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화 (90/109)

제 23 장

::천수불변::

성현이 이르기를.

수에는 천수와 지수가 있는데 천수가 다섯이요 지수도 다섯이다.

다섯 자리가 서로 얻어서 각각 합하게 되니 천수가 이십오. 지수가 삼십이다. 

합하여 천수와 지수가 오십오니 이것은 변화를 이루고 귀신의 수를 행하기 위함이라.

이렇게 천수로 정해진 바는 바꿀 수가 없으니.

모든 변수 또한 천수 안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ㅡ역학박사 백리문.『역경주해』

23-1.

그르매는 들고 있던 소쿠리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소쿠리에 담긴 나물이 흙바닥에

나뒹굴고, 그르매의 입에서 가까스로 불신에 찬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가스라기‥‥‥."

가스라기는 잠깐 동안 상대를 알아보지 못했다. 영소가 어째서 장원 밖의 농가로 자신을

데리고 왔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고, 자신을 보고 농가의 젊은 여자가 왜 저리 소스라치게

놀라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어리둥절해서 주변을 둘러보니 비슷비슷한 초가집들이 근처에

올망졸망 보였다. 장원의 큰 도련님이 오셨다는 이야기에 몰려나와 구경하는 촌사람들도

있었다. 분명히 처음 오는 곳인데도 묘하게 낯익은 느낌이 들었다.

"그르매 언니, 왜 그래?"

한 여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소쿠리를 떨군 여자에게 다가가며 부르는 소리를 듣고

가스라기는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자신을 이리 데려온 영소를 돌아보았다.

"여, 여기, 혹시‥‥‥."

영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귓도리골 사람들입니다."

그때, 지한은 글자들 속에 갇인 채 눈을 떴다. 그의 의식을 앗아 갔던 죽간은 여전히

심장께에 꽂혀 있었으나 통증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죽간의 반대편 끄트머리에서

흘러나온 글자들이 그를 둘러싸고 원기둥 모양으로 흘렀다.

그 글자들은 관인들이 선어를 흉내 내어 쓰는 관어가 아니었고, 심지어 선계에서 쓰는

선어와도 달랐다. 그것은 보다 더 뿌리에 가까운 글자였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선어였으며, 최초의 글자에 가까웠다. 말이 먼저 있고 그 말을 담기 위해 만들어진 

글자가 아니라 말 이전에 존재했던 글자였다. 삼라는 애초에 단 하나의 '글자'로부터

비롯된 세상이라고 했는데, 지금 지한이 보고 있는 것은 바로 그처럼 원류에 가까운

글자였다.

지한은 선인이기에 알 수 있었다. 이 글자들이 오랜 세월 동안 조악한 관어들 사이에 

숨어서 자신들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 선인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사실을.

선학을 연구하는 가문에 선골이 없다는 모순이 이 글자들을 오랜 세월 유폐시켜왔다는

사실을. 마침내 오늘, 그 로 인해 길고 긴 유폐가 풀린 것이다.

읽을 수 있는 자의 눈에 읽힐 수 있게 된 글자들이 가지고 있던 이야기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생명과 감정을 가진 글자들은 우선 그 길고 긴 유폐가 얼마나 지루하고 

답답했는지 푸념부터 늘어놓았다. 지한은 그 푸념들을 건너뛰었다. 울지세가의 선조가 

최초로 이 글자들을 발견했던 일과, 인간의 능력에 한계가 있어 글자들로부터 피상적인

이야기밖에는 들을 수 없었던 일, 그래서 완전히 이해받지 못한 글자들이 느꼈던 울분의

하소연도 슬쩍 훑은 뒤 건너뛰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울지세가의 자손들이 이 글자를

접했으나 누구 하나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푸념 역시 마찬가지였다.

