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화 (79/109)

20-2.

이상한 여행이자 이상한 길동무들이었다. 함께 가는 길부터 이상했다. 물고기 하나

헤엄치지 않는 회색 강을 따라,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길을 그저 정처 없이 걸을

뿐이었다. 숨을 쉴 때마다 연한 푸른색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영소는 가스라기를 둘러멘 채 지한의 뒤를 따라 걸으며 한 손을 입으로 가져가 후후

불었다. 몹시 추운 느낌인데 뼈나 살을 에는 추위는 아니었다. 이를테면 혼을 발라내는

추위 같은 것이라 명계의 날씨로는 썩 어울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영소는 추위보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과 고요가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놓아달라고 난리를 피우면서 전에는 들어보지도 못한 온갖 욕을 뱉던 가스라기도 

이제 지쳤는지 축 늘어졌고, 지한 역시 앞에서 걷기만 할 뿐 말 한마디 없었다.

지한은 그쪽에 하계로 가는 출구가 있다는 것을 확신이라도 하는 것처럼 거침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영소가 아무리 눈에 힘을 주고 바라보아도, 그가 가는 방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자신들이 가는 방향과는 반대로 흐르는 실개천이 있을 뿐이다.

사실 그쪽만이 아니라 눈이 닿는 곳 모두 똑같았다. 사방 어디나 안개가 깔린 것처럼

뿌옇지만 막상 안개는 아니며, 공기는 건조하고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끝없는 황무지였다.

특별한 것이 있다면 그들이 향한 반대쪽 멀리 보이는 산과, 실개천에서 이어져 하늘 같지

않은 하늘을 향해 흐르는 큰 강이었다. 오히려 출구가 있다면 그쪽일 것 같은데 반대

방향을 향해 고집스럽게 가고 있는 지한을 영소는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영소는 꼼짝도 않고 축 늘어져서 본격적인 짐이 되고 있는 가스라기를 고쳐 메고,

걸음을 재게 놀려 지한의 옆까지 따라붙었다.

"선인, 정말 이쪽으로 가면 하계로 돌아갈 수 있는 겁니까?"

지한은 마치 그의 말을 듣지도 못한 것처럼 똑바로 앞만 보고 걸음을 옮겼다. 그 오만한

옆모습을 바라보면서 영소는 천군을 생각했다. 처음 보았을 때는 같은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똑같은 얼굴이라도 풍기는 기도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하계인인 그도 이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이 얼굴을 가까이에서 볼 기회를 얻자, 역시 형제는 형제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딱 꼬집어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생김새를 떠나 기질이 정반대이면서도

닮은 구석이 느껴졌다.

"선인, 벌써 하루가 넘게 걸었습니다."

역시 대답이 없었다. 영소도 괜한 오기가 나서 더 재우쳐 물었다.

"방향을 잘못 잡으신 게 아닙니까? 저 산 쪽으로 가보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지한의 걸음이 멈췄다. 그는 한심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고 영소를 바라보았다.

"하계인, 넌 도대체‥‥‥."

"울지 가문의 아들로, 자는 영소입니다."

영소가 느닷없이 자기 이름을 대자 지한은 눈을 찌푸렸다. 그러나 곧 혀를 차고는 말했다.

"뭐, 상관없겠지. 어차피 네놈의 이름은 선계에 새겨질 테니까‥‥‥. 어쨌든, 네놈은

도대체 저 산이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선학은 가문의 영향으로 접해보았고, 명계에 대한 학문이 명학은 초혼부대의 일을 

맡았을 때 수박 겉핥기로 맛을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영소는 집작하는 바를 이야기했다.

"명부의 산이라고 하면 풍도산, 강이라고 하면 삼도천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잘도 주워들었군. 그럼 왜 그리 가면 안 되는지도 알겠지? 

쓸데없는 질문으로 발목 잡지 마라."

그러고 나서 지한은 다시 걸음을 옮기려 했고, 영소는 가스라기를 한 팔로 붙잡은 채로

나머지 손을 뻗어 지한의 소매를 잡았다. 지한은 버럭 화를 내며 그 손을 뿌리쳤다.

"어딜 감히!"

더러운 벌레 취급을 받은 셈이지만 영소의 표정을 달라지지 않았다.

"답이 되지 않았습니다. 풍도산과 삼도천이 대체 어떻단 말씀입니까?"

지한은 신경질적으로 소매를 털면서 답했다.

"어설프게 배웠군. 그쪽으로 가면 안 된다는 건 뻔하지 않나!"

