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83/109)

21-2.

수면에 비친 것은 검은 옷에 창백한 안색의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이었는데, 다른 설명을

듣지 않고도 그것이 바로 상상하던 명부사자의 모습에 가까운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늘 뒤에서 목소리만 들리던 명부사자의 모습을 보게 되자 영소는 본증적인

공포를 느꼈다. 그러나 명부사자는 영소에게는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ㅡ섭섭하오, 진선. 어째서 명계에 오셨으면서도 들르지 않고 그냥 지나가려 하셨소?"

지한은 예상이라도 했는지 그다지 놀라지 않고 대꾸했다.

"명부사자가 섭섭이니 뭐니 감정이 있는 것처럼 군다는 게 더 놀랍군. 일이 바쁘실 것

같아 번거로움을 덜어드리려 한 것이니 과히 나무라지 마시오."

ㅡ새로 삼도천을 건너오는 자들이 많아 바쁜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진선을

접대할 시간조차 없겠소? 처음 명계로 오는 문을 여셨을 때, 그리고 물을 찾기 위해

염마라견을 꺼냈을 때, 두 번이나 진선께서 오신 것을 알아차렸건만 곧바로 조심스럽게

기척을 감추시기에 제대로 마중도 나오지 못했소. 이제 세 번째에 서야 겨우 계신 곳을

알고 서둘러 달려 나왔는데, 다행히 떠나시기 전에 뵙게 되었구려.

"아, 그러신가. 뭐 이제라도 얼굴 뵈었으니 되었겠지. 그럼 급한 일이 있어 

가보아야겠으니 이만 비켜주시겠소?"

ㅡ물론 비켜드려야지. 하지만 그전에 몇 가지 여쭤도 될는지?

"싫은데."

ㅡ첫째, 진선의 급작스러운 방문과 지난번 천제하강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는지?

"글쎄."

ㅡ둘째, 지난번에 못다 물은 것이지만, 시호를 가지지 않은 그 선녀는 대체 누구이고

왜 그 선녀의 시호를 궁금하게 여기셨는지?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바빠서 그러는데 좀 비켜주시겠소?"

ㅡ셋째, 혹 동행한 저 여인이 그 선녀는 아닌지?

"비키라고 했잖아."

ㅡ넷째, 근자에 순라를 돌던 하급 사자가 사라진 일이 있었는데 혹 아시는 바가 있는지?

"이봐."

ㅡ다섯째, 진선께서 이리 나오시는 건, 애써 다진 우리와의 화의를 스스로 

깨시겠다는 뜻인지?

지한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명부를 대표해서 지한과의 여락을 담당했던 사자는

마지막 질문을 더했다.

ㅡ여섯째, 선인 된 입장으로 명계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신 후과가 만만치 않을 터.

더군다나 기척을 숨기고 은밀히 움직이려 했으니 더욱 몸을 상하셨을 텐데 견딜 만하신지?

앞선 질문들과 비슷한 평탄한 어조였으나 말의 마지막 꼬리가 어딘가 느긋하게 끌렸고,

수면에 잔물결이 불길하게 번져갔다. 가스라기와 영소는 동시에 지한을 돌아보았다.

지한은 그저 수면에 비친 명부사자를 담담히 내려다보고 있었으나, 그렇게 말을 듣고 

봐서 그런지 뒷짐 지고 선 그의 신형이 어딘가 많이 불안해보였다. 얼굴색이 창백하고,

입술도 지그시 깨물어 고통을 누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영소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선인, 혹시 어딘가‥‥‥."

"닥쳐."

다 끝맺기도 전에 그의 말을 자르더니, 지한은 갑자기 뜻 모를 소리를 불쑥 했다.

"왜 기백이 너를 보천궁에 보냈는지 알고 있느냐?"

영소는 느닷없는 질문에 눈을 깜빡였다.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모르겠지. 단순한 관인 놈."

그러고 나서 다시 수면을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이번에는 명부사자를 향해 빙긋 웃어

보이며 물었다.

"궁금한 게 참 많으시군. 그럼 나도 질문을 하지. 첫째, 정말 안 비킬 텐가?"

ㅡ진선 지한, 전에도 말했다시피 우리는 신의를 중요하게 생각하오. 가능한 한

귀하와 한 약속을 지키고 싶소.

"둘째, 계속 그렇게 막는다면 강제로 밀고 지나갈 텐데, 막을 자신 있나?"

ㅡ귀하가 보천궁을 맡게 되기를 원하고, 그 후에 환주의 선계와 우리 명부가 새로운

관계를 맺기를 원하오. 그런 만큼 여기서 불미스러운‥‥‥.

