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
한입을 데리고 놀던 선녀를 찾아 받아 들고, 가스라기는 긴 주랑을 지나 하늘님의 방으로
타박타박 걸어갔다. 가스라기가 이 방에서 지내게 된 이후로 밤에 번을 서는 선녀는
없었다. 형식적으로는 가스라기가 번을 서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어두운 방에 들어서는 가스라기의 얼굴에는 상심이 가득했다. 하늘님은 상아님하고
이야기하려고 나를 내쫓았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둘째일 뿐이다. 아니, 사실은
둘째조차 못 될지도 모른다. 선인들은 본능적으로 하계 여자의 몸을 좋아한다고 했다.
선녀들 중에서도 아직 하계의 물을 덜 벗은 여자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나도 단지
그런 것일 뿐일지도 모른다. 내딛는 걸음, 내뱉는 한숨마다 그런 생각들이 무겁게 깔렸다.
품에 안긴 한입이 귀를 쫑긋거리면서 그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한입을 보면서
가스라기는 중얼거렸다.
"넌 좋겠다. 아무 고민도 없어서."
내전의 가장 깊은 방에 도착하자, 몹시도 크고 휑해 보이는 사주침상이 눈에 들어왔다.
하늘님과 둘이 누워 있을 때는 저렇게 넓은 줄 몰랐는데. 오늘은‥‥‥ 어쩌면 상아님과
이야기가 아주 길어질지도 모른다. 아니, 안 올지도 모른다‥‥‥. 나처럼 안고 입
맞출 수는 없겠지만 상아님과 하늘님 사이에만 통하는 긴긴 이야기를 할지도 모른다‥‥‥.
하늘님한테는 그게 더 소중할지도 모른다‥‥‥.
가스라기는 한입을 안고 속삭였다.
"오늘은 나랑 둘이 자야겠다."
그러고 나서 침상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데, 주렴 앞 어두운 곳에서 두 팔이 다가와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처음에는 화들짝 놀랐지만, 익숙한 체온과 살 냄새에
가스라기는 금세 그가 하늘님임을 알아차렸다. 넓은 가슴에 가스라기의 온몸이 푹 파묻히도
록 끌어안고서, 천군은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토기 하나 찾는 데 꽤나 시간이 걸렸구나."
숨결이 닿는 것만으로도 몸이 녹을 듯이 기뻐서 대답하는 가스라기의 목소리는
사뭇 떨렸다.
"선녀님들이 데리고 있어서‥‥‥물어보고 다니느라고‥‥‥."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난 둘째일 뿐이다. 아니, 둘째도 못 될지 모른다.
가스라기는 목을 움츠렸다. 입을 실룩거리면서 뾰로통한 음성으로 물었다.
"상아님은?"
가스라기의 귀에 코와 입을 대고 그녀의 살 냄새를 맡던 천군이 그 목소리에 담긴 심통을
못 알아차릴 리가 없다. 그는 살짝 얼굴을 떼고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여 가스라기의
옆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가스라기는 짐짓 한입을 꽉 끌어안으면서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너무 세게 끌어안은 탓인지 한입이 끼익 숨 막히는 소리를 냈다. 천군은
가스라기가 고개를 돌린 쪽으로 다시 머리를 기울이고 대답했다.
"상아각으로 돌아갔지."
이번에는 뺨에 입술이 닿을 만큼 가까이 왔기 때문에 가스라기는 흠칫 놀랐다. 하늘님의
눈과 코와 입술을 마주 대하면 마음이 흔들릴 게 뻔하다. 그녀는 다시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입이 미친 듯이 바동거렸다. 천군은 비어져 나오려는 웃음을 꽉 깨물며 말했다.
"놓아줘라. 그러다 잡겠다."
"싫어. 데려오라고 했잖아."
"데려왔으니까 이제 놓아줘."
"싫어. 데리고 잘 거야."
"화낼 거다."
"왜? 데려오라고 해서 데려왔는데. 그리고‥‥‥."
더 말하기 전에 천군은 가스라기를 홱 돌려세웠다. 꼼짝도 못하게 허리를 꽉 조여 안고
비명도 못 지를 만큼 숨 막히게 입을 맞췄다. 가스라기는 입을 앙다물고 도리질을 했지만
다른 한 손이 목까지 둘러 안아버리니 이내 도리질도 할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힘으로만 불리한 게 아니었다. 아무리 화가 나도 하늘님의 품에 안기면 좋은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금세 무릎이 풀리고 몸에 열이 올랐다. 정신이 흐물흐물해지면서 단단히 다물린
입술의 빗장도 같이 헐거워졌다.
달디 단 타액과 뜨거운 혀가 막 얽히려는 순간, 갑자기 천군이 그녀를 슬쩍 밀어냈다.
