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밀지는 둥글고 긴 원통 안에 들어 있다. 통의 뚜껑은 단단히 봉인되어 있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영소는 한 번도 그것을 몸에서 떼어놓은 일이 없었다. 물론 그 안에 든
밀지를 엿본 적도 없었다.
마치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이 밀지를 전하기 위해서라는 듯이 목숨을 아끼지 않으며
운반해온 그 통을 도착한 지 보름이 넘어서야 겨우 배알하게 된 보천궁의 궁주 앞에
바치는 순간 영소는 만감이 교차했다. 봉인을 뜯어 둥글게 말린 두루마리를 꺼내 읽고
있는 궁주 화영은 그가 두 번째로 목격하는 진선이었다.
"먼 길 오느라 수고했소."
언뜻언뜻 유리처럼 투명해 보이기도 하고 아지랑이처럼 아물거리기도 하는 화영의 신형
앞에서, 울지영소는 저것이 바로 말로만 듣던 극진선의 신위로구나 생각하며 떨리는
호흡을 진정시켰다. 아무리 상대가 환주의 선계 수장이라고 해도 이쪽 역시 환주 속계의
수장인 왕을 대신하는 밀사인 만큼 합당한 위신을 지켜야 했다.
부사의 자격으로 따라온 시혼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납작 엎드려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벌벌 떨며 하계인 망신을 다 시키고 있으니, 자신만이라도 의연한 태도를 보여야 했다.
"울지영소라고 했던가?"
어째 이르다 싶게 밀지에서 눈을 뗀 화영이 물었다. 밀지의 내용이 그렇게 짧은 건지,
아니면 선인은 글자를 읽는 능력조차도 빠른 건지 궁금해졌다.
"그러하옵니다."
"오는 길도 힘들었으련만 내 잠이 길어 꽤 오래 기다리게 해버렸군. 하지만 답서를
가져가려면 좀 더 기다려야겠소. 기다리는 동안 불편함이 없기를 빌지."
언제쯤 답서를 준다는 기약이 없었지만, 재촉할 입장이 못 됐다. 선계의 인물을 상대할
때는 결코 시간을 재촉하지 말라는 것이 관인들 사이의 금언이었다. 선인들은 매사에
가장 적절한 때를 알고 있다는 것을 믿어주어야 한다, 못 믿겠어도 믿는 척해야 한다,
불신을 들키거나 무례를 범하면 그들 나름의 어깃장을 놓을 수 있다. 시간은 하계인이
아니라 선계인의 편이다, 그들과 시간을 가지고 다투지 말라,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선경에 머물게 해주신 아량에 감사드리며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무량무극."
선계의 인사말을 올리고 뒤로 물러나던 영소의 눈에 문득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화영이 무심히 내려놓은 밀지의 두루마리가 서탁 옆으로 흘러내렸다. 거기에는 아무런
글자도 적혀 있지 않았다. 텅 빈 공백뿐이었다. 순간 영소의 머리도 하얘졌다.
밀지는 처음 왕이 준 그대로였다. 바꿔치기 되었을 리도 없다. 설마, 아무것오 안 쓰여
있는 밀지를 전하기 위해 그 고생을 했단 말인가? 아니, 아니, 그럴 리 없다.
선인과 왕만이 알아볼 수 있는 비문으로 쓰여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게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 없지만 있을 법하다. 영소는 필사적으로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찾으려고 머리를 쥐어짰다. 혹 그 답이 화영의 얼굴에 쓰여 있지 않을까 싶어 올려다본
순간, 영소는 심장이 멎을 뻔했다.
화영의 투명한 눈은 그의 머리 위를 지나, 주렴 드리운 문 앞에 엎드린 시혼의 등에
꽂혀 있었다. 우연히 시선이 거기 머문 것도 아니고, 명부판관 앞에 선 것처럼 벌벌
떨고 있는 하계인의 꼴이 우스워서 보는 것도 아니었다. 시혼을 바라보는 화영의 눈에는
어떤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 감정의 깊이와 색은 영소로서는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전하께서 하필 동생 밀사로 저놈을 점찍으신 것이 설마 궁주의 저 눈빛과 관련이
있는 건가.'
영소는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필사적으로 다리에 힘을 주며 물러섰다. 엎드려 있던 시혼이
반색하며 일어나 따라오다가 다리를 휘청거렸다. 홍옥 주렴을 걷으며 영객전을 물러나오
자마자 시혼은 안쪽까지 들릴 만큼 큰 소리로 한숨을 내쉬었다.
"후아, 살았다! 아니, 선인 중에 저런 선인도 다 있군요. 전 웬 낮도깨비인가 했습니다.
그래도 다리는 달려 있는 걸 보고 안심했지요."
울화가 치밀어 한마디 하려던 영소는 주렴 앞에서 한 선인과 부딪칠 뻔했다. 당황해서
고개를 돌린 순간, 그는 또 심장이 철렁 내려앉을 뻔했다.
