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7/109)

22-2.

그때, 가스라기는 뜨거운 물속에 알몸으로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곳은 머나먼 저승을 떠나와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곧고 또 걸은 끝에 도착한 울지세가의

장원 안이었다. 나랏일을 하러 떠났던 장원의 큰 도련님이 아닌 밤중에 비 맞은 생쥐 꼴로,

그것도 생전 처음 보는 불청객 두 명까지 달고 뒷문을 두드리자 울지세가의 청지기는

사색이 되었다. 그러나 졸부의 하인이 아니라 유서 깊은 세가의 식솔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청지기는 이내 표정을 수습했다. 영소가 군령을 어기고 이탈이라도 한 것은 

아닌지, 동행한 두 남녀는 누군지 묻고 싶은 것이 많을 텐데도 입을 꾹 다문 채 정중하고도

은밀하게 세 사람을 별채로 모셨다.

오래 지나지 않아 두 손님을 위해 뜨거운 목욕물을 준비했다는 기별이 왔고, 가스라기는

선계와는 분위기가 또 다른, 관인 사회에서도 기풍이엄격하고 취향이 고아한 유서 깊은

가문의 손님용 욕실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다.

벽도 바다도 욕조도 모두 파르스름하고 매끄러운 돌로 만들어졌고, 욕조의 물에 어떤 

향유를 뿌려두었는지 물빛도 푸르고 거기서 솟는 김조차도 은은히 푸르러서 옷을 훌훌 벗고

그 안에 들어가 앉으니 푸른 꿈을 꾸는 것처럼 기분이 몽롱해졌다.

춥다는 사실조차 모를 만큼 마비되었던 몸의 감각이 뜨거운 물속에서 조금씩 살아났다.

가스라기는 후우 숨을 내쉬었다. 긴장이 풀리자 졸렸다. 웅크리고 있던 몸이 점점 나른하게

늘어졌다. 욕조에 팔을 걸친 채 꾸벅꾸벅 졸다가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퍼뜩 잠이 깼다.

옆의 욕실에는 지한이 있었다. 하지만 웃음소리는 지한의 것이 아니었다. 지한의 목욕

시중을 들기 위해 따라 들어간 계집종이 내는 소리였다. 습기 때문에 몽롱하게 울리는 

웃음소리의 여운 뒤에 지한이 유쾌한 듯이 속삭이는 소리가 불분명하고 나지막하게

따라왔다. 가스라기는 물속에서 다시 발을 오므리고 무릎을 감싸 안았다.

욕실에 들어오기 전의 일이 생각났다. 별채라는 곳으로 안내되어 들어갔더니 잠시 후에

계집종 둘이 가스라기와 지한에게 목욕물이 준비되었다며 따라오라고 했다. 영소는

청지기와 함께 어딘가 다른 곳으로 가는 눈치였는데 신기한 건 지한이 그걸 막지 않은

거였다. 영소가 도망칠 가능성이 있는데도 말이다.

게다가 계집종이 목욕물을 준비해두었다며 모시러 왔을 때는 마치 점잖은 가문의 손님인

양, 정중히 일어나 따르는 것이었다.

가스라기는 그게 신기해서 얼결에 따라나섰는데, 욕실 문 앞에서 계집종이 두 사람을

부부로 알았던지 '함께 목욕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는 놀라서 버럭 '아뇨!'라고 

큰 소리로 외치고 말았다. 그리고 목욕 시중을 들어준다는 말에도 재빨리 손사래를 쳤다.

엄격하다고 해도 관인 사회에서 부부가 함께 목욕을 하거나 시녀가 목욕 시중을 드는

일은 당연한 것이었다.

계집종 두 명이 의아한 눈으로 지한과 가스라기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지한에게도 혼자

들어가시겠느냐고 물었고, 지한은 태연히 시중을 받겠다고 대답했다. 게다가 사람을 녹일

듯한 미소까지 지으면서 '울지세가에서는 시녀조차 미인만 쓰는 모양이군. 이런 극진한

접대를 거절하면 도리가 아니지'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 말이 좋게 들리기도 했으려니와,

목욕 시중을 받는 쪽이 세가 풍습으로는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에 계집종들은 안심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게 가스라기에게는 참 이상하게 보였다.

