 세계로 도망쳤다.
그렇게 가스라기는 감각과 무감각을 가르는 경계선을 오락가락 했다. 그녀를 다시 잠들게
하는 것은 언제나 추위와 통증이었다. 그녀를 깨우는 것은 매번 달랐다. 때로는 저린
팔다리를 풀어주는 손길이었고, 때로는 안타깝게 귀와 입술과 목덜미를 더듬는 입술의
촉감이었고, 때로는 말의 내용보다 그 말과 함께 내뿜어지는 탄식과 숨결이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는 듯한 속삭임이었다.
통증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가스라기의 의식이 감각의 영역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러자 몸을 쓰다듬는 손길도 조금씩 변했다. 그녀를 물 위로 끌어올리려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몸속에 불을 지피려는 것 같았다.
젖가슴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던 손길이 꺼져가는 심장에 풀무질을 하듯 조금씩 거친 박자로
움직였다. 기운 없이 늘어져 있던 두 다리 사이를 조심스럽게 벌리는 무릎이 느껴졌다.
추위 때문에 곤두서 있던 젖꼭지가 뜨거운 입속으로 삼켜지는 순간 그녀의 감각은
뾰족한 침에 찔린 것처럼 일어섰다. 목구멍에서 꿈틀꿈틀 신음이 비어져 나왔다.
그 신음 소리를 가스라기는 자신의 귀로 들었다.
그녀는 또한 들었다. 처음 선총을 받던 날 자신의 내부에서 들렸던 소리, 생명이 경각에
달할 때마다 그녀를 되살렸던 소리를. 가스라기의 어미에게서 가스라기의 딸로 이어지는
본능의 소리에 따라, 그녀는 아직 다 열리지 않은 감각의 문을 활짝 열었다. 이렇게
해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아는 것처럼, 가스라기는 제
가슴을 빠는 이의 목을 안고, 제 다리 사이에 들어와 있는 이의 허리에 두 다리를 감았다.
인내의 끈이 끊어진 것 같은 누군가의 신음이 들렸다. 그리고 그녀의 몸속으로 다른 이의
몸이 깊이 들어왔다. 익숙한 쾌감이 등골을 타고 전신으로 번졌다. 가스라기는 눈을 떴다.
낯선 동굴, 어두운 천장. 그러나 또렷이 보였다. 못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자신의 몸
위에 있는 것이 지한이라는 사실을. 쾌감 속에 눈을 뜬 가스라기는 곧바로 지옥으로
추락했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두 다리를 오므리려고 했다. 팔로 밀어내려고도 했다.
그러나 용광로처럼 뜨거운 여체 속에 막 들어서서 그 여운을 맛보며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멈춰 있던 지한의 손과 무릎으로 단숨에 그녀를 눌렀다. 가스라기는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지독한 욕을 퍼부어주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전에 지한이 눈을 떴고,
입을 열었다.
"살고 싶으면, 가만히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