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64/109)

16-2.

때를 맞추지 못한 봄은 환주의 곳곳뿐만이 아니라 선계에도 찾아왔다. 황산 칠십이

봉의 대기는 늦은 밤 이른 새벽을 가리지 않고 따스했다. 비단 봄만 온 것이 아니었다.

청송의 녹음은 여름처럼 짙었고, 계곡을 흐르는 물길도 한여름의 그것처럼 힘찼다. 

어제는 천도봉에 난데없이 눈이 내려 선녀들을 기쁘게 했다. 선계에 내리는 눈은

천공옥희라고 불리는데 그 눈을 녹인 물로 얼굴을 씻으면 윤기가 돌고 차를 끓이면

그 맛이 어떤 물을 쓴 것보다도 좋았다.

눈이 내리되 춥지 않고, 봄꽃이 피되 봄날처럼 땅이 질척하지 않으며 한여름의 녹음과

가을의 단풍이 어우러지니 마치 사계중에 가장 아르다운 것들만을 골라 같은 때에

몰아넣은 듯했다. 이 기이한 날씨의 변화는 칠십이 봉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었지만

어느 곳이나 술에 취한 듯한 천기가 드러나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천기의 변화가 가장 심한 곳은 천도봉이었다.

파란 풀잎 끝에 앉은 두 마리의 버마재비가 짝짓기를 하고 잇어싿. 버마재비의 암컷은

교미 중에 수컷을 먹어버리는 습성이 있는데, 지금도 막 그 오래된 종족의 전통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암컷이 수컷의 머리통을 집게 같은 앞발로 붙잡았다.

그러나 암컷이 일을 치르기 전에 거대한 코가 벌름거리며 다가오더니 버마재비 한

쌍을 풀 위에서 밀어내버렸다. 방금까지 버마재비들이 짝짓기 하던 풀을 오물오물 

씹으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그 짐승은 쫑긋한 귀에 빨간 눈, 발름거리는 코와

모아 든 앞발로 보아 분명 토끼였다. 하지만 온몸의 터럭이 희거나 갈색이 아니라

은은한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지난 중추에 천군에게 이름을 받아 조만간 신수록에

올라갈 토끼 한입이었다.

신수에도 여러 급이 있어서 태초에 만들어진 일급 신수가 있는가 하면 천변지이를

일으키거나 흉조나 길조를 드러내는 능력을 지닌 신수도 있고 사람의 말을 할 줄

아는 신수도 있으며 얼핏 보아서는 단지 좀 특이한 미물이나 다를 바 없는 한입과 같은

신수도 있다. 천룡애에서 사는 동안 화기를 키우는 온갖 푸성귀만 뜯어먹다가 몸에

화기가 가득 쌓였던 한입은 이제야 겨우 몸을 추스르고 제 발로 밖에 나와 풀을 

뜯어먹을 만한 처지가 된 것이다. 아직 신수다운 위용을 드러내기에는 멀어서 그저 풀

뜯기를 좋아하는 붉은 털가죽의 토끼처럼 보일 뿐이었다.

한입은 오랜만에 맛보는 신선한 풀의 감촉에 취해 제 뒤로 사뿐사뿐 소리 없이 다가오는

거대한 발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그 발이 갑자기 덮쳐와 제 몸을 찍어 누른 뒤에야

알고서 바동바동 몸부림을 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호오, 요놈 봐라?"

수안니는 발밑에서 꼼틀거리는 신기한 토끼의 몸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화기가 물씬물씬 풍기는 것이 네놈도 이 어르신의 족보 저 끄트머리쯤에 있는

놈이로구나. 옳지. 잘됐다. 보아하니 이제 막 신수 반열에 오른 애송이 같은데

오늘부터 이 어르신을 하늘같이 모시고 신수의 올바른 태도에 대해 배울 기회를 주마.

어떠냐? 고맙지?"

고마워하기는커녕 바동거리고 발로 차대는 성질 고약한 토끼를 보고 수안니는 으르렁

하고 입을 쩍 벌렸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이 녀석이! 말 안 들으면 한입에 삼켜줄 테다!"

"어머, 어머, 그러시면 안 됩니다. 영수님."

"안 되지요. 안 되고말고요."