지한이 여자를 데리고 목욕하는 것이 이상한 게 아니라, 울지세가의 장원에 도착한 이후

줄곧 인간을 벌레처럼 취급하는 오만한 선인이 아니라 그냥 보통 사람처럼 굴고 있는 것이

이상했던 것이다. 영소를 감시하지 않는 것도 그렇고, 계집종들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도

그랬다.

가스라기가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자, 계집종 둘에게는 들리지 않는 자그마한 전음이

그녀의 귀에 들려왔다.

ㅡ불만이면 네가 대신 시중을 들어줄래?

가스라기가 버럭 화를 내고는 혼자 욕실로 도망치듯 들어올 때, 등 뒤에서 지한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 웃음소리를 생각하자 다시 화가 났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때와

비슷한 웃음소리가 지금도 욕실의 벽 너머에서 울렸다. 가스라기는 괜히 물속에서 

발길질을 하고, 손으로 수면을 내리쳐 철썩철썩 물을 튀겼다.

그녀의 시중을 들어주려고 따라온 계집종도 지한을 따라 들어간 모양인지 옆의 욕실에서는

두 여자가 웃기도 하고 속삭이기도 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남의 목욕 시중을 드는

것이 저렇게 즐거운 일일까? 가스라기는 달아오른 얼굴을 풍덩 담그며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왜 얼굴이 달아올랐을까?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걸까? 가스라기는 답을 알고 있었다. 지한의

전음을 들었을 때 가슴이 심하게 뛰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건 벌거벗은

지한과 함께 욕조에 들어가 있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때 버럭 화를 내고 돌아선 건

지한이 아니라 그걸 떠올린 자신에게 깜짝 놀라고 화가 났기 때문이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가스라기는 그 답도 알고 있었다. 천도각에서 보냈던 꿈같은

보름 동안 하늘님과 그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알몸으로 함께 은옥 욕조에서 시간을 보냈다.

교합 후에 땀에 젖은 몸을 씻으러 갔다가 다시 한 몸이 되어 물속으로 가라앉았던 적이

몇 번이던가. 너무나 많은 일을 겪으면서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그때의 기억들은 그녀의

몸속 깊이 잠자고 있다가 이따금 하나하나 깨어나 온몸이 욱신거리도록 안쪽에서 두들겨

대고, 외쳐댔다. 다시 그 시간으로 돌려보내달라고, 다시 한 번 그 무한한 쾌락과 

행복을 맛보게 해달라고.

그렇게 외쳐대는 욕망 때문에 지한의 말을 듣는 순간 바로 그걸 떠올려버린 것이다. 

아무리 저건 가짜라고 마음을 다스려보아도 한번 머릿속에 달라붙은 그 음험한 상상은

도무지 떨쳐지지가 않았다. 가스라기는 이런 자신이 싫었다.

세상에 하나뿐인 하늘님의 자리에 다른 존재를, 그것도 하늘님과 겉은 닮았을지언정 속은

전혀 다른 존재를 끼워 넣는 이 음험한 상상은 죄였다. 수하린을 부러워할 때는 자신의

무능이 괴로웠지만, 지금은 자신의 죄가 괴로웠다.

"미쳤어! 미쳤어!"

가스라기는 물속에서 자신을 꾸짖었다. 거품이 부글부글 일어났다. 그러다가 결국 물이

목구멍 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숨이 막혀 물 위로 올라왔다. 콜록콜록 기침을 해서 물을

토해냈다. 물은 토할 수 있었지만, 옆의 욕실에서 시시덕대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가스라기는 서둘러 목욕을 마쳤다.

"어머나?"

