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
계속 은형술로 몸을 감춘 채 가스라기를 지켜보고 있던 지한은 광명정 쪽에서 푸른
무지개가 뻗어올 때부터 천선이 오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푸른 무지개, 청예선흔은
천선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놀라운 일이었다. 보천궁을 방문한 천선이 왜 이곳으로
온단 말인가. 여기 있는 것은 보잘것없는 선녀 몇 명과 하계인뿐인데.
지한을 놀라게 하는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천선이 무지개 위에서 손을 뻗으며 오라고 말하자, 가스라기의 몸이 움찔 떨리는가 싶더니
보이지 않는 계단을 밟는 것처럼 허공을 디디며 무지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기 싫은지 도리질을 하면서도 몸은 계속 천선을 향해 다가가는 모양을 보니 속박을
당한 듯했다.
"싫어‥‥‥ 싫어!"
반쯤 끌려 올라가던 가스라기가 소리를 지르며 거세게 몸을 뒤틀었다. 그러자 갑자기
속박이 풀리고 그녀는 땅바닥에 떨어져 뒹굴었다. 천선의 속박을 푼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그것을 보고도 천선이 경악하기는커녕 고개를 끄덕인 것이 더욱 놀라웠다.
"과연. 확실히 가스라기가 맞구나. 그럼 이건 어떨까?"
천선이 새끼손가락을 입가로 가져가 훅 하고 내불었다. 그 손가락에는 가느다란 금빛
머리카락 같은 것이 감겨 있었는데, 입김을 내불자 머리카락이 아래로 날아가며 사람의
몸길이가 넘을 만큼 길어졌다. 금린박룡삭이라는 물건이다. 비록 가늘기는 머리카락과
같지만 용조차 일단 묶이면 무슨 수를 써서도 끊어버릴 수 없다는 천계의 보물이었다.
아직 몸도 일으키지 못한 가스라기 위로 날아간 박룡삭이 순식간에 그녀의 몸을 친친
감았다. 가스라기는 불에 덴 것처럼 비명을 지르며 마구 발버둥을 쳤다.
지한은 자기도 모르게 혀를 찼다. 박룡삭은 단지 꼼짝 못하게 묶는 정도에서 그치는
물건이 아니다. 풀려나기 위해 발버둥을 칠수록 더욱 옥죄며 살을 찢고 뼈를 으스러뜨리는
잔인한 형구였다.
저 계집은 언제나 사서 고생을 하는군. 하긴 나한테도 그랬지. 덤벼들면 덤벼들수록
더 고통을 주고 싶어진다는 것도 모르고 말이야. 차라리 가만히 있으면‥‥‥.
지한은 가스라기가 차라리 반항을 그치고 더 이상 고통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자신을
발견하고 문득 놀랐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는 그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고개를
저었다. 그때,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당황하며 발만 동동 구르던 가스라기 주변의
사람들이 탄성을 지르는 것을 그는 들었다.
박룡삭에 감긴 채 누워서 발버둥을 치던 가스라기가 자유의 몸이 되어 일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몸을 옥죄던 박룡삭은 조각조각 끊어져서 바닥에 떨어졌다. 이번에도
천선은 놀라지 않았다. 손을 내밀어 끊어진 박룡삭의 파편을 회수하면서 말했다.
"이제 확실히 보았겠지? 저 아이는 선술이라면 뭐든 통하지 않아."
그건 화영을 향한 말이었다. 화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선이 물었다.
"그럼, 양해해주겠지?"
화영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집행하십시오."
천선의 시선이 다시 가스라기 쪽으로 향했다. 본능이 그녀에게 명령하는 것처럼,
가스라기는 겁에 질린 상태에서도 그 시선을 마주 쏘아보았다. 그녀는 선계에 올라오기
전, 하늘님을 만나기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상처 입고 겁먹은 외로운 짐승으로.
"가스라기."
천선의 입이 열렸다.
"선인을 죽이는 자여."
그 말에 가스라기와 그 옆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 지한까지도 움찔 몸을 굳혔다.
"선계는 너와 같은 독초가 자랄 곳이 아니니, 네 뿌리를 여기서 뽑겠다.
나, 파라천선이 형을 집행한다."
"누구 마음대로?"
천선의 말을 가로채며 빛 속에서 뛰어나와 가스라기 앞을 막고 선 것은 수안니였다.
파라천선이 빙그레 웃었다.
"화안금정수인가? 설마 이 계집의 영수가 된 건 아닐 텐데."
언제나 선인들에게도 말을 함부로 해대던 수안니다. 하지만 천선 앞에서는 쉽게 성질을
낼 수 없었다. 지금껏 빛 속에 숨어 지켜보고 있었던 것도 천선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왔고, 파라천선의 말에 잠깐 목을
움츠렸다가 이를 갈며 대꾸했다.
