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3/109)

제 16 장

::천도무친::

일찍이 한 현인에게 들었으되 천도는 친애함이 없다고 했다. 만물에 등급이 있어

미물보다 사람이 위고 사람보다 선인이 위라고 하나 천도는 미물도 선인도 똑같이

아끼고 똑같이 멀리하며 천공의 별 중에 북신과 같이 뭇별들의 중심에서 빛날 뿐

다가서지도 달아나지도 않는다.

군왕의 도리도 천도와 다르지 않다. 군왕이 사사로운 정을 품으면 그 화는 온 나라에

미치고, 선인이 친애를 알면 그 화는 온 세상에 미친다.

그런고로, 모름지기 사내대장부라면 처첩을 대함에 편애가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도 천도무친이다.

ㅡ풍류기인 무명씨.『제가십조』

16-1.

보위에 오른 지 어언 스무 해. 환공 기백이 하루도 빼놓지 않는 일과가 있으니 

자시에 홀로 서재에 들어 낮에 도착한 장계를 다시 곱씹어 읽는 것이다. 몇 년간

그에게 올려진 장계들은 대부분 변경의 동태에 대한 것으로 어느 방면에 원군이

필요하다거나 군량이 떨어졌음을 호소하는 것이 많았다. 긴급을 요하는 장계들에

대해서는 낮에 이미 읽고 조치를 해두었거니와, 주의해서 다시 읽는 것은 흑황군의

동태가 아니라 '요사한 존재들'에 의한 피해를 보고 하는 장계들이었다.

흑황군의 도발에 대한 장계에 비하면 이런 장계는 그 수가 무척이나 적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백도 알고 있었다. 요수를 만난 백성이 살아남아 그 일을

증언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우니까. 그의 손에 들어온 장계들 역시 내용이 

구체적이지 않고 두루뭉술했다.

ㅡ모월 모일 모처의 산에서 하루 종일 앞을 볼 수 없는 피바람이 불고 여인의 귀곡성이

들렸다 하나 흑황의 군세가 코앞에 진을 치고 있어 사람을 보내 따로 진위를 

알아보지는 못하였나이다.

ㅡ군졸 서넛이 하룻밤 사이에 자취 없이 사라졌사온데 군율을 어기고 달아났다 하는

사람과 간밤에 그 셋이 넋을 잃은 모습으로 강을 건너는 것을 보았다는 꿈같은

이야기가 있어 군졸들의 기강이 해이해진 것을 알 수 있었나이다.

이런 식이었다. 진위가 불분명한 그 장계들 속에서 기백은 요수들의 흐름을 읽으려

했다.

그는 환주가 사람 사는 땅으로 남을 수 있게 지탱하는 방벽이었고, 파사제요의 

기둥이었다. 환주의 백성들이 요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 수 있는 것은 모두 환공

이라는 존재 덕이었다. 민간에 그 사특한 이름을 알리지 않은 것은, 요사한 것은

부르면 부르는 대로 오고 두려워하면 그 두려움만큼 커지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런 수동적인 방비로는 한계가 있어 보였다. 흑황의 도발이 

심해지면서 그 한계는 점점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울지영소에게도 말했다시피, 

조만간 강사포를 입어야 하는 날이 다가올지도 모른다.

사락사락, 두루마리를 넘기며 특이한 장계들을 눈으로 훑던 기백은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특이한 중에도 각별히 특이한 장계였다.

ㅡ왕명을 받잡고 북쪽의 국경으로 이동하던 중에 기이한 것을 보아 여기 올리나이다.

