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60/109)

15-2.

하늘님의 눈에 고인 물기를 보았을 때, 가스라기는 본능적으로 수하린이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녀는 수하린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그 상아처럼 천군을

살리고 싶었다. 비록 자신은 보잘것없는 가스라기이고 천수배필과는 까마득히

차이가 있지만 그래도 그를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아마도 그 이야기 속의 상아는 어머니처럼, 혹은 누이처럼 다정하고 자상하게 선인을

안고 위로했을 것이다. 하지만 가스라기는 월인 상아가 아니라서, 태세가 되려는

천군을 안고 난 다음에 제가 먼저 설움이 복받쳐 엉엉 울었다. 죽지 마, 울지 마,

그렇게 목놓아 외치면서.

아득한 시간이 지났다. 공기의 뒤틀림이 멈췄다. 달빛과 별빛이 제자리로 돌아와

다시 흘렀다. 명상의 네 기둥도 비명을 그쳤다. 이윽고 길고 긴 천군의 한숨 소리가

가스라기의 귀에 들렸다.

"이제야 알았다."

산을 하나 넘고 돌아온 것처럼 몹시도 지치고 나른한 목소리로 천군이 속삭였다.

"왜 네가 그리 무서웠는지‥‥‥."

영원히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손이 가스라기의 머리를 끌어당겨 가슴에 안았다.

"너는 나를 선인도 무엇도 아닌 필부로 만드는구나."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그 말을 입 밖에 냄으로써 천군은 태세의 문턱에 올렸던 발을

다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 대신 천도무친의 원이 이지러지기 시작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은 없지만, 돌이킬 수 없는 변화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천군은 알고

있었다. 실로 어처구니없이 작은 일로부터 시작된 어처구니없이 큰일이었다.

화영이 즐겨하는 말대로 때로는 작은 돌이 모든 것을 바꾸기도 하는 것이다.

가스라기의 눈에는 그런 것들이 보이지 않았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 바라본

천군의 눈에 더 이상 눈물이 고여 있지 않다는 것만 보였다.

"이제 괜찮아?"

천군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안 울어?"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네가 나를 위해 대신 울어주었으므로 나는 이제

울지 못한다. 나를 위해 울어주는 이가 사는 세상을 죽일 수 없으므로 울지 못한다.

천군은 가스라기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천천히 고개를 숙여 축축한 두 뺨에

번갈아 입술을 눌렀다. 인간의 눈물이란 쓰라리고 짠 것이 분명할 텐데,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흘려준 눈물의 맛은 한없이 달았다.

가스라기의 눈물도 그쳤다. 하늘님이 두 뺨에 입 맞추고 눈물을 핥아주는 동안 그녀는

꿈꾸는 것처럼 멍해졌다. 가스라기는 알고 있는 모든 고통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하늘님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고통. 하늘님에게 부정당했을때의

고통. 만나기 위해 참아내야 했던 몸과 마음의 고통. 하계에서 보냈던 긴 죽음의

겨울, 기다림과 인내의 고통. 하늘님을 만나 알게 된 고통. 만나기 전에 세월, 홀로

살아야 했던 고통. 기억하지도 못하는 태어남 그 자체의 고통까지. 진흙으로 만든 

소가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듯 그 모든 고통이 그의 입술 사이로 녹아 들어갔다.

가스라기는 겨우 마음을 놓고 배시시 웃었다. 이마에 이마를 대고 가만히 들여다보던

하늘님이 웃는 그녀의 뺨에 다시 입술을 댔다. 몇 번이나 그의 입술은 가스라기의 

입술 가까이 다가왔지만, 차마 포개지 못하고 뺨과 턱 어림을 떠돌기만 했다.

잇새로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절망이나 슬픔과는 색이 다른 탄식이었다.

가스라기의 얼굴에 다시 근심이 어렸다.

"아직 아파?"

그녀가 한마디 뱉을 때마다 뿜어지는 숨이 바로 그의 입술에 닿을 만큼 가까웠다.

"아니."

대답하는 목소리가 어딘가 화난 것처럼 무뚝뚝해서 가스라기는 다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럼 왜?"

"아무것도‥‥‥."

말끝을 흐린다. 아무래도 아픈 것 같아서 얼굴을 제대로 보려고 고개를 움직이다가

입술과 입술이 살짝 스쳤다. 하늘님이 불에 덴 것처럼 움찔 얼굴을 뗐다. 가스라기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초조한 얼굴로 가스라기의 어깨에 두 손을 얹은 채 빤히

내려다보던 하늘님이 이윽고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

닫고 다시 여는 것을 가스라기는 고개를 갸웃한 채 바라보았다. 초조한 얼굴로 

가스라기의 어깨에 두 손을 얹은 채 빤히 내려다보던 하늘님이 이윽고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 닫고 다시 여는 것을 가스라기는 고개를 

갸웃한 채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가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그만 돌아가는 게 좋겠다."