"왜 안 된다는 겁니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쪽보다 제 눈에는 차라리 저 쪽이 더‥‥‥."

"그러니까 하계인은 어리석다고 하는 거지. 풍도로 걸어 들어가면 명부사자들이 친절하게

하계까지 돌려보내줄 거라고 생각하느냐?"

영소는 움찔했다. 하지만 쉽게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저희는 죽은 자가 아니니 붙잡을 수 없지 않습니까. 숱한 문헌에서도 아직 하늘이 죽을

때라고 정하지 않은 사람은 명부사자조차 붙잡을 수 없다고‥‥‥."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불청객인 주제에 명계에서 숨을 쉬고, 명계의 빛으로 사물을

볼 수 있는 게 무슨 덕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네놈도, 저 계집도 명계의 물, 삼도천의

근원이 되는 물을 마셨다. 내가 마시게 했지."

지한은 영소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대고 노려보며 말했다.

"명계의 것을 몸에 받아들이면 반쯤은 명계에 속하게 된다. 명부사자가 잡아갈 명분이

생기는 거지. 그게 무슨 뜻인 줄 아느냐? 네놈도, 그 계집도 반쯤 죽은 거나 

다름이 없다는 소리야!"

"죽었다?"

"벌써 하루가 넘게 걸었다고 했지? 배가 고프더냐? 아니면 잠이 오더냐?"

영소의 얼굴색이 변했다. 지한이 빙긋 웃었다.

"그게 반쯤 명계에 걸친 자의 특징이지. 배고픔도 졸림도 느끼지 못하고 다만 영원히

피곤할 뿐, 그게 죽음이라는 것이다."

웃음을 거두고 그는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영소는 정신을 차리고 그 뒤를 따라

걸으며 물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쪽에 하계로 올라가는 길이 있을 것 같지는 않‥‥‥."

무거운 자루처럼 축 처져 있던 가스라기가 꿈틀거리는 바람에 영소는 발이 꼬여서 

하마터면 엎어질 뻔했다. 선인과의 신경전만으로도 벅찬 판이라 그는 가스라기에게

화가 치밀었다.

"놓아줘요."

그런데 화를 터뜨리려는 순간 둘둘 감은 장포 안에서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말 들을 테니까 놓아줘요. 내 발로 걸어갈 테니까."

생고집을 피울 때와는 딴판이었다. 하루 종일 어깨 위에 늘어져 있는 동안 제법 마음을

잡은 모양이었다. 하루 종일 어깨 위에 늘어져 있는 동안 제법 마음을 잡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방심하게 해놓고 또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영소는 선뜻 그녀를 놓아줄 수가 

없었다.

"뜻대로 해줘."

앞서가던 지한이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말했다.

"제 발로 걷겠다니 잘됐지. 너도 더 이상은 그 계집을 업고 다닐 수 없을 테니까 말이야."

"무슨 뜻이십니까?"

지한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고, 그 뒷모습이 점점 멀어져가는 것을 바라보던 영소는

가스라기를 내려주고 장포를 벗겼다. 머리가 형편없이 흐트러진 가스라기가 후아아

하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미안하게 됐소."

영소가 사과했지만 가스라기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영소를 탓하는 것 같은 눈치도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뒤 가스라기는 지한의 뒤를 따라,

안개가 낀 듯이 뿌연 실개천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이를 앙다문 그 얼굴이 천군이나

지한처럼 고집스럽게 보였다. 영소도 그녀를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상한 여행이고, 이상한 길동무들이었다. 영소의 머릿속에서는 계속해서 의문이 피어났다.

자신과 가스라기는 명계의 물을 마셨으니 명부사자에게 잡혀갈 수 있다지만, 지한은 어째서

명부사자 만나기를 꺼리는 것일까? 물론 선인도 죽을 수는 있겠지만 하계인처럼 명부의

물을 마셨다고 해서 바로 잡혀가거나 할 리는 없다고 영소는 생각했다. 자신이나 가스라기라

명부에 구속되는 것을 걱정해서 일부러 그 길을 피한다는 추측은, 지한의 성정을 

생각할 때 말이 되지 않았다.

영소는 지한의 뒤꿈치만 바라보며 걷다가 문득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천의 자락 아래,

지한의 맨발이 명계의 대지를 밟고 있었다. 선인은 언제나 땅 위 일 촌 지기만을 

밟아야 할 텐데, 명계에서는 그렇지 않은 걸까? 영소가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지한이 걸음을 멈췄다.

"오는군."

영소는 의아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뭔가 다가오는 기척 같은 건 없었다.

