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80/109)

20-3.

ㅡ가스라기야.

가스라기가 듣고 있는 목소리는, 영소가 들은 것과는 달랐다. 영소는 명계에서 들릴 리

없는 기백의 목소리를 들은 것이지만, 가스라기는 명계에서 들어도 하등 이상할 것 없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녀를 부른 것은 엄마의 목소리였다.

ㅡ보고 싶었단다. 내 새끼, 너를 혼자 남기고 떠나다니. 불쌍한 것, 불쌍한 것.

그리고 엄마는 그녀에게 이리 오라고, 엄마랑 같이 가자고 말했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했다. 가스라기도 그러고 싶었다. 엄마에게 물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정말로 가스라기는 선인을 죽인 죄인이냐고. 엄마도 그렇고, 나도 그러냐고.

그녀는 지금껏 한 번도 궁금해 하지 않았던 것이 궁금했다.

가스라기라는 이름이 걸머진 죄의 정체가 궁금했다. 죄인이라기에 죄인인 줄 믿고 

살아왔는데, 그 죄가 이제 와서 자신의 목을 조르게 되었으니 반드시 알아야만 했다.

그래서 대답하려고, 돌아보려고 하는데 보이지 않는 팔과 손이 입을 막고 고개를 

못 돌리게 붙잡는다. 그 팔과 손이 미웠다. 몇 번이나 그 팔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딱

한 푼의 힘이 모자라서 번번이 실패했다. 가스라기는 약이 올랐다. 이 팔을 뿌리치려면

힘이 아니라 다른 방법을 써야 할 것 같았다. 정신을 반쯤 명부사자의 목소리에 빼앗긴

채로 가스라기는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선인."

가스라기가 말을 하거나 고개를 돌릴 수 없도록 그 입과 목을 붙든 채로 버티던 영소는,

그녀가 조금 얌전해지자 지한을 노려보았다. 자신이 감히 이런 짓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도 놀라면서 그는 말했다.

"선인께서 보시기에는 저나 이 여인이 한낱 미물에 불가할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지한이 코웃음을 쳤다.

"사실이긴 하지만 자학까지 할 건 없다."

영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뱃속에서 꿈틀거리는 말을 울컥 뱉어내려다가, 지한의 얼굴을

보고 그는 입을 도로 다물었다. 지한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비웃음을

머금고 있었는데, 영소를 바라보는 그 눈에 묘한 기대감이 어려 있었던 것이다. 마치

영소가 무례를 저지르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 대체 왜? 영소는 이치에 맞는 답을

생각할 수가 없었지만, 어쨌거나 화를 내면 지한이 원하는 대로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하고 싶은 말을 꾹꾹 누르고 억지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말투에 비아냥거리는

기색이 담기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어쨌거나 명계를 벗어날 때까지 한 배를 탄 처지가 아닙니까? 선인께서는 저희보다

명계의 일에 밝으시니, 부디 살펴주십시오."

지한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한 배를 탄 처지? 웃기지 마라. 같은 땅을 디딘다고 네가 나와 같아지는 줄 아느냐?"

또 한 번 삐딱하게 대꾸하긴 했지만, 그건 빈정거린다기보다 화를 내는 쪽에 가까웠다.

상대로 하여금 화를 내게 만들려고 한 것인데 거꾸로 자기가 화를 내고 말았으니 지한은

입맛이 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영소가 무례를 저지르고, 그 무례에 합당한 벌을 가할

수 있기를 원했다. 그런 다음에 가스라기와 영소를 명계에 버리고 혼자 떠날 수 있게

되기를 원했다. 사실 그러고 싶으면 굳이 영소를 도발할 필요 없이 그냥 원하는 대로

하면 된다.

하지만 그게 쉽지가 않았다. 이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을 다 팽개쳐버리고 싶었지만,

사실 이 상황을 불러들인 것은 황건역사의 손아래에서 가스라기를 빼낸 그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득실보다는 호오를 먼저 따진다고 내키는 대로 말해버렸으나, 돌이켜보면

그에게는 언제나 득실과 호오가 일치했다. 그 둘이 이처럼 불일치하는 상황은 너무나

낯선 것이라 그는 내심 몹시 혼란스러웠다. 때문에 핑계가 필요했다.

빼앗기기 싫어서 구했고, 건방지게 굴기에 내팽개쳤다는 핑계가.

