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88/109)

22-3.

"목 부러지겠어."

정자에 도착한 가스라기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구름처럼 틀어 올린 머리 위에 봉황잠이니

옥련화니 바리바리 꽂은 머리 장식이 무거워서 제대로 목을 가누지도 못했다. 몸에는 흰

바탕에 붉은 매화 무늬가 들어간 궁장을 걸쳤는데, 하계 관인 계층의 화려한 복색은

가능한 한 자연스럽게 몸을 따라 흐르도록 만들어진 선녀들의 옷과는 또 달라서 허리는

있는 대로 조이고 가슴은 실제보다 더 도드라져 보이게 하는, 한마디로 처음 입어보는

사람은 제대로 숨을 쉴 수도 없게 하는 몸에 붙은 감옥과 같은 것이었다. 가스라기는 

의자에 앉을 때도 허리를 뻣뻣하게 세우고 다리를 발발 떨었다. 앉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술상을 넘어 들려왔다.

이런 결과를 만든 장본인인 지한은 시치미를 뚝 떼고 청지기와 계집종들에게 손짓을 해서

물러나게 했다. 그리고 술잔을 채우면서 태연히 물었다.

"네 성질에 어떻게 그걸 내주는 대로 고분고분 입었지?"

"그게."

바짝 조인 가슴을 들먹이며 가스라기가 힘겹게 대답했다.

"울잖아. 내가 기분 나빠하면 윗사람한테 혼난다고."

"호오?"

물론 지한이 예상한 대로 가스라기는 계집종들이 내온 옷과 장신구를 보고는 치를 떨며

거절했다. 계속 강권하면 몸싸움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계집종들은 그런 가스라기의

태도를 단지 '성격 이상한 소저가 트집을 잡는' 것으로 이해했고, 눈물을 글썽이며 손님

접대가 시원치 않으면 계집종들의 윗사람인 여총관에게 단단히 혼이 난다고 하소연을 했다.

여총관이 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가스라기는 대뜸 여진을 떠올렸고, 계집종들에게 

동병상련을 느꼈다. 그래서 거절하지 못하고 입혀주는 대로 입고 씌워주는 대로 썼더니

이런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지한은 물끄러미 가스라기를 뜯어보았다. 골탕이나 좀 먹으라고 한 거짓말일 뿐 하계의

귀공녀 같은 차림을 실제로 보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막상 보니 정말 안 어울렸다.

숨도 제대로 못 쉬는 것은 물론이고, 목을 돌리는 자세도 영락없는 나무 인형이었다.

보고 있는 자신의 목이 다 뻑뻑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지한은 더 못 봐주겠다고 생각하고

손짓했다.

"옷은 됐다 치고 머리에 꽂은 그것들이라도 뽑아."

지한이 계집종들에게 가스라기의 취향을 말해줄 때 '머리에 꽂는 비녀의 수가 스무 개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고'라고 했는데, 계집종들은 충실하게도 딱 그 숫자를 지킨 것이다.

"못 뽑아."

가스라기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하긴 목도 제대로 못 돌릴 지경인데 뽑을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지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스라기의 뒤쪽으로 다가갔다. 그의 손이 첫 번째

비녀에 닿는 순간 가스라기의 몸이 움찔거렸다. 지한은 잠시 기다렸다. 이윽고 가스라기가

아주 약간 목을 굽혔다. 지한은 손을 움직여 첫 번째 비녀를 뽑았다. 제일 큰 것으로

용의 머리 모양을 본뜬 용잠이었다. 용머리 부분이 거의 주먹만 한 것이 그것 

하나만으로도 묵직해서, 용잠이 머리에서 뽑히자 가스라기는 후우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쉴 정도였다. 그다음으로 지한은 봉황 한 쌍을 본떠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진 봉황잠을

뽑았다. 대나무를 흉내 낸 죽절잠, 매화와 새가 어우러진 매조잠, 가란잠, 석류잠, 어두잠,

국화잠, 화엽잠이 차례로 뽑혀 나갔다. 잠자는 호랑이의 코털이라도 뽑듯이 하나하나 

조심조심 뽑아냈기 때문에 그 많은 비녀를 거의 다 뽑아냈는데도 가스라기의 머리 모양은

크게 흐트러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풀 삼태기 모양의 소박한 초롱잠 하나가 남았다.

지한은 초롱잠의 끄트머리를 손가락으로 잠깐 어루만지다가 뽑지 않고 그냥 손을 뗐다.