생글생글 웃음기 넘치는 선녀들의 음성이 들려와, 수안니는 입을 쩍 벌린 채 뒤를

돌아보았다. 천도각의 선녀들 한 떼거리가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어느 쪽으로

도망갈까 망설이는 사이에 선녀들은 그를 둘러싸버렸다. 발밑에서 한입을 빼낸다,

안아준다, 쓰다듬어준다, 수안니에게는 손속이 거칠다 어쩐다 하며 법설을 떨어대는

통에 혼이 반쯤 나가서 쩔쩔매다가 한 선녀가 전부터 이 불꽃 갈기가 뜨겁지는 

않은지 만져보고 싶었다며 손까지 대자 버럭 노성을 내질렀지만 선녀들은 깔깔

웃기만 할 뿐 도무지 겁을 낼 줄 몰랐다.

수안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에라 모르겠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서는 자는

시늉을 했다. 천도각에 온 이후로 이곳 선녀들에게 이런 취급을 받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결국 이게 최선의 방법이라는 걸 깨달아버린 것이다.

하지만 자는 척하는 수법을 깰 방법까지 이 영악한 선녀들은 깨우쳐버린 모양이었다.

눈을 질끈 감은 수안니의 코앞에 뭔가 향긋하고 시원한 것이 들이밀어졌다. 한쪽 눈만

슬쩍 뜨고 넘겨다보니 차가운 서리가 맺힌 한옥 그릇 안에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수액을 끼얹은 흰 눈이 보였다. 수안니는 골난 목소리로 물었다.

"뭐야?"

"어제 내린 천공옥희를 녹지 않게 한옥 그릇에 담아두었다가 열매와 수액을 얹어 만든

빙과랍니다. 영수님게서도 좀 드셔보세요."

이제 보니 선녀들은 따뜻한 햇볕 아래에서 빙과를 먹기 위해 나들이를 나온 모양으로

저마다 빙과 그릇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흥, 이 몸은 불길같이 뜨거운 몸이시다. 빙과는 무슨 얼어 죽을 빙‥‥‥."

시험 삼아 혀를 대보고 수안니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맛있잖아!"

선녀들이 키득키득 웃었다.

"요즘 같은 때가 아니면 맛보기 힘들지요. 천공옥희와 단풍나무에서 짜낸 풍향지,

복숭아와 오얏을 한꺼번에 맛보는 날이 올 줄 누가 알았겠어요?"

혀에 닿는 즉시 스르륵 녹아버리는 달고 시원한 빙과를 핥아대던 수안니는 문득

선녀들을 보고 한심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래, 사철을 넘나드는 과일을 맛보게 되니 다들 좋아 죽겠는 모양이지?

아무 걱정도 안 되시고?"

선녀들은 작은 은수저로 빙과를 떠서 먹다 말고 자기들끼리 눈을 마주치더니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수안니를 바라보았다.

"왜 걱정을 해야 하나요?"

"당연하잖아! 이게 어딜 봐서 천도에 맞는 자연스러운 일이냐? 눈은 겨울에 내려아 하고

봄꽃은 봄에 피어야 하고 가을 열매는 가을에 달려야 마땅한 것이지!"

"뜻밖의 선물이라 여기면 되는 거지요."

"선물은 무슨 얼어 죽을! 순리에 맞지 않는 일이 벌어지는데 의심할 줄도 모른단 

말이야? 너희들은 머릿속에 든 게 전부 이‥‥‥ 이 빙과 같은 것뿐이냐? 응?"

"어머, 말씀이 심하십니다."

"그러게 말이에요."

"심하긴 뭐가 심해? 너희들은 그 뭐냐‥‥‥ 하계 여자들처럼 질투도 안 해?"

"까닭 없이 좋은 날씨에 질투는 왜 한답니까?"

"날씨 말고 말이야! 너희들이 모시는 진선 나부랭이가 새내기 선녀 하나 끼고 벌써

며칠째 두문불출이냐? 황음도 유분수지. 난 요새 낯 뜨거워서 그놈 근처에도 못

가겠어. 시도 때도 없이 찰싹 붙어서는 그‥‥‥ 그‥‥‥."

"그?"

"그러니까 그‥‥‥."

"그러니까? 아이참, 영수님, 애태우지 말고 말을 해보세요. 저희는 번을 서는 날이 

아니면 진선께 영수님만큼 가까이 가지도 못한답니다. 도대체 무엇을 하시는데요? 네?"