눈앞에 서 있는 것은 귓도리골의 숲에서 본 진선이었다. 인연이 있다면 내세에 다시
보자고 했던 바로 그다. 그런데 다시 만났단 말인가? 설마 없던 선연이 다시 생겼단
말인가? 영소는 아연한 충격에 휩싸여 영객전으로 들어가려는 진선의 길을 막은 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진선이 차가운 눈길로 울지영소를 훑어보았다. 뭔가 이상했다.
생긴 건 분명 그때 그 진선인데 눈빛이며 세세한 느낌이 어딘가 달랐다. 흔들리는
붉은 옥석의 주렴 탓인가, 아니면 그날 밤의 숲 공기가 지나치게 푸르렀던 탓인가.
선인의 입술이 열리고 짤막한 질문이 튀어나왔다.
"밀사?"
영소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영소의 뒤에 반쯤 숨듯 서 있던 시혼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진선의 윤곽 뚜렷한 입술 끝이 치켜지며 웃음을 그렸다.
무표정할 때보다 더 섬뜩한 웃음이었다.
"비켜."
화영은 밀지를 둥글게 말아 손에 쥔 채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홍옥 주렴이 거칠게
걷히며 지한이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서는 기세가 상당히 무례하고 난폭했지만 화영은
눈을 뜨지 않았다. 지한은 공수조차 하지 않고 고개만 까딱했다.
무량무극. 궁주 배알."
"어서 오게."
그제야 화영이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그의 신색을 잠깐 훑어보던 지한이 히죽 웃었다.
"이번 선몽은 유달리 좀 기셨다지? 어째 궁주의 몸에서 아귀들의 혈향이 물씬 풍기는
것 같은데 내 코가 잘못된 거요?"
"피를 뒤집어쓰고 사는 자는 어디서든 혈향을 맡는 법이지."
화영은 긍정도 부정도 안 하고 슬쩍 말길을 돌렸다.
"내가 선몽에 든 동안 자네는 선계를 떠나 있었다고 들었는데."
"아."
지한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지옥 구경을 좀 하고 왔지."
화영은 놀라기나 한 것처럼 눈썹을 치켜떴다.
"지옥? 설마 명부에 다녀왔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왜 아니겠소?"
지한이 싱글싱글 웃었다.
"허어, 그것 참 곤란한 이야기로군. 선계인이 하계에 오래 머무는 것도 좋지 않은데
하물며 명계라?"
"이거 왜 이러시나."
지한이 화영의 서탁에 두 손을 짚으며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나지막하고 위협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모르고 계셨던 것도 아닐 텐데 새삼스레 말이지."
화영이 빙그레 웃으며 반문했다.
"알고도 모르는 척 넘어갈 수 있을 때와는 다르지. 자백까지 들은 마당에 내가 그 일을
천계에 상신하면 어쩌려고?"
"하시든지. 아마 지금 당장 고해도 내년 중추쯤에나 답이 내려오려나? 그것도 빠른
편이겠지. 본래 하늘의 맷돌은 몹시도 천천히 돌지 않던가."
"대신 곱게 갈린다네."
"상관없어. 이번 제석이 지나면 둘 중 하나가 될 테니까. 천계에서도 쉽게 갈아버리지
못할 지위에 오르든가‥‥‥."
"아니면 이미 갈릴 대로 갈려 있든가?"
화영이 웃으면서 덧붙이자, 지한도 웃었다.
"궁주, 정작 신경 써야 할 건 내가 아니라 천도봉 쪽이 아니오? 돌아와보니 온 산이
난리도 아니군. 봄도 이런 봄이 없어. 천리가 역행하고 있는데 이걸 내버려둘 셈인가?
대답 좀 해보시오."
"자네 마음을 모르겠군. 자백을 하러 온 건가, 내 결단을 재촉하러 온 건가?"
지한은 두어 번 눈을 깜빡이더니 짤막하게 말했다.
"따지러 왔소."
"뭘?"
"나한테 무슨 장난을 치려고 했는지 말이야."
"무슨 장난?"
화영이 무덤덤한 태도로 되묻자 지한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 계집."
"아하."
"뭘 원한 거요? 제석 전까지 화기를 상하지 말라는 명을 어기기를? 아니면, 천군이
아니라 내가 천도무친을 깨기를? 어느 쪽이든 너무 얕은 수라고 생각하지 않소?"
화영은 뺨을 슬쩍 긁은 뒤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내 보기에는 자네와 그 아이도 그림이 좋던데. 어때, 마음에 들지 않던가?"
어이없는 대답에 지한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말 돌리지 마시오."
"돌린 적 없는걸. 자네야말로 돌리지 말게. 대답해봐. 좋던가, 싫던가?"
지한은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
"궁주."
"싫지는 않았겠지. 그러니까 느닷없이 명부 나들이를 다 했을테고. 지옥의 열기에라도
취하지 않으면 마음을 가다듬을 수 없어서 도망치듯 떠났던 것이 아니었‥‥‥."
