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
천군의 출행은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지난번 남화궁행 때에 지한의 암습을 받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깥은 물론 각내의 선녀들에게도 일절 비밀로 했다. 어차피 며칠이
지나면 진선의 부재가 알려질 테지만, 가능한 한 그전에 남화궁에 진입하면 큰 탈은
없을 것이다.
배웅을 나온 것은 그래서 수안니와 수하린, 그리고 가스라기뿐이었다. 그는 이번에 수안니를
데려가지 않기로 했다. 광둔술로 남화궁 입구 근처까지 가는 방법도 생각해봤지만,
남화궁은 선계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인 만큼 그 입구를 가리는 기문둔갑진의 수준이
상당한 데다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광둔술로 가까이 접근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천군이 수안니를 남기고 가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수하린과 가스라기에게
등을 돌리고 그는 수안니를 한쪽으로 불러 당부했다.
"눈을 떼지 말고 지켜."
수안니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물었다.
"둘 중 누구? 누가 더 너한테 귀중하냐?"
천군이 인상을 썼다.
"너까지 그걸 묻는 거냐?"
수안니는 콧방귀를 뀌었다.
"흥, 나는 여기서 계집이나 지키라고 내팽개치고, 그놈의 토끼는 데려간다 이거냐?"
"가는 길에 신수록에 올리려는 거다."
"쳇, 마음대로 해. 뭐 네놈하고 같이 안 가도 되니까 난 편하다."
"수안니."
"왜?"
"언젠가 네가 내게 제안한 것, 기억하고 있겠지?"
"이제 와서 뭘 새삼."
"만약 내가 없는 사이 무슨 문제가 생겼을 때 네가 저 아이를 잘 지켜준다면‥‥‥
그 제안을 고려해보겠다."
수안니가 오히려 당황했다.
"어이, 왜 그래? 네놈답지 않게."
"예감이."
천군은 심장이 있는 가슴께를 누르면서 나직이 말했다.
"좋지 않아서."
수안니는 그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계집에게 너무 힘을 쏟으니 정기가 쇠한 거겠지. 별 시답잖은 소리를 다 듣겠구먼.
아무튼 지켜줄 테니까 걱정 집어치우고 가."
"믿겠다."
"믿든지 말든지. 난 내 할 일은 한다."
천군은 수안니의 등덜미를 한 번 두드려주고 수하린 쪽으로 돌아섰다.
"다녀오리다. 돌아왔을 때는 좋은 소식을 들려주시오. 무량무극."
"좋은 소식이 무엇인지도 잊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다녀오십시오. 무량무극."
수하린과 그가 짧은 인사를 나누는 것을 가스라기는 조마조마 보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무슨 말로 보내야 하나. 하늘님이 그녀를 향해 다가올 때까지도 보내줄 만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입속에서 맴도는 것은 그저 가지 마, 빨리 와, 라는 말뿐이었다.
가스라기가 아무 말도 못하고 눈만 깜빡거리자, 천군도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는 잠자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리와 뺨, 귀를 오가는 손길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새벽부터 시작된 불길한 예감이 그의 심장 안쪽에서 점점 크게 자라났다. 이렇게 그를
똑바로 바라보는 간절한 눈을, 이제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중추 이후에 처음으로 오랫동안 떨어져 있게 되었기 때문일거다. 하루도 눈 밖으로
떼어놓지 않은 얼굴을 앞으로 한동안 못 보게 되기 때문일 거다. 단지 그뿐일 거다.
애써 마음을 다스려봤지만 불길한 예감은 점점 커졌다. 차라리 뚜렷하게 천수가 보인다면
남화궁에 가는 것을 포기하기라도 할 텐데 아무런 징조도 없었다. 단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불안한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잡고 있을 수는 없었다. 천군은 천천히 그녀의 머리칼과 뺨에서 손을
뗐다. 손바닥이 떨어지고, 손가락 사이로 가스라기의 머리카락이 흘러 빠져나갔다.
마지막 한 가닥마저 흘러내리자, 그와 그녀 사이에는 더 이상 닿은 곳이 없었다.
한마디라도 입을 열면 울음이 나올 것 같아서 가스라기는 말도 못하고 입을 꾹 다문 채
씩씩거리기만 했다. 말을 시켰다가 가스라기가 울면 떠나는 발걸음이 더 무거울 것
같아서 천군은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인사했다.
"다녀오마."
돌아서서 비검을 허공에 날리고, 빤히 자신을 올려다보는 한입을 한 손으로 안아 들었다.
가볍게 비검 위로 내려서서 막 출발하려는데 가스라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늘님."
돌아보니 입술을 바들바들 떨다가 수천마디 하고 싶은 말 중에 딱 하나를 골라서 내뱉었다.
"무량‥‥‥."
다 끝도 못 내고 코를 훌쩍였다. 그러고는 우는 모습 보이지 않으려고 억지로 웃느라
얼굴이 있는 대로 구겨졌다. 꽃 같은 얼굴도, 달 같은 자태도 아닌데, 그 모습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치밀자 천군은 하마터면 비검에서 뛰어내릴
뻔했다. 이를 지그시 물고 천군은 가스라기가 맺지 못한 마지막 말을 맺어주었다.
"무극."
선계의 모든 사람이 쓰지만 두 사람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절대로 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는 말을 마지막으로 천군의 비검은 날아올랐다.
그것이 그가 아는 가스라기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가스라기下』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