숙영을 삼은 곳은 백성이 떠나 연화가 끊긴지 오래인 폐촌이었사온데 다행히 우물이

마르지 않아 군졸에게 물을 길어오라 하였더니 물에서 단 냄새가 난다 하여 마셔본즉

과연 달고 좋은 물이라 군마와 나귀에게도 먹이고 하룻밤을 자고 일어났더니 병든

나귀가 기운차게 뛰고 오랜 행군에 지친 병졸들의 얼굴이 맑았나이다. 하도 신기하여

소관이 직접 우물을 들여다보니 캄캄한 물 밑바닥에서 은은한 빛이 나오는지라 

밧줄을 내어 내려가 보려 했더니 그 반짝이는 것이 별안간 요동하며 튀어 올랐사온데

길이는 석 자를 넘고 온몸이 무지개처럼 현란하며 입으로 구름과 같은 것을 뿜는

물고기였사옵니다. 군졸들은 그것이 신어라 하며 그물을 드리워 잡기를 종용했사오나

소관이 보기에는 명백한 길조라 혹여 손을 대면 왕사에 누가 될까 저어하여 군조들의

입을 단속하고 우물에 제사를 올린 후 서둘러 그 마을을 떠나왔나이다.

기백은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기이한 일임에 분명하지만 요수같지는 않았다.

"무지갯빛 신어라‥‥‥. 맛은 있을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그와 비슷한 또 다른 장계를 뒤척이니 몇 개가 더 있었다.

ㅡ대도의 남쪽 농가에서 암탉이 큰 달걀을 낳았는데 껍질의 빛깔이 마치 청옥과

같았고 주인이 실수로 그것을 깨드리니 안에서 무지개가 흘러나와 마당에 반나절을

떠 있다가 사라졌다 합니다.

ㅡ유민의 아낙이 만삭이 되어 몸을 풀었는데 열두 쌍둥이가 태어났고 그중 가장 

마지막으로 나온 아이는 낳자마자 일어나 걷고 말을 하여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라‥‥‥.

ㅡ대부 형운의 노모가 칠순을 맞아 칠순연을 베푸는데 잔치중에 갑자기 때 아닌 흰

눈이 내렸건만 눈이 차갑지 않고 부드럽고 따뜻하여 내객들이 모두 기뻐하며

이것은 길조라‥‥‥.

보다 못해 기백은 두루마리들을 밀어 치웠다. 턱밑에 모아 깍지낀 그의 손가락이

초조한 듯 손등을 두드렸다.

"이상하다. 뭔가 이상해. 흉조라 보기에는 서기가 강하고, 길조라 보기에는 계절과

순리에 어긋나는구나.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기백은 미간을 찌푸리며 깊게 생각에 잠겼다. 창은 굳게 닫혀있는데 황촉의 은은한

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촛불이 꺼졌다. 생각에 몰두해 반쯤

눈을 감고 있던 기백은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좀 전까지는 그는 분명 왕의 서재에 있었는데, 지금 이곳은 전혀 엉뚱한 곳이었다.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끝없는 벌판, 매캐한 연기를 뿜어대는 큰 무쇠 솥들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다. 흙바닥에는 짐승의 피로 짐작되는 끈적끈적한 액체로 그려진 기괴한

도형이 보였는데, 기백과 그가 앉은 의자가 그 도형의 중심부에 놓여 있었다.

무쇠 솥 너머에는 머리를 산발하고 털가죽 옷을 아무렇게나 걸쳐 입은 노파들이 입을

모아 웅얼웅얼 사특한 주문을 영창하고 있었다. 솥 안에서는 무엇인가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는데 몹시도 역겨운 냄새를 풍겼다. 마치 갑자기 빠져든 악몽의 한가운데

같았다.

기백은 턱을 고이고 있던 손을 내리고 침착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 사람이

무쇠 솥 건너편에서 그를 향해 걸어왔다. 그 사람은 차가운 북방의 바람도 아랑곳하지

않는 듯 소매가 없고 오른쪽 어깨를 완전히 드러낸 털가죽 저고리, 짐승의 이빨이

주렁주렁 매달린 조악한 허리띠 아래 탄탄한 다리의 선을 드러내는 바지를 입었고,

올려 묶은 머리채가 엉덩이 어림까지 치렁치렁 늘어진 여자였다.

