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화 (74/109)

제 19 장

::황건역사::

황건역사는 천선들만이 다루는 천계의 신병이다. 생명도 없고 혼도 없으되 

천지를 뒤집는 힘이 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천계에서 만든 것이 아니라 이계에서 온 거병이라,

선인들의 선술도 통하지 않는다고 한다.

한번 나타나면 선계도 능히 파괴할 위력이 있기에 자비로운 천선들은 결코 

그것을 쓰려 하지 않는다.

하계에 누런 모래바람이 불면, 황건역사가 출현한 징조다.

ㅡ환문공.『환수경』외편

19-1.

시혼과 여진이 아옹다옹하고 제자들이 그것을 뜯어말리는 후자암 위의 풍경을 화영은

화령신조의 눈을 통해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재미있게 살고 있군."

"궁주님."

등 뒤에서 그를 부르는 설화선고의 음성이 들려왔다. 화영은 화령신조와의 교신을 끊고

현실의 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설화선고를 돌아보았다. 상아가 명행에 들어 안주인이

없는 광명정에서 그 일을 대신하고 있는 그녀가 떨리는 음성으로 고했다.

"천제하강이 완료되었나이다."

간밤부터 드리워지기 시작한 하늘 사다리가 드디어 광명정에 다 내려왔다는 소리다.

천제하강의 징조가 보였을 때부터 광명정은 비상이 걸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화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자, 그럼 지극히 존귀하신 천선의 존안을 뵈러 가볼까."

화영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하무린이 명행에 들기 전 광명정의 상아각이라 불렸던 곳,

그러나 지금은 명행묘라 불리는 곳이다. 천도봉이나 연화봉의 상아각과 외양은 별다를

바가 없지만 그 안에는 이제 거하는 사람이 없다. 매일 세 명의 선녀가 교대로 번을

서며 혹 명행에 든 상아의 상태에 변화가 없는지 지켜볼 뿐이다.

간밤부터는 천제하강의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더 많은 선녀들이 명행묘에서 번을 섰다.

화영이 입구에 도착하자 그 선녀들 모두가 나와 있다가 그를 맞이했다. 광명정의 선녀들은

대체로 선계에서 살아온 세월이 길긴 하지만, 가장 연장인 설화선고조차 천제하강을 

직접 겪어보는 것은 처음이기에 모두들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들어가십시오."

배행한 설화선고가 말했다. 화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명행묘 안으로 한 걸음 들여놓다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혹시 내가 영영 밖으로 나오지 않거든 제석까지 기다릴 것 없이 천군이 돌아오는 대로

결판을 내라는 것이 내 유지였다고 전하게."

"궁주님! 그 무슨 망극한 말씀을‥‥‥."

"모를 일이니까 해두는 말이야. 천계에서 일없이 천선을 보냈을리가 있나. 상이 아니면

벌인데, 상 받을 일을 한 기억은 없으니까 말이지."

화영은 씩 웃고 나서 명행묘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입구에 남은 선녀들은 그를 삼킨

어두운 묘 안쪽을 가슴 졸이며 바라보았다.

햇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곳, 낮인데도 월광주가 뿜어내는 달빛으로 은은한 석실, 화영이

태세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의 몸에 손을 댔다가 명행에 들어버린 하무린상아가 누워

있는 그곳에 천선이 있었다.

하무린이 누운 돌 침상 한 귀퉁이에 걸터앉은 백의동자였다. 열 살 남짓해 보이는 작은

체구에, 몸에 걸친 백의는 특별히 휘황하지도 않고 어찌 보면 여염의 사내아이가 입는 

짧은 저고리와 무릎 바지에 불과했다. 신을 신지 않은 두 발은 바닥에 닿지 않았고, 

품에는 팔뚝만 한 진흙 인형 하나를 안고 있었다. 신기한 것은 동자의 얼굴이 누워 있는

하무린과 무척이나 닮았다는 사실이었다.

영원한 잠에 빠진 하무린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천선은, 화영이 석실 안으로 

들어서자 고개를 들었다. 화영은 천계 사신 앞에 멈춰서 공수했다.

