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8/109)

14-4.

신수록에 기록된바, 급으로 따지면 태초에 만들어진 일급 신수요, 계열로는 태양신수

이며, 형상은 화안금정수, 천수에 정해지기를 보천궁의 진선 천군에게 봉공하며

봉명은 백문산예 그 주인만이 부를 수 있는 수호는 수안니라 하는 신수가 모년 중추의

밤에 비로소 천수를 받드니 공순서약에 따라 만약 불경함이 있을 시에는 주인이 

부르는 이름이 곧 시호가 되리라 하였다.

"마음에 안 들어."

운중석해에서 천도각을 향해 날아가면서, 수안니는 계속해서 투덜거렸다. 이름을

얻었다고 해서 성질이 어디로 가지는 않는 것이다. 수안니의 등에 탄 천군이 물었다.

"또 뭐가?"

"네놈이 왜 몸의 상처는 안 돌보고 겉으로 드러난 상처부터 급히 고쳤는지 

알아차렸단 말이다."

어찌어찌 무릎을 꿇리기는 했지만 이 영수에게서 '주이님'같은 상식적인 칭호를

들을 기대는 아예 접는 게 낫겠다고 천군은 생각했다.

"네놈이 그렇게 멀쩡한 꼴로 돌아오면 선인 나부랭이들은 물론이고 네놈을 모시는

천도각의 선녀들도 몽땅 착각할 게 아니냐! 네놈이 머리털 하나 그슬리지 않고 나를

제압했다고! 잘난 척하려고 그런 거지?

천군은 피식 웃었다. 

"수안니, 너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할 거다."

"뭐? 비록 내가 망할 놈의 천수 때문에 이 꼴이 되긴 했지만 못하는 게 없는 태고의

신수이신데 못하는 게 있을 리가!"

"너희들은 거짓말을 못하지."

"그, 그건 그렇지만."

아래쪽 천도각의 별 같은 불빛을 보며 천군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그러니까 이해하지 못할 거다. 알고도 속아주고, 속아주는 걸 알면서도 하는 

거짓말이라는 것을 말이지. 그들은 내가 하는 말을 믿어야 할 의무가 있고, 나는 

그들을 걱정하지 않게 만들 의무가 있다. 그것이 선녀들과 나의 관계야."

수안니는 눈을 굴리다가 음침하게 말했다.

"그럼 내가 선녀들에게 사실 네가 많이 다쳤다고 확 말해버리면 네놈이 좀 곤란해지는

거냐?"

"그러면 나는 수신고 울리고 나니 새로 거둔 영수가 어린애처럼 펑펑 울면서 

서러워하더라고 일러야겠지. 주종이 함께 무색해지겠군."

"쳇."

"그만 툴툴대고 내려가자. 다들 기다리고 있으니."

천도각을 향해 내려가려던 수안니가 잠깐 멈칫하고 물었다.

"어이, 하나만 더 물어보자. 그 계집은 어떻게 할 거냐? 분명히 말해두지만 난

거짓말 안 했다."

정식으로 하늘에 고한 영수와 단둘이 있는 때라 풀어져 있던 천군의 표정이 다시

굳었다.

"쳇, 네놈이 천수배필의 눈을 속일 수 있어도 하늘이 정한 주종 관계인 내 눈은‥‥‥.

젠장, 이런 걸 내 입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몹시 싫다만, 아무튼 어절 거냐? 응?"

"수안니."

"응?"

"다른 건 상관없지만, 이거 하나만은 지켜라.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한 번 말하면

들어."

"무슨 소리야?"

"그만 내려가자고. 다들 기다리고 있으니."

수안니는 투덜거리면서 천도각으로 내려갔다. 앞으로 지긋지긋하게 보게 될 천도각

선녀들의 기를 좀 잡아놓아야겠다는 생각에, 일부러 대전의 월출창으로 날아 들어가

네 발로 바닥을 세게 디뎠다. 무시무시한 콰르릉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으니 간 작은

선녀들 이 기겁을 할 줄 알았는데 웬걸, 대전에 그림처럼 도열한 선녀들은 눈도 깜짝

하지 않고 천군에게 대례를 올렸다.

"무사히 영수를 얻어 돌아오심을 경하드립니다."

수안니의 등에서 내려선 천군이 응답했다.

"고맙소. 오랜 시간 기다리느라고 다들 노고가 컸겠소. 그런데‥‥‥."

천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뒤에 가스라기의 모습이 보였다. 얼른 시선을 옮겼다.

"상아는?"

상아각의 선녀가 앞으로 나와 수하린에게 일어난 일을 고했다. 천군의 안색이 

굳어졌다.

"원인은? 의선각에서는 뭐라고 하던가?"

"불명이라 했습니다. 다만, 온혜선고께서는 혹시나‥‥‥."

잠깐 말을 머뭇거리기에 눈길로 재촉하자 선녀가 대답하기를.

"중추 가배에 나온 그 토끼에게 천수혼돈이 일어난 바 있는데, 상아께서 일전에 그

혼돈을 풀어주며 명을 나눠주셨다 합니다. 혹시 그 문제 때문이 아닐까 짐작만

하신다고‥‥‥."

천군은 미간을 찡그렸다. 천수에 개입했다가 그 반탄력 때문에 탈이 난 거라면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작용한 동기가 있을 것이다. 그게 대체 뭘까?

"상아각으로 가봐야겠군."

바로 출발하려는 천군을 상아각의 선녀가 말렸다.

"상아께서는 좀 전에 기력을 되찾으셨고 이제 안정을 취하셔야 한다고 합니다. 

진선께서 무사히 수신례 치르셨다는 이야기 들으시고 경하의 말씀 전하라 하셨습니다.