관중의 애를 태우는 솜씨 좋은 이야기꾼이 길고 긴 서설을 마치고 드디어 본격적인

이야기에 접어들 때 그 눈빛과 목소리가 유달리 반짝이는 것처럼, 어느 지점부터 글자들은

강하고, 엄숙하고, 맑아졌다. 그리고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ㅡ가스라기란 낟알의 껍질이며, 그것을 벗겨내고서야 비로소 낟알은 제 역할을 

다하게 되는 것.

그다음은 이렇게 이어졌다.

ㅡ선인의 시해도 이와 같다.

빛의 글자들이 이룬 원통 안에서, 지한의 몸이 움찔 굳었다.

ㅡ그리하여 가스라기는 선인을 시해할 힘을 얻었다.

가스라기, 시해(尸解), 시해(弑害), 시해, 가스라기, 시해, 시해, 가스라기.

글자들이 지한의 몸과 머리를 관통했다. 그는 계속해서 밀려드는 글자들에게 난자당했다.

신수의 이빨, 보검의 칼날, 태고의 불이 아니라 몇 조각 진실이 그를 물어뜯고, 토막 내고,

불태웠다. 그는 살해당하고, 흔들리고, 일깨워졌으며, 마침내 마지막 기억의 한 조각을

되찾고 중극에 이르렀다.

"지, 진짜 가스라기네?"

귓도리골이 그대로 옮겨온 듯한 촌락 한가운데, 가스라기는 마을 사람들에게 둥글게

둘러싸여 있었다.

하지만 예전처럼 돌을 던지거나 고함을 지르는 이는 아무도 없다. 울지세가의 장남인

영소가 '내 손님이다'라고 딱 잘라 말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처음에는 경계의 빛들이 뚜렷했다. 하지만 한 처녀가 조심조심 물으면서

그 벽이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저기, 저, 그동안 뭐, 한 거야, 가스라기야?"

"어, 선계 가 있었어."

가스라기는 되도록 태연하게 보이려 애쓰면서 대답했다. 사실 마음은 예전처럼 치맛자락

높이 들고 냅다 달아나고 싶었다. 이런 시선을 받는 것이 불편해 죽을 맛이었다.

특히 한때는 그녀를 사람 취급도 안 하던 사람들의 시선이니.

"선계? 그럼 선녀가 된 거야?"

질문했던 처녀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디 그 처녀뿐이랴. 모여든 마을 사람들 전부

눈알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세가 도련님의 손님으로 온 것보다 그게 더 놀라운

모양이다. 가스라기는 괜히 목을 좌우로 까딱거리고 어깨를 움찔거렸다.

"응, 선녀야."

아직 선적은 못 받았지만. 그리고 선인시해니 뭐니 해서 말도 안 되는 소리 때문에 잠깐

여기 내려온 거지만, 어쨌든 선녀는 선녀 맞지, 뭐.

가스라기의 말만으로는 믿을 수 없었던지 사람들의 시선이 그 옆에 서 있는 영소에게로

슬그머니 향했다. 영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선계에서 모시고 왔지요."

맞단다! 그것도 도련님이 '모시고' 왔다고까지 했다. 가스라기를 보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완전히 달라졌다. 딱 한 사람, 그르매만 빼고.

그르매는 사람들 뒤편에 서서 착잡한 표정으로 가스라기와 영소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비록 머리에 꽂았던 수많은 비녀를 모두 뽑아내고 초롱잠 하나만 남겨 머리 모양이

약간 어수선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지금 가스라기의 차림새는 촌닭 같은 자신에 비하면

그야말로 대가의 공녀, 아니 선계의 선녀 같았다. 어찌 보면 옆에 선 영소와 한 쌍처럼

어울려 보이기도 한다. 게다가, 자신의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저 아득히 높은 곳의 

도련님이 비천한 가스라기를 '모시고' 왔다고까지 말한다. 

하늘과 땅이 뒤바뀌는 것 같은 일이다.