하지만 그 여자가 앞에 와서 섰을 때, 기백은 한 명의 여자가 아니라 한 자루의

날 선 칼을 보는 것 같았다. 여자는 가무잡잡한 피부에 들고양이 같은 눈, 그리고

표범 같은 몸을 가지고 있었다. 그 눈으로 기백을 노려보면서, 날에 가죽을 감아둔

칼끝으로 그를 가리키며 여자가 물었다.

"환공 기백?"

기백은 앉은 자세를 바꾸지 않은 채 고개만 까딱하면서 천천히 대답했다.

"원한다면."

다소 엉뚱한 대답에 여자는 다시 매섭게 말했다.

"환공 기백이 맞느냐고 물었다."

기백은 여전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대가 원한다면 환공 기백이 되어주겠노라고 대답한 것이다."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군. 그럼 환공 기백이 아니란 말이냐?"

기백은 빙긋 웃었다.

"왕좌는 신기라, 자신이 되고자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남이 원했기에 되는 것이라는

고사를 모르는 모양이군. 하긴 흑황의 아녀자에게는 좀 어려운 농담이었나?"

여자는 농담을 할 생각도 받아줄 생각도 없는 듯 얼음 같은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기백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두 손을 벌렸다.

"그래, 환공 기백을 죽이기 위해 위험한 사술을 쓴 모양이니 분명 간절히 원했다고

여겨야겠군. 좋다. 내가 환공 기백이다."

여자는 그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바람은 차갑고, 무쇠 솥에서 뿜어내는 연기는 독하기

그지없는데 여자의 칼끝은 한 점도 흔들리지 않았다. 눈빛 또한 마찬가지였다.

"환주의 왕이 어떤 자인가 싶었더니 늙지도 않는 여장 요괴에 불과했구나."

여자는 관찰을 끝내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흑황의 손님 대접은 어째 이리 박한가? 밤은 깊고 바람은 차가우니 그대들이

자랑하는 마유주라도 내와 마시면서 이야기를 해보는 것이 어떨지."

기백이 능청스레 말했다. 여자가 잠시 그를 노려보더니 물었다.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모르고 있나?"

"환의 왕 노릇을 한 지가 몇 년인데 설마 하니 흑황에 사람을 천 리 밖에서 강제로

불러들여 암살하는 천리쇄혼의 주술이 있다는 것을 모르겠나."

"안다면 됐다. 너를 여기 끌어들이기 위해 많은 제물이 들어갔다. 그러니 환공 기백,

너는 오늘 여기서 넋을 묻고 가야겠다."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 쥐고 있던 칼로 허공을 한 번 세게 내리쳤다. 끈으로 얽혀 있던

가죽 칼집이 벗겨졌다. 시퍼렇고 두툼한 날이 튀어나왔다. 여자처럼 탄탄하고, 

단호하고, 추호의 망설임도 없어 보이는 칼이었다. 여자가 칼을 겨누고 그를 향해

다가왔다. 기백은 의자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천리쇄혼의 주술은 그의 몸이 아니라 넋을

이곳에 불러들여 진 안에 단단히 가둔 것이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가 아는 바에 따르면 천리쇄혼의 주술을 시전하기 위해서는 흑황의 늙은 무녀 열두

명이 목숨을 내놓고 진을 펼친 뒤 한 명의 비범한 칼잡이가 단칼에 희생물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했다. 베는 것은 목이지만 잘려 나가는 것은 넋으로, 주술이 완성되면

희생물은 원래 있던 자리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되는데 몸은 살아 있지만 넋이 사라져

산송장이 된다는 것이다.

기백은 별로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여자의 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좋은 칼이고, 좋은 여자였다. 아마도 흑황의 무녀들이 고르고 고른

최상의 칼잡이일 것이다. 주술이 실패할 경우에는 칼잡이도 처형된다고 그는 알고

있었다. 죽기에는 아까운 나이로군. 그는 여자를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칼끝이 그의 목젖에 닿았다. 기백은 까딱도 하지 않았다. 여자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머리 위로 칼을 치켜들었다.