그와 동시에 가슴과 아랫배가 화끈해졌다. 그리고 방금까지 두 사람의 몸이 붙어 있던
곳에서 빨간 불길이 확 치솟아 올랐다. 가스라기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불꽃 사이에
작은 얼음 방패를 만들어 막았다. 두 사람의 몸 사이에 찌부러져 있던 한입이 온몸의
털을 빨갛게 곤두세운 채로 후다닥 뛰어 방 저편으로 달아났다. 가스라기는 얼이 빠져서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천군이 그 옆에 쭈그려 앉으며 그녀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
봤다.
"봐라. 화낸다고 했지?"
"한입이 이야기였어?"
"그럼."
"하늘님이 화내는 게 아니라?"
"하는 네가 낸 것 같은데?"
가스라기는 그제야 자신이 열심히 화를 내고 있던 중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얼른 다시
돌아앉으려고 했는데 이번에도 또 선수를 빼앗겨버렸다. 천군이 그녀를 슬쩍 밀어 몸의
중심을 흩어 버린 것이다. 가스라기는 뒤로 발랑 넘어져버렸고, 천군이 그 위를
덮쳐눌렀다. 밀어낸다 어쩐다 무익한 노력을 하다가 가스라기는 에잇 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 두 손을 잡아 끌어내리는 것쯤은 문제도 아니었지만, 천군은 그런
가스라기를 보는 것이 재미있어서 일단 하는 대로 내버려뒀다. 하지만 목소리만은 짐짓
무겁게 냈다.
"얼굴 좀 보자."
"싫어."
"왜?"
"아직 화 안 풀렸어."
"왜 났는데?"
막상 왜 화가 난 건지 설명하려니 몹시도 구차했다.
"몰라."
하늘님의 목소리가 잠깐 들리지 않았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하늘님의 표정을
볼 수 없던 가스라기는 조금 불안해졌다. 이러다가 하늘님이 화를 내고 가버리면 어쩌나.
손가락 틈을 조금 벌려 엿보고도 싶지만 얼굴이 너무 가까워서 그랬다가는 들킬 것
같았다. 가스라기가 노심초사하고 있는 동안, 그 손 하나 위에서 천군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꽉 눌러 참고 있었다. 간신히 호흡을 정리한 뒤, 천군은 다시 물었다.
"어떻게 해주면 손을 내릴까?"
가스라기는 분주히 머리를 굴렸다.
"내가 묻는 거 대답해주면."
"물어봐."
"상아님하고 나하고 누가 더 좋아?"
천군은 말문이 막혔다. 설마 하니 이런 걸 물어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철없는
어린아이들이나 할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여자로서 누굴 더 좋아하느냐는
질문이라면 답은 고민할 필요도 없이 뻔했다. 상아란 진선에게 애초부터 여자가 아니니까.
하지만 가스라기가 묻는 건 그 의미의 이상인 것 같았다. 아니, 분명히 그렇다. 그가 그런
것처럼 가스라기 역시 그의 모든 것을 갖고 싶을 것이다. 이미 가진 것은 물론이고,
소유할 수 없는 부문까지도 욕심을 낼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그는 좀 더 잘 참을 수
있고, 가스라기는 참을 수 없다는 것뿐이다.
지금은 저 질문에 수하린이 들어가 있지만 좀 더 시간이 지나면 다른 것들이 수하린을
대신할지도 모른다. 다른 존재, 다른 일, 선인으로서의 삶, 의무‥‥‥. 무의미한
질문이라는 것을 알더라도 그것은 반복될 것이다. 어느 날인가는 단지 투정 어린 질문으로
그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에게 선택을 요구할지도 모른다. 그때, 무어라고 대답해야
할까? 천군이 한참이나 대답하지 않자, 가스라기의 음성이 작아졌다.
"상아님이 더 좋아? 더 귀중해?"
얼굴을 가린 손 위에, 하늘님의 입술이 닿았다. 손을 치우면 가스라기의 입술을 닿을
자리였다.
"네게 순서를 매겨본 적이 없어."
한마디 속삭일 때마다 하늘님의 입술이 움직여 손등을 간질였다. 그 느낌만으로도
가스라기는 가슴이 시큰거렸지만 '너'라는 대답을 못 들은 것은 내심 분했다.
"그럼‥‥‥이것도 대답해봐. 나 얼마나 좋아?"
천군은 이번 질문도 어렵다고 생각했다. 잴 수 없는 것을 재서 말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수하린이 말한 대로 드러내지 않으면 불안해하고 확인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것이
여자의 마음인 모양이었다. 그는 잠깐 눈을 감고 생각하다가 가스라기가 채 손으로 덮지
못한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대고 누르며 말했다.
"무량무극."
가스라기는 콧등을 찡그렸다. 얼마나 좋으냐고 물었는데 왜 엉뚱하게 도호로 대답을
한단 말인가.