가스라기 역시 그런 느낌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그르매처럼 눈앞이 캄캄한 것이 아니라

발이 허공에 뜨는 듯한 기분이었다. 처음 질문했던 처녀는 가만히 보니, 그때 수릿날에

가스라기는 왜 재수 없는 거냐고 언니들에게 물었던 막내둥이다. 그사이에 벌써 세월이

흐른 것이다.

"저, 저기, 선계는 어떤 곳이야? 응? 선인들도 봤어?"

막내둥이 처녀가 숨을 할딱거리며 물었다. 가스라기는 너무 자랑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썼기 때문에 더 솔직한 자랑이 배어나는 얼굴로 대답했다.

"응."

"허이고, 정말인가 보네. 그럼 선인들은 진짜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던가?"

나이 좀 먹은 여자, 억쇠의 어미인 억쇠네가 물었다. 예전 같으면 '응'이라고 대답했겠지만

가스라기는 선계에서 배운 예의라는 것을 시범 보여주기로 결정했다.

"네."

가스라기의 입에서 공손한 말을 듣자 그나마 남아 있던 몇몇 사람들의 회의 어린 

눈빛마저 깡그리 날아갔다. 진짜 선녀가 되었구나!

"이게 다 무슨 일이래. 정말 가스라기가 선녀가 되었네. 말마따나 하늘에 지은 죄를 씻고

아주 선계까지 그냥 올라가버렸구먼. 이젠 가스라기도 가스라기가 아니구먼!"

여편네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가스라기는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길이 없었다.

쑥스럽기도 했다.

그 모습을 영소는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귓도리골 사람들과

가스라기를 만나게 해준 결과는 좋아 보였다. 그는 어떻게든 지한의 간섭을 뿌리치고

가스라기를 왕에게 데려가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이 울지세가의 장남으로 지켰던

사사로운 비밀을 왕에게 고하고 싶었다. 비록 그것으로 인해 왕재의 자격을 잃게 된다고

해도, 그래야 마음이 편할 성싶었다.

지한의 간섭은 둘째치고 가스라기가 자신조차 완전히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지난번 지한을 버려두고 가기를 거부한 것도 자신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이런 작은

친절이 가스라기의 믿음을 살 수 있기를 그는 바랐다.

분위기는 점점 좋아졌다. 마을 아낙 몇몇이 집으로 뛰어가 술과 음식을 좀 가져오겠다고

했다. 선계의 진객이 오셨는데 그냥 보낼 수는 없다는 거다. 가스라기는 입으로 제법

사양하는 말을 뱉으면서도 얼른 가서 가져오라고 손짓을 했다. 어린아이들이 가스라기

주변으로 모여들어 치마도 만져보고 옷고름도 만져보이면서 이게 다 선계의 옷이냐고

물었다. 진객을 어떻게 밖에 세워놓느냐며 누추하지만 지붕 아래로 들어가자고 억쇠네가

청해서 그 집 안방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영소와 가스라기를 상석에 앉히고 억쇠네 식구들과 마을 어른들이 방에 들어앉고 나머지

마을 사람들은 마당에 빼곡 서서 방문을 열어두고 들여다봤다.

가스라기는 웃으면서 사람들 얼굴을 둘러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이쯤

되면 나타나서 잘난 척을 해야 할 얼굴 하나가 보이지 않는다.

"저기, 촌장 할아버지는?"

"아아."

마을 사람 하나가 외따로 떨어져 있는 그르매 쪽을 힐끔 보더니 대답했다.

"작년에 돌아가셨지. 아직 좀 더 사실만한 나이였는데, 마을을 떠나면서부터 시름시름

몸이 나빠지시더라고."

가스라기는 잠시 멍해졌다. 죽었다니. 촌장 할아버지는 마을을 대표해 그녀를 괴롭히던

사람이지만, 그녀가 귓도리숲에 묻어두고 온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 빼놓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런 노인이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니. 묘한 슬픔이 느껴졌다.

