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싫어"
가스라기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상대는 그녀를 구석으로 몰며 점점 다가왔다.
"잠깐이면 된다."
하늘님이 광명정에 가기 전에 한 말과 똑같은 소리였다. 하지만 가스라기가 듣기에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잠깐만 네 몸을 좀 보자는 거야."
달래는 말투였지만, 그럴수록 가스라기는 더욱 움츠러들었다. 누구의 손이라도
이 몸에 닿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늘님은 이 방에서 절대 나가지 말라고 했다.
그 말이 아니라도 가스라기는 여기서 한 발자국도 나가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과 마주치고 싶지도 않았다. 보름 동안 그녀는 하늘님만 보고, 하늘님하고만
이야기했다. 그건 완벽한 낙원이었다. 하늘님이 없더라도 이 방 안에서 이 침상 위에
홀로 앉아 지난 보름 동안의 일만 생각하면 여전히 가스라기는 낙원에 있을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찾아온 이 불청객이 그녀의 낙원을 헤집고 있는 것이다.
수궁부 하정선고의 얼음 조각 같은 얼굴이 찡그려졌다. 보름 동안 수궁부는 이
가스라기 때문에 난리도 아니었다. 천군이 음계를 열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하정선고는 들고 있던 찻잔을 깨뜨렸다. 수궁부의 선녀들은 가스라기가 분명히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안이한 일처리로 생목숨을 죽게 만들었다는 가책이 그들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고 열흘이 지나도 천도각에서 비보는 들려오지
않았다. 이쯤 되면 가짜 수궁계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수궁부 선녀들은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것 같은 충격에 휩싸였다. 천도봉을 중심으로 한 천기의 변화와 더불어,
천군의 품에 안긴 가배 장원 선녀에 대한 소문은 이미 온 황산에 널리 퍼졌다. 가배
장원을 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주목을 받았던 가스라기가 지금은 거의 모든 선인
선녀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름이 된 것이다.
수궁부 선녀들은 전에 없이 당황해서 이런 전례가 있었는지 수궁부의 기록은 물론
선계의 서고까지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딱히 이렇다 할 예는 발견되지 않았다.
우선 선계인들은 하계인들 보다 오히려 기록에 의존하지 않는 버릇이 있다. 하계인들보다
훨씬 수명이 길기 때문에 다음 세대를 위해 기록을 남긴다는 행위에 그렇게까지
필사적이지 않다. 변덕이라도 난 것처럼 갑자기 붓을 들고 이것저것 적어 내려가는
선인도 간혹 있긴 하지만 그건 그야말로 별난 취미에 해당했다. 기록에만 의존할 수
ㅇ벗어 배분이 높은 선녀들과 이런 일에 밝은 선인들을 찾아 은밀히 묻기도 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거기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이라고는 '가스라기라는 아이가 체질이
특이하여 선총을 잘 받아들이는 모양이다'라는 것뿐이었다.
수궁부 선녀들, 특히 하정선고는 그 결론에 절대 만족할 수가 없었고, 수궁례를 하던
그날은 시간이 없어 자세히 조사해보지 못했던 가스라기의 몸을 다시 한 번 제대로
보아야만 한다는 결의에 불탔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그럴 틈이 없었다. 천군이
가스라기의 곁을 한시도 비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제든 진선께서 그 곁을 비우면
바로 비합전서를 날려달라고 친분 있는 선고에게 신신당부를 한 끝에, 지금에서야
그 기회를 맞이했다. 그런데 이 맹랑한 선녀 아이는 제 몸에 손끝 하나 대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하정선고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인간의 감정을 가스라기로 인해
되살려냈다. 조급함과 답답함이었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무슨 아이가 이렇게 방자하고 무례한 거냐! 내가 언제 너를 핍박하기라도 하겠다더냐!
잠깐 진맥만 하겠다는데 어째서 말을 안 들어? 해를 끼치려는 게 아니라 네게 이상이라도
생기지 않았는지 알아보겠다는데도!"
살살 달래겠다는 애초의 마음은 휙 집어던져버리고, 하정선고는 크게 꾸짖은 뒤
성큼성큼 가스라기를 향해 다가갔다. 하정선고의 손이 덮쳐오는 순간, 벽에 등을 대고
몸을 웅크리고 있던 가스라기가 성난 살쾡이처럼 달려들었다. 처음엔 단지 손을
뿌리치고 달아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궁지에 몰리자 그녀는 거칠어졌다. 뿌리치는
것으로 모자라 하정선고의 손등을 할퀴어버렸다. 뜻밖에도 손등을 할퀴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저고리 소매가 우두둑 뜯어지고, 손등에서 팔꿈치까지 손톱자국이
그어졌다. 하정선고도 가스라기도 순간 놀라서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하정선고를
천군의 침실까지 안내해온 선녀나, 수궁부에서 조사를 나왔다니 호기심에 들여다보던
선녀들도 말을 잊었다.