"그 계집 따위 어찌되든 내 알 바 아니지만‥‥‥ 이 몸은 약속을 했으니 지켜야겠어.
너희 선인 나부랭이들처럼 신의 없는 종자가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또
하나, 난 선인들 중에서도 너희 천선들이 제일 마음에 안 들어."
한번 말이 쏟아져 나오자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이 되었다. 수안니는 앞발로 땅을
헤치며 으르렁거렸다.
"이 계집에게 손을 대려거든 나를 넘어가라. 아무리 천선이라도 신수의 피를 본 대가는
가볍지 않겠지?"
"신수 하나 치우는 데 피까지 볼 필요야 있나?"
눈을 가늘게 뜨고 수안니를 지켜보던 파라천선이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그 손에는
누런 머리띠를 한 진흙 인형이 쥐어져 있었다. 그 물건을 알아본 순간, 기세를 올리던
수안니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망할! 황산을 아예 들었다 놓을 생각이로구만."
동시에 지한도 입술을 깨물었다. '저것'을 가져왔다는 건 천선이 보통 결심을 한 것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그는 초조한 표정으로 가스라기를 바라보았다. 시호가 없는 계집,
넌 도대체 뭐냐. 선인을 죽이는 자라고? 대체 그게 뭐냐. 까마득한 옛날, 천선을 죽였던
자가 되살아나기라도 했단 말이냐.
파라천선은 진흙 인형을 든 손을 앞으로 내밀며 가스라기를 향해 말했다.
"이것은 너를 위해 가져온 것이다. 선인의 술(術)도 통하지 않고, 선인의 보패도 부수는
가스라기, 너를 벌하기 위해서 말이지. 천계에서 만들어진 물건이 아니니 너의 그 무작한
힘도 듣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전에 거치적거리는 신수를 치우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는 진흙 인형의 머리띠를 벗겨 허공에 날리고, 뒤따라 진흙 인형을
던졌다. 누런 머리띠가 펄럭거리며 날아올라, 하늘과 땅을 전부 덮을 듯 이들의 시야가
그 누런 천에 가로막혔다. 천지를 쪼개는 굉음이 울리고, 황사바람이 휩쓸고 지나갔다.
수안니조차도 제대로 눈을 뜨지 못했다. 시혼은 바람에 휩쓸려 몇 장이나 뒤로 굴러갔다.
영소는 가까운 나무를 붙들고 간신히 버텼다. 운교는 얼이 빠진 백화를 끌어안으며
보호했고, 여진은 꼿꼿이 서서 버티려고 안간힘을 날아갈 뻔한 가스라기를 붙잡았다.
한순간에 바람이 멈췄다. 하늘을 가리던 누런 천이 사라졌다. 그 너머에 나타난 것은,
발은 망후봉 아래 닿고 머리는 하늘을 찌르는 거인, 천계의 신병 황건역사였다.
황건역사는 해를 가리고 거대한 그림자를 망후봉 위에 드리웠다. 사람 형상으로 생겼으나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으며, 눈에는 눈알이 없고 그저 눈의 흔적만 있을 뿐이며, 온몸이
진흙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다. 머리에는 좀 전에 하늘을 가리던 누런 천이 변한 듯한
머리띠가 둘러져 있는데, 황건역사를 조종하는 자는 바로 그 머리끈을 통해 천지간에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이 거병을 다룰 수 있었다.
푸른 무지개 위의 파라천선이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황건역사가 천천히 허리를 굽히며
손을 뻗었다. 황건역사의 손 그림자가 망후봉 위를 덮었다. 거대한 압력이 함께 따라왔다.
가스라기를 포함해 모든 이들이 꼼짝하기는커녕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수안니뿐이었다. 수안니는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황건역사의 손이 다가온 순간 펄쩍
뛰어올랐다. 수안니도 작은 덩치가 아니건만 황건역사 앞에서는 한 손아귀에 들어가는
강아지 정도로 보였다.
황건역사가 귀찮은 파리라도 떨어내듯 손을 젓자, 수안니의 몸이 가볍게 날아갔다.
가스라기는 자신을 향해 덮쳐오는 거대한 손바닥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모든 것이
지독한 악몽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뭐 하고 있어."
여진의 떨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가스라기가 고개를 돌리자 새파랗게 질린 입술을 벌벌
떨면서 황건역사를 바라보는 여진의 얼굴이 보였다.
"사, 살려달라고 빌든지, 도망을 치든지 하지 않고! 어서! 이 바보 같은 것아!"
하지만 하늘을 덮을 듯이 다가오는 황건역사의 손바닥을 피할 방법도, 이미 선고를 내린
천선에게 용서를 빌 방법도 없다는 것을 여진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여진의 얼굴에 떠오른 절망이 바로 그 증거였다.
"뭐 하고 있냐니까! 어서 도망쳐! 어서!"
여진이 꽥 고함을 질렀을 때, 바로 머리 위까지 내려와 있던 황건역사의 손이 우뚝 멈췄다.