"셋째, 자신 있다면 어디 이놈부터 한번 막아볼 텐가?"

명부사자는 또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한 듯했다. 하지만 지한이 냅다 영소의 뒷덜미를

잡아 못을 향해 집어던지는 바람에 이야기는 중지되었다. 거울 같은 못을 향해 던져진

영소가 헉 놀란 소리를 질렀다. 거기 비친 명부사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명부사자의 

검은 소매가 들렸다. 그리고 지문이 없는 반들반들한 손바닥을 내밀었다. 못에 빠지기

직전 영소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자신의 몸을 가로막는 것을 느꼈다. 그의 몸은 수면 

위에서 추락을 멈췄다. 물속 명부사자의 손이 무엇인가를 움켜쥐는 것 같은 동작을 취했다.

그러자 영소는 숨이 턱 막히는 고통을 느꼈다. 박동 치던 심장에 누군가가 쇠막대기를

꽂아 움직임을 강제로 멈춰 세우는 것 같았다.

ㅡ진선, 이렇게 나오시다니 실망이오. 나는 당신이 좀 더 머리를‥‥‥.

다소 느긋하게 말하며 움켜쥔 손을 슬그머니 비틀던 명부사자의 표정이 갑자기 굳었다.

명부사자의 색깔 없는 입술 사이에서 칼로 쇠판을 긁는 듯한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는 뜨거운 불덩이라도 만진 듯이 손을 뒤로 뺐다. 동시에 영소는 다시 숨을

쉴 수 있게 되었고, 그의 몸은 못의 물속으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첨벙 빠져들었다.

못의 물은 살을 익혀버릴 듯이 뜨거웠다. 그리고 어두웠다. 분명히 몸 하나 담그는 것이

고작인 작은 못이었는데 안에 들어가는 순간 무저갱처럼 깊고 바다처럼 무한한 어둠이 그의

몸을 감쌌다. 영소는 끝없이 아래로 가라앉으면서 잠깐 위를 쳐다보았다. 우물의 입구처럼

뻥 뚫린 작은 구멍으로 놀란 눈을 하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가스라기의 얼굴과 그 옆에서

빙긋 웃는 지한의 얼굴이 보였다. 명부사자의 지한의 문답이 물속을 우렁우렁 울렸다.

ㅡ선인도 아닌 하계인인데 어째서 이런 일이! 도대체 저놈이 누구요?

"당연하지 않은가. 선인이 아니면서도 하늘의 허락이 없으면 그대들도 건드리지 못하는

목숨. 머지않아 신기를 물려받기로 내정된 자일세."

영소야.

왕좌는 신기다.

옥좌가 비어 있다. 너는 저기 앉고 싶지 않으냐?

명부사자의 부름이 없는데도 영소는 기백의 음성을 들었다. 그것이 하계로 돌아가기 직전,

명계에서 의식을 잃기 직전 영소가 들은 마지막 소리였다.

수면이 잔잔해졌다. 그리고 거기에 다시 명부사자의 얼굴이 비쳤다. 그 눈이 지한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ㅡ내 말을 고치겠소. 진선은 좀 더 거래할 가치가 있는 교활한 선인이오.

"칭찬으로 알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면 이만 비켜주겠소?"

ㅡ왕재를 동행했을 정도라면, 같이 온 저 여인은 확실히 그 선녀겠군. 다시 묻겠소,

진선 지한. 정말 잠시하도 풍도에 들러 저 연인에 대해 우리들이 조사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지 않으시겠소?

이미 싫다고 거절한 것에 대해 또 대답을 요구받았을 때, 지한은 늘 정도 이상으로 화를

내며 바로 반응을 보이곤 했다. 그러나 이번에 그는 잠시 대답을 늦췄다. 지한이 옆을

돌아보자, 신기하기도 하고 약간 겁을 집어먹기도 해서 눈만 굴리고 있던 가스라기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 눈을 보면서 지한은 느리게, 그러나 단호하게 대답했다.

"싫소."

명부사자가 한숨을 내쉰 듯했다.

ㅡ그럼 결례를 용서하시오. 진선이 이 관문을 지나간다면 우리도 더 잡지 않으리다.

하지만 지나가지 못한다면 부득이하게 풍도에 들러 며칠만 더 쉬어 가셔야겠소. 명계에

흘린 선기는 그때 다시 보해드릴 테니 너무 섭하게 여기지 마시길.

그 말을 남기고 명부사자는 거짓말처럼 수면에서 사라졌다. 가스라기는 놀라 눈을 

깜빡였고, 지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가스라기의 팔을 잡아 못 쪽으로 끌었다.

"뭐 하고 있어? 어서 뛰어들‥‥‥."