천의를 들춰본 계집종이 신기하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비를 맞고 오면서 옷이 하나도 젖지 않았네요. 게다가 구겨지지도 않고 더러워지지도

않고. 이건 대체 무슨 옷감일까? 참 곱기도 하지."

"풍류를 즐기려면 나름대로 요령이 필요한 법. 옷이 더러워서야 어디 가서 대접을

받을 수 있겠나?"

말 그대로 '주인 도련님과 함께 온 잘생긴 한량 손님' 답게 시답지 않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목욕을 마친 뒤, 지한은 적당히 눙치며 천의를 도로 걸쳐 입었다.

"말씀도 참 잘하시네요. 도련님의 친구분 중에는 지금껏 이런 분이 안 계셨는데."

처음에는 제법 세가의 종답게 고분고분하면서도 몸가짐은 단정하게 굴던 계집종이었는데,

잠깐 사이에 유곽의 노류장화같이 친근하게 굴었다. 지한은 이따금 하계에 내려와 한량

노릇을 하기도 했던 터라 이런 놀이에 익숙했다. 전 같으면 두 명의 계집종 모두 다음날

시신으로 발견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여자를 목적으로 온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함께 오신 소저도 이제 목욕이 끝나실 때가 되었으니 갈아입을 옷을 내드려야 

할 텐데‥‥‥. 혹시 그분 소저도 새 옷이 필요 없으실까요?"

"그쪽은 필요할걸."

지한은 갑자기 무심해진 얼굴로 대꾸했다. 거의 입 안에 들어온 떡이나 마찬가지인 

두 계집종에게 애초부터 마음이 동하지 않은 것이, 말로 희롱을 주고받으면서도 욕실 벽

너머에 있는 가스라기에게 신경이 쓰여서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갑자기 느긋하게

즐기던 기분이 싹 달아나버렸다. 계집종이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취향이 각별한 분 같던데 어떤 옷을 올려야 할지‥‥‥."

장원의 소장주와 함께 온 두 사람이 대체 무슨 신분인지는 모르지만 평범한 이들은 절대

아닐 거라고 계집종들은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지한의 풍모가 범인의 경지를

초월한 것이었다. 어쩌면 다른 세가의 귀한 자제, 아니 아예 다른 나라의 왕실 사람이라고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여겼다. 한량처럼 굴고 있기는 해도 언제나 남의 위에 서 

있었고, 만인에게 받들어 모셔지던 자의 행동은 그들처럼 남을 모시는 일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결코 쉽게 감춰지지 않는 것이다. 이런 남자와 동행한 가스라기 역시 

그에 걸맞는 신분일 거라고 계집종들은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스라기 쪽은 계집종의 눈에도 이상하게 보였다. 비록 접한 시간이 얼마 되지는

않지만 자연히 배어 나오는 어딘가 어설픈 태도며, 목욕 시중마저 거절하는 모양새가 

그러했다. 계집종들에게는 그것이 '높은 신분이지만 성벽이 괴팍한 아가씨'정도로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혹여 옷 고르는 것에도 무슨 실수를 하여 꼬투리를 잡힐까 봐 은근히

돌려 물어본 것이다.

지한은 처음에는 대답할 마음이 없었으나,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특이하긴 하지. 좀 많이 까다롭거든."

그는 두 계집종에게 몇 가지 설명을 했다. 둘 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힘든 일일 테니

어서 가서 준비하라고 둘을 내보내고, 지한은 싱글싱글 웃으며 욕실을 나와 밖에서 

기다리던 하인의 안내를 받아 별원으로 나갔다. 억수같이 쏟아지던 빗줄기가 그 사이 

봄날 세우처럼 가늘어져 있었다. 지붕이 달린 구름다리 같은 긴 주랑을 따라 별원 

한가운데 자리한 정자로 안내되었다. 뜨거운 물속에서 나른하게 퍼져 있던 온몸이

이번에는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딱 기분이 좋을 만큼 팽팽하게 당겨졌다. 