"하나쯤은 남겨두는 게 낫겠지."

비녀를 뽑는 동안 거의 숨도 안 쉬고 가만히 있던 가스라기가 잠에서 깬 듯 퍼뜩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좀 살 만한가 보군. 고개도 끄덕이고."

지한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드럽게 웃으면서 가스라기 앞으로 돌아가 제자리에

앉았다. 가스라기는 이 미묘한 분위기를 빨리 털어버리려고 짐짓 큰 소리로 투덜거렸다.

"아직도 답답해. 무슨 옷이 이렇게 허리를 조이고 가슴도 답답하고‥‥‥."

"그것도 마저 풀어주랴?"

지한은 평소 입버릇대로 말을 뱉었다가 가스라기가 흠칫 굳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왜 갑자기 말문이 막히지? 좋은 기회인데, 더 놀려줘도 될 텐데. 그는 머뭇거리는 자신에게

당황했다. 빗소리가 둘 사이의 적막 위로 쏟아졌다. 한참 만에 지한은 입을 열었다.

"술이나 마시자. 그놈이 돌아오면 여기도 곧 떠나야 할 테니까."

가스라기는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한의 못된 말장난에 화를

내기는커녕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고 어쩔 줄 모르던 참이다. 말이 돌려지니

정말 살 것 같았다.

"그, 그래. 술이나 마시자."

이런 곳에 오게 될 일이 있으리라고는 둘 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선계와도 다르고 짐승이

살던 숲과도 다른 하계 세가의 고적한 정자 안에서 두 사람은 각자 술잔을 기울였다.

그들과 바깥세상 사이를 가려주는 것은 은실처럼 가는 빗방울의 주렴이었고, 그 비는 이제

점점 가늘어져 조만간 그칠 기미가 보였다.

지한은 비를 좋아한 일이 없다. 물론 해가 나는 날을 좋아한 적도 없다. 사실 그의 마음에

드는 날씨란 없었다. 그런데도 지금 이 순간만은 이 비가 그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비가 그치면, 여기서 한 발만 더 나가면 알아서는 안 되고 보아서는 안 될 것을 알게 되고

보게 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비는 그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세상이 영원히 그들을 내버려두지도 않았다. 술병이 다 

비기 전에 영소가 왔다. 부친과 이야기만 마치고 서둘러 돌아온 기색이 역력했다. 

지한을 오래 기다리게 하기가 불안했던 것이다.

"아버님께 열쇠를 받았습니다."

영소의 음성은 딱딱했다.

"지금 가서 보시겠습니까?"

지한은 술잔을 놓고 일어서며 영소에게 한마디 툭 던졌다.

"현명하군."

영소는 그 말에서 '무슨 수작이라도 부리려고 했다면 네 식솔들이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라는 뜻을 읽었고, 소름이 쭉 끼쳤다. 지한을 바라보는 영소의 눈에는 적개심과 혐오감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지한은 개의치 않았다. 그런 눈빛을 받는 것이 오히려 편했다. 악의와 살기를 드러낼 때

자신이 더 자신다울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이 자신답지 못한 순간은 불편했다.

가스라기는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아니, 불편하다는 말로는 이루 다 설명할 수가 없다.

영소를 따라 장원의 서고로 가는 동안, 힘겹게 뒤따라오는 가스라기의 발소리가 내내 

지한의 귀를 괴롭혔다. 한 번도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새 옷과 새 신이 몸에 맞지 않아

이따금 내뱉는 괴로운 신음 소리며 간혹 걸음을 멈추고 숨을 몰아쉬는 소리까지 뭐 하나

그의 귀는 놓치지 않았다. 가죽신의 밑창이 비에 젖은 땅에 붙었다가 떨어지는 

쩔꺽 소리는,

그가 들어본 어떤 소리보다도 관능적이었다. 안 들으려고 해도 안 들을 수가 없었고,

안 들으려고 할수록 그녀가 내뿜는 모든 소리가 더울 생생하게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군자가 되기를 원한 적이 없었다. 생명을 범하고 빼앗는 일을 꺼려본 적이 없었다.

생명이란 태어날 때부터 범해질 수밖에 없는 것, 천수라는 미명 하에 어차피 능욕당하는

것이라고 여겨왔다. 때문에 그는 지금껏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오직 

가스라기만이 달랐으므로 그는 그녀가 불편했으며, 두려웠다.

'천적인가?'