지한이 서탁을 거칠게 내리쳤다. 화영은 짐짓 눈살을 찌푸렸다.
"이거 남화궁에서 선물 받은 좋은 서탁인데."
"하 가지만 말해둡시다."
지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당신이 천군의 승리를 바란다는 건 모르는 바 아니야. 그래도 지금까지는 내게
구체적으로 해를 가하려 하지 않았으므로 참았어. 지는 노을에게 내 요구할 바는
딱 하나, 형식적인 중도라도 지키라는 거요."
"못하겠다면?"
"남화궁에 상신하겠어. 궁주를 믿을 수 없으니 제석의 판관으로 다른 극진선을
보내달라고."
"자네에게 별로 유리해질 것 같지는 않은데? 남화궁의 판관이 오면 명부와의 유착도
꼬치꼬치 따질 것이고."
"더 불리해질 것도 없지. 게다가 진선으로서의 마지막 일을 제 손으로 맺지 못한다면
등천 후에 당신의 천계 서열에도 영향이 좀 갈걸?"
"기왕 빠질 물이라면 끌어안고 가겠다?"
"혼자 가는 건 섭섭하니까."
화영이 웃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네. 돌아가게."
"알았다는 말에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도 포함된거라고 믿어도 될까?"
집요하게 추궁하는 지한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화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지한은 서탁에서 손을 떼고 물러섰다.
"용무는 끝이오. 무례를 용서하시길."
홍옥 주렴을 걷으며 나서는 지한의 뒷모습에서 화영은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의 입속에서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누구 편을 들고 있는 건지 나도 모르겠는데 중도를 요구한단 말인가."
영객전을 물러나온 지한은 얼마 못 가 우뚝 멈춰 섰다. 그의 형제이자 원수가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마치 거울이 미끄러져 오는 것처럼. 둘 사이의 거리가 십오 척으로
줄어들었다. 천군 역시 걸음을 멈췄다. 주랑은 폭이 넓었고, 그들은 충분히 서로
거리를 유지한 채 각자의 길로 지나쳐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둘은 지나쳐 가는 대신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기묘하게도 그들은 닮았으면서도 하늘과
땅처럼 달랐다.
지한의 얼굴에 일그러진 웃음이 떠올랐다. 원래도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보름 만에 보는
천군은 정말이지 아득하게 다른 존재 같았다. 그가 지옥에 있는 동안, 그의 형은
만취한 선경에서 행복한 꿈에 취해 했었다. 하기야 이번만이 아니다. 언제나 그랬던
것이다. 그와 그의 형은. 같은 선계에 있어도 천군은 언제나 푸른 대나무의 그림자
아래 서 있었고, 그는 몰아치는 피바람 속에 서 있었다.
"좋은 냄새가 나는군."
지한은 짐짓 숨을 들이켜는 시늉을 했다.
"그 계집의 냄새인가? 몹시 궁금해지는데."
"건드리지 마."
칼로 쳐내는 듯한 답이 돌아왔다. 지한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이내 장난기 넘치는
웃음이 그의 입가에 떠올랐다.
"왜 그래? 그럴수록 더 건드리고 싶어지는 거 알면서."
"하지 마."
"이야, 재미있는데? 그동안의 가식은 대체 어디로 던져버리시고? 점점 구미가 당기는군.
존엄하신 형님께서 무릎을 꿇고 사정이라도 하면 모를까, 이래서야 손을 안 대볼
수가 없‥‥‥."
"원하는 게 그거냐?"
담담한 말투로 반문하는 천군을 보고 지한의 표정이 굳었다. 천군의 손이 천의 앞자락을
잡아 허리께로 올렸다. 정말 원하는 게 무릎을 꿇는 것이라면 기꺼이 해주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굴욕이나 계산속 같은 것은 찾아볼 수도 없는 얼굴이었다. 지한은 넋을
잃었고, 다음 순간 갑자기 심장에 미칠 듯한 통증이 찾아왔다. 예전에도 느꼈던,
바로 그 통증이었다.
"집어치워!"
천군이 무릎을 꿇기 전에 지한은 소리치며 그를 지나쳐버렸다. 통증으로 창백해진
얼굴을 보이지 않은 채로 그는 안간힘을 다해 웃는 소리를 냈다.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려온 건데, 고작 계집 하나로 그걸 받아 내서야 보람이 없지
않겠어? 제석까지 기다려줄 테니 미리 김 빼지 마."
그 말을 남기고, 지한은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밴 채로 걸음 흩뜨리지 않으려 애쓰며
주랑을 걸어 나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천군도 발길을 돌려 화영이 기다리는
영객전의 홍옥 주렴을 걷었다. 피곤한 표정으로 의자에 몸을 묻고 있던 화영이
반쯤 뜬 눈으로 그를 맞이했다.
"세 번째 손님이로군. 어서 오게."
천군이 화영과 만나는 그 순간, 가스라기도 누군가를 만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