가스라기를 밀어 넣고 뒤따라 뛰어들려던 지한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반사적으로 

지한의 팔을 뿌리친 가스라기는, 지한이 신경질을 내지 않자 오히려 놀라서 그를 

돌아보았다. 지한은 명부사자의 모습이 사라진 수면을 놀란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스라기의 눈에는 분명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그는 거기서 무엇인가를 

보고 있는 듯했다.

"어떻게‥‥‥."

지한은 눈도 깜빡이지 못한 채로, 입술을 떨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어떻게‥‥‥ 나‥‥‥ 나에 대해‥‥‥ 속세의 일을‥‥‥

명부‥‥‥ 너희들이 거기까지‥‥‥."

뜻이 닿지 않는 말을 중얼거리며 지한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한 여자의 모습이었다. 하얀 이마, 곧잘 찡그리던 눈썹, 유달리 작은 입술, 구름처럼 틀어

올린 머리, 몇 가닥 머리카락이 흘러내린 희고 고운 목, 그리고 믿음이 가득한 눈동자,

세상 모두가 그를 두려워할 때, 유일하게 그를 두려워하지 않던, 세상 모두가 그를

잔혹하다 비난할 때 유일하게 비난하지 않던 한 쌍의 눈동자.

진선에 오르면서 그가 버렸던, 아니 완전히 버리지도 못하고 향기와 잔재만 부둥켜안은 채

신음했던 기억을 명부의 조력자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지한은 자신이 속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하게 의식했으나, 이 유혹은 너무도 컸다. 지한의 입이 동굴처럼 열렸다.

그 동굴 안에 잠자고 있던 짐승이 깨어나 울부짖었다. 

안 그래도 놀라서 바라보고 있던 가스라기는, 지한이 못 옆에 주저앉아 물속에 손을

담그고 허우적거리며 울부짖는 것을 보고 주춤 뒤로 물러섰다. 지한은 완전히 정신이

나간 것 같았고,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영소의 뒤를 따라 저 못

속으로 뛰어들어야 하계로 갈 수 있다는 것은 명확한데 지한이 저러고 있으니 못 속에

뛰어들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달리 도망갈 길도 보이지 않아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가스라기는 잠깐이나마 지한을 발로 뻥 차서 못 속에 빠뜨리면 어떨까 생각했다.

백화를 그렇게 놀려먹은 경험이 여러 번 있기에 못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노리고 

노리던 복수의 기회가 아닌가.

하지만 그녀가 그것을 실천에 옮기기 전에 지한이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는 넋 나간 

얼굴로 뒤를 돌아보는 것이었다. 지한이 바라보는 방향은 그들이 한사코 돌아보지 

않으려고 했던 풍도산이 있는 방향이다.

지한은 이제 그녀의 음성을 듣고 있었다.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그 음성은 사실 불분명했다.

마치 옛 무덤에서 파낸 목판을 손으로 잡는 순간 파삭 부서지는 것처럼, 그녀의 목소리는

들리는 순간 사라졌다. 하지만 향기는 남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가슴을 욱신거리게

하는 가뭇없는 향기만으로도 그는 기꺼이 뒤를 돌아보았고, 풍도산의 초대에 응할 수 

있었다. 지한의 울부짖음은 이미 그쳤다. 그는 돌아섰고, 물속이 아니라 눈앞에 서 있는

그녀를 보았으며,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지한이 못에서 물러나자 가스라기는 안도했다. 혹시나 싶어 물속을 들여다보니 그 섬뜩한

명부사자는 보이지 않았다. 이제 그 속으로 뛰어들기만 하면 뒬 듯했다. 못의 둘레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더 줄었다가는 그녀의 몸도 못 들어가게 될지 몰라서 가스라기는

코를 꽉 잡고 눈을 딱 감은 다음 셋을 세고 나서 뛰어들기로 했다.

"하나, 둘."

셋을 세기 전에 가스라기는 뒤를 돌아보았다. 풍도산 쪽으로 휘청휘청 걸어가는 지한의

뒷모습이 보였다.

'알 게 뭐야. 잘됐네. 여기서 콱 줄어버려.'

가스라기는 홱 외면하고 다시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잠깐 씩씩거리다가 다시 지한을 바라보았다. 무엇인가에 끌려가는 뒷모습이 무척이나

바보처럼 보였다. 가스라기는 지한이 그동안 자신에게 했던 못된 소리며, 천군을 흉내

내 속인 일, 강제로 범하려고 했던 순간 등등을 생각했다. 그중 단 한 가지만 따져도

지한은 지옥에 떨어져도 괜찮다고 그녀는 스스로에게 답했다.