"너 하나가 죽으면 더 많은 피를 아낄 수 있다. 원망 없이 가라, 환공."

원한다면 기꺼이, 라고 그가 마음속으로 대답한 순간, 그의 몸이 의자와 함께 뒤로

홱 밀려났다. 내리쳐진 칼은 허공을 그었다. 여자의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기백이 앉은 의자는 피로 만든 쇄혼의 진 안에 갇혀 천근을 들어올리는 장사가 밀어도

움직일 수 없어야 마땅한데, 지금 그녀의 눈앞에서 허공을 향해 둥실둥실 떠오르고

있었다.

여자는 고개를 들어 쇄혼진의 상공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밤하늘에, 무엇인가 

반투명하고 희끄무레한 남자의 형상 같은 것이 떠 있었다. 실체가 없는 존재로 보이는

그 형상이 기백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으며, 기백과 그의 의자는 그리로 빨려들듯이

올라가는 것이었다. 기백은 인상을 찡그리면서 말했다.

"훼방꾼이 왔으니 이만 내 서재로 끌려가야겠군. 술을 못 얻어 마신 것이 몹시

아쉬‥‥‥."

여자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손에 쥔 칼을 날렸다. 팔십 근 박도가 작은 유엽비도처럼

원을 그리며 날아갔다. 그러나 그 칼이 기백에게 닿기 전, 기백과 그의 의지, 그리고

기백을 구한 반투명 형상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쇄혼진의 속박에서 풀려나기 직전, 기백이 들은 마지막 소리는 주술을 펼치던 늙은

무녀들의 찢어지는 비명과, 칼잡이 여자의 거친 욕설이었다. 눈을 감았다 뜨니 

자신은 원래대로 서재에 앉아 있었다.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장계 두루마리가 

산처럼 쌓인 서탁의 귀퉁이에 너무나 투명해서 반대편이 다 들여다보일 정도인

존재가 앉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기백은 그 존재, 화영을 향해 오만상을 썼다.

"왜 방해한 겁니까? 한창 분위기 좋았는데."

ㅡ분위기가 좋다니. 목이 떨어질 판이었지 않나.

화영이 되묻는 음성 또한 투명해서 도무지 실체 같지 않았다. 쇄혼진과는 느낌이

천양지차지만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기백은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화영과 접촉할 때는 항상 이렇게 꿈과 생시의 경계에서 만나곤 했기

때문이다.

"아까운 여자였는데. 내 목을 떨구지 못했으니 그 여자가 죽게 생겼군."

기백은 혀를 찼다.

ㅡ반했나?

기백은 싱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당연하지. 단칼에 자기 목을 베어낼 수 있을 것 같은 여자에게 반하지 않을 사내가

어디 있습니까?"

ㅡ그토록 죽고 싶은가?

그 질문에 대한 기백의 대답은 조금 늦게 나왔다.

"왕 된 자로서 누가 죽음을 꿈꾸지 않겠습니까?"

한동안 말없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화영이 어깨를 두드렸다. 두드린다는 것은 사실

기분일 뿐이었고, 화영의 손은 기백의 어깨를 지나쳤다.

ㅡ선양을 하고 나면 선택의 기회가 올 걸세. 죽음을 맞이하고 환생을 하든, 선적에

이름을 올리고 영생을 살든.

"전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그거 참 잔인한 선택이라는 거 알고 있습니까? 어린아이

앞에 입에는 쓰지만 몸에는 좋은 탕약과 먹으면 이를 썩게 할 단 과자를 내놓고

어느 걸 먹겠느냐고 묻는 잔인한 양반들아."

ㅡ어쩌겠나, 시황 때부터 내려오는 구주의 전통인 것을. 원망하고 싶다면

시황을 원망하게.

