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82/109)

제 21 장

::삼도천::

사람이 죽어서 저승으로 가는 길에 강이 있는데 이를 일러 삼도천이라고 한다.

물살이 빠르고 느린 여울이 셋이 있어 생전에 지은 업에 따라 건너는 곳이 다르다.

삼도천의 한쪽은 은하로 향하고, 다른 한쪽은 어디로 향하는지 알지 못한다.

ㅡ명학박사 서문추.『명부기행』

21-1.

며칠이 지났는지 알 수가 없다. 며칠이 지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해도 달도 없으니

천체의 변화로 시간을 가늠할 수도 없다. 배가 고프거나 잠이 오는 감각의 변화로

가늠할 수도 없다. 한 번도 잠을 잔 적이 없고, 한 번도 배가 고파본 적이 없다. 온몸이

꺼질 듯한 만성적인 피로에도 불구하고 두 발을 질질 끌며 그저 한없이 실개천을 따라

걸을 뿐이다. 죽음에 반쯤 발을 들여놓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딱 하나, 시간의 흐름을 느낄 기준이 될 만한 일은 명부사자의 부름이었다. 첫 번째

사자를 물리친 후에도, 명계의 황무지를 순찰하는 또 다른 사자를 간혹 만났다. 그들은

첫 번째 사자와 마찬가지로 이름을 확인하려 했고, 사자 한 명이 꼭 세 번씩 불렀다.

그 부름은 때로는 가스라기를 향하기도 했고, 영소를 향하기도 했다.

지한을 부르는 사자는 없었다. 그가 선인이기에 명계에서 길을 잃은 하계의 생명을 주로

순찰하는 하급 명부사자의 시야에는 잘 보이지 않았던 탓이다.

영소는 많은 목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환공 기백의 목소리일 때도 있고, 그의 모친과

부친, 이미 명부에 귀속된 조부모의 목소리일 때도 있었다. 때로는 그가 장원에 

거두어들인 귓도리골 사람들의 목소리이기도 했고, 초혼부대의 군졸들 음성이기도 했고,

순무사령 일을 맡아 환의 시골 구석구석을 돌아다닐 때 만났던 이름도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의 무수한 목소리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그렇듯 많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에 당황했지만, 그때마다 어떻게든 뒤를 돌아보지 않고 대답을 참으며

견뎌낼 수 있었다.

가스라기의 경우에는 좀 달랐다. 그녀가 듣는 것은 오직 하나의 목소리, 첫 명부사자 때

들었던 엄마의 목소리뿐이었다. 게다가 그 목소리가 하는 말 역시 처음 들었을 대와

대동소이했다. 어쨌거나 가스라기 역시 그 부름의 유혹에 더 이상 넘어가지 않고 계속

길을 재촉할 수 있었는데, 영소가 보기에는 그녀가 그럴 수 있는 힘이 분노에서 비롯된

것 같았다. 지한이 천군의 흉내를 내어 명부 사자의 손에서 그녀를 빼낸 이후, 가스라기는

계속 화난 멧돼지처럼 씩씩거리면서 적군을 향해 돌진하는 용감한 군졸처럼 걸었다.

명부사자의 부름이 거듭될수록 영소 자신은 피로가 점점 더해져서 걸음을 옮기기가 

쉽지 않은데, 가스라기는 정반대로 점점 힘이 솟구치는 것처럼 보였다.

"왜 그렇게 화가 났습니까?"

신기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말을 걸었더니, 앞서가는 지한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도 않은 채 버럭 대답했다.

"미우니까 그렇죠."

심통 난 어린애 같은 말에 영소는 하마터면 웃음을 흘릴 뻔했다. 간신히 삼키고 가스라기와

지한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곰곰 생각해보니, 이건 웃고 넘어갈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여전히 앞장서서 성큼성큼 걷고 있는 지한은 이따금 영소가 명부사자의 부름에 위태하게

흔들릴 때 한마디 불쑥 빈정거리는 것 외에는 별 말이 없었다. 가스라기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가스라기도 죽일 듯이 그 뒷모습을 노려보기만

할 뿐 뭐라고 말을 걸지는 않았다. 바람 한 점 없는 명계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사이에는 싸늘한 바람이 슁슁 부는 듯했다.