진짜로 눈물이 날 만큼 슬픈 게 아니라, 강 건너의 일을 구경하는 듯한 슬픔이었다.

'아, 이게 선녀병인가?'

백화가 하계에 내려갔다 와서 우울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생각이 났다.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선계에 있을 때는 선녀 기분이라고는 거의 내보지 못했는데, 이런

엉뚱한 곳에서 선녀가 된 기분이라니.

그러고 보니 백화, 운교, 여진선고, 망후봉의 식구들이 그리웠다.

뭘 하고 있을까? 한바탕 난리가 났을 텐데.

귓도리골 사람들을 보니 새삼 용기가 났다. 천선이 무슨 심보로 그런 짓을 했는지 몰라도

어떻게든 곧 선계로 되돌아갈 수 있으리라. 하늘님만 돌아오면 이 모든 일도 다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절대로 이렇게 마주 보고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던

귓도리골 사람들과도 이렇게 되지 않았는가. 지한이 무슨 심술을 부리더라도 이제는

속지 말아야지, 하고 결심했을 때 마을 사람들이 허공을 쳐다보며 와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탄성은 다음 순간 비명으로 뒤바뀌었다.

마당의 소란에 잠깐 주의를 빼앗긴 찰나, 머리 위 지붕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영소가 벌떡 일어나 가스라기를 감쌌다. 그러나 지붕은 무너지지 않았다. 대신 날아갔다.

지푸라기와 흙덩이 일부가 방 안에 쏟아져 내렸다. 텅 빈 천장으로 밤하늘이 내려보였다.

밤하늘에는 지한의 비륜처럼 윙윙 회전하는 초승달 모양의 거대한 칼이 있었다. 

칼 너머에는 달빛 수레, 월륜거가 떠 있고, 그 위에는 금발벽안의 미녀가 앉아 있었다.

미사린이었다. 그녀의 주홍빛 입술이 열렸다.

"찾았군요."

가스라기는 흙먼지를 손으로 헤치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미사린의 월륜거 옆에 또 다른

달빛의 탈것, 월륜교가 있었다. 그리고 거기 앉은 것은, 못 본 사이 더욱 수척해진

수하린상아였다. 귓도리골 사람들보다 차라리 더 친숙한 선계의 인물들을 본 순간

가스라기는 반색을 했다.

"상아님!"

영소를 뿌리치고 그녀는 벌떡 일어섰다.

"어머님이신 태황성모를 대신하여."

눈썹을 내리깔고 있던 수하린이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가 수하린답지 않게 너무나

차가워서 가스라기는 움찔 놀랐다.

"네 명을 거두러 왔다."

하늘에는 두 개의 신월이 떠 있었다. 하나는 막 돋아난 진짜 초승달, 다른 하나는 미사린이

꺼낸 초승달 모양이 거대한 칼, 신월륜이었다. 그리고 이제 세 번째 달이 뜨고 있었다.

수하린의 등 뒤에서 떠오른 그 달은 꽉 차게 둥근 만월이었다. 창백한 만월륜이 수하린의

머리 위로 완전히 떠오른 뒤 천천히 가로누웠다. 달처럼 둥글지만, 종잇장처럼 얇고

날카로운 테두리가 가스라기의 눈동자에 비쳐 동공을 반으로 갈랐다.

"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 같은 것은 가스라기의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묻고

싶었다. 왜 날 죽이려고 하느냐고. 나는 선인을 해치려고 한 적이 없다고. 그런 생각은

앞으로도 하지 않을 거라고. 수하린 대신 미사린이 입을 열었다.

"왜냐고 물을 필요 없다. 너를 죽이는 것이 우리의 소임이니까."

"왜‥‥‥."

"글쎄, 죽어야 하는 너는 무척 궁금하겠지."

미사린은 서늘하게 웃었다.