"얼마나 좋으냐니까 왜 대답은 안 하고‥‥‥."
"했다."
"언제."
"방금."
"그건‥‥‥."
"여진선고에게 도호의 의미를 배웠겠지?"
"들었지만‥‥‥그건 왜?"
천존의 자비로움이 도인무량, 대도의 법력이 광대무량, 제천의 신선이 무량무수하니,
삼라의 만상에 끝이 없다. 귀가 닳도록 들은 말이지만 그 뜻에 깊게 신경 써본 일은
없었다. 묻기에 다시 돌이켜 보고 나서야 가스라기는 뒤늦게 깨달았다.
"정말?"
"그만 묻고 이제 그만 손 내려."
대답하는 하늘님의 목소리가 좀 이상해서 가스라기는 견디가 못해 손가락 사이를 살짝
벌리고 내다봤다. 방은 어둡고 달빛은 흐렸지만, 하늘님의 얼굴이 다른 때보다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몹시 민망한 짓을 해버린 것처럼 콧등을 찡그린 채 자기 이마를 손으로
문지르고 있어서, 가스라기가 내다보는 것도 눈치를 못 채는 것 같았다. 이제 그만
용서해줄까 싶었지만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보기로 했다.
"하나만 더."
천군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묻는 질문마다 대답하기 어려운 것만 골라 묻는데 세 번째는
또 얼마나 곤란한 것일까.
"해."
"나‥‥‥나 아니라도‥‥‥하계 여자면‥‥‥아니면 하계에서 올라온 지 얼마
안 되면, 다 좋은 거야? 응?"
놀랍게도 이건 가장 쉬운 질문이었다. 하계 여자의 몸이 선인을 끌어당기는 것은 맞지만,
어느 하계 여자인들 너처럼 지극할 수 있을까. 천군은 제꺽 대답했다.
"아니."
너무 쉬운 질문이다 싶더니 역시 함정이 하나 있었다.
"그, 그럼, 그냥 꼭 안고만 잘 수 있어? 내 몸 때문이 아니라면, 그럴 수 있어?"
이쯤 되면 웃지 않을 수가 없다. 여자는 언제나 남자를 시험하려 한다고 들었는데, 설마
가스라기에게 이런 시험을 당할 줄이야.
"그래. 네가 원한다면 그러자. 오랫동안 못 보게 될 테니 좀 섭섭하지만."
"응?"
가스라기가 놀라서 손을 내렸다.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무슨 소리야?"
"내일 남화궁에 가야 한다."
"난? 같이 못 가?"
가스라기의 얼굴에 두려운 빛이 떠오르는 것을 보니 천군은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얼마나 오래 걸려?"
"정확히 말할 수가 없어."
"왜?"
"남화궁은 준천계라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 그래서 출입이 어렵고‥‥‥.
그곳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보천궁의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지는 나도 장담할 수가 없어."
"그럼‥‥‥그럼 백 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거야?"
"그렇지는 않아. 제석 전까지는 돌아와야 하니까."
한 해의 마지막 날, 제석까지는 석 달이나 남았다. 가스라기는 울상이 되었다.
"왜 그걸 이제야 말해!"
말할 틈도 없이 계속 화내고 있었던 건 새카맣게 잊은 모양이었다. 꼭 가야 하는 거냐,
정말 데려가면 안 되는 거냐 한참을 조르며 물어댔다. 가스라기가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만, 걱정하지 않을 정도로만 대답해주면서 천군은 그녀의 얼굴을 하나하나 눈에
담아 가기 위해 꼼꼼히 뜯어보았다. 졸라대고 투정 부리던 가스라기가 마침내 제풀에
지쳐서 울먹거리다가 그의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목소리에 풀이 팍 죽었다.
"진작 말하지. 그럼 화 안 냈을 텐데."
"괜찮아. 귀여웠다."
그는 솔직하게 말한 거지만, 가스라기는 코를 찡그리며 그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아까처럼
심통이 난 것 같지는 않았다. 눈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분해."
한참 그 눈으로 바라보다가 한마디 그렇게 뱉더니 입술을 가져왔다. 그는 웃으면서
그 입술을 받아 머금었다. 가스라기는 그의 손을 끌어 제 저고리 섶 사이로 밀어 넣었다.
"안고만 자라더니?"
"내가 원하면."
가쁜 숨을 내뿜으면서, 가스라기가 그의 몸 위로 올라왔다.
"안 원해. 그러니까‥‥‥."
앞으로 몇 달이나 물도 식량도 없이 긴 사막을 지나가야 하는 여행자들처럼, 둘은 서로를
허겁지겁 먹고 마셔댔다. 길어지기 시작한 가을밤이 푸르게 동터올 때까지 먹고 마셔도,
내일이면 또 그 허기와 갈증은 되살아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