"무량무극."

그는 천선의 복색을 한눈에 훑어보며 내심 이 방문의 의미를 추측해보았다. 관복을 입지

않았다면 상제의 정식 명령은 아니라는 소리다. 사사로운 방문이거나 혹은 공식적으로

처리할 수 없는 밀명일 것이다. 사사로이 하늘 사다리를 내릴 수 있는 천선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바 없으니 아무래도 후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천선이 품에 안고 있는

진흙 인형이 그 가능성을 더 높여주었다. 진흙 인형의 머리에 둘러진 누런 머리띠에

화영의 시선이 꽤나 오래 머물렀다.

결정적으로 화영의 시선을 끈 것은 천계 사신의 얼굴이었다. 누가 보아도 하무린과의

연관성을 부인할 수 없을 만큼 닮은 얼굴.

"무량무극."

하무린을 닮은 얼굴로 미소 지으며 답례한 뒤, 사신은 말했다. 

"내 누이동생은 언제쯤 자신의 일을 마칠 수 있는 건가?"

짐작대로 이번 사신은 하무린의 오라버니 되는 파라천선이었다. 파라천선은 상제 직속 

군대를 나누어 맡는 열두 명의 신장(神將)중 하나로, 양에 해당하는 육정신의 네 번째 

정미신장(丁未神將) 파이라의(波夷羅) 직책을 맡고 있는 천선이었다. 동자 같은 겉모습과 

달리 전쟁터에서는 누구보다도 용맹하여 상제의 총애가 각별하다고 들었다.

파라천선이 물어본바, '하무린이 일을 마치는 시기'라는 것은 곧 화영이 등천하는 시기를

의미했다. 화영은 선선히 대답했다.

"제석에는 어떻게든 결론이 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지근한 대답이군."

파라천선은 하무린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남매인 파라천선과 하무린 사이에는

일월률이 적용되지 않으므로 닿을 수 있다. 파라천선의 얼굴에는 미움도 불만도 드러나지

않았지만, 화영은 천선에게 호오(好惡)의 감정이 존재할 수 있다면 파라천선이 자신을

미워할 거라고 생각했다. 누이를 영원한 잠에 빠뜨린 자를 누가 곱게 볼 것인가.

물론 천선의 심중을 그가 다 헤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쩐 일이십니까?"

화영은 짧게 용건을 물었다. 파라천선의 대답도 짧았다.

"사람을 하나 데려가려고 왔네."

"누구를 말씀하십니까?"

"죄인을."

"어떤 죄인을 말씀하십니까?"

파라천선이 하무린에게서 시선을 떼고 화영을 바라보았다.

"천고의 죄인을 말하지."

입술 끝을 올려 싱긋 웃으며 천선이 덧붙였다.

"아니, 천고의 죄를 품은 씨앗이라고 말해야 하나?"

말이 이어질수록 점점 판단하기 어려워져 화영은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천선도 보천궁의

경내에 들어온 이상 궁주를 완전히 무시하고 움직일 수는 없을 테니 이야기를 안 해줄 리

없다. 묻느니 기다리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더 이상 묻지 않자 

이번에는 파라천선이 물었다.

"보천궁 안에 가스라기라는 이름의 인간이 있겠지?"

천선의 입에서 듣게 될 거라고는 생각 못한 이름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화영에게 무표정을

유지하고 대답을 거부하라 말했고, 그는 그렇게 했다.

"부정할 생각은 말게. 천계의 눈인 자네의 선몽을 통해 우리는 그 인간이 여기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까."

모르는 척해도 이미 소용없는 상황이었다. 젠장. 화영은 속으로 욕설을 뱉으며

공손히 물었다.

"분명 그런 이름의 선녀가 있습니다만, 어떤 죄인지 여쭈어도 될까요?"

"까마득한 과거에 저질러졌으나 잊혀진 죄, 그리고 앞으로 또다시 저질러질 죄지."

파라천선의 그다음 말이, 화영의 귀에 창처럼 꽂혔다.

"선인시해(仙人弑害)의 죄."

"하계에 나들이 갔던 건 재미있었어?"