"너, 너‥‥‥."
살짝 벗겨진 살갗에 은은한 분홍색 핏기가 비쳤다. 하정선고의 입술이 하얗게 떨렸다.
가스라기의 얼굴은 그보다 더 창백해졌다. 구경하던 다른 선녀들도 새파랗게 질려
어쩔 줄 몰랐다.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하정선고가 입술을 떨며 더듬더듬 말했다. 이건 비정상이다. 물론, 선총을 받고
살아만 난다면 선녀든 하계 여자든 그 몸의 능력이 전보다 월등히 강해진다. 보름을
진선의 품안에 있었던 아이다. 완력도 보통은 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가스라기가 와락 덤벼들 때 하정선고가 미처 피하지
못한 것은 그 눈에서 파랗게 일어나는 지독한 적개심과 살기 같은 것에 압도되었기
때문이다. 그건 선녀는 물론이고 인간에게서도 볼 수 없는 살기였다. 게다가 한낱
선녀 아이의 손톱에 선고의 살갗이 상했다. 진선의 천의 보다는 격이 낮지만 그래도
도검불침인 선고의 천잠의를 맨손으로 뜯어내기도 했다. 거기에 수궁도의 상식을 깬
보름의 선총. 불길한 상상으로 하정선고의 머리가 터질 지경이 되었을 때,
선녀들 사이를 헤치고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섰다.
"무슨 일인가요?"
가스라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수하린이었던 것이다. 가스라기가 지금 세상에서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 있다면 바로 수하린이었다. 한동안 두문불출하던 수하린이
모처럼 천도각에 나온 것을 보고 선녀들이 분분히 인사를 올렸다. 뜯어진 소매를 한
팔로 잡고 황급히 상아에게 예를 표한 하정선고가 말했다.
"상아님, 이 아이를 수궁부에서 데려가도록 허락해주십시오."
가스라기와 하정선고를 번갈아 쳐다본 수하린이 왜냐고 물었다.
"납득이 가지 않는 점들이 있습니다. 제대로 조사를 해보아야만 합니다. 상아님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 아이는 수궁도의 상식을 뒤집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진선 출타하신 틈에 허락도 없이 아이를 내보낼 수는 없어요."
하정선고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말했다.
"상아님, 이 아이‥‥‥ 이 아이는 진선 곁에 두지 않으시는 편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정선고는 명확하게 그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었다. 단지 불길한 몇 가지 징조와
막연한 예감뿐이었다. 하정선고가 두서없는 말을 늘어놓는 동안 수하린은 구석에
웅크리고 선 가스라기를 바라보았다. 마치 궁지에 몰린 짐승이나 추궁당하는 죄인
같은 모습이었다. 수하린은 긴말 않고 손을 내저었다.
"됐습니다. 어쨌든 지금 당장 데려가시겠다는 것은 예가 아니에요. 진선께서 돌아오시면
말씀드려보겠어요. 일단은 물러들 가세요."
하정선고는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보다 못한 천도각의 선녀 하나가 그녀를
부축하는 척하며 끌고 나갔다. 구경 왔던 다른 선녀들도 함께 총총 물러갔다. 이내
그 방에는 가스라기와 수하린 단둘만이 남았다. 수하린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가스라기를 향해 다가왔다.
"놀랐겠구나."
가스라기는 움찔거리면 뒤로 물러섰다. 못 보던 사이에 수하린의 얼굴이 여위어 있었다.
가스라기는 명치가 따끔거렸다.
"나쁜 생각으로 그러지는 않았을 거야. 내가 좀 더 일찍 왔어야 하는데‥‥‥."
수하린이 변함없이 다정한 음성으로 말을 걸어오자, 명치가 점점 더 아팠다. 처음에는
수하린의 얼굴을 차마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만큼 미안했다. 왜 미안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미안했다. 하지만 그 미안함이 자꾸 커지자 마음이 답답해졌다. 나는 그저
내가 바라던 것을, 내가 원하던 것을 얻은 것뿐인데 왜 미안해해야 하는 걸까.
명치에 탁하고 무거운 오물 덩어리가 얹힌 것처럼 기분이 나빠졌다. 이 모든 불쾌한
기분의 원인이 상냥하게 말하며 손을 뻗어오는 수하린에게 있는 것 같았다.
가스라기는 다가오는 손을 할퀴고 싶었다. 물어뜯고 밀쳐버리고 싶었다. 하늘님과
단둘만이 있던 이 방에서 수하린을 내쫓고 싶었다. 지금껏 누구한테도 느껴본 적
없는 격렬한 미움이 가스라기의 마음속에서 기름 먹은 불덩이처럼 커지고 있었다.