정자에는 청지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도련님께서는 장주 내외분께 문안 여쭙고 계십니다. 선경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잠시나마

이 별원의 풍치를 맛보면서 기다려 주시면 반드시 돌아오겠노라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충직한 청지기가 아마도 한 글자 틀림없이 옮기는 것일 이 전언을 듣고 지한은 피식

웃었다. 그 말을 한 영소나 그 말을 듣는 자신에게는 그렇지 않지만, 그 말을 전하는

청지기는 '선경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이라는 말이 단순히 겸양을 위한 수식이라고 여길

것이다. 게다가 '반드시 돌아오겠노라'는 말도 그러했다. 아마도 청지기는 기다리는 

친우에 대한 예의 정도로 생각할 테지만 그에게는 그 말을 하는 영소의 비참한 심경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지한은 영소가 이제는 도망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영소의 집안에 속한 모든 것, 계집종과 청지기, 하인들, 혈육들이 모두 그의 인질이었다.

영소와 같은 인간은 이런 상황에서 그를 배신할 수 없다. 단지 느긋하게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정자에는 화로가 지펴졌고, 술과 안주도 준비되어 있었다. 운치 있게 내리는 비를 

바라보면서 술을 마시라는 모양이었다. 술시중을 들 계집종을 데려오겠다는 청지기에게

'됐다'고 거절하고, 자작하여 첫 잔을 마시며 선경에 비할 바 못 되는 울지세가의 

별원을 눈으로 쓱 훑다가, 나지막한 벽돌담 군데군데 액자처럼 끼워진 네모난 흰 돌에

시선이 멎었다. 아마 단조로운 벽에 변화를 주기 위해 넣은 장식인 모양인데, 비록 세월과

비바람에 씻기기는 했지만 흰 돌의 표면에는 어떤 형상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지한이 술잔을 기울이며 그 석판을 눈여겨보자, 청지기가 말했다.

"여느 세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장식이지요."

"확실히 그렇군."

"저 열두 개의 석판은 이름난 석공이 새긴 시황군략십이도라는 것입니다. 전설 속의

시황께서 어떻게 갈라진 천하를 하나로 통합하셨는가를 열두 개의 석판에 새긴 것이지요.

이 별원의 자랑거리로 장주님께서도 매우 아끼시는 것입니다."

지한은 깊게 갈앉은 눈으로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낼 수 있는 온갖 괴이한 형상의 요마들

사이를 한 자루 칼만으로 가르고 다니는 한 인간을, 무수한 장수들 앞에서 그 칼을 

치켜든 한 인간을, 태사의에 앉아 만인의 예를 받는 한 인간을 차례차례 바라보았다. 

하계의 인간들에게는 전설이겠으나, 그에게는 기억이었다. 열 두 개의 석판은 그가 

그의 형, 한때 시황이라고 불렸던 천군을 도와 천하를 통합하던 오래전의 일들과

큰 흐름이 일치했다. 그때 입고 있던 옷은 저런 것이 아니었다든가, 그때 저런 요마는

없었다든가 하는 자잘한 불일치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석판에 그려진 것은 오직 천군뿐이었다. 지한의 존재는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석판 속 천군이 들고 있는 것은 지한의 보패인 화혈삼첨도와 흡사했다. 지한은 차가운

비웃음을 흘렸다. 인간들이 기억하는 역사란 오직 제왕의 역사일 뿐이며, 천군의 제패에

도구로 이용된 그는 그저 석판 속의 칼 형상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지한은 술잔에

남은 술을 단숨에 털어 놓고 다시 술병을 찾아 손을 뻗었다. 술맛이 쓰게 느껴졌다.

"소저께서 오시는군요."

청지기가 말했다. 지한은 술병으로 뻗던 손길을 멈추지 않은 채 시선만 주랑 쪽으로 힐끔

돌렸다. 계집종의 안내를 받아 걸어오는 가스라기를 보고, 그는 하마터면 술병을

떨어뜨릴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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