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길 잃어버렸네."
가스라기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반 시진마다 한 번씩, 벌써 서너번째 같은 말만
중얼거리고 있었다. 낙담한 채로 천도각을 빠져나와 바람을 쐬면서 천도봉을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다가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 한참 전. 그때는 해도 지지
않았는데, 지금은 이미 밤이었다. 천도봉이 넓기는 하지만 지나가는 선녀하나 만나지
못했다. 딱히 천도각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곳은 역시 자기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내 자리는 어디일까? 아무 데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운교와 백화가 있는
후자암으로 돌아가고 싶기도 했지만 길도 모르는데다 더 걸을 기분이 아니었다.
하릴없이 아무 나무 밑에나 주저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가끔씩 길 잃었네,
길 잃어버렸네, 하지만 어디로 가지, 중얼거리면서.
문득 낑낑거리는 강아지 울음소리가 들려와 가스라기는 고개를 돌렸다. 강아지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주위가 이상하게 변한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분명히 밤은
밤인데, 새벽처럼 푸르스름했다. 시간이 그새 이렇게 흘러갔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땅을 짚고 있던 손에 복슬복슬한 것이 와 닿았다. 내려다보니 주먹만한
강아지였다.
꼬리를 바쁘게 흔들면서 헥헥거리는 모습이 쓰다듬어달라고 조르는 것 같았다.
가스라기가 무심코 그 머리에 손을 올리려는데, 쯔쯔 혀를 차서 강아지를 불러들이는
소리가 나무 몇 그루 저편에서 들려왔다.
강아지가 또 바쁘게 꼬리를 흔들며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달려갔다. 나무 사이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오더니 허리를 굽혀 강아지를 손으로 잡았다. 고개를 들던 그가
문득 가스라기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가스라기는 놀라지도 기뻐하지도 않았다.
하늘‥‥‥. 아냐. 또 가짜 하늘님일 거야. 그래, 내 눈에는 똑같이 보이지만 분명히
가짜 하늘님이야. 하늘님이 여기 있을 리 없잖아.
"또 너냐?"
거봐, 맞지. 가스라기는 기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도봉에 있는 줄 알았는데?"
"길 잃었어요."
지난번처럼 당황하지도, 달아나려고 기를 쓰지도 않을뿐더러, 대답하는 목소리에
매가리 하나 없는 가스라기를 지한은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 잡힌
효천견이 낑낑거렸다. 효천견을 봉령주로 거둬들이려던 지한은 잠깐 생각을 접고
다시 땅에 풀어놓았다. 효천견은 풀과 돌멩이 사이를 팔팔 뛰어다녔다.
가스라기가 눈으로 효천견을 좇는데, 어딘가 멍한 것이 아무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지한은 걸음을 옮겼다. 그가 옆에 와서 앉을 때까지도
가스라기는 그저 무방비 상태로 개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 참."
지한은 기가 막혀 웃음을 흘렸다. 날 잡아 잡수 하고 넋 놓고 있는 것도 이쯤 되면
아예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 없는 경지였다. 천도봉에 있어야 할 계집이
어째서 연화봉 초입에서 길을 잃고 헤매며, 간밤 내 소원하던 놈의 품에 안겼을 테니
희희낙락하고 있어야 할 얼굴이 어째서 이렇게 혼 빠진 꼴이란 말인가.
"오, 알겠다."
문득 짐작 가는 바가 있어 지한은 히죽 웃으며 가스라기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또 버림받았군. 그렇지?"
가스라기는 힐끔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비스듬히 숙인 가스라기의 이마와 얼굴, 그리고 목덜미에 지한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가 고개를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그림자가 옮겨졌다.
"이 개도 영수예요?"
묻는 말에 대답은 안 하고 슬그머니 말을 돌리는데도 지한은 그다지 탓하고 싶지
않았다. 묘한 기분이었다.
"영수는 아니다. 반은 살아 있지만 반은 물건이나 다름이 없지."
건성으로 대답하긴 했지만, 목소리도 어딘가 부드러워졌다. 가스라기가 효천견의
귀를 만지며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따뜻한데?"
지한은 새벽같이 푸른빛 속에 잠긴 가스라기의 귀를 바라보았다. 제멋대로 흩어진
몇 가닥 머리카락 위로 지한의 그림자가 고개를 기울였다.
"아예 물건이 되어버리면 곤란하기 때문에 가끔 밖에 내놓아서 숨을 쉬게 해주는
것뿐이야. 천군이 화안금정수를 얻는다면 이쪽에서도 대비를 해야 하고‥‥‥."
무심히 대답하다가 문득 말을 끊었다. 지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내가 왜 너랑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어야 하는 거지?"
효천견이 지한의 손에 머리를 비볐다. 지한은 효천견의 머리를 홱 밀어냈다.
"영수 따위 귀찮아. 칼이나 방패 같은 도구에 불과한 짐승에게 무슨 이름을 붙이고
예식이니 뭐니."
가스라기는 그런 지한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효천견이 뿜어내는 푸른 새벽빛
때문일까?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데도 가짜 하늘님이 진짜 하늘님처럼 보였다.
그것도 진짜 하늘님과는 달리 손만 내밀면 잡을 수 있는 아주 가까운 하늘로.
가스라기는 천천히 효천견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나 같으면 조금 더 귀여워해줄 텐데."
지한이 이죽거렸다.
