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76/109)

19-3.

한입은 풀 한 포기 나지 않은 반들반들한 돌바닥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두 귀를 쫑긋 

세우고 코를 발름거리다가 뒷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작은 토끼가 발 구르는 소리도

남화궁의 높고 둥근 천장에 부딪히자 크게 울렸다. 한입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던 천군이

문득 중얼거렸다.

"불안한 모양이구나."

불안하기는 천군도 마찬가지였다. 남화궁에 온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첫 번째는 진선에

올라 수하린을 맞이하러 왔을 때, 그리고 사 년 전 이곳에서 보패를 압수당했다. 앞으로

스무 번을 더 온다고 해도 준천계의 풍경에 익숙해질 것 같지는 않았다.

일단 이곳은 나무도 풀도 자라지 않는다. 축축한 흙 대신 티 한 점 없는 흰 돌을 대지로

삼고 있다. 그 위에 선 건물들 역시 흰 돌로 만들어졌는데, 보천궁의 그것들처럼 우아한

처마나 지붕의 곡선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네모나고 둔탁한 것들이 흰 대지의 지평선

저편에 드문드문 보였다. 건물이라기보다는 반질반질한 흰 대지 곳곳에 돌출된 티눈 같았다.

게다가 하늘은 언제나 밤이다. 그러면서도 어둡지는 않다. 태양 대신 흰 돌바닥의 빛이

모든 것을 낮처럼 밝힌다. 서 있는 곳은 낮이며, 바라보는 곳은 밤이다.

천군도 남화궁의 전체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들은 말에 의하면, 남화궁은 전체가 둥근

공처럼 생겼는데 윗부분을 뚝 잘라내고 대신 딱 맞는 투명한 뚜껑을 씌운 것과 같다고

했다. 그래서 투명한 천장 너머로 언제나 하늘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생기도 아취도 없는 살풍경한 이 장소가, 아홉 선계 중에 으뜸이라는 사실은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나마 남화궁의 풍경 중에 마음이 드는 것이 있다면, 어디서든

고개만 들면 바라볼 수 있는 별의 강 은하수였다. 검푸른 밤하늘 가운데 사선으로 흐르는 

폭 넓은 은하의 한끝은 남화궁의 지평선 아래로 가라앉고, 다른 한끝은 천군이 볼 수

있는 가장 높은 하늘 저 위로 사라져갔다. 모든 강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기 마련이지만

은하는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강이다. 무한계의 한쪽을 흐르는 물길이 그렇듯이,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모든 물은 이 은하의 자손이라고 한다.

"흠, 흠."

한입을 안아 들고 쓰다듬으며 은하수를 바라보고 있던 천군의 뒤에서 느닷없이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발뒤꿈치까지 늘어진 긴 은발에 은빛 눈동자, 남화궁의 대지처럼 생기 없는

흰 피부와 하얀 입술을 지닌 여섯 살가량의 어린 여아였다. 천군은 그녀를 향해 공수하고

고개를 숙였다.

"무량무극. 남화궁의 상아를 뵙습니다."

남화궁 태상노군의 상아 자무린이었다. 그녀는 천군이 수하린을 맞이하러 남화궁에 왔던

수백 년 전에도 지금과 똑같이 남화궁 풍경처럼 탈색된 무표정한 얼굴에 어린아이의 

몸이었다.

"아, 귀여운 토끼."

자무린은 천군의 인사는 받는 둥 마는 둥, 그 팔에 안긴 한입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다른

선인의 상아라고 해도 접촉을 할 수는 없기에 천군은 손이 닿지 않도록 조심하며 한입을

건네주었다. 자무린은 붉은 털가죽을 쓰다듬으며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물었다.

"할아버지를 만나러 온 거지?"

"예. 노군께서는 지금‥‥‥."

"할아버지는 술 마시고 자."

태상노군이 취해서 명상에 들었다면 언제 깨어날지 알 수가 없다. 가능한 한 빨리 일을

마치고 돌아가야 하는데 낭패였다.

"나한테 말해봐. 무슨 일이야?"

자무린이 한입의 털에 얼굴을 비비며 말했다. 천군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노군만이 들어주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 말에 자무린의 은빛 눈이 반짝였다. 맡아둔 보패를 돌려주는 일이라면 상아가 대신

처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천군은 그게 아니라고 했다. 잠시 천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자무린이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별을 보고 있었지?"

"예, 은하를."

자무린이 피식 비웃음을 뱉었다.

"은하수 따위를 왜 봐? 다른 별을 봐야지."