"죽여야 하는 우리도 궁금하구나. 애초에 월궁의 딸들이 선계로 내려오게 된 이유가 바로

너 때문이니까. 아니, 너라고 말하는 건 온당치 못하겠지. 너, 혹은 네 어미, 네 어미의 

어미, 모든 가스라기 때문이니까."

"전에는 안 그랬잖아요. 왜 갑자기."

미사린은 귀찮다는 듯이 고갯짓을 했다.

"말했잖아. 우리도 궁금하다고."

초가의 지붕을 날리고 저만치 떠 있던 신월륜이 호선을 그리며 날아와, 둥근 달을 가스라기

쪽으로 향하고 누웠다.

"하지만 우리는 너처럼 '왜'라고 묻지 않아. 기억도 하지 못하던 소명, 어느 순간 깨달으면

그저 행할 뿐이지. 그러니 그저 이렇게 생각하렴. 왜냐고 물을 수 있는 너를, 왜냐고

물을 수 없는 우리가 죽이는 거라고."

미사린은 말을 끝내며 빙긋 웃었다. 하늘에 떠 있던 신월륜이 갑자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싶은 순간, 가스라기는 목덜미에 섬뜩한 바람이 닿는 것을 느꼈다. 발이 허공에 떴고,

잘려 나간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흩날렸다. 가스라기를 밀치면서 함께 바닥에 쓰러진 

영소가 윗몸을 일으키며 고함을 질렀다. '정신 차려'라는 소리가 들렸고, '도망'이라는

말도 들렸다. 나머지 소리는 아득한 공명에 묻혀버렸다.

방 안에 함께 있던 억쇠네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늙은이들도 허둥지둥 마당으로 몸을

굴렸다. 초가의 흙벽을 부수며 날아간 신월륜이 반환점을 돌아 허공에 멈춰 섰다.

"수하린상아."

미사린이 수하린을 돌아보며 재촉했다. 침묵하고 있던 수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월륜이

울었다. 칼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달의 공진 같기도 한 울림을 토한 뒤 만월륜이 가스라기를

향해 날아왔다. 또 영소가 그녀를 밀어냈는지 아니면 비겁한 생의 욕구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직인 것인지, 가스라기는 초가의 방문 밖으로 나뒹굴었다. 수평으로 방향을 

꺾은 만월륜이 가스라기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어울리지 않는 귀공녀의 차림새로 비에 젖은 마당에 나뒹굴어 진흙투성이가 된 가스라기는

멍하니 자신을 둘러싼 풍경을 바라보았다. 마을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자식와 아내의

손을 잡고 제 집으로 숨어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영소는 월륜의 거듭되는 공격을 받고

진흙으로 만든 장난감 집처럼 무너져가는 초옥에서 아직 못 빠져나온 마을 노인을 

끌어내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늘에서는 얼음으로 만든 달처럼 차가운 눈의 두 상아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계인도 선계인도 저마다 무리를 짓고 있는데,

가스라기만이 함께 무리 지을 이 없이 혼자였다.

그녀는 젖은 흙 위에 무릎을 꿇고 목을 젖혀 하늘을 바라보았다. 미사린의 신월륜이

그녀의 머리 위에 떠 있었다. 쉬익, 밤의 어둠에 흰 상처 자국을 남기며 신월륜이 날을

세웠다. 미사린의 긴소매를 크게 너울거리자, 신월륜이 곧장 가스라기의 목을 향해

내리꽂혔다. 가스라기는 피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한 쌍의 팔이 가스라기를 잡아 뒤로 끌어당겼다. 화로처럼 뜨거운 품이 가스라기를 안았다.

신월륜은 빈 땅에 꽂혔다. 부드러운 살점처럼 진흙이 튀고, 빗물이 선혈처럼 신월륜에

묻었다. 미사린이 손을 위로 치켜들자 신월륜은 땅에 움푹 자국을 남기며 다시 하늘로

튀어 올랐다. 미사린은 서늘한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불렀다.

"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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