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7/109)

14-3.

화염산 기슭. 중심부에서는 벗어났지만 여전히 불덩이가 튀고 용암의 내가 흐르는

곳에, 거대한 짐승 한 마리와 선인 하나가 죽은 듯이 늘어져 있었다. 화안금정수와

천군이었다. 바위처럼 움직이지 않던 둘 중에 먼저 꿈틀 몸을 일으킨 것은 천군이었다.

천의는 거의 다 타서 흔적만 남고, 이른 아침에 가스라기가 빗어준 긴 머리카락도

불에 그슬려 엉망진창인 데다, 얼굴도 몸도 온통 희고 붉은 상처 자국으로 가득했다.

보패에 입은 상처가 아니라 피는 흐르지 않았지만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도 천군의 손은 화안금정수의 갈기를 꽉 붙잡은 채였다.

"망할 놈."

화안금정수가 끄응 신음과 함께 말을 내뱉었다. 천군이 갈기 잡은 손으로 화안금정수의

머리를 지그시 누르면서 말했다.

"말버릇 고쳐라. 이긴 건 나니까."

화안금정수는 다 죽어가는 소리로 시시시 웃었다.

"틀렸다. 자시까지 돌아가야 시험이 끝나는 거다. 날 끌어내긴 했지만 넌 시간에 못

맞췄어. 별을 봐라. 이미 자시에 들어섰다고. 반 시진 내로 보천궁에 돌아갈 방법은

없을걸."

"돌아갈 거다."

천군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한 손을 들었다. 화염산의 하늘 위에서 기다리던 그의

비검이 날아왔다.

"무슨 수로?"

화안금정수가 씩씩거리며 물었지만 천군은 대꾸도 안 하고 비검에 걸어두었던

기린관을 벗겨 머리에 썼다.

"무슨 수로 돌아갈 거냐고!"

화안금정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천군이 가부좌를 틀고 앉으며 눈을 감았다.

"기다려. 일단은‥‥‥ 회복을 하고."

치유와 자애의 힘을 지닌 기린관을 빌려 천군이 회복하는 동안 화안금정수는

입으로만 투덜거리며 벌렁 누워 있었다. 천군의 타버린 머리카락이 도로 길어지고,

쪼가리만 남은 천의가 원래 모습대로 자라기 시작했다. 화안금정수가 얼굴에 그은

흰 발톱 자국들도 스르륵 사라졌다. 일각 만에 천군은 최소한 겉모습만은 말짱해졌다.

화안금정수는 있는 기운 없는 기운 다 짜내서 비아냥거렸다.

"흥, 겉만 번지르르한 놈! 더 아픈건 몸의 상처일 텐데 얼굴부터 고치냐?"

천군은 귀찮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기린관을 벗더니 화안금정수의 머리통 위에

얹었다. 화안금정수는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뭐냐?"

"기운을 회복해라. 같이 돌아가야 하니까."

"네놈 몸의 상처부터 고쳐."

"됐어. 견딜 수 있으니까."

잘난 척하지 마라, 그래서 네놈이 재수 없다 어쩌고 하면서 버럭버럭 질러대는 소리를

무시하고 천군은 재빨리 교룡갑을 두르고 천마화를 신은 다음 비검을 검집으로 

회수하고 옷 밖으로 드러나는 목덜미나 손 같은 부분에 혹시 상처가 남지는 않았는지

꼼꼼히 짚어보고 나서야 자리에 앉아 화안금정수가 움직일 힘을 되찾을 때까지

기다렸다.

일각이 지나자 화안금정수도 일어설 정도가 되었다. 네 다리를 쭉 펴며 일어선 

화안금정수는 하늘을 향해 몇 마디 욕설을 지껄였다. 선계와 신수들이 벌인 아득한

옛날의 큰 전쟁 이후로, 이렇게 개고생을 해본 것은 처음이었다. 천군이 기린관을

회수해 머리에 얹으며 일어섰다.

"자, 돌아가자."

"무슨 수로?"

"빛으로."

천군의 대답에 화안금정수는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 놀랐다.

"뭐, 뭐? 너 지금 광둔술을 쓰겠다는 거냐?"