가스라기가 묻자 백화의 표정이 갑자기 굳었다.

"백화야?"

"아, 응‥‥‥. 아니, 아냐."

가스라기는 기가 막혀서 중얼거렸다.

"백화가 아니네."

백화라고 불러도 '언니라고 하라니까!'하면서 난리를 피우지 않는 백화는 백화가 아니다.

괜히 가스라기의 눈길을 피하면서 대답하지 않으려는 것도 이상했다.

"왜 그래? 무슨 일‥‥‥."

"내버려둬."

운교가 참견했다.

"병이야."

가스라기는 운교를 돌아보고 물었다.

"아프면 의선각에 안 가고 왜 여기 있는 건데?"

운교가 차갑게 웃었다.

"의선의 시조라는 화타가 와도 고칠 수 없는 병이야. 꼭 앓고 지나가야 하는 병이기도 하고."

"무슨 병인데?"

"선녀병이지."

"선녀병?"

나머지는 백화한테 직접 듣든가 말든가 하라는 뜻인지 운교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백화가 한숨을 내쉬더니 불쑥 말했다.

"나, 사실은 입선하기 전에 마음에 담았던 남자가 있었어."

가스라기는 '헉'소리를 냈다. 백화한테 그런 게 다 있다니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그 남자는 다른 여자한테 마음을 줬거든. 그 남자가 혼례를 치르던 날 입선했는데,

이번에 고향집에 가는 김에 만나서 으스대려고 했어. 봐라, 네가 찬 여자는 이렇게 

선녀가 되었다. 약 좀 올려주려고."

그건 또 백화다웠다.

"그런데?"

백화가 후 한숨을 내쉬는데 얼핏 그 얼굴에 서른의 나이가 비치는 듯했다.

"그사이에 그 남자는 마누라한테 애를 넷이나 남겨놓고 저승에 갔더라. 그거 보고 나니까

기분이‥‥‥. 그냥 그랬어. 뭐랄까. 나는 이제 정말 하계인이 아니다 싶고. 부모님도

남동생도 지금은 살아있지만 언젠가는‥‥‥.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

"그게 선녀병이야."

운교가 다시 말했다.

"여기서만 지내면 몰라. 처음으로 통행부를 받아 외출해보면 그때서야 확실히 깨닫게 되지.

자기가 이제 정말 하계인이 아니라는 거. 그걸 깨닫고 나면 한동안 멍하지. 내가 왜 선계에

들어오려고 했던가. 애초에 왜 그랬던 걸까. 뭐가 목표였는지도 아스라하고‥‥‥.

뭐, 누구나 한 번은 겪는 병이야."

가스라기를 힐끔 보고 운교는 쓴웃음을 지었다.

"너는 안 그렇겠지만."

가스라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왜?"

"너는 꿈이 분명하니까. 그리고 그걸 이루었잖아."

가스라기는 운교의 눈에서 부러움을 보았다. 세상 누구도 그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운교 언니는? 언니도 백화처럼 그 병을 앓았어?"

운교는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난 통행부가 나와도 하계에는 가지 않아. 내 꿈도 이곳에 있으니까."

"무슨 꿈인데?"

운교의 꿈이 무엇인지 들은 기회는 없었다. 바로 그 순간 시혼이 갑자기 손뼉을 딱 치며

부르짖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후자암 아래에서 회포를 푸는 동안 나도 어려운 말 할 줄 아는 선계인이라는 티를

팍팍 내며 두 손님을 괴롭히던 여진선고가 뱀눈을 하고 그를 노려보았다.

"뭐가 말입니까?"

시혼은 벌떡 일어나 바위 아래 세 선녀, 정확히는 가스라기를 가리키며 외쳤다.

"귓도리골! 귓도리골의 요괴 두령! 그렇지? 너, 나 기억 안 나냐?"

가스라기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도 벌떡 일어나 시혼을 가리키며 외쳤다.

"가짜 도사!"

"그래, 가짜 벽혈자! 생각났지? 너 그때 이름이 분명히‥‥‥. 맞다! 가스라기!"

시혼의 그 외침에 가장 격렬한 반응을 보인 것은 뜻밖의 사람이었다.