"아니, 그러니까 그게‥‥‥."

수안니는 쩔쩔매며 말을 빙빙 돌리다가, 선녀들이 입을 가리고 숨죽여 웃는 것을 보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제 보니 몰라서 물어보는 게 아니라 작당을 하고 놀리고 있는

것이다.

"뭐야! 너희들도 다 알면서 그러는 거냐? 응?"

"알지요. 모를 리가 있나요?"

"그럼 분하지도 않냐? 하계의 계집들도 서방이 시앗을 보면 눈을 까뒤집고 덤비는 판에."

선녀 하나가 은수저에 담긴 빙과를 입에 넣으며 대답했다.

"우리는 하계 여자가 아니니까요."

또 다른 선녀가 장단을 맞추듯이 말했다.

"진선은 우리들의 낭군이 아니고요."

"해를 메고 사는 것보다야 그냥 보고 사는 쪽이 낫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선계의

여자가 아니지요."

"게다가 천수배필이신 상아님도 아무 말씀이 없으신데 우리가 왜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답니까?"

"그러고 보니 상아님도 그간 내내 두문불출이셨지요? 나는 그쪽이 오히려 걱정입니다.

중추 날부터 계속 두문불출이시라지요? 의선각 선고 말로는 몸은 분명히 다 나으셨다는데."

"어떻게 안 좋으시답니까?"

"넋이 반쯤 나가신 것처럼 아무 말씀도 없으시고, 해야 할 일도 깜빡깜빡하시고‥‥‥."

"원래 그러시잖아요."

"아이참, 전보다 더 심하시다는 거지요."

어느 결엔가 선녀들은 자기들끼의 이야기에 푹 빠져버렸다. 그들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은수저를 쥔 손을 흔들기까지 하며 열띤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눴다. 입을 헤벌리고

선녀들을 바라보던 수안니는 에라 모르겠다, 선계가 어떻게 돌아가건 내 알 바 

아니지 하고는 엎드려버렸다.

천도각이 거처가 된 이후로 수안니에게는 도대체 만만한 상대가 없었다. 천도각의

선녀들은 때로는 멍청해 보이고 때로는 소름이 끼칠 만큼 영악해서 가끔은 주인인

천군보다 무서웠다. 아까 토끼를 발견했을 때는 그래서 내심 뛸 듯이 기뻤다.

제 말이라면 껌뻑 죽을 아랫것 하나를 키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선녀의 무릎에 몸을 웅크리고 앉은 한입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수안니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는데도 피하지 않고 빤히 쳐다보는데, 착각일지 모르지만 족보로 따지면

십팔만 리 차이는 날 하급 신수인 주제에 감히 그를 보고 비웃는 것 같았다. 울화가

치밀었지만 선녀에게 안겨 있는 걸 덮쳐서 빼올 수도 없어 그는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돌아누웠다. 길들여진 짐승의 신세란 참으로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가스라기는 잠에서 깼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깊게 잠들어 있는 시늉을

하면서 실눈을 살짝 떴다. 처음에는 뿌옇던 시야에 창가에 선 하늘님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어깨를 드러낸 천의 자락, 한옆으로 모아 넘긴 검푸른 머리가 꿈에 보는

것처럼 아스라했다. 매를 닮은 새 한 마리가 그의 팔에 앉아 있었다. 소식을 가져온

비합전서인 모양이다.

가스라기는 깨어났다는 기척을 숨긴 채, 하늘님의 모습을 실눈으로 훔쳐보았다. 

보름이 넘게 이어진 꿈같은 시간 동안 그녀는 종종 이렇게 했다. 살을 맞대고 열락으로

빠져드는 시간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지만, 잠깐의 휴식 동안 하늘님을 몰래 

관찰하는 것도 그녀는 너무나 좋아했다.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그의 어깨와 팔과 목과 턱, 새의 부리에 기울인 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짓는 입매, 바람이 천의를 만지고 지나가면 드러나는 다리의 윤곽까지

모든 것이 뼈가 저릴 정도로 좋았다. 그 팔이 자신을 안고, 손이 쓰다듬고, 임술이

더듬고, 다리가 감겨오는 것을 생각하면 나른하던 온몸의 살들이 열을 내며 

일어나는 듯했다.