마중하지 못한 것을 사죄드리고 오늘은 부디 푹 쉬시라는 말씀도 함께."

말은 공손하지만, 수하린이 그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기색이 보였다. 하긴,

힘든 수신례를 마친 그를 배려하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천군은 별수 없이 가던 걸음을

거두고, 천도각의 선녀들에게 수안니를 소개했다.

"이제 천도각의 새 식구요. 성질은 좀 고약하지만‥‥‥."

수안니가 으르렁거렸지만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럭저럭 귀여운 구석도 있는 녀석이니 잘 부탁하오. 오늘은 많이 지쳤을 테니 

잠들기 전에 선향을 좀 피워주시오."

선녀들은 웃음기 머금은 얼굴로 예, 대답했다.

"진선께서도 피곤하시겠습니다. 예장 푸시고 이만 쉬셔야지요."

천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아각의 선녀가 조심스레 말했다. 

"상아께서 예장 해제도 장원한 새내기 선녀에게 시키라 전하셨습니다."

천군의 얼굴은 태연했지만 소매 아래에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가장 힘든 순간이었

다. 수하린의 명을 받은 상아각 선녀의 부름에 따라 가스라기는 앞으로 나왔다.

나와서도 천군의 얼굴을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먼저 천마화부터

벗겼다. 신을 벗겨낼 때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 뒤로 돌아가서 흉갑을 벗길 때, 그 이상한 느낌은 좀 더 뚜렷해졌다. 

흉갑과 신발이 살에 스칠 대 아주 조금이지만 천군의 몸이 움찔거린 듯했다. 이상하다

여기며 마지막으로 관을 벗겼는데 이번에는 천군이 움찔한 것이 아니라 가스라기가

움찔했다.

"고맙다."

예장을 갖추는 일부터 푸는 일까지 모두 맡아서 한 것에 대한 처하인지, 천군이

별안간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이미 얼굴을 돌린 후였다.

하지만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것도 못 보게 되지는 않는다. 가스라기는

천군의 턱을 보았고, 그것으로 그녀가 알아보아야 할 것을 알기에는 충분했다.

툴툴거리는 수안니를 후원에 자리 잡을 수 있게 데려다주고, 천도각의 선녀들 모두에게

치하한 뒤, 내전에 들어 번서는 선녀에게도 오늘은 달리 필요한 일 없으니 가서 쉬라

내보내고 나서야, 천군은 혼자가 되었다.

가배와 수신, 중추가 드디어 끝난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홀로 상처를 치료하는 

일뿐이었다. 천군은 명상에 걸터앉아 천의를 내리고 몸의 상처를 확인해보았다.

붉은 것은 화염산이 남긴 상처고, 흰 것은 수안니가 남긴 상처였다. 화염산의 불이

남긴 상처는 피륙의 상처라 차라리 괜찮았다. 벌써 몇 군데는 저절로 아물어가고 

있었다. 문제는 수안니가 낸 상처였다. 화독이 안으로 쌓여 몰아내려면 밤새 운기를

해야 할 듯했다.

의선녀들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만, 어차피 진선은 등급의 보패에 입은 상처가

아니면 대부분 혼자 치료가 가능했다. 하루, 길면 이틀. 부상을 입고 돌아왔다는

것을 측근 선녀들도 짐작 못하는 바는 아닐 테니 일단 한동안은 번잡한 일은 

막아주겠지. 운기가 끝나고 화독을 모두 몰아내면 무엇부터 해야 할까? 크게는 제석의

일이 남았고, 수하린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 건지도 알아보아야 하는데‥‥‥.

화영이 선몽에서 깨어나는 대로 광명정에도 한번 가 봐야 하고, 아, 남화궁에도

다녀와야 하는데‥‥‥. 아니, 하지만 그전에 일단 오늘은 운기부터‥‥‥.

불이 남긴 상처를 돌보다가, 천군은 제 마음속에서 이글대는 불덩이를 발견했다.

아무리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못 본 체하려고 해도 무시할 수 없는,

이글이글 타는 몹쓸 마음.

가스라기‥‥‥.

가스라기가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된다. 그것도 그의 가장 큰 적인 지한의 여자.

몸도 마음도 모두 그의 것이 된다.

'원래 내 것이 아니었어. 봤잖은가. 그 아이의 미래에 있을 인연을!"

하지만 누구인지, 언제일지도 모를 미래의 인연을 보았을 때와는 기분이 달랐다.

얼굴도 실체도 정확히 보이지 않는 미래의 인연에 대해서는 이런 아픔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저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가는 물을 보는 씁쓸함을 느꼈을 뿐이다. 하지만

이건 달랐다. 가스라기가 지한의 여자가 된다는 사실이 마치 불타는 칼로 심장을

수비는 것처럼 아팠다. 그렇게 모진 말을 해대고 밀어내도 언제나 자신을 바라보던

눈이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을 보지 않게 된다는 것이 사무치게 아팠다. 아픈 자리가

아물기는커녕 점점 더 벌어졌다. 천군은 턱없는 자조를 느꼈다.

'내가, 그래, 이 잘난 선인 나부랭이인 내가‥‥‥ 그 아이에게 그리 모진 말을 해댈

수 있었던 건‥‥‥ 그래도 그 아이는 나를 따를 거라고‥‥‥ 그렇게 믿었던,

오만 때문이었던가. 그것이 깨져서 지금 이렇게 흔들리고 있는 건가.'

주렴이 찰그락 흔들렸다. 천군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둠 속에 가스라기가 서

있었다. 천군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루 종일 불에 당했는데, 마지막까지 발등에 불이 떨어지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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