'그래도 소저를 몇 번이나 구하셨습니다.'라고 영소가 했던 말이 귀를 왱왱 울렸다.

절대 순수한 호의가 아니었을 거라고, 분명히 무슨 꿍꿍이가 있었을 거라고, 그런 건 

선의가 아니라고 가스라기는 그 말에 반박했다.

하지만 그 반박의 목소리는 그렇게 당당하지 못했다. 꿍꿍이가 있었다 해도 그는 어쨌든

자신을 구했다고, 사실 정말로 화가 나는 건 하늘님을 불렀을 때 하늘님이 아니라 가짜에게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아니냐고, 그 둘을 구별하지도 못하는 썩은 눈이 아니냐고 조용히 

되묻는 자신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가스라기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가

버럭 외쳤다.

"에잇, 몰라! 하나, 둘, 셋!"

가스라기는 못의 물이 아니라 지한을 향해 뛰었다. 흐느적흐느적, 보이지 않는 부름을

따라 풍도산을 향해 걸어가는 지한의 뒤까지 쫓아가서 냅다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지한은 머리채가 뒤로 당겨지자 목을 젖히면서 걸음을 멈췄다. 가스라기는 다른 한 팔로

그의 허리를 잡아서 점점 좁혀지는 못을 향해 끌어당겼다. 지한은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면서 그녀를 뿌리치려고 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하계 여자인 가스라기가 지한을

억지로 끌고 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선인이었고, 그녀는 가스라기였다. 선인으로서 별다른 조치 없이 무방비

상태로 명계에 오랜 시간 노출되어 있던 그는 약해질 만큼 약해져 있었고, 가스라기로서

가스라기의 힘에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한 그녀는 절박한 심정 때문에 더욱 강해졌다.

그것이 그들 둘 사이의 무한에 가까운 힘의 격차를 조금씩 줄였다.

"나중에 혼자서 지옥에 가든지‥‥‥ 죽든지‥‥‥ 태세가 되든지‥‥‥."

가스라기는 태산을 끌고 가듯이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하계로 열린 못을 향해

걸음을 옮기면서 아득바득 이를 갈았다.

"마음대로 해. 하지만 지금은 하지 마. 지금은 안 돼!"

그때, 지한은 그리운 여인의 희고 고운 목에 막 손을 대려던 찰나였다. 코끝이 찡하고,

눈물이 핑 돌았다. 이 곱던 목, 세상에서 가장 순종적이던 목. 이 목을 단칼에 

베어버린 것이 누구였던가. 천하를 위해, 대를 위해서는 소를 희생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논리로 그 칼을 들어 올린 자가 누구였던가. 바로 천군이었다.

'그래, 그랬다. 그래서 나는 그를 증오했어. 그에게는 천하라는 것이 알지도 못하는 

쓰레기 개백정부터 사리사욕에 눈먼 배부른 고관 돼지들까지 그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었겠지만, 내 천하는 오직 내 여자, 내 가족뿐이었어. 어느 천하가 더 중요하단 

말이냐! 내겐 내 천하가 모든 것이었다. 자신의 천하를 위해 내 천하를 죽인 형을 내가

어떻게 증오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이냐. 타인의 천하를 부정하는 더 큰 천하 따위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이냐.'

진선에 오르면서 속세의 기억 대부분을 잊은 상태에서도 자신의 증오가 결코 방향이 틀린

것이 아니었음을 새삼 깨달으며 웃었다. 그리고 자신이 이 싸움을 더 이상 해나갈 수 

없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의 천하는 편협한 천하였고, 격정이 끓어 넘쳤다. 때문에

유혹에 약했다. 사도의 진전이 빠르기는 해도 영원히 정도의 가장 높은 경지를 따라갈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이유를 새삼 알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런들 어떠랴 싶었다.

'어차피 내가 원한 것은 궁주의 자리가 아니었어. 언젠가 얻게 될 나의 세계, 나의 별도

아니었어. 나는 그저 복수를 원했어. 크고 광대하기만 할 뿐 위선 덩어리인 천군의 천하를

내 힘으로 부정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하지만, 내 천하보다 소중한 기억이 이곳 명계에

있다면 기꺼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여기 주저앉아주지.'

지한은 빙그레 웃으며 패배를 받아들이고 기억 속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다. 머리채를

당기는 느낌과 함께 귀를 쩌렁쩌렁 울리는 가스라기의 고함 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ㅡ마음대로 해. 하지만 지금은 하지 마. 지금은 안 돼!

하계의 시간으로 시월 팔일.

명부의 땅 한 귀퉁이가 뚫리고 세 목숨이 명계를 탈출하니, 

이후 그 길을 통해 명부의 샘이 흘러 유황천을 이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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