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화 (93/109)

23-4.

천군을 피해 멀리 사라진 줄 알았던 가스라기와 지한이 다시 나타났을 때 누구보다도

놀란 것은 물론 영소였다.

느닷없는 상아들의 공격에 넋이 나갔다가, 가스라기와 지한이 사라지자 한편으로는

안도했다. 선계에서 시작된 셋의 불합리한 동행에서 이제야 해방된 것이다.

하지만 그 안도는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은 여전히 뒤죽박죽이었다. 

가스라기가 선계와 인연을 깊게 맺은 이 사건이 실제로 하계, 특히 환주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지금 벌어지는 흑황과의 전쟁에 어떤 변수가 될지, 무엇보다도 지한에게 듣고 

천군에게 확인받은바, 자신이 왕재로 선택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영소에게 남은 숙제는 너무나 많았다. 이제부터 그 숙제를 머릿속으로 정리할 요량이었다.

그런데, 지한이 떠나지 않고 다시 나타난 것이다. 영소는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며 

본능적으로 다시 사람들과 지한 사이를 가로막았다.

"타고난 왕재인가?"

지한이 빙긋이 웃으며 물었다. 저점 커진 불안감이 영소의 목구멍을 답답하게 막았다.

"대답해보아라. 가스라기가 선계에 오기 전 살았던 마을의 인간들이 지금 이곳에 사는

자들, 맞느냐?"

"그건 왜 물으십니까?"

"여기 오기 전에 네 집안의 청지기에게 들은 이야기다. 확인을 하려는 것이니 괜히

수 쓰지 말고 대답이나 해."

"이미 들으셨다면, 왜 구태여 물으십니까?"

지한이 손을 뻗어 영소의 목을 틀어잡았다. 그르매가 놀라 비명을 질렀다. 천고의 죄인

가스라기가 선녀가 되어 나타났다가, 달빛을 타고 온 높은 선녀 두 명이 느닷없이 

초가지붕을 날리고 생 난장판을 만들더니, 그다음에는 갑자기 선인이 나타나 가스라기를 

데리고 사라졌다가, 또 다른 선인이 영수를 타고 나타나 높은 선녀와 함께 돌아가서

이제 겨우 난리가 끝나나 싶은 순간 다시 가스라기와 선인이 나타나는, 보통 사람들 

같으면 삼생에 걸쳐서도 보기 힘든 선연을 잇달아 그것도 떼로 만나 완전히 얼이 빠져

있던 마을 사람들도 헉 하고 놀란 소리를 냈다.

"대답이나 하라고 경고했는데도. 뭐, 좋다. 그렇게 미심쩍다면 말해주마. 네놈을 위해서

물어본 거다.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일을 영문도 모른 채 구경하고 있노라면 네놈은

미쳐버릴 테니까. 아무리 내가 사도선인이라지만 하계의 왕이 미친놈이면 가히 마음이

좋을 리가 없잖아?"

"무, 무슨‥‥‥."

발꿈치가 땅에서 떨어진 영소가 캑캑거리며 버둥댔다.

"무슨, 짓을, 하려는‥‥‥."

지한은 영소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말을 고치지. 이제부터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시작했다. 그걸 하느라고 좀 늦었지.

이젠 마무리를 할 때고."

"그게, 무슨, 뜻‥‥‥."

"이런 뜻이지. 울지세가에 속한 것은 오늘 이 자리에서 모두 죽는다."

영소는 눈을 부릅떴다. 고함을 치려고 하는 순간 지한이 더욱 세게 그의 목을 졸랐다.

"나는 천군과 다르다. 불안한 씨앗 따위 남겨두지 않아."

지한은 움켜잡고 있던 영소를 한옆으로 팽개치며 말했다.

"그럼 청소를 시작해볼까."

"무슨 짓이야!"