"만나게 해준다면 대놓고 원망해주지. 군신이라 칭송받은 학살자여, 그대가 구주의

기틀을 잡아놓은 덕분에 후인들이 이 지경으로 고생을 하고 있소. 구주의 혼돈을

정리했으면 차라리 만군을 호령해서 팔황까지 정리를 해버릴 것이지 황좌조차 

팽개치고 선계로 달아나버리면 어쩌란 소리냐고 말이야. 그래, 그 작자는 속세일

모두 잊고 잘 살고 있답니까?"

어찌된 셈인지 화영은 그 말에 쓴웃음을 짓는 것 같았다. 웃음의 윤곽조차 투명해서

고개를 돌리니 이내 지워져버렸지만. 기백은 예리하게 눈을 빛내며 캐물었다.

"선계에 또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ㅡ아직은 모르겠네. 돌아갈 수 있다면 직접 확인을 해봐야겠지.

"돌아갈 수 있다면? 그건 도 무슨 망령 난 소리입니까? 그냥 선몽에서 깨시면 될

거 아닙니까?"

화영이 쑥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ㅡ그게‥‥‥ 길을 잃었어.

"그 무슨 개도 웃지 않을 소리를."

ㅡ진짜야. 좀 무리를 하다가 길을 잃어버렸네. 꿈길을 잃으니 돌아 나갈 방도를

찾는 데 한참 걸리는군.

기백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저 관망하는 선몽이라면 무리했다 할 리 없으니, 또 무슨 수작을 벌이다가

그르친 거로군요?"

ㅡ변명은 하지 않겠네. 천수를 좀 만지려다가 헛손질을 해버렸지.

"아하, 그렇게 된 거로군?"

기백은 팔짱을 끼고 싱글싱글 웃었다.

"꿈길을 잃고 헤매다 보니 문득 이 환공 기백이 생각나더라 이 말씀이지요? 

왕좌와 함께 물려받은 제왕반으로 방향을 알려달라 하면 되겠구나 싶어서?"

ㅡ어찌 지내나 궁금하기도 했네. 미우니 고우니 해도 자네는 환주의 왕이고 나는

환주의 선계를 맡고 있는 몸이 아닌가.

"선계씩이나 맡고 있는 분을 헛손질하게 만든 천수의 주인이 누구인지 참으로 

궁금해지는 순간입니다그려. 얼마나 대단한 자의 천수를 만지려 하셨기에?"

화영이 머쓱해져 머리를 긁었다.

ㅡ말해봤자 못 믿을 걸세. 그냥 돌아갈 길이나 알려주게.

"불가근불가원. 속사나 돌보고 선계의 내밀한 일에는 신경을 끄라는 말씀으로 

알아듣지요."

ㅡ거참, 하지도 않은 타박을 챙겨 듣는 재주 하나는 용하군. 

민망해하는 화영의 중얼거림은 들은 척도 안 하고, 기백은 서탁안에서 목괘를

꺼내 열었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지름이 두 뼘 정도 되는 둥근 철판이었다. 철판

가운데에는 둥근 홈이 파여 있고 그 안에 양끝이 뾰족한 자석 침이 들어 있으며,

철판 위에는 천간과 십이지의 어지러운 도형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이 철판은 풍수가

나 지관이 쓰는 나침반과 비슷한 것으로 지남철, 혹은 패철이라고 부르는데 철판

위에 새겨진 도해는 윤도라 하였다. 지관들이 쓰는 패철과는 달리 왕이 물려받는

제왕반은 현세의 동서남북을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천계와 하계 사이에 상응하는

힘의 방향을 읽기 위한 것이었다.

"제가 보낸 밀사들은 만나보셨습니까?"

ㅡ그게‥‥‥ 아직 못 만났네. 그네들의 여독이 풀리기 전에 내가 선몽에 들어 아직

이렇게 헤매고 있으니 말이지.

"약속은 잊지 않으셨겠지요?"

ㅡ물론이지. 내가 무슨 원망을 들으려고 그걸 잊겠나?

"잊지만 않았다 하고 지키겠다는 말은 안 하시는군요?"