영소를 아무리 쑤셔대봤자 더 이상 핑계를 뽑아낼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지한은 그에게

관심을 끄고 다시 가스라기를 힐끔 쳐다보았다. 홀린 듯이 명부사자의 부름을 듣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 또다시 기분이 나빠졌다. 아니, 따지고 보면 그가 느끼는 모든

혼란과 불만의 근원은 그녀였다.

'보나마나 그놈의 목소리를 듣고 있겠지.'

명부사자가 처음 나타났을 때나 영소를 불렀을 때는 일부러 귀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그 목소리를 들었지만, 가스라기 혼자 부름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후로는

부러 듣고 있지 않았다. 

사실 처음 부름을 제외한 나머지 두 개의 부름은, 정확히 말하면 명부사자의 음성이 아니라

듣는 자가 듣고 싶어 하는 목소리였다. 요수들 중에는 명부사자의 이런 능력과 비슷한

술법을 쓰는 놈들도 존재하는데, 이를테면 술사 자신도 어떤 소리가 상대에게 들리는지

알지 못하고 단지 상대가 지금 현재 가장 듣고 싶어 하는 음성으로 가장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가스라기가 누구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할지는 너무나 뻔하기에 그는 그 소리를 듣지 않으려 했다.

한동안 좀 얌전하던 가스라기가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슬금슬금 손을 다리 아래쪽으로

내리는 것이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직 영소는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지한은 갈수록 기분이 나빠졌다.

'지치지도 않는군! 도대체 뭐가 좋다고 저렇게 애를 쓰는 거지?'

부글부글 끓다가 이따금 불길을 내뿜는 화염산의 분화구처럼 울화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지한은 갑자기 변덕이 났다. 가스라기가 그렇게나 좋아하는 그놈의 가짜 목소리를 한번

들어봐줘야겠다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듣고 나서 비웃어주든가 혹시 이용해먹을 만한

점이 있다면 철저히 이용해주겠다면서 귀를 기울였다. 처음에는 갈라지는 바람 소리 같은

것이 들렸고, 그 바람 소리가 점차 하나의 목소리로 변했다. 

그건 지한이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

'뭐야, 이건?'

여자의 목소리였다. 가스라기를 부르는 가스라기 어미의 목소리를 듣는 동안 지한의

얼굴은 천변만화했다. 그때 갑자기 영소가 비명을 질렀다. 가스라기가 치마 속에서 꺼낸

뼈칼로 그의 팔을 찌른 것이다. 영소는 그녀를 붙들고 있던 손을 놓쳤고 가스라기는

자유를 얻자마자 뒤로 돌아섰다.

"안 돼!"

영소가 신음을 삼키며 외쳤다. 지한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재빨리 팔을 뻗어 가스라기를

따라 돌아서려는 영소의 어깨를 잡았다.

"기다려. 돌아보면 네놈까지 끌려간다."

"하지만, 선인!"

"닥치고 귓구멍이나 막고 있어."

지한은 영소를 밀어내고 가스라기를 향해 돌아섰다.

"저 망아지는 내가 데려올 테니까."

영소의 팔을 뿌리치고 돌아선 순간, 가스라기는 낯선 존재와 눈이 마주쳤다. 그건 엄마가

아니었다. 검은 옷에 창백한 얼굴, 남자 같기도 하고 여자 같기도 한 존재, 명부사자였다. 

당황한 나머지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영소도 지한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옆을

흐르던 실개천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어쩐지 저 머나먼 곳에 거꾸로 선 산이 아까보다

더 가까워 보였다.

ㅡ이제 보니 아직 체온이 따뜻한 하계의 계집이었구나.

눈앞의 명부사자가 말했다.

"엄마‥‥‥."

가스라기는 혹시나 싶어 명부사자의 좌우를 살펴보았지만 역시 엄마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ㅡ네가 들은 목소리가 모친의 것이었구나.

가스라기는 그제야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이가 없어 자신에게 화가 났다. 분명히

미리 이야기도 들었건만, 어째서 그 목소리를 듣는 동안은 그게 가짜라는 생각을 한 번도

떠올리지 못했을까? 말이 씨가 된다더니 정말 명부사자에게 끌려가게 생긴 것이다. 

가스라기는 안절부절못했다. 지금이라도 반대로 돌아서서 뛰면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ㅡ그렇게 무서워할 것 없다. 네가 만나고 싶은 것이 네 어미라면, 내가 만나게 해주마.