"내가 쓰겠다는 게 아니라 너보고 쓰라는 거다."

"미, 미쳤냐!"

"넌 태양신수고, 광둔술을 쓸 능력이 있어, 다만 좀 더 안전한 화둔에 의존하는

것뿐이지."

"당연하지! 방향도 잡기 힘들고 괜히 서두르다가는 중간에 무주고흔이 된단 말이다!

난 절대 광둔술은 쓰지 않을 거다!"

"방향은 내가 잡을 거고, 지금은 서둘러야 할 필요가 있는 때다. 그리고‥‥‥."

천군이 지그시 내려보며 덧붙였다.

"네 주인으로서 첫 번째 내리는 명령이다, 수안니."

수안니란 화안금정수의 수호다. 수호란 그 주인만 부를 수 있는 이름이다. 만약

세상에 태양의 기운을 타고나 화안금정을 가진 사자 모습의 신수가 또 있다면 그것

도한 화안금정수라고 불리겠지만 수안니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이제 천군의 

영수가 된 이 화안금정수 하나뿐이다.

사 년 전 하계에서 화안금정수가 공격했을 때, 천군은 이 이름을 불러 그를 물러가게

한 적이 있다. 본래는 수신례를 치르고 난 다음부터 부를 수 있는 이름이지만 그때는

다급한 김에 임시변통으로 그 이름을 썼던 것이다. 그 이름으로 불린 화안금정수,

아니 수안니는 그때도 그러했던 것처럼 이제 천군의 명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젠장! 네놈도 광둔술 따위 써본 적이 없을 텐데 무슨 재주로 방향을 잡겠다는 거냐?"

"걱정 마라. 귀월의 맥을 쫓아가면 되니까."

"난 책임 안 진다."

"잘 생각했다. 책임은 내 몫이니 그만 투덜거리고 출발하자."

"망할! 좋아, 타라! 수신고가 울려 종이 되기 전에 네놈과 함께 무주고혼이 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수안니가 네 다리에 힘을 주고 몸을 부르르 떨며 갈기를 세웠다. 천군이 그 등에 

올라타자마자 출발한다는 소리도 없이 펄쩍 달빛을 향해 날아올랐다. 그리고 다음

순간, 천군과 수안니의 모습을 빛 속에 녹아 사라졌다.

빛에서 빛으로 건너뛸 수 있는 것은 빛뿐이라, 광둔술을 행하는 자는 그 자신도 빛이

되어야 한다. 빛이 된 순간에는 시간도 공간도 무의미해지며 무량하고 무극한 것에

가장 가깝게 되니, 가야한다는 목적도 잊고 가야 할 방향도 잊어버리기 십상이다.

광둔술을 쓸 수 있었던 선인들 중에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서 더 이상 돌아오지 

않게 된 이가 적지 않다. 그들이 어디로 가버렸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천군도 지금 바로 그곳에 있었다. 모든 것이 정지한 공간에. 화염산이 토해내던 불의

기침도 분화구 위에 멈춰 있고, 흐르던 용암도 굳어 있었다. 달은 구름에 가린 채

꼼짝하지 않고, 가물대던 별도 딱 가물대던 순간 그대로였다.

ㅡ자, 방향을 말해라. 내 눈에는 보천궁의 방향이 보이지 않아. 수안니의 소리가

의식 속으로 가늘게 밀려 들어왔다. 화염산에서 보천궁은 동북쪽 방향이지만, 단지

그 방위가 아니라 그 사이에 노정한 아득한 거리가 문제였다. 천군은 귀월의 맥에

집중했다. 언제, 어느 때라도 진선은 천수배필이 있는 곳, 돌아가야 할 곳을 알 수

있다. 신선들 중에는 간혹 하계에 나갔다가 돌아가야 할 선계의 방향을 잃고 수십 년

동안 유랑하는 경우도 있지만 진선에게는 그런 일이 없다. 그들에게는 하늘이 정해준

북극성이, 짝이, 귀소의 근본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짚이지 않았다. 수하린이 느껴지지 않았다. 가야 할 곳이 보이지 않았다.

당황스럽다거나 아찔하다는 말 정도로는 표현할 수 없는 순간이 천군에게 찾아왔다.