어째서 은하수를 '따위'라고 하는지 천군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수천 년 동안 준천계에

살며 은하수를 지겹도록 봐온 탓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른 별이라 하시면?"

"이를테면‥‥‥."

자무린이 한 손을 들어 은하 주변에 흩어진 무수한 별들과 별들 사이의 빈 공간을 가리켰다.

"네 별이라든가."

천군은 웃었다.

"아직 제 별은 만들어지지도 않았습니다."

자무린도 웃었다.

"아직 만들어ㅣ지도 않은 별을 팔려는 거잖아."

천군의 웃음이 쓰게 변했다. 누구의 천수배필이든, 상아를 속인 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자무린의 은빛 눈이 천군을 빤히 바라보았다.

"할아버지를 만나려는 선인들은 다 그 생각을 하지. 별은 진선이 내놓을 수 있는 가장

큰 거야. 또 다른 삼라에서 천존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버리는 거니까. 네가 얻으려는 건

그만한 가치가 있는거야?"

천군의 대답은 천천히 흘러나왔지만, 망설임은 한 점도 묻어나지 않았다. 대답하기 전에

그는 잠시 가스라기를 생각했다. 그녀의 웃음, 심술 난 표정, 아프지 않냐고 걱정하는 얼굴.

"예."

"누구나 다 그렇게 대답하더라. 하지만 누구나 다 별을 팔지는 못해. 

할아버지는 까다로우니까."

자무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천군의 표정을 살폈다.

"그런데 넌 좀 달라 보이는구나. 내가 잘못 본 것일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좋아.

할아버지가 깰 때까지 기다려야 해. 따라와."

자무린이 돌아섰다. 남화궁에서는 남화궁 거주자의 안내를 받지 않으면 계속 제자리걸음을

할 뿐 어디로도 움직일 수가 없기 때문에 천군은 재빨리 그녀의 뒤로 다가갔다. 그때,

갑자기 심장에 극심한 격통이 찾아왔다. 천군은 저도 모르게 짤막한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자무린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돌아보았다.

그녀의 품에서 한입이 귀를 쫑긋거리며 고개를 들더니 폴짝 뛰어내려 천군의 무릎에 앉았다.

"왜 그래?"

잠시 동안은 자무린의 질문에 대답할 힘조차 없었다. 

천군 자신도 이해가 가지 않는 고통이었다.

"여독이야?"

준천계의 공기는 선계보다도 희박해서, 하계인이 선계에 들어오면 여독을 앓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인도 남화궁에서는 여독을 앓기 마련이었다. 수행이 높은 선인일수록 앓는

기간이 줄어들고, 궁주가 발급해주는 통행부를 지니고 있을 경우 여독은 잠깐 어지럼증을

느끼는 정도로 끝난다. 이미 그 여독 현상은 지나갔기 때문에 지금 이것이 여독일 리는

없었다. 천군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그 순간 자무린의 입가에 그려진

희미한 미소를 보지 못했다.

"동생이 벌써 움직이기 시작했나 봐."

천군이 겨우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을 때, 자무린이 중얼거리는 혼잣말이 들렸다.

동생이라니?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자무린은 빙긋 웃고 돌아섰다.

"움직일 수 있으면 일어서. 우선 신수부에 가서 이 토끼를 등록해야지."

일어설 수는 있었지만 여전히 심장이 크게 두근거렸다. 근래 이런 일이 점점 잦아졌는데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박동과 고통이 컸다.

자무린이 걸음을 옮겼다. 아니, 자무린이 움직인 것이 아니라 남화궁의 흰 대지가 거대한

공처럼 그들의 발밑에서 움직였다는 쪽이 옳았다. 둥글고 흰 남화궁의 지평선이 자무린과

천군 앞으로 밀려왔다. 그 지평선 끝에 붙은 네모난 건물들도 함께 다가왔다.

신수부로 다가가는 동안에도, 천군의 가슴속에서는 불길한 예감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동생이라니. 설마 지한을 말하는 건가? 지한이 움직이기 시작했단 말인가?

무슨 일로?

어서 일을 마치고 보천궁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자신의 미래, 선인이 궁극적으로 손에 넣을 수 있는 또 다른 세계 전부를 걸고서라도

지키고 싶은 존재가 있는 곳으로.

남화궁과 보천궁의 시간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흘러가지만, 천군이 고통을 겪은 그 순간에

황건역사는 황산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가스라기는 하늘님을 불렀으며, 지한은 그녀를

데리고 명계의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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