하늘님이 떠난 자리만 바라보고 있던 가스라기도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비틀비틀

일어섰다. 지한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마을 사람, 그르매를 향해 돌아섰다. 가스라기는

그의 온몸에서 흘러넘치는 살기에 몸을 떨었다. 무섭다. 무서운 짓을 하려고 한다.

가스라기는 달려가 지한의 옷자락을 잡았다.

"무슨 짓이야! 무슨 짓을 하려고 그래!"

"닥치고 얌전히 있어."

"하지 마!"

그르매를 향한 한 걸음 옮기려고 할 때마다 가스라기가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지한은

입술을 깨물고, 그녀를 밀쳐냈다.

"방해하지 마!"

그러나 그ㅕ를 쓰러뜨릴 만큼 세게 밀치지는 못했다. 가스라기는 서너 걸음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나다가 중심을 잡고는, 그를 노려보았다. 지한은 뱉으려던 말을 안으로 삼키고 돌아섰다.

"나중에 설명해줄 테니 방해하지 말고 있어."

"싫어."

섬뜩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가스라기가 말했다. 기묘한 느낌에 지한이 돌아보자, 

뼈칼을 두 손으로 움켜쥔 가스라기의 모습이 보였다. 칼끝은 지한을 겨누고 있었다.

"해치려는 거지? 마을 사람들."

지한은 그녀의 칼을 홀린 듯이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그래."

"왜?"

"나중에."

"지금 말해! 왜!"

지한은 화가 치밀어 견딜 수 없었다. 가스라기와 지한이 실랑이를 하는 사이에 마을 

사람들은 모두 앞 다투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는 거세게 고개를 한 번 저은 다음

대답했다.

"저들 중에 너를 죽일 자가 나올 테니까! 이제 됐어?"

칼을 쥐고 있던 가스라기의 손목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칼이 떨어지기 직전에 간신히

다시 움켜쥐고서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때문에?"

"알아들었으면 방해하지 마!"

그러나 가스라기는 또 방해했다. 그르매 쪽으로 돌아서려는 지한의 등을 향해 뼈칼을 

겨누고 비틀비틀 돌진했다. 칼날은 지한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지한은 가스라기의

손목을 비틀어 잡았다. 칼이 스친 자리, 천의가 베이고 피가 흘러내렸다.

"죽이지 마! 나 같은 거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잖아!"

지한의 눈에 노기가 일었다.

"뭐가 어째?"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가스라기는 비명을 질렀고, 뼈칼이 땅에 떨어졌다.

"아픈 건 알면서, 정작 죽을 일이 생기면 두려워할 거면서 잘도 상관없다고 재잘대는군.

네 하늘님이 언제든 너를 벨 수 있을 것 같아 보이니 그래 살맛이 뚝 떨어지더냐? 아까는

잘도 하늘님이 베면 기꺼이 목을 늘어뜨릴 것처럼 굴더니, 막상 그놈이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꽤나 속이 쓰렸던 모양이지? 그놈이 안 그럴 줄 알았냐? 하! 착각도 유분수지.

두 눈 똑똑히 뜨고 봐라. 생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하찮은 건지. 얼마나 하찮게 부러지고

망가질 수 있는 건지 똑똑히 봐!"

그는 거칠게 가스라기를 밀어냈다. 이번에는 당분간 방해를 할 수 없을 만큼 힘껏 

내동댕이쳤다. 가스라기는 무너진 울짱 아래로 굴러갔다. 지한은 불같은 눈을 돌려 

그르매를 찾았다. 그르매는 아까까지 있던 자리에 없었다. 영소가 그녀를 끌고 비틀비틀

다른 인가 쪽으로 달아나는 모습이 보였다.

지한은 다시 굵어지기 시작한 빗줄기를 고스란히 맞으면서 허공을 미끄러지듯이 밟으며

그 뒤를 쫓아갔다. 영소가 인가의 문 안쪽으로 그르매를 밀어 넣고 검을 뽑아 들며

돌아섰다. 지한은 맨손으로도 검날을 잡아 우그러뜨리고, 영소를 초가지붕 위로 던져버렸다.