명부사자가 뜻밖에도 부드럽게 권했다. 머리끄덩이라도 잡고 강제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죽음의 부름은 생각한 것과 달리 온유했다.

"정말?"

가스라기는 주저하다가 물었다.

ㅡ죽음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법이다. 염려 말고 이리 오너라. 

명부사자가 손을 내밀었다. 가스라기는 그래도 미심쩍어서 물었다.

"잡아가려는 거 아냐? 나도 죽이려고."

ㅡ누가 네게 죽음에 대해 그리 험구하더냐? 명부에 산 사람이 들어와 헤매는 것은 온당치

못하기 때문에 데려가려는 것뿐이다. 풍도산에 가서 정당한 절차를 거쳐 네가 왔던 

곳으로 돌려보내주겠다. 그전에 네가 보고 싶어 하는 어미도 만나게 해주고.

가스라기는 심하게 마음이 흔들렸다. 하기야 명부사자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건 오직

지한에게서 들은 말일 뿐이다. 지한이야 말로 그녀를 늘 해치려고 안달하던 자가 아닌가.

그녀는 하계로 가는 것보다 선계로, 정확히 말하자면 하늘님에게로 돌아가고 싶었다.

지한보다는 명부사자들이 더 그 일을 공정하게 처리해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스라기는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명부사자의 손을 바라보았다. 희고 창백한 손이었다.

조금 무섭기도 했지만 생각했던 것처럼 흉악하거나 섬뜩해 보이지는 않았다. 가스라기는

잠시 주저하다가 한 걸음 그쪽으로 내딛었다. 혹시라도 명부사자가 낚아채려는 기색이

보이면 언제든지 뿌리치고 달아나려고 온몸의 신겨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명부사자는

재촉하는 기미도 없이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한 걸음을 더 내디뎠다. 신기하게도 명부사자와의 거리는 그다지 좁혀지지 않는데 그의

등 뒤에 보이는 풍도산이 그녀를 향해 한 걸음 다가온 것 같았다. 다시 한 걸음 내딛자

산이 좀 더 그녀에게 다가왔고, 안개에 감싸인 것 같던 산의 모습이 조금 더 또렷하게

보였다. 산 전체에 시커멓고 번쩍번쩍 빛을 내는 나무들이 빽빽했다. 다시 한 걸음

다가가자 그것들이 사실 검과 칼의 나무요, 숲이라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었다. 명부의

산은 전체가 강철로 만들어진 모양이었다. 무섭기도 하지만 쇠붙이들이 번쩍이는 모습이

한편 아름답기도 해서 가스라기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한번 내뱉은 한숨이 길고 푸른 입김이 되어 끝없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명부사자는

미소를 지었고, 가스라기는 이상하다 생각하면서도 머리가 띵한 채로 다시 또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입에서 흘러나온 푸른 입김은 점점 길고 커져서 해질녘의 그림자만큼이나

늘어졌다. 어쩐지 주위가 얼어붙은 것처럼 춥다고 생각하며 가스라기는 한 걸음을 더

나갔다. 그때 그녀의 어깨에 따뜻한 손이 얹혔다.

돌아보자 지한의 얼굴이 보였다. 가스라기는 힘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너 따위와 같이 가느니 차라리 저승으로 가겠다고 외쳐주려 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지한은 평소처럼 화를 내거나 비아냥거리지 않았다. 억지로 그녀를 멈춰

세우려고 하지도 않았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슬프게 고개를 젓는 것이었다.

"그쪽으로 가면 안 된다."

말투도 어딘가 달랐다. 가스라기는 혼란에 빠져서 엉거주춤 멈춰 섰다.

"왜?"

확신을 얻지 못한 채로 그녀가 묻자, 그가 대답했다.

"나를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는 거냐?"

그렇게 말하고, 그는 가스라기의 어깨에서 손을 떼어 뺨으로 가져갔다. 몹시도 소중한

것을 만지듯이 부드럽게 쓰다듬는 그 손길에 가스라기의 혼란은 더욱 커졌다. 

그녀는 믿을 수가 없었다.

"하늘님?"

그는 대답 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지한의 그것처럼 차갑고 빈정거리는 웃음이

아니라 하늘님만이 지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의심하고 도사렸던 가스라기는 그 순간

갑자기 설움이 복받쳐서 울음을 터뜨리며 그의 팔에 매달렸다. 해야 할 말이 너무

많았다. 고자질할 것도 많았고 하소연할 것도 많았다. 투정할 것도 산처럼 쌓여 있었다.