가스라기는 얼굴을 찡그렸다. 이제야 겨우 하늘님이 예전처럼 대해주게 되었는데

돌아가라니. 오늘 밤이 지나면 내일은 후자암으로 돌려보내질 테고, 다시 또 

만나기 어려울지도 모르는데. 그건 아무래도 싫었다. 고개를 저으려는 순간 하늘님이

어깨를 잡은 손에 꽉 힘을 주면서 나직하게 말했다.

"이대로 있으면 내가 또 너를‥‥‥."

마지막 말은 목구멍이 조여든 것처럼 다 맺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가스라기는 이내

하늘님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깨달았다. 악몽이라기에는 너무 귀중하고, 행복한

꿈이라기에는 너무 고통스러웠던 선총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어깨를 잡은 손이

그때처럼 뜨거운데 못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가스라기는 몸을 부르르 떨고 목을

움츠렸다.

그녀의 눈에 떠오른 두려움을 읽고 천군은 눈을 감았다. 오늘 그가 마지막으로 만난

불은 화염산의 불길이나 태양신수의 불꽃보다 더 뜨겁고 위험했다. 이 불은 제대로

붙으면 가스라기와 그를 모두 태워버릴 것이다. 범과 짝짓기를 하는 토끼는 죽음의

고통을 맛보게 되지만, 토끼를 사랑하게 된 범에게도 고통은 있다. 지금 그는 세상

무엇보다도 필부의 삶이 부러웠다. 안고 싶을 때 안고, 땀에 젖어 지친 몸으로 늦은

아침이 올 때까지 함께 잠들 수 있는 하계인의 비속한 사랑이 부러웠다.

천군은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하면서 조금씩 손에서 힘을 뺐다. 마침내 길고 차분한

호흡과 함께 눈을 뜬 다음, 관절이 하얗게 곤두선 두 손을 천천히 뗐다. 막 어깨에서

떨어지는 그의 손을 가스라기가 잡아 눌렀다. 간신히 가라앉혀둔 피가 역류하기 시작

했다. 가스라기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감았다. 그녀의 

숨소리가 천군의 귀에 아찔한 이명처럼 웅웅거렸다. 뭔가 말을 할 것처럼 달싹이던

가스라기의 입술이 서툴지만 망설임 없이 천군의 입술에 와 닿았다.

잔뜩 조여진 금의 현처럼 팽팽하던 천군의 신경이 그 순간 툭 끊어졌다. 그는

가스라기의 허리와 엉덩이를 안아 무릎 위로 끌어 올렸다. 중추 전야부터 잔뜩

곤두서 있던 신경, 길고 긴 하루의 싸움, 태세의 문턱에서 간신히 돌아 나온 직후의

피로가 그를 더이상 인내하지 못하게 했다. 창으로 들어오는 월광은 이미 은빛이

아니었다.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하계에 떨어져 있던 그때처럼, 천군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붉었다.

자신의 손길에 두두둑 뜯겨 나간 것이 옷고름인지 치마말기인지도 구별이 가지 

않았고, 정신없이 빨아대고 있는 것이 입술인지 목덜미인지도 분별할 수 없었다.

그의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는 것은 폭발할 것 같은 정념을 완전히 풀어버릴 때까지

품안의 이 작은 짐승이 도망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는 가스라기의

허리를 꼼짝도 하지 못하게 붙들었다.

그의 품안에 든 작은 짐승은 겁에 질리기는 했지만 도망가려고 들지는 않았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면서도 하늘님의 목에 감은 팔을 풀지 않았다. 무서우면

무서울수록 그녀는 더 세게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모든 두려움이 그로부터 비롯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가스라기는 그 두려움을 끝내줄 수 있는 것 역시 하늘님뿐이라는

듯이 그에게 매달렸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입에서 신음처럼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죽어도 괜찮아‥‥‥."

거칠게 탐하던 하늘님의 입술이 우뚝 멈췄다. 온몸을 휩쓸던 회오리가 갑자기 멎자

가스라기는 하나의 두려움을 잃은 대신 또 다른 두려움을 얻었다. 하늘님이 또 

밀어내면 어쩌나. 이대로 돌아가라고 하면 어쩌나.

그녀의 목덜미에서 입술을 뗀 천군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가스라기가 버럭 소리쳤다.