문이 열리고, 그 안에 숨어 있던 일가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비명을 지르며 

쏟아져 나왔다.

인간의 전쟁터를 거닐 때와 다를 바 없이, 지한은 반쯤 꿈에 젖은 채로 하나하나 침착하게

잡아 죽였다. 다른 집에 숨어 있던 자들도 집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도망쳐 나왔다.

그러나 집 밖도 안전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멀리 도망가면 혹시나 저 요수보다 

무서운 선인의 손길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 사람들도, 시간의 선후가 있을 뿐

하나하나 목이 부러지거나 이마에 구멍이 뚫려 쓰러졌다. 모든 죽음은 일격에 이루었고,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 시간 같은 것은 주어지지 않았다.

한 마을을 도살하는 데 걸린 시간이 일각을 넘지 않았다. 이곳에 오기 전 울지세가의

모든 식솔을 해치우는 데 걸린 시간보다 더 짧았다. 그사이 빗줄기는 조금씩 더 굵어졌다.

지한은 비에 젖은 채 허공에 떠서 혹시 아직 살아남은 것이 있는지 찾기 위해 마을을

둘러보았다. 아까 던져놓은 지붕 위에서 꿈틀거리는 영소가 보였다.

지한이 가까이 다가가자 영소는 신음을 흘리며 다리를 잡고 옆으로 움직이려 애썼다.

아마도 아까 던져질 때 다리뼈가 부러진 모양이었다.

"너는 죽이지 않는다."

"왜‥‥‥."

"왕재는 이런 운명에서 예외니까. 네놈이 가스라기를 죽일 수는 없어."

영소는 이를 악물고 물었다.

"내‥‥‥내 가족은‥‥‥."

"모두 죽였다."

"후회하게 될 거다."

"뭘?"

"나를 살려둔 걸."

지한은 피식 웃었다.

"네놈은 아직 왕이 뭔지 모르는 모양이군. 네가 왕이 되는 이상, 나는 네놈에 대해서는

후회할 일이 없다."

"무슨‥‥‥ 의미지?"

"왕은 천계와 선계의 꼭두각시일 뿐. 불가근불가원이란 너희를 위한 규칙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규칙이니까."

지한을 죽일 듯이 노려보던 영소의 몸이 지붕에서 미끄러져 내려 땅에 떨어졌다.

억눌린 비명 소리가 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잠자코 허공에서 그를 내려다보던 지한은,

문득 가스라기가 있던 자리를 돌아보고 눈을 부릅떴다.

가스라기도 영소처럼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지한이 황급히 달려가

그녀의 몸을 젖히자, 그녀가 자기 배에 꽂아 넣은 뼈칼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지한은 입술을 부들부들 떨었다.

"누구 마음대로‥‥‥."

지한은 그녀의 멱살을 잡아 일으키며 외쳤다.

"누구 마음대로 죽어!"

가스라기는 대답이 없었고, 그녀를 두들겨 패서라도 정신을 차리게 하려던 지한은

짐승 같은 소리로 울부짖으며 축 늘어진 몸을 끌어안았다.

참기 힘든 고통 때문에 영소는 정신이 흐릿해져가는 것이 차라리 반가웠다. 그는 지한이

가스라기를 안고 일어나는 모습을, 그리고 빗속을 뚫고 어디론가 날아가는 것을 보면서

의식을 잃었다. 빗물 속에서 체온이 식어 이대로 죽을 것이라 여겼는데, 한참 뒤 두 배로

커진 고통과 함께 눈을 떴다.

비는 그쳤고, 사방에는 마른 피 냄새가 진동했다. 영소는 한동안 멍하니 누워 있다가 

비틀비틀 일어섰다. 그는 옛 귓도리골 사람들의 시신 사이를 걸었다. 지팡이가 될 만한

작대기 하나를 주워 들고 거기 몸을 의지해 세가의 저택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도 살아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부모의 시신을 보고, 청지기와 하녀들의 시신을 보았다.