영소는 둘 사이를 어떻게든 중재해야만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물론 가스라기만큼은

아닐지언정 그 역시 지한에 대해 반감을 느끼고는 있었다. 그래도 감정을 가라앉히고 

곰곰 생각해보니, 최소한 명부사자의 부름에 흔들릴 만하다 싶을 때 꼬박꼬박 선인의

음성으로 자신을 일깨워주는 것을 온전히 나쁘게만 볼 수는 없었다. 비록 말의 내용은

빈정대는 것이지만 최소한 그때마다 결과적으로 자신을 구하지 않았던가. 겉보기에는

이 괴이한 동행을 떨쳐버리고 싶어 하는 것 같아도, 지한이 내심으로는 끝까지 데리고

갈 생각이라는 짐작도 갔다. 그렇다면 더더욱 가스라기와 지한의 사이가 이 이상 

위험해지지 않도록 중재할 의무가 자신에게 있다고 영소는 생각했다.

"너무 미워하지 마십시오."

영소는 약간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왜요?"

'대답이 시원치 않으면 너도 미워해주고 말겠어'라는 내색을 감추지도 않고

가스라기가 반문했다.

"그래도 그‥‥‥ 소저를 몇 번이나 구하셨습니다."

막상 가스라기를 직접 호칭하려니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영소는 잠깐 우물거렸다.

'선녀'라고 칭하자니 가스라기에게는 그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소저라고 

칭했는데 막상 입 밖으로 내놓고 보니 선녀만큼이나 어울리지 않았다. 그 호칭을 들은

가스라기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평생 그런 식으로 불려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입을 쑥 내밀고 있던 가스라기는 '소저'라는 낯선 칭호가 주는 간질간질한 느낌에 괜히

목을 한 번 긁고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고 나니 좀 표정이 풀어졌다. 

가스라기는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걸 어떻게 믿어요?"

"하지만 진짜입니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황건역사의 손에서 소저를 구한 것도 저 

선인이시고, 명부사자에게 잡혀갈 뻔했을 때도‥‥‥."

"분명히 다른 속셈이 있었을걸요."

가스라기는 영소의 말을 탁 잘랐다. 거리가 좀 있다고는 해도 선인의 청력으로 이 정도

음성을 못 들을 리 없는데, 감추려는 생각도 하지 않고 제 속에 있는 말을 다 뱉었다.

"언제나 거짓말만 했어요. 선인이라고 다 똑같은 선인은 아니라고요. 똑같이 생겼어도

하늘님하고는 전혀 달라. 그런데도 하늘님인 척하고‥‥‥."

가스라기는 다시 분한 표정으로 입술을 실룩거렸다. 영소는 지한이 이 말을 듣고 또 화를

낼 까봐 더럭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슬쩍 보니 이야기 소리가 안 들리는 건지 아니면

들려도 무시하는 건지 통 반응이 없었다. 영소는 목소리를 좀 더 낮춰서 말했다.

"하지만 그건 소저를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아니에요."

가스라기는 도리질까지 하며 강하게 부정했다. 물론 자신도 지한을 썩 좋게 보고 있지는

않지만, 쇠고집으로 지한을 미워하는 가스라기를 보고 있자니 영소는 좀 답답해졌다.

"왜 아니라고만 생각합니까?"

"하늘님이 아니니까요."

가스라기가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되돌린 대답을 듣고 영소는 더욱 기가 막혔다. 하늘님이

누구를 칭하는 것인지는 그도 눈치로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어째서 지한에게

혹시 있을지도 모를 호의를 부정하는 이유가 될 수 있단 말인가.

"하늘님은 남을 돕더라도 딴 속셈 같은 건 없어. 그래야 한다고, 그게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돕는 거예요. 하늘님은 남을 돕고 나서 그걸 가지고 유세 떨지도 않아. 심술도 안

부려. 욕을 먹더라도 그냥 자기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 해. 얼굴이 똑같다고 해도 

똑같은 사람은 아냐. 똑같이 상냥하게 말해도 달라. 저건 가짜야!"