"싫어!"

두 무릎을 천군의 허리에 바싹 붙이며 찰싹 달라붙었다. 두 팔로는 아예 머리를 꽉

끌어안았다.

"가라고 하지 마. 싫어. 안 가. 못 가. 차라리 죽여. 가라고 하면 죽을 거야."

이윽고, 바동거리던 가스라기의 가슴팍에 천군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 웃음 섞인

탄식이 닿았다.

"가라고 말 안 했다."

그래도 가스라기는 안심하지 못했다.

"지금 말하려고 했잖아."

천군이 갑자기 손을 뒤로 돌려 머리를 끌어안은 가스라기의 팔을 풀었다. 안 놓아주려

고 애썼지만 힘으로는 당할 수가 없었다. 가스라기의 두 손을 붙잡아 내린 뒤 천군이

고개를 들더니 버럭 말했다.

"네가 간다 해도 이제는 보내줄 수도 없어!"

그제야 가스라기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아직도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천군은 그런

가스라기를 바라보았다. 천도각에 왔을때 곱게 땋아 타래를 지어두었던 머리가 반쯤

풀려 어깨에 늘어져 있었다. 옷고름이 뜯겨져 나간 저고리는 속적삼과 함께 이미

바닥에 떨어졌고, 치마말기도 반쯤 뜯어진 채로 엉덩이까지 끌어내려져 거의 벌거벗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잠깐 사이에 그가 해놓은 일이었다.

사 년 전과 다름없이 죽어도 좋으니 안아달라고 하는 가스라기였지만, 그녀의 몸은

그 짧은 세월 동안 훌쩍 자라 있었다. 마르긴 했지만 질박한 곡선을 드러낸 초승달

같은 몸이었다. 어린애처럼 골난 얼굴을 하고 있지만, 가스라기는 그새 훌쩍 여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하계 여자의 마력이란 참으로 무섭다. 하늘이 하계 여자를 만들어낸 것은 선인의

숫자를 필요 이상으로 늘리고 싶지 않아서라는, 선계인들만이 아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니까. 사 년 전과 마찬가지로 그 마력에 취해 정신을 잃고 또 거칠게 

안아버릴 뻔했다가 '죽어도 괜찮다'는 말에 간신히 이성을 되찾기는 했지만 아직도

그의 몸은 뜨겁게 일어서 있었다. 다치지 않도록 돌려보내고 싶은 마음이 굴뜩같다면,

돌려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은 태산 같으니 진퇴양난이었다.

괴로운 숨을 뿜어내던 그가 문득 생각난 듯이 가스라기의 손목을 들여다보았다.

세 개의 붉은 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꺼질듯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 손목에

입을 맞췄다. 다행이다. 수궁계가 있었던 것이다. 선계 수궁부의 존재에 이렇게

감사해본 것은 처음이었다.

손목에서 시작된 입맞춤이 팔을 타고 겨드랑이까지 흘러갔다. 가스라기가 몸을 움찔

거렸다. 수궁계 덕분에 조금 마음의 여유를 되찾은 그는 가스라기의 몸에 아직도 

두려움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천군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또 지난번처럼 정신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결심이

곤두섰다. 수궁계가 있다는 사실에 안심했기 때문인지 다행히 이번에는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설령 오늘 음계를 완전히 열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이 두려움의

앙금을 완전히 걷어내지 않고서는 앞으로 매번 안을 때마다 가스라기가 고생하게

될 테니까.

서두르지 않기로 결심한 뒤 그는 팔을 뻗어 가스라기의 머리에 불안하게 매달려 있던

머리꽂이를 뽑아냈다. 덜 풀린 땋은 머리를 한 손으로 빗어 내리면서 가스라기를 

안아 눕히고, 그 옆에 나란히 누웠다. 그리고 팔을 내밀어 그녀를 말없이 불렀다.

가스라기의 눈이 빛났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그의 품안으로 들어왔다. 하계에서

한때 그녀를 편히 잠들게 해주던 팔베개였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목

뒤로 넘겨주는 손길이 느껴졌다. 다리에 걸린 치맛자락을 걷어내는 손길이 느껴졌다.

어느 사이에 알몸이 된 것인지 천군의 다리가 가스라기의 다리 사이로 들어왔다.

그때의 고통을 몸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움찔했지만 다행히 그저 다리를 감아

당길 뿐 무섭고 아픈 일은 시작되지 않았다.