하늘님이 수고했다며 새를 쓰다듬는 손길조차 제가 가져야 할 것을 남이 빼앗아가는

것 같아 명치가 욱신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가스라기는 꾹 참았다. 조금만 기다리면

그가 다시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기대한 대로, 하늘님은 새를 날려 보내고 창가에서 돌아섰다. 가스라기는 눈을

얼른 감고 잠결에 몸을 뒤척이는 시늉을 했다. 사락사락, 천의 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하늘님이 그녀에게 다가오는 소리다. 누운 가스라기 옆에 하늘님이 걸터앉는

기척이 들렸다. 그다음에는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는 손등의 느낌이 왔다. 언제나

그렇듯이 혹시 잠을 깨울까 조심조심, 스칠 듯 말 듯 쓰다듬는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그런 조심성도 얼마 가지 못한다는 것을 가스라기는 몇 번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어느 사이엔가 쓰다듬던 손길은 점점 뜨거워지고, 그녀도 자던 시늉을 그치고 목을

끌어안으며 매달리기 마련이다. 두 몸의 합일이 주는 아득한 쾌감과 함께 가스라기의

하루는 시작되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하늘님의 손길이 좀처럼 깊이 들어오지 않았다. 어쩐 일인가

싶어 실눈을 뜬 가스라기는,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웃고 있는 하늘님과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자는 척하는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눈빛이었다.

원망스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가스라기는 얼른 일어나 목을 안으며 매달렸다.

하늘님은 그녀의 벌거벗은 등을 안고 쓸어주다가 뼈가 조여들 만큼 세게 안았다.

숨 막히는 충만감이 온몸으로 전해져왔다. 그렇게 안고 잠시 있다가, 하늘님이 그녀를

풀어주며 속삭였다.

"잠시 다녀와야 할 곳이 있다."

그를 바라보는 가스라기의 눈에 불안한 빛이 떠돌았다. 중추의 밤에 그에게 안긴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떨어져 있었던 적이 없다. 아니, 숫제 이 침상과 방, 그리고 몇 간

떨어진 주랑 바깥의 은옥 욕조 외에는 가본 일도 없었다.

하늘님은 이상할 정도로 그녀를 떼어놓으려 하지 않고 바깥에 데리고 나가려고 하지도

않았다. 마치 이곳 바깥으로 나가면 그녀가 위험해지기라도 한다는 듯이.

"난 못 가는 곳이야?"

조심스럽게 묻자, 하늘님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데려가고 싶지만‥‥‥ 안 돼. 혹시라도‥‥‥."

뒷말을 흐렸다.

"응?"

"아니.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걱정 마라."

하늘님이 이마와 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그 입술과 목소리에 아주 희미한 불안이

감돌았지만, 하늘님이 걱정 말라고 했으므로, 그녀는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어디 가는 거야?"

"광명정에. 화영궁주가 선몽에서 깨어났다고 하는구나."

뭔가 또 불안한 생각을 했는지, 하늘님의 입맞춤이 좀 더 거세졌다.

"돌아올 때까지 어디에도 나가지 마. 여기서 기다려. 알았지?"

"응."

가스라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한한 신뢰로 가득한 그 얼굴을 보면서 천군의

표정도 조금 풀렸다. 묶어둘 수 있다면.

어디로 흘러갈지 모를 불안한 천수를 내 옆에 영원히 묶어둘 수 있다면. 하지만 흐르는

물처럼 그것은 묶을 수 없는 것이고, 천군은 그 물살과 싸우기 위해서라도 그녀의

곁을 떠나야 했다. 아주 잠깐이지만.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가스라기를 내려다보던 천군이 갑자기 그녀의 가슴으로 입술을

내렸다. 며칠 사이에 그녀의 몸은 더욱 윤기가 흐르고 부드러워졌다. 가끔은 깨물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살에서 단맛이 났다. 가스라기가 그의 머리카락 사이에 

손가락을 넣고 움켜쥐며 물었다.

"가야 한다고 했잖아‥‥‥."

"잠깐이면 돼."

가스라기를 다시 눕히면서 천군은 속삭였다. 가스라기의 손목, 세 개의 붉은 수궁계는

아직도 색이 바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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