"호오."
황건역사가 작은 탄성을 뱉었다. 그 눈은 황건역사의 목을 밟고 뛰어올라 머리띠를
물어뜯는 수안니를 향해 있었다. 일격에 날아간 줄 알았던 수안니가 실은 날아가는 힘을
이용해 황건역사의 머리 위까지 솟구쳤다가 역습을 가한 것이다.
"제법 일급 신수답게 노는군. 하지만‥‥‥."
황건역사는 반대편 손을 머리로 들어올렸고, 귀찮은 등에를 때려잡듯이 수안니를 내리쳤다.
수안니는 용케 그 손길을 피했고, 제 머리를 때린 황건역사의 큰 몸이 잠깐 비틀거렸다.
우레 같은 소리가 황산 전체에 울려 퍼지고, 천룡애 쪽에서는 놀란 신수 영수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소리가 들렸다. 황건역사가 몸의 중심을 잡기 위해 옮긴 걸음에 망후봉
아래 작은 숲 하나가 반쯤 부서졌다.
수안니는 간신히 손길을 피했지만 안전하지는 못했다. 스친 손바람만으로도 수안니의
불꽃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수안니는 머리끈의 끝자락을 물고 간신히 매달리며 버텼으나,
다시 누런 손이 다가오는 것을 어쩔 줄 모르고 지켜봐야 했다. 황건역사는 몹시도 행동이
느리기 때문에 수안니가 마음만 먹는다면 일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도망치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가스라기를 지키는 것이 목표였다. 수안니는
다시 한 번 천군을 저주했다.
가스라기는 머릿속이 텅 빈 채로 이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영이 천선과 나타난
이후 그녀는 마치 오래된 본능처럼 공포에 사로잡혔다. 지금 그녀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이름뿐이었다.
"하늘님‥‥‥."
그때, 황건역사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더욱 어두워진 후자암 근처의 숲 나무 그림자 속에서
지한이 은둔을 풀고 뛰쳐나왔다.
파라천선과 화영은 내색하지 않았을 뿐 진작부터 그곳에 지한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파라천선은 천계의 다른 이들보다 보천궁의 사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지한이
천군과는 불구대천의 관계라는 것도 그가 아는 사실 중의 하나였다. 그는 지한이 이 일을
방해할 리 없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계산이 틀려버린 것이다.
머리끈에 매달린 수안니 때문에 황건역사의 기동이 잠시 흐트러진 그 찰나, 지한은
그대로 서서 죽음을 맞이하려는 듯이 꼼짝하지 않던 가스라기를 낚아챘다. 여진이
반사적으로 가스라기의 옷깃을 잡았으나 지한은 간단히 그 손을 뿌리쳤고, 황건역사의
손 그늘 밖으로 재빨리 물러섰다. 나무를 붙든 채 넋을 잃고 있는 영소의 바로 옆자리였다.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느낀 파라천선이 호통을 쳤다.
"그 불나방에게는 신경 쓰지 말고 어서 저쪽부터 먼저 처리해!"
명령을 받은 황건역사가 기우뚱 몸의 방향을 틀고 그쪽으로 손을 뻗을 때, 지한은 보패인
화혈삼첨도 끝을 땅으로 내리고 크게 휘둘렀다. 검은 안개의 칼날이 땅을 쓸고 지나가며
지한과 가스라기, 그리고 영소까지 포함한 큰 원을 그렸다. 칼날이 지나간 자리에서 검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막 내리 덮치는 황건역사의 손바닥을 힐끔 올려다보며 지한은
씩 웃었다.
"천선과도 나누고 싶지 않은 사냥감이니, 혼자 데려가겠소."
우르릉. 천지를 울리는 소리와 함께 황건역사의 손이 지한과 가스라기, 영소가 서 있던
자리를 내리찍었다. 산 한 귀퉁이가 그대로 무너졌고,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여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 후, 진동이 사라지고 황건역사가 손을 들자 그 자리에는
짓눌린 시체 하나 보이지 않았다.
푸른 무지개가 길게 늘어나 그 자리 바로 위까지 다가갔다. 파라천선은 굳은 얼굴로 무너진
흙더미를 내려다보았다. 좀 전에 지한이 서 있던 자리는 완전히 무너져 흔적도 없었지만,
마치 그가 칼로 그은 상처가 깊숙이 남은 것처럼, 무너진 흙더미에서 검은 기운이 문문
피어올랐다. 파라천선은 날카로운 눈으로 화영을 돌아보며 추궁했다.
"이게 어찌된 일이지?"
화영은 기뻐하는 건지 화를 내는 건지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를 잠시 노려보던 파라천선이 다시 검은 기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영리하군, 진선 지한. 내가 쫓아갈 수 없는 명계로 달아나다니
말이야. 하지만 과연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너 또한 하늘의 기운을 받는 선인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