대신 발가벗은 몸을 맞댄 채 길고 긴 입맞춤이 시작되었다. 먼저 천군의 입술이 

귓볼에 와서 닿았다. 간질간질한 느낌 때문에 목을 움츠리자 목덜미에 손이 와 닿더니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뺨과 턱을 따라 움직이던 입술이 달아오른 숨과 함께 포개질

때, 가스라기는 잠깐 저녁나절의 일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내 머릿속에서 털어버렸다.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은 가짜 하늘님이 아니다. 진짜 하늘님이다.

혀가 입술의 문을 두드렸다. 가스라기는 도망치지 않고 입술을 열었다. 그녀는 절대로

도망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죽어도 괜찮다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었다.

이 길이 하늘님을 향해 뻗은 것이라면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심이 가스라기를 지금까지 버티게 해준 힘이었다. 지금 이 자리라고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입속으로 들어온 혀에서 축축한 갈망의 맛이 났다. 가스라기는 그 갈망에 응했다.

좀 심하게. 그녀는 천군의 혀와 입술을 거의 깨물 뻔했다. 천군이 눈을 떴다. 입술을

맞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천군의 눈이 엎드린 초승달처럼 웃음을 지었다.

가스라기의 등을 안고 있던 손으로 두어번 다독거린 뒤,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 손길이 가스라기에게 말하는 듯 했다. 천천히, 천천히, 두려워하지 말라고.

손이 말하는 바를 따라 그녀는 천천히, 천천히 움직이려고 애썼다. 처음에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간질간질하고 애가 타는 이 느낌은 앞만 보고 달려온 가스라기에게는

정말로 낯선 것이었다. 차라리 숨 막히는 고통과 헐떡이는 질주 쪽이 익숙하고 견디기

쉽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가스라기는 질끈 눈을 감았다. 마치 몸속에 풀리지 않는

멍울이 생겨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해소할 길 없는 간지러움과 열기로 똘똘

뭉친 작은 공이었다. 

등을 쓰다듬던 손길이 엉덩이로 내려가 매암을 돌다가 바싹 끌어당기자 그 공은 조금

더 커지고 단단해졌다. 가스라기의 잇새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자신의 신음 소리에

놀라 그녀는 눈을 떴다. 천군은 진작부터 눈을 뜨고 있었던 모양으로 그녀를 보고는

또 웃으며 이마에 입을 맞추고, 엉덩이를 안고 있던 손을 허리로 옮겼다. 완만한

봉우리의 굴곡진 선을 따라 흐르는 아침나절의 구름처럼 유연하게 쓰다듬던 손길이

가슴을 아래쪽부터 감싸 쥐자 몸속의 공은 깜짝 놀란 것처럼 굳었고, 촉촉한 빗방울이

떨어지듯 입술이 젖꼭지를 머금자 공은 미친 듯이 튀어 올랐다.

손과 입술이 만드는 신음과 탄식의 바다에 가스라기는 점점 빠져들었다. 공은 자꾸

커지고 단단해져서 이대로 가다가는 그녀의 몸을 꽉 채우는 것으로 모자라 터져버릴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꾹 참고 꼼짝하지 않으려 했던 몸이 진땀으로 젖고

열기로 달궈져 꿈틀꿈틀 움직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녀는 견디지 못하고 손에

닿는 것을 꽉 움켜쥐었다.

천군의 신음 소리가 들려와 가스라기는 눈을 떴다. 자신의 손톱이 그의 가슴에 길게

새겨진 흰 상처 자국을 후벼 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화들짝 놀랐다.

"미안해. 미안해. 아파? 많이 아파?"

그녀는 어쩔 줄 모르고 허둥거렸다. 흉갑을 벗기면서 스친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워했던

상처인데 얼마나 아팠을까 생각하니 제 살이 후벼진 것 같았다. 울먹이던 가스라기는

그의 상처에 입을 대고 핥았다.

"넌 언제나 나보고 아프지 않느냐고 묻는구나."

상처를 핥는 가스라기의 뺨에 손을 대며 천군이 말했다. 가스라기는 그의 가슴에서

입을 떼지 않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속삭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팠으니까."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건 변할 수 없다. 그는 그녀가 처음으로 주운 상처 입은

사람이었다. 그녀의 삶은 그로 인해 짐승의 삶이 아닌 다른 것으로 변했다. 그의

상처를 냄새 맡고 핥아주는 것이 가스라기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기쁜

일이었다.

상처를 핥아대는 가스라기를 뭐라 말 못할 눈으로 내려다보던 천군도 다시 그녀의

몸을 핥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마치 두 마리의 다친 짐승처럼 서로 얽힌 채 보이는

상처와 보이지 않는 상처를 핥고 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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