하지만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안겨서 살을 비비고 우는 것이었다. 그녀는 안겼고,

그는 받아 안아주었다. 가스라기의 입에서 빠져나가던 푸른 입김이 흐릿하게 흩어졌다.

따스한 품에 몸을 묻자, 해야 할 말들이 모두 잊혀졌다. 가스라기는 따끈한 물에 

녹아내리는 소금처럼 흐물흐물해졌고, 곧 그의 팔 안에서 축 늘어졌다.

그녀를 한 팔로 단단히 잡고서, 그는 고개를 들어 명부사자를 바라보았다. 한 걸음만

더 앞으로 나왔다면 가스라기를 채어서 풍도산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명부사자는 이제 

손을 거두고 무표정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ㅡ이제 보니 선계에서 오신 손님이었군. 어쩐지 셋 중 하나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싶었더니.

그는 명부사자를 향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온화하고 부드럽던 미소를 걷어내고 

그 자리에 들어선 것은 차갑고 빈정대는 듯한 웃음이었다.

"알았으면 이제 그만 얼씬거리고 다른 곳이나 더 살펴보시는 게 어떨지?"

ㅡ주인 된 입장으로 객이 오셨는데 그럴 수야 있겠소? 선인께서는 어느 선적에 계시는

분이기에 맑디맑은 선계의 공기를 마다하고 이곳을 헤매고 계신지?

'다행히 나에 대해서 잘 모르는 하급 사자로군.'

지한은 내심 안도하면서 대답했다.

"곡절이 있어서 잠시 명계의 길을 쓰는 것뿐이오. 곧 나갈 생각이니 남의 일에 

신경 끄시오."

ㅡ그럴 수야 없지, 선계의 손님이라고 하면 대제께서도 환영하실 거요. 일행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을 테니 일단 함께 산으로 가서 대제를 배알하시지요. 선계만은 못해도 

명부의 술 또한 마실만하니.

지한은 하마터면 이미 지겹게 마셔봤다고 버럭 외칠 뻔했다. 간신히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젓고 정중히 초청을 거절했다. 그러나 명부사자는 좀처럼 의심을 풀려 하지 않았다.

ㅡ선인께서 명부의 길을 아시는 걸 보니 혹 명계에 지인이 있는 것은 아니신지?

끝까지 꼬치꼬치 캐묻는 것이었다. 지한은 갈등했다. 그와 명부 사이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명부사자는 지금 눈앞의 명부사자보다는 급수가 높았다. 아마도 곧 판관의 지위에

오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한은 그를 만나는 건 원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 사자와

접촉했을 때, 시호가 없는 선녀에 대해 유달리 호기심을 보였던 것 때문이다. 선인을

죽일 수 있는 존재라는 것까지 알게 된다면 그 호기심이 욕심으로 커질 수도 있다.

그렇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지한은 가능한 한 빨리 명계를 벗어나고 싶었다.

눈앞의 명부사자가 적당히 물러나준다면 좋으련만 아무래도 그렇게 될 것 같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지한은 별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군. 명부의 술은 한번 마시면 그칠 수 없어 주도가 문란해지는지라 슬그머니

곁길로 돌아가려 했는데 말이오. 그렇게까지 나오시니 거듭 사양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군. 그럼 갑시다. 풍도산으로 안내해주시오."

지한은 가스라기를 옆구리에 낀 채 명부사자 쪽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명부사자가 고개를

숙이고는 풍도산을 향해 돌아섰다. 그 순간 지한은 갑자기 그의 뒤에 바싹 붙으며

한 손을 등에 댔다. 그리고 영원히 죽은 자인 명부사자의 몸에 영원히 사는 자인 선인의

생기를 왈칵 밀어 넣었다. 명계의 변두리를 얼씬거리는 선인에게 내심 의심을 품으면서도,

풍도산으로 데려가 높은 판관에게 맡기면 곡절이 드러날 거라고 방심하고 있던 명부사자는

고무공에서 바람이 빠지는 것 같은 비명을 내뱉었다.

"다시 태어났다가 죽어서 또 명부사자가 되거든 이 교훈을 잊지마라."

지한은 점점 오그라드는 명부사자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선인은 술수를 부리지 못할 거라는 건 너의 명계인들의 착각이다."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손을 움켜쥐자, 명부사자의 검은 기운이 손안에서 물거품처럼

터졌다. 운 나쁜 명부사자는 명부에서 죽음을 맞아, 윤회의 수레바퀴를 다시 타게 되었다.