다만 좀 전보다 추워진 느낌이었다. 귀를 기울여 보니 뒤쪽의 뿌연 공기 저편에서 우우

하고 우는 소리가 얼핏 들린 것도 같았다. 영소가 허리춤의 칼집에 손을 대면서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 하자, 지한이 말했다.

"가지 마라."

그리고 그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순라다."

"순라?"

더욱 강한 한기가 갑자기 엄습해왔고, 뒤쪽에서 회오리바람이 다가오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가스라기와 영소는 눈을 마주쳤고, 거의 동시에 뒤를 돌아보려 했다.

"돌아보지 마. 그냥 걸어."

지한이 다시 경고했다. 둘은 움찔 놀라며 시키는 대로 걸음을 옮겼지만, 한기는 점점

강해지고 회오리바람은 목 뒤의 머리털을 날릴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렸다.

ㅡ명부의 황야를 헤매는 자여, 이 몸은 진광왕을 모시는 명부사자다. 산 자도 아니고

죽은 자도 아닌 너희들은 대체 누구냐? 성과 명을 고이 밝힌다면 너희들이 돌아가야 할

곳으로 가게 해주겠다.

명부사자의 음울한 목소리는 선어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힘이 있어서 저절로 영소의

입이 벌어졌다. 영소는 그의 자로, 태어날 때 받는 본명과는 다르다. 자(字)란 명문의 

자제가 성인이 될 때 진짜 이름을 보호하기 위해 웃어른이 지어주는 두 번째 이름이다.

관인들 사이에서는 아호니 외호니 해서 여러 가지 고상한 이름으로 서로를 칭하는 풍습이

있는데, 이 또한 자와 마찬가지로 삿된 것들로부터 본명을 보호하는 효험이 있다고 해서

도사들이 권장하는 것이었다.

명부사자가 요구하는 성과 명은 자나 아호가 아니라 본명으로, 가족이 아니라면 절친한

친구한테조차 알려주지 않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지금 제 뜻과 무관하게 열린 영소의 

입에서는 바로 그의 본명이 뱉어지려 하고 있었다.

"정신 차려!"

지한의 고함 소리가 머리를 찡하게 만들었다. 두통이 치밀었지만 동시에 머리가 맑아졌다.

강제로 열리려던 입을 간신히 다물 수 있었다. 가스라기를 돌아보니 그녀도 간신히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정신이 들고 보니 음산한 회오리바람의 기척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혼을 얼어붙게 하는 한기도 가셨다. 사도선인이라고 해도 선인은 선인, 선기가 

실린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한결 나아진 것이다. 하지만 온몸의 진이 다 빠져서 발이

땅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모, 못 걷겠어."

가스라기의 무릎이 꺾였다. 영소는 그녀의 팔을 잡아 부축하려고 했지만, 자신도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지한은 무표정한 얼굴로 걸음을 재촉하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명부사자는 꼭 세 번을 부른다. 앞으로 두 번 더 남았어."

영소가 힘겨운 목소리로 물었다.

"대답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풍도로 소환된다. 죽고 싶지 않으면 귀를 막고 걸어. 돌아보지도 말고. 바보짓을 하는

녀석은 버리고 갈 테니까."

대답하면서도 지한은 걸음을 멈추지 않아서 점점 거리가 멀어졌다. 영소는 힘을 짜내 외쳤다.

"저는 버리셔도 상관없습니다만, 이 여자는 데려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가스라기가 어떤 존재인지 확인하려고 위험을 무릅쓰신 게 아니었습니까?"

"그럴 생각이었지. 하지만 나는 득실을 따지기 전에 호오를 먼저 가리는 성격이라서 말이야.

계속 귀찮게 군다면 버릴밖에. 살고 싶다면 닥치고 따라와."

지한의 모습이 뿌연 막 저편으로 스며들듯이 사라졌다. 영소는 이를 갈았다.

저렇게나 빨리 걸어갈 힘이 있다면 부축을 해줄 수도 있을 텐데 제 몸 하나만 건사하며

가버리는 처사가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예전 같으면 감히 선인에게 화를 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심한 욕이라도 그 뒤통수에 대로

외쳐주고 싶었다.

그런데 가스라기가 그의 팔을 붙잡고 비틀비틀 일어섰다. 영소가 놀라 바라보는 앞에서,

그녀는 거치적거리던 치마말기를 감아 허리춤에 꽂았다. 댕기를 풀어 흐트러진 머리칼을

다시 단단히 묶더니 지한을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선인에게는 강할지 몰라도, 다른 면에서는 보통 여자나 다름없는 것이 가스라기다. 