가스라기 자신도 당혹스러울 정도로 격렬한 감정이었다.
사람의 마음에 예민한 수하린이 그걸 눈치 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수하린은 내밀던
손길을 멈췄다. 가스라기의 눈에 도사린 미움과 경계의 빛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수하린은 갑자기 말했다.
"나를 미워하는구나."
처음에는 움찔했으나, 가스라기는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자신도 정확히 모르는 이유를 설명할 방법은 없었다. 가스라기는 수하린을 노려보다가
한 발 앞으로 나갔다.
"안 물어봐도 알 수 있잖아요."
여태껏 눈빛으로 거부하고 있던 수하린의 손을 가스라기가 덥석 잡았다. 다음 순간,
수하린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들어오는 심어의 파도에 휩쓸렸다.
ㅡ상아님도, 나를, 미워하잖아. 나는, 상아님도 아닌데, 하늘님 옆에, 있으니까.
그러니까, 하, 하지만 내 거야. 하늘님은, 내, 내 거야. 아무도 못 빼앗아가. 다, 다
싫어. 상아님, 상아님도 싫어. 내가 미우면서, 그러면서 친절한 척, 그러잖아.
속이려고, 그러는 거지. 다들, 똑같아. 하늘님이, 나, 날 얼마나, 좋아하는데, 지금까지,
내 옆에, 못 오게 하고. 다, 다들 그랬어. 가까이 가지 말라고. 다 속인 거야.
여진선고님도, 백화도, 운교 언니도, 상아님도, 다, 내가 하늘님 옆에 있는 걸 싫어했어.
하지만 우린 안 떨어질 거야. 같이 있을 거야. 우리 둘만 있으면 돼. 다 필요 없어.
우리 둘만. 다른 사람은, 다 필요 없어. 다 죽어버려. 다 없어져버려!
무수한 작은 칼날을 목구멍으로 삼킨 듯한 느낌이었다. 수하린은 저도 모르게 짤막한
비명을 지르며 가스라기의 손을 뿌리쳤다. 이렇게 짙고 뚜렷한 미움을 읽어본 경험이
그녀에게는 없었다. 수하린이 뿌리친 손을 보며, 가스라기는 입술을 실룩거렸다.
웃는 것도 같고, 우는 것도 같았다.
"그것 봐. 상아님도‥‥‥ 내가 밉죠?"
한동안 가쁜 숨을 내쉬던 수하린이 불현듯 말했다.
"바람 좀 쐬자."
그러고는 냅다 뿌리쳤던 손을 도로 잡는 것이었다. 가스라기는 반사적으로, 하정선고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 손을 뿌리쳤다. 수하린이 반대쪽 손을 잡았다. 가스라기는 그 손을
후려치듯이 할퀴었다. 가스라기의 손이 살기를 띠고 다가오는 것을 본 순간, 갑자기
수하린의 눈이 노란 달처럼 빛났다.
손톱과 살이 부딪치는 순간, 쨍 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스라기는 바위라도 내리친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수하린의 손에는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대신 가스라기의
손끝만 무섭게 아팠다. 손톱이 빠지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
"아악‥‥‥."
반사적으로 신음을 흘리며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수하린이 그 손을 다시
낚아챘다. 그리고 질질 끌고 방을 나섰다. 끌려가면서 가스라기는 울부짖었다.
"하늘님이 나가지 말랬어요!"
"멀리 가지는 않을 거야."
"그래도."
"잠깐이면 돼."
가스라기는 더 이상 반항하지 못했다. 하정선고에게 느꼈던 것 보다 몇 배나 더 큰
미움을 품고 있으면서도 수하린을 뿌리치기는 힘들었다. 잠깐이면 된다고 하는 그
음성의 느낌이 하늘님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래서 더 미운 것 같기도 했다.
아무리 떼어놓고 생각하려고 해도 상아는 하늘님에게 가스라기보다 훨씬 가까운
존재였다. 하늘님의 품에 안겨 있는 동안은 미처 기억해내지 못했던 불안이지만,
하늘님이 잠깐이나마 자리를 비운 사이 수하린을 보자 그 생각이 무섭게 솟구쳐 올랐다.
자신이 갖지 못한 하늘님의 마지막 부분을, 수하린은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수하린은 천도각의 지붕 밖으로 가스라기를 끌고 나가서야 손을 놓아주었다.
"봐라."
주위를 둘러보면서 수하린이 말했다. 가스라기는 적의가 사그라지지 않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뭘 봐요?"
"네 눈에 보이는 걸 봐. 그리고 다시 생각해보렴."