진선 천군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물론 지한에 비하면 정도선인인 데다 처음 접한

진선이니 영소도 호감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가스라기의 찬양은 좀 도가 지나쳤다.

천도봉 소속이었다고 들었으니 주선에 대한 충성? 아니다. 남녀간의 정? 그렇다쳐도 좀

심하다. 하고많은 선인 중에 왜 천군이 그렇게 그녀에게 절대적인 존재일까? 그녀가

범상한 하계인이 아니라 '가스라기'이기 때문에 그 사실은 더욱 영소의 관심을 끌었다.

아니, 사실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이런 이야기를 듣고 지한이 무슨 난리를 피울지가

걱정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지한이 발을 멈췄다. 영소와 가스라기도 따라서 우뚝 멈췄다.

영소는 가슴을 졸였다. 가스라기도 약간 움츠러들었지만, 해볼 테면 해보라는 눈빛으로

지한의 뒷모습만 노려보고 있었다. 이윽고 지한은 낮으나 또렷하게 들리는 음성으로

한마디를 중얼거렸다.

"그 가짜도 구별 못하고 하늘님 하늘님 하며 매달린 계집이 똑똑한 척하기는."

그러고는 다시 태연히 걷기 시작했다. 가스라기가 채찍에 호되게 맞은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분해 죽겠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가만 내버려두면 지한의 등에 머리라도

들이받을 것 같았다.

저 심술궂은 사도선인과 이 왈패 같은 가스라기 사이에서 어떻게든 분위기를 좋은 쪽으로

끌고 가 무사히 명계를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자신의 맡은바 소임이라고 생각한

울지영소는 얼른 말렸다.

"소저,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해보십시오. 어찌되었든 지금 명계의 일에 가장 밝은 것은

저분 선인이시고, 우리는 저분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여기서 빠져나갈 수도 없습니다.

선계로 돌아가려고 해도 일단은 여기를 빠져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디‥‥‥."

"알아요."

가스라기는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더니 말했다.

"여길 빠져나가기만 해봐라."

그러고는 입을 다물고 걷기 시작했다. 영소도 다시 걸음을 옮겼다. 대화가 없는 여정이

다시 시작되었다. 참으로 지루한 것이 죽음이로구나, 영소는 새삼 생각했다. 지루하고,

피곤하고, 목적지도 볼만한 풍경도 없는 무한한 길이었다. 저승의 풍경이 이와 같다는

것을 알면 살아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사실 저승에 대한 이야기는 하계의 

괴담에 숱하게 나오는데, 그중 대부분이 속된 것이라 여겨 선학을 업으로 삼은 그의 

가분에서는 진지하게 다뤄본 일이 없었다.

그 속된 이야기들 가운데 저승에는 '지옥'이 있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일단 저승에 

도착하면 저승사자의 마중을 받는다. 저승사자란 명부사자를 민간에서 이르는 말로 같은

뜻이었다. 사자의 안내를 받아 판관 앞에 이르거서 생전의 선업과 악업을 평가받고

악행을 많이 저지른 자는 지옥이라는 곳으로 가게 되는데, 무시무시한 지옥의 옥졸들이

죄인을 기다렸다가 사지를 찢고 귀에 쇳물을 붓고 쇠꼬챙이에 꽂는 등 영원히 끝나지

않을 형벌을 가한다는 것이다.

못 믿을 이야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직접 제 눈으로 명계를 보니 정말 그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괴이한 것이라고는 마주친 일도 없다. 그나마 비슷한 것은 순라를 돌던

명부사자 몇이었는데, 따지고 보면 이 명계에서는 명부사자가 괴이한 것이 아니라 죽지도

않고 명계를 헤매는 자신들이 더 괴이한 존재일 것이다. 명부의 수도라는 풍도산에 가면

좀 달라질지도 모르지만 명계란 무섭고 끔찍하고 혹독한 곳이 아니라 지루하고 피곤하고

아무 목적도 없는 잿빛 세계라는 느낌이었다. 그들에게는 그나마 이 명계를 빠져나가야 

한다는 목적이라도 있었다. 그 목적 때문에 반만 죽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걷는 것과 생각하는 것밖에 없기에 이런저런 잡다한 상념에

젖어 걸음을 옮기던 차에 이제는 거의 익숙해져서 놀랍지도 않은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ㅡ영소야! 네가 어째서 여기에 있느냐!