개나 고양이도 예외는 없었다. 그가 아끼던 말들도, 말의 관리인도 모두 죽어 있었다.

그는 절뚝거리며 저택을 빠져나왔다. 엉망이 된 그의 몰골은 더 이상 울지세가의 소가주도,

너무나 곧이곧대로라서 곧잘 놀림감이 되곤 하던 젊은 관인도 아니었다. 

그는 어디로 가야 할지도 알지 못했다.

한동안 죽은 시체만을 보았기에,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는 순간 영소는 화들짝 놀랐다.

겁에 질려 돌아보자, 그 자신만큼이나 꼴이 엉망인 여자가 서 있었다.

"당신은‥‥‥."

영소는 그녀를 기억했다. 죽은 촌장 노인의 손녀였다. 그 가까이 서 있었기 때문에 

첫 번째로 지한의 목표가 되었는데, 그가 어느 집에 밀어 넣은 뒤 혼란 속에서 어찌어찌

살아남은 모양이었다. 그 잔인한 사선의 손길이 빠뜨리고 지나간 것이 있다는 사실에

영소는 감격했고, 목이 메었다. 그르매는 그를 바라보다가 얼굴을 감싸며 울음을 터뜨렸다.

"우리 때문이에요. 우리 때문에‥‥‥세가가‥‥‥도련님이‥‥‥."

"무슨 소리요?"

"우리가‥‥‥우리가 가스라기를 도왔으니까‥‥‥우리 마을에 살게 해줬으니까‥‥‥

그게 잘못되었던 거예요. 가스라기를 도운 사람은 천벌을 받는다잖아요.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잖아요."

영소는 미욱해 보이기도 하고 소박해 보이기도 하는 그녀의 자책을 듣고 피식 쓴웃음을

흘렸다. 일이 이렇게 되었지만 영소는 가스라기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는 가스라기 역시

제 뜻과 무관하게 휘말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피의 빚은 반드시 돌려주어야 할 테지만,

지한 역시 이 일의 진정한 원흉은 아니라 여겼다. 이 모든 것의 진짜 원흉은 다른 곳에

있었다. 보다 치명적이고, 보다 높은 곳에. 영소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가스라기를 도운 자는 천벌을 받는다'는 것이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일지도 모르지."

그는 지팡이를 짚고 일어서서 그르매에게 다가갔다. 넋을 잃고 우는 그녀를 한동안

다독여 위로했다. 그러는 사이에 그의 마음도 진정이 되어갔다. 해가 다시 기울어 

노을이 질 무렵, 그르매도 울음을 그쳤다.

"이제 몸을 추스를 수 있겠소?"

그사이에 영소의 팔에 기대는 것이 자연스러워진 그르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갑시다. 여기 더 있다간 혹시 그 잔인한 사선이 되돌아오면 피할 길도 없으니."

"어디로 가실 건가요? 왕궁으로?"

영소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선계로?"

"아니."

영소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나도 모르겠소. 하지만 확실한 건 있지.

나는 왕도 선인도 되지 않을 거요."

그르매는 그의 목적지가 어디든 상관없었다. 그리하여, 두 남녀는 거대한 무덤이 된

울지세가의 장원을 떠났다.

그들이 떠난 직후, 천기를 짚어본 환공 기백의 명을 받고 한 무리의 군사들이 울지세가의

장원에 당도했다. 그들은 거기서 본 것을 왕에게 돌아가 고했다. 훗날 사가들이 이날의

일을 기록하기를 환공 기백이 '왕재를 잃었도다, 태백성이 빛을 잃었도다'라고 

탄식했노라 했다. 사서에는 그가 제왕반이 허공으로 한 자나 떠오를 만큼 세게 탁자를

내리치면서 외친 한마디는 기록되지 않았다.

"망할! 죽지도 않는 선계의 요물들이 결국 일을 쳤어!"

선계의 기린이 흑기린으로 변해 귀천당한 후 약 다섯 달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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