ㅡ하하, 그랬던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익숙한 솜씨로 제왕반의 중심을 잡고 자석침이 가리키는 방향과

천간지지의 상응을 읽어 내린 뒤 기백은 쌀쌀맞게 말했다.

"동북방 귀문을 통해 돌아가셔야겠습니다. 소사명을 밟고 구유계로 들어가 귀신

수백을 베고 곧장 나아가면 길이 보일 겁니다. 천기가 흐려 잘 보이지는 않지만

뭐 틀리면 낭패를 보는 건 제가 아니니 상관없고."

ㅡ아아, 고맙네. 일부러 제일 험한 길을 알려준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야.

"알았으면 얼른 가십시오. 약속 잊지 마시고."

ㅡ잊지는 않겠네.

화영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참."

그가 떠나기 전에 기백은 다시 불러 세워 한마디를 더 물었다.

"신어가 나타나고 가을에 따뜻한 눈이 오고 닭이 무지개가 나오는 달걀을 낳는 건

대체 무슨 까닭입니까?"

화영의 모습은 여전히 투명했으나, 기백의 눈에는 그의 표정이 갑자기 무거워진

듯이 보였다. 대답하는 소리 또한 무거웠다.

ㅡ천도무친이 깨지는 징조일세.

기백은 눈을 찌푸리고 한마디를 더 물어보려 했으나, 화영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는 혀를 차고 입맛을 다셨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아무래도 날이 밝으면

서죽을 꺼내 천기를 다시 짚어보아야 하려나.

그는 장계 두루마리를 다시 들추려다가 오늘 밤은 너무 많은 일이 있었으니 이쯤

그치는 게 좋겠다 싶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서재를 나서니 그믐을 막 지나 새로

돋기 시작하는 얇은 달이 소심한 빛을 뜰에 내리비치고 있었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칼을 능숙하게 다루던 흑황의 여인이 문득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흑황은 여러 부족이 모인 연합으로, 언뜻 생각하기에는 명백한 왕이 있는 환주에 비해

법이 엄하지 않을 것 같지만 부족의 수장들이 모여 선출하는 그네들의 한에 대한 

충성심이 워낙 높아 한의 이름으로 보호되는 규율은 목숨처럼 아낀다고 했다.

그 규율에 따라, 실패한 칼잡이인 여인은 아마도 죽었을 것이다. 늦가을로 접어드는

바람이 스산했다. 환주의 반이 여자요, 왕궁에서 일하는 사람이 반이 여자라고 해도

대란홍상을 입은 왕의 가슴을 데워줄 여인은 없었다.

쓴웃음을 흘리고 돌아서던 기백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의 서재 앞뜰에는 환주에

왕기가 서던 날 천계로부터 하사받았다는 복사나무가 서 있었다. 환주는 구주 중에

파사의 선봉이며, 환공은 환주를 지키는 제요의 칼이라는 의미를 가진 나무였다.

해마다 봄이면 이 복사나무는 화사한 흰색의 복사꽃을 가득 피워냈다.

지금은 늦가을이었다. 그러나 저녁 무렵 서재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아무 조짐이

없던 그 나무에 흰 복사꽃이 만개했다. 화영은 간 지 오래인데 아직도 꿈속인가 

싶었으나, 바람이 불자 꽃송이가 떨어져 그의 얼굴에 닿았다.

바람은 늦가을답지 않게 부드러웠다. 마치 하루도 빠짐없이 제 앞을 지나 서재를 오간

환의 왕을 더할 나위 없이 친애해왔던 나무의 정령이 그러는 것처럼, 복사나무가

부드럽게 꽃잎을 흔들며 향기를 뿌려댔다. 근 이십 년간 이 앞을 지났지만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지독한 친밀감이었다. 넋을 잃은 듯이 복사나무를 바라보던 기백의

입에서 잠시 후 한마디 쓴 욕설이 튀어나왔다.

"천도무친‥‥‥. 어느 시러베아들 같은 선인이 정 주지 말아야 할 것에 정을

주었단 말이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