영소는 한숨만 내쉬고 계속 걸음을 옮겼다. 명부사자들의 부름에는 독창성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부르는 말의 내용이 이리 한결같은가. 사실 저 부름은 명부사자의 말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말이라는 것을 모르기에 그는 명부사자들을 탓할 수 있었다.

잠시 후, 옆에서 걷던 가스라기가 투덜거렸다.

"또 똑같은 소리야. 지겨워."

그녀도 역시 부름을 들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영소는

내심 웃었다. 세 번째 부름은 그를 향한 것이었는데, 이번에는 제법 특이했다.

ㅡ별장님, 너무하지 않으십니까? 저만 선계에 팽개치고 가버리시다니!

'저 인간의 목소리마저 듣게 되다니'

시혼의 음성을 듣고 조금 놀라긴 했지만 영소는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그 인간만 생각하면

이유 없이 부글부글 속이 끓을 대와는 달리 어쩐지 웃음이 났다. 그러고 보니 황건역사가

등장해 쑥대밭이 되었을 보천궁에서 시혼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좀 궁금하기도 했다.

뒤따라오던 시혼의 목소리는, 영소가 버리고 간 덕분에 자신의 신세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해졌노라고 처량하게 하소연을 늘어놓다가 가물가물 사라져버렸다. 이번 명부사자의

세 번 부름도 모두 끝이 난 모양이었다. 그때 지한이 걸음을 멈췄다. 뿐만 아니라 뒤를

돌아보고 영소를 향해 물었다.

"몇 번째지?"

"예?"

"이번이 몇 번째 명부사자였느냔 말이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영소는 얼떨떨했다.

"여섯‥‥‥ 아니, 일곱 번째였습니다."

지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 번씩 일곱 번, 삼칠일. 됐다. 도착했군."

도착했다는 말에 놀라 영소와 가스라기는 앞과 옆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달라진

건 없었다. 옆에는 여전히 실개천이 흐르고, 앞은 뿌옇기만 했다. 지한이 한 손을 옆으로

내밀었다. 그 손바닥 안에서 화혈삼첨도가 나왔다. 선인이 보패를 꺼내 드는 장면을

제대로 보는 것이 처음이라 영소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황건역사 앞에서도 지한이

보패를 꺼내 들긴 했지만 그때는 황망하여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이다.

지한의 화혈삼첨도가 완전히 드러나자 영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인의 보패치고는

너무 음침한 검은 기운으로 똘똘 뭉쳐 있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보다는 그 보패의 모양이

어딘가 눈에 익었다. 지한이 보패에 얼굴을 갖다 대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자, 이제 찾아내라."

그가 보패를 쥔 손을 떨쳐내자, 화혈삼첨도는 그대로 날아가 허공에서 몇 바퀴 맴을 돌더니

약간 앞쪽의 어느 한 지점에 내려 꽂혀서 칼끝으로 원을 그렸다. 그어진 땅거죽에서 푸른

기가 도는 흰 연기가 화악 일어나고 둥근 빛을 번쩍이더니 빛이 사라지자 그 자리에

무럭무럭 김이 끓어오르는 작은 못이 나타났다.

"출구다."

손바닥 안으로 보패를 회수해 들이면서 지한이 말했다. 영소가 눈을 빛냈다.

'이제 보니 출구를 향한 여정이란 거리를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삼칠일의 시간을 행보하는

것인 모양이구나.'

명계에 대해 전에 없던 관심이 생겨, 이 일을 잘 기억해두리라 결심하면서 영소는 그 못을

제대로 보기 위해 다가갔다. 수면 위로 얼굴을 기울이자 물 위에 그림자가 일렁이더니

어떤 얼굴이 비쳤다. 제 얼굴일 거라고 방심하고 들여다보던 영소는 헉 놀라며 기울였던

몸을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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