"뭐?"

영소가 벌떡 일어섰다. 잡아먹을 듯이 무서운 눈으로 시혼을 노려보더니 물었다.

"지금 뭐라고 했지?"

시혼은 멍청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라, 이거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가스라기‥‥‥ 라고."

영소의 시선이 홱 가스라기 쪽으로 돌아갔다. 그는 대뜸 후자암에서 뛰어내리더니

가스라기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낌새가 이상한 것을 눈치 챈 운교가 가스라기 앞을

막아섰다. 그러나 영소는 성난 황소처럼 그녀를 밀치고 가스라기 앞으로 나아갔다.

발끈한 운교가 울지영소를 향해 손을 뻗었다.

"운교야!"

여진이 호통을 쳐서 운교를 제지했다. 아무리 무례하더라도 상대는 하계인이고 궁주의

손님이다. 자칫 손을 잘못 쓰면 연약한 하계 남자는 크게 다칠 수 있다. 아까는 제자들이

스승을 말렸고 이번엔 스승이 제자를 말린 셈이다.

영소는 가스라기의 코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부릅뜬 눈으로 가스라기를 노려보았다.

가스라기는 물러서지도 않고 그를 마주보았다.

"가스라기?"

그의 입에서 나온 '가스라기'라는 소리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다른 것을 부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친숙하면서도 동시에 거부감이 들었다. 그래서 가스라기는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정말‥‥‥ 가스라기란 말인가."

가스라기의 눈, 코, 입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던 영소가 혼잣말 비슷하게 중얼거린 뒤 다시

물었다.

"귓도리골에 살던 가스라기가 맞소?"

그제야 가스라기는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왜 이상하게 느껴지는지 깨달았다.

그건 선계의 사람들이 그녀를 부르는 '가스라기'가 아니라, 귓도리골 사람들이 그녀를

칭하던 '가스라기'에 가까웠다. 사람을 부르는 이름이 아니라 토끼, 뱀, 살쾡이 같은

짐승 그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가스라기는 그제야 눈을 찡그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영소가 그녀를 쫓아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때, 시혼이 헉 하고 놀란 소리를 냈다.

"저게 뭐지?"

시혼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향해 모두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돌아갔다. 광명정

쪽에서 무엇인가가 망후봉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진선들의 선흔과 비슷한데 그보다 좀

더 크고 뚜렷했다. 광명정을 한끝으로 삼고 망후봉을 또 다른 끝으로 삼는 무지개처럼

포물선을 그리며 곧장 다가오는데, 그 색은 무지개와 같이 현란하지 않고 옅고 짙은 푸른

띠를 몇 개나 이어 붙인 것 같았다.

푸른 무지개가 그들의 머리 위로 가까이 다가오자, 그 끝에 서 있는 화영의 신형이 보였다.

여진과 운교는 황급히 대례를 올렸다. 뒤늦게나마 영소와 시혼도 보천궁의 궁주에 대한

예를 취했다. 그러나 가스라기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화영 옆에 서 있는 백의동자에게 못 박혀 있었다. 푸른 무지개가 다가오는

것을 볼 때부터 이상하게 심장의 고동이 빨라졌는데, 백의동자와 눈이 마주치자 걷잡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백의동자 역시 가스라기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은

마치 가스라기를 뼛속까지 꿰뚫어보는 것 같았다.

예를 받고도 화영이 입을 열지 않자, 여진과 운교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고 궁주의 안색을

살폈다. 그리고 그들도 화영의 옆에 서 있는 백의동자를 주시했다. 반노환동 선인인가

싶기도 했지만, 최소한 보천궁 내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선계에서 온 손님일 것 같은데, 동행한 궁주의 안색이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화영은 가스라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짧게 혀를 차더니 백의동자, 파라천선을

향해 말했다.

"증거를 보여주시지요."

파라천선이 푸른 무지개의 끄트머리를 향해 한 걸음 나섰다. 거기 멈춰 서서 천천히 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피 한 방울, 먼지 한 톨 묻어본 적이 없을 것 같은 흰 손이었다.

"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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