그런 그녀가 힘을 내서 다시 걷는데 사내 된 체면에 계속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영소도 땅을 짚고 일어섰다. 그리고 아까보다 더 빨리 걸음을 옮겼다. 이내 그는 

가스라기를 따라잡았다. 나란히 서서 걷게 되었을 때, 영소는 가스라기가 이를 악물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따라가는 게 아냐. 자기 마음대로 끌고 왔으면서‥‥‥. 누가 구해달라고 했나? 

벌을 받더라도 선계에 있는 편이 나았어. 따라가지 않아. 내 발로 여길 나갈 거야.

그리고 선계로 돌아갈 거야. 두고 봐."

지한이 가스라기의 소리를 들었는지 어떤지는, 그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기에

확인할 수 없었다. 지한은 아까와 같은 속도로 걷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곧 그

뒤까지 따라붙을 수 있었다. 영소는 지한을 앞질러가서 그 얼굴에 대고 '어떠냐?'하고

웃어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ㅡ영소야.

그는 걸음을 멈췄다. 명계에서 들릴 리 없는 음성이었다. 하지만 너무나 가깝고 

생생한 음성이었다.

ㅡ네가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느냐?

대도 휘경, 가장 안전한 벽와궁에 있어야 할 환공 기백의 음성이 어째서 지금 들리는

것인가. 영소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ㅡ짐이 네게 시킨 일은 이것이 아니었지 않느냐. 네가 왜 명계의 황야를 헤매고 

있는 것이냐? 영소야, 대답해보아라.

'전하!'

영소가 대답하며 돌아서려는 순간, 지한이 나지막하게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영소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ㅡ어찌 감히 네가 나를 돌아보지도 않느냐? 내가 네게 무엇이더냐? 영소야!

식은땀이 흘렀다. 분명 기백의 음성이라고 생각한 그 목소리가 점점 일그러지더니 아까

명부사자의 음성처럼 스산하게 변하다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음산한 한기가 그의 귓불

근처를 쓰다듬다가 함께 사라졌다. 가스라기가 영소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를 들었어요?"

"당신은‥‥‥ 아무것도 못 들은 거요?"

가스라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영소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나만 부른 모양이군. 이게 두 번째 부르는 소리라면, 

이제 한 번만 더 버티면‥‥‥."

"편한 대로 생각하는군."

지한의 음성이 끼어들었다.

"하루에 세 번이라는 뜻이다. 앞으로 출구에 도착할 때까지 매일 세 번 시험을 거치게

될 거라는 소리지. 과연 며칠이나 견딜지 궁금해지는군."

"선인."

영소는 화를 꾹꾹 누른 음성으로 지한을 불렀다.

"뭐냐?"

지한이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영소는 막상 말을 꺼내놓고서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선인에 대한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화를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지한의 시선이 가스라기

쪽으로 옮겨졌다.

"호오."

지한의 입에서 비웃음 섞인 탄성이 흘러나오는 것을 듣고, 영소도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스라기는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영소에게는 들리지

않는 어떤 소리를 듣고 있는 것처럼. 영소가 헉 소리를 내자, 지한이 빙긋 웃었다.

"그래, 세 번째 부름을 듣고 있는 거다."

영소는 황급히 가스라기의 팔을 붙잡았다. 혹시라도 그녀가 돌아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정신 차리시오!"

가스라기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있는 것처럼 영소의 말을 듣지 못했다. 그녀가 듣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영소는 도대체 어떤 목소리가 부르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멍하던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돌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무척이나 가깝고

소중한 사람의 음성임이 분명했다. 그녀의 입이 천천히 열리는 것을 보고 영소는

황급히 그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지한에게 외쳤다.

"도와주십시오."

"죽음의 길에는 부모도, 형제도, 벗도, 정인도 동행하지 못하지. 누구도 도와줄 수 없어."

"하지만 선인의 목소리를 듣고 깨어날 수 있었습니다!"

"너는 그랬지."

영소는 퍼뜩 깨달았다. 지금도 지한의 음성이 들리는데 가스라기는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선계에 속한 것에 대한 면역의 힘이 하필 지금 발휘되는 모양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지한의 얼굴을 보니, 비웃는 표정이면서도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었다.

"다른 방법은 없는 겁니까?"

손을 뿌리치며 돌아서려는 가스라기를 한사코 붙잡아두면서 영소가 물었다.

지한이 차가운 표정으로 반문했다.

"있다고 한들, 왜 내가 해야 하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