자신이 가스라기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지한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가스라기는 선인을 죽이는, 혹은 죽일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지금껏

이 보잘것없는 계집에게 느꼈던 모든 감정이 그 한마디로 설명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한편으로는 어이없고, 한편으로는 섬뜩했다. 차라리 가스라기의 외양이 숨 막힐

만큼 아름답거나, 혹은 소름끼칠 만큼 추하다면 이해할 수 있었다. 뿔이 난 토끼라든가

머리 세 개 달린 강아지라면 범도 경계를 할 테니까. 하지만 평범한 토끼, 평범한 강아지가

분명한데 잡아먹을 수도 없고 해칠 수도 없는 건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이해하기 힘든 일은 왕왕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여깁니다."

영소가 한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놀라울 만큼 거대한 건물이었다. 아니, 

건물 자체로는 분명 크긴 해도 장대하다는 느낌을 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온전히

서책을 보관하기 위한 장소라는 것 때문에 장대해 보였다. 선인들은 기록에 무심하여 이런

큰 서고를 갖지 못했다. 나라 전체의 것도 아니고 한 세가의 장서가 이 정도 규모에

달한다는 것에 지한은 조금 소름이 돋았다. 인간은 그들의 짧은 수명을 이런 기록의

전승을 통해 보완하는 것일까?

영소는 문에 걸린 자물통을 열쇠로 땄다.

"찾으시는 서책은 이 안에 있습니다. 제가 들어가서 찾아드리‥‥‥."

"아니, 됐다."

지한은 영소를 옆으로 밀어냈다.

"찾는 데 오래 걸리실 겁니다."

"네 말대로 그 책이 선어로 쓰였다면 오래 걸릴 리가 없지. 

방해받고 싶지 않으니 따라오지 마."

묵직한 문을 밀로 안으로 들어서기 직전에 지한은 가스라기 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는 쾅 소리나게 문을 닫았다. 두툼한 문이 가스라기와 그의

사이를 완전히 가렸지만, 지한의 시야에는 아직도 그녀의 잔상이 아른거렸다. 눈을 질끈

감았다 떠서 그 잔상을 털어내려고 애쓰며 지한은 텁텁한 공기로 가득한 서고 내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가 널 두려워하는 건 네 정체를, 가스라기라는 존재의 의미를 내가 아직 다 모르기

때문이다. 함부로 손을 댔다가 어떤 부작용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신중해진 것뿐이야.

이곳에서 가스라기가 무엇인지 알아내게 된다면 더 이상 두려움도 없겠지.'

지한은 갑골과 점토판, 석판, 그리고 대나무 조각에 글을 새기고 끈으로 묶은 죽간들이

가득 쌓인 서가가 수백 줄이나 늘어선 서고의 미궁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영소가 말한 가스라기에 대한 기록에 선어가 포함되어 있다면 그 책을 찾는 데 오래 

걸릴 리 없다고 지한은 생각했다. 그의 생각은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렸다. 

그는 그 책을 찾지 못했다.

책이 그를 찾았다. 불분명하게 어른거리는 선기를 좇아 서가 사이를 걷다가 한 모퉁이를

돌아섰을 때, 갑자기 한 묶음의 죽간이 그를 향해 날아왔다. 

자객의 비도처럼 빠르고 은밀하게, 심장을 정확히 노리고.

가스라기는 고개를 들었다. 지한이 들어가 닫은 문 안쪽에서 짤막한 비명 소리가 들린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귀를 기울여보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잘못 들었나 보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래 기다려야 하나?"

가스라기는 투덜거렸다. 사실 저 안의 책은 자신에 대해 쓰여 있을 거다. 지한이 아니라

자신이 들어가서 봐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무서운 표정으로 흘겨보고 혼자 들어가다니.

겁나서 따라 들어가지도 못했다. 게다가 저 서고 안에서 단둘이 있는 것도 겁이 났다.

차라리 나중에 영소에게 부탁해서 보는 쪽이 나을 것 같았다.

영소는 가스라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문득 한 가지가 생각나서 말했다.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이나 좀 만나보시겠습니까?"

"예?"

"소저도 아는 사람들."

"어, 그런 사람 없는데‥‥‥."

"있습니다. 제 말이 맞을걸요."

영소는 자신만만하게 말하고 가스라기를 데리고 서고 앞을 떠났다. 두 사람이 완전히

멀어진 뒤, 서고의 문틈으로 푸른 서기가 넘실넘실 밀려 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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