영소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너무나 궁금했지만 차마 돌아볼 수가 없어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등 뒤에 무엇인가 무겁게 털썩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려다가 지한이 경고한 말이 생각나서 꾹 참고 있는데, 목소리가 들렸다.

"됐다. 이제는 돌아봐도 돼."

지한의 음성인데 무척이나 지친 것 같았다. 영소는 기다렸다는 듯이 돌아보았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지한이 가스라기를 옆구리에 낀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위로 향한 얼굴이 무척이나 피곤해보였다.

"괜찮으십니까?"

영소가 다가가서 부축하려 하자 지한은 귀찮다는 듯이 그 손을 쳐냈다.

"바보 같은 놈. 돌아봐도 된다고 말했다고 바로 돌아보냐?"

영소가 당황해서 순간 말을 잇지 못하자 지한은 눈을 감으며 소매로 얼굴을 덮었다.

"걱정 마라. 진짜 나니까. 이번 명부사자는 더 이상 오지 못할거다. 하지만 순라는 

그놈 말고도 더 있을 테니 다음에도 잊지마. 그놈들이 내 목소리로 부르더라도

돌아보지 말라는 소리다. 난 잠깐 쉴 테니까 이 계집이나 치워."

영소는 도대체 이 변덕스러운 선인에게 고마워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지한에 대해 판단 내리는 것을 유보하고 일단 가스라기를 부축해 옆에

눕히려 했다. 그러나 그가 손을 대자 가스라기는 금세 눈을 떴다. 그러고는 벌떡 윗몸을

일으켜 앉더니 옆을 둘러보았다. 가스라기는 바로 옆에서 자신이 찾던 존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소매로 눈을 가리고 있지만 그 콧날과 입술과 턱의 모양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하늘님!"

반갑고도 원망스러운 목소리로 그를 부르자, 지한이 눈을 가리고 있던 팔을 들어올리고

실눈으로 가스라기를 바라보았다. 가스라기는 아직도 그가 하늘님이라고 착가하고 

있었다. 천군이 가장 아프고 괴로울 때 옆에 있었던 가스라기의 눈에는 명부사자를 

환생시키기 위해 생기를 왈칵 쏟아낸 여파로 지치고 피로에 젖은 지한의 얼굴이 영락없이

천군으로 보였기 때문이기도 하고, 눈이 마주친 순간 지한이 잠시나마 그 특유의 비웃는

표정을 짓지 않고 물끄러미 그녀를 올려다보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지한 자신도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로, 자신을 천군이라고 생각하는 가스라기의 착각이

전만큼 심하게 기분 나쁘지 않았다. 이상하기로 따지면 천군의 흉내를 내서까지 

가스라기를 구해낸 것부터가 그랬다. 그녀가 듣는 목소리가 천군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이상하게도 마음이 너그러워져버렸던 것이다. 하긴, 애초에 가스라기를 

황건역사의 손아래에서 끄집어낼 때부터 모든 게 다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언제 온 거야? 어떻게? 난‥‥‥ 아, 할 말이 너무 많은데, 뭐부터 해야‥‥‥."

그 모든 괴사의 중심인 가스라기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다가 지한은 그 자신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넌 정말 지치지도 않는구나."

울먹이던 가스라기의 표정이 굳었다.

"어떻게 된 게 몇 번을 속고도 또 속지? 게다가 상대도 가리지 않고 말이야. 

나든 명부사자든. 저 하계인 놈이 속여도 속아 넘어 갈 테지? 어이, 하계인, 너도 심심하면

한번 속여보지 그래?"

지한은 한껏 빈정거린 다음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눈을 감았다. 오래 지체할 수는 없겠지만

잠깐이라도 기운을 되찾아야 다시 걸어갈 힘이 날 터이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멍청하게 지한을 내려다보던 가스라기가 버럭 고함을 지르며 벌떡 일어나 지한을

죽여버릴 듯이 날뛰었고, 그녀에게 선인을 죽일 힘이 있다고 믿는 영소는 대경실색하여

뜯어말리느라고 죽을힘을 썼다. 두 사람이 법석을 떠는 소리를 들으며 지한은 얼굴을

가린 채로 피식 웃었다. 가장 이상한 일은 그것이었다. 그가 가장 증오하는 천군의

흉내를 내어 그의 여자를 구해내고도 웃을 수 있다는 사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