눈에 보이는 것은 봄꽃 흐드러진 산기슭, 우거진 녹음과 단풍, 햇볕 내리쪼이는
나뭇가지 위에서 사르르 녹아가는 흰 눈이었다. 짝짓기를 하다 놀라 달아나는 한 쌍의
너구리, 봄에나 태어났어야 할 새끼를 데리고 유유히 나는 새, 천도각을 감아 도는
계류에서 첨벙 소리를 내며 뛰어오르는 무지갯빛 잉어였다. 신기했다. 그리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하지만 그뿐이다. 뭘 다시 생각해보라는 걸까?
가스라기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봤어요."
"이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니?"
"몰라요."
고집스럽게 대다하는 가스라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수하린은 허리를 숙여 들꽃
한 송이의 꽃 대궁을 잡았다. 입속으로 선어를 읊고 단숨에 그것을 뚝 꺾었다.
풀도 밟지 않는 수하린이 꽃을 꺾는 것을 보고 가스라기는 움찔 놀랐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가스라기는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갔다. 꺾인 것은 꽃이지,
가스라기가 아니니까.
"내가 이 꽃을 꺾는 순간에, 진선게서는 직접 보지 않았는데도 잠깐이나마 마음이
아프셨을 거다."
수하린이 꺾어 든 꽃을 내밀며 말했다.
"왜?"
하늘님이 아프다는 소리에 가스라기는 제깍 반응했다.
"이 꽃이 그분의 친애를 받고 있기 때문이야."
꽃 대궁을 든 손으로 수하린은 허공에 원을 그렸다. 대궁에서 흘러나온 푸른 수액으로
달처럼 둥근 형상을 만들더니, 그 중심에 푸른 점까지 찍었다.
"삼라만상과 진선의 관계는 본래 이와 같아야 한다. 비천한 것도 존귀한 것도
똑같이 여겨야 해. 하지만‥‥‥."
수하린이 대궁으로 원의 테두리 한 지점을 바깥에서 안쪽을 향해 밀었다.
그러자 원이 일그러졌다.
"너로 인해 그것이 깨졌어."
수하린의 손은 일그러진 원의 바깥을 돌아가며 쓰다듬었다.
"평정이 깨지자, 두 번째 일이 일어난 거다. 한 점에 대한 친애로 원이 일그러졌다면,
다른 점들도 똑같이 친애하여‥‥‥."
제일 먼저 안으로 들어간 지점을 따라 원의 윤곽이 일렁이며 좁아지자, 전보다 더
작지만 완전한 원으로 돌아갔다.
"어떻게 해서든, 천도와 삼라만상의 관계를 전과 같이 유지하려는 진선의 본능이다.
그게 지금 네가 보고 있는 모습이야. 처음에는 풀이나 새, 짐승들 같은 것이 먼저
반응하지. 하계에서도 이런 기운에 민감한 것들은 반응을 일으키고 있을 것이고.
그런 일들이 점점 잦아지고, 넓어질 것이다. 나중에는 하계인들 역시 이렇게 될 거야.
천화경을 읊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천경지수가 일어나는 거다. 무정하던 자가
까닭 없이 눈물을 흘리고, 포악하던 자가 칼을 손에서 떨구겠지. 참회의 눈물이
바다를 이루고, 명예와 권세를 좇던 장부들은 늙은 어미가 기다리는 고향집으로
돌아가겠지. 종국에는 하계인들뿐 아니라 선계인들도 마찬가지로 이 기운에
취하게 될 거다."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수액의 원을 가스라기는 넋을 잃은 채 바라보았다.
"한 번이라도 그런 느낌을 받아본 적이 있니? 천지만물이 내 말에 귀를 기울려주는구나,
하늘이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구나 하는 느낌말이다. 보아라. 진선의 능력이 닿는
곳까지 모든 미물과 인간과 선계인들이 그걸 느끼게 될 것이다. 하늘과 나의 거리가
좁혀졌다고 말이야. 이미 그 일은 시작되었어. 너로 인해서. 너에 대한 친애로 인해,
진선과 삼라만상의 거리가 좁혀졌다. 이 꽃들이 지금 봄을 맞고 저 미물들이 지금
짝을 짓는 것은 다 그분의 친애 때문이다. 그분이 쏟는 친애에 화답해서 꽃을 피우고
눈을 내리는 거야. 이것이 천계의 뜻을 하계에 전하는, 천도의 화신인 진선과
삼라가 맺는 관계요. 사랑이다."
수하린은 꽃 대궁을 든 손을 내리고 가스라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런 세상을 너는 없어지라 할 수 있느냐?"
수액의 원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가스라기는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수하린을
바라보았다. 수하린이 한마디 한마디 힘을 주어 물었다.
"대답해봐. 그럴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