ㅡ서둘러! 빨리 건너뛰지 않으면 이대로 우리는 빛에 섞여서 떠돌게 된단 말이다!

수안니가 재촉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수하린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이 틀립없다.

십중팔구 그가 돌아올 때까지 추일의 맥을 유지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맥을 놓친 정도가 아니라 아예 흔적조차 없으니, 정신을 잃었거나 아니면 그에 

준하는 어떤 변고가 생긴 게 틀림없다.

수안니의 재촉, 정지된 시간, 그리고 점점 무량과 무극에 가까워지며 흩어져가는 존재

사이에서, 천군은 귀월의 맥을 틀었다. 어떤 반응을 기대하고 해본 것은 아니었다.

반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고 나머지 반쯤은 화안금정수와 함께 영원히

무극무변의 세계를 떠도는 의식 없는 빛의 한 입자가 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돌아보겠다는 심정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응답을 들었다.

하늘님, 돌아와. 제발.

돌아와서‥‥‥.

ㅡ천군!

수안니의 단말마 같은 재촉에 천군은 대답했다.

ㅡ찾았다.

돌아와서‥‥‥ 아무것도 안 해줘도 좋으니까 제발. 그냥 돌아와서 얼굴만이라도 보게

해줘. 안 그러면 또 길 잃어버릴 것 같아. 난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눈도 나쁘고,

바보인 데다 참을성도 없어서 또 속을 거야. 하늘님하고 비슷하게 생긴 사람 보면

따라가 버릴지도 몰라.

가스라기는 간절히 빌고 있었다. 수하린 대신 대전에 모여 정좌한 선녀들의 맨 뒷줄에

끼어 앉아서 그녀만의 방식으로 천군의 귀환을 빌고 있었다. 비록 귀월의 맥을 대신할

수는 없겠지만 모든 선녀들이 주선의 무사귀환을, 그리고 상아의 옥체강녕을 빌며

초조한 시간을 보냈다.

자정이 약간 넘었을 때, 대전의 창으로 비합전서가 푸드득 날아 들어왔다. 전서의

주인인 선녀가 일어나 새를 받아 들고 잠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더니, 환한

얼굴로 뭇 선녀들을 향해 말했다.

"돌아오셨답니다!"

선녀는 모두가 궁금해하는 일의 성패도 곧바로 알려주었다.

"화안금정수를 무사히 길들이셨대요. 방금 수신고가 세 번 울렸답니다."

대전 안의 선녀들이 모두 손을 맞잡고 기뻐했다.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다른 선녀들의

비합전서가 잇다라 날아 들어와서 운중석해 쪽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자시 중순 폐회 직전에 천군과 화안금정수가 광둔술로 운중석해 상공에 곧바로 

나타났다던가, 수신고 앞에서 천군에게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린 화안금정수가 

갑자기 불꽃의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 어린애처럼 울어대는 통에 다들 아연해했다던가

하는 뒷이야기가 거의 시간차를 두지 않고 천도각의 대전에 곧바로 중계되었다.

"영수가 그리 울어댔으면 천군께서는 어찌하셨을까요?"

"보나마나 뻔하지 않겠어요? 우리 진선께서는 딱 세 마디 하셨을 겁니다."

"뭐라고?"

"첫 마디는 '울지 마' 두 번째는 '울지 말라니까' 세 번째는 '울지 말랬잖아!'

아니겠어요?"

활달한 선녀들은 그런 이야기를 소곤대면서 웃었다. 신중한 선고들은 천군이 혹

부상은 입지 않았는지 걱정하기도 했다. 비합전서가 전한 소식에 의하면 옷자락 하나

타지 않은 말짱한 모습이라고 하니 모두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군요."

다행인 소식이 또 하나 있었다. 수하린의 용태가 많이 좋아져 정신을 차렸다는 

의선각의 전갈이었다. 천도각 선녀들은 안팎 윗전의 일이 모두 무사히 풀리자 겨우

얼굴의 그늘을 걷었다.

"막 수신회가 폐회한 모양입니다. 일각 이내에 주선께서 도착하실 테니 이제 모두

준비를 하지요!"

선녀들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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