"네 하늘님처럼 널 버려두지 않고 말이지?"
또 두 눈 똑바로 뜨고 악을 쓰며 하늘님 역성을 들 줄 알았더니 잠잠 아무 소리도
없었다. 그러고 나오니 뭐라고 한마디 더 이죽거려줄 의욕도 생기지 않았다.
지한도 입을 다물어버렸다.
만월 아래로 구름이 지나갔다. 기묘한 중추의 밤이었다. 어제는 제 하늘만 눈 빠지게
쳐다보던 그녀가 지금 그의 앞에서는 땅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제와 같은 것이
있다면, 여전히 지한은 그녀를 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제와는 무척이나 다른
기분이었지만.
가까운 풍경도, 먼 풍경도 보이지 않고 가스라기와 자신을 둘러싼 새벽의 푸른빛만
진했다. 괜히 화가 나면서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마음도 일지 않았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가스라기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눈동자는 물론이고 발그스름한
작은 귓바퀴와, 거기 돋은 솜털 하나하나까지도 또렷하게 보였다. 선인이 된 후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기묘한 몰닉이었다.
지한은 충동적으로 다가갔다. 그곳에 그라는 칼을 끌어당기는 자석이 있어서 다가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처럼. 지한의 입술이 가스라기의 귀 밑에 닿았다. 거기서
잠깐 멈추고 가스라기가 어쩌는지 기다렸다. 움찔, 그리고 조용했다.
그녀는 피하지 않았다.
지한은 눈을 감고 천천히 가스라기를 맛보기 시작했다. 맥박이 뛰는 따스하고 작은
귓볼과 거기 드리워진 머리카락, 화장기 없는 맨살의 촉감을 따라 목덜미와 뺨을
오가며 입술을 움직였다. 따뜻했다. 하계 여자 특유의 살 냄새도 느껴졌다.
찝찔하면서도 달콤하고, 뜨겁고, 피가 흐르고 심장이 뛰는 살아 있는 야생동물의
살냄새였다. 수궁도로 온몸을 철저히 보호한, 그래서 나긋나긋하지만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는 선녀들과는 달랐다. 지한은 조금씩 거친 숨을 내뿜으며 가스라기의
입술을 향해 움직였다. 체념한 듯이 반쯤 벌린 채 그를 기다리는 입술 사이로
달아오른 혀를 밀어 넣으려는 순간,
"꿈이야‥‥‥."
넋을 잃은 듯 먼 곳을 바라보면서 가스라기가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똑같아? 꼭 하늘님처럼‥‥‥. 하지만 아냐, 아냐. 이건 꿈이야!"
지한은 눈을 떴다. 찬물을 뒤집어쓴 듯한 섬뜩한 느낌이 등골을 스치고 지나갔다.
가스라기가 그를 밀어내고 일어나서 뒤돌아 달렸다. 잡으려면 못 잡을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달아나도록 내버려두었다.
머리가 조금씩 맑아졌다. 마치 꿈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선인은 선몽 외의 꿈은 꾸지
않는다. 하지만, 좀 전까지의 일은 말 그대로 꿈과 같았다. 지한의 표정이 원래대로
서서히 돌아오자, 낑낑거리던 효천견이 꼬리를 말고 엎드렸다. 효천견에게서 나오던
새벽의 푸른빛이 옅어졌다. 지한은 아직도 뜨거운 기운이 남은 이마에 손을 대고
쿡쿡 웃었다.
"이 무슨 바보짓을. 설마‥‥‥."
그는 눈을 들어 캄캄한 하늘은 쳐다보았다.
"수작을 부린 건 아니겠지, 화영?"
미사린상아의 방에는 작은 화분이 하나 있다. 그 화분에는 볼품없는 풀 하나가 심어져
있는데, 어느 모로 보나 월인 상아가 애지중지 키우기에는 격이 떨어지는 이름 없는
풀이었다. 미사린은 매월 보름 밤마다 그 화분을 월출창에 내어놓고 달빛을 쬐었다.
미사린을 모시는 선녀라면 그 화분에 대해 누구나 궁금해했다. 하지만 아무도 감히
묻지 못했다. 미사린의 차가운 성정은 주변 선녀들에게도 두려움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윗대로부터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미사린이 천계에서 내려올 때 가지고 온
화분이라는데 도무지 꽃도 열매도 맺지 않고 늘 푸른 풀만 돋다 있었다.
얼마 전 드디어 그 풀에서 꽃이 피어났다. 하지만 은근히 기대하던 것에 비하면
맨드라미를 닮은 별 볼일 없는 꽃이었다. 게다가 며칠 피어 있지도 않더니 꽃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도로 풀만 남았다. 수하린이 가배의 술대접을 받으며 미사린의
상아각에 왔다 간 그날이었다.
오늘도 중추 보름 밤. 미사린이 화분을 들고 월출창으로 나아갔다. 모시던 선녀는
대체 그 풀이 무엇이며 꽃은 무엇인지, 왜 꽃이 피었다 그리 일찍 사라진 것인지,
아니 무엇보다도 보잘것없는 그 꽃을 왜 상아께서 그리 애지중지하시는지 너무나도
궁금했지만, 평소와 마찬가지로 꾹 참았다. 그래서 월출창 앞에 서서 누각 아래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미사린이 불쑥 물었을 때는 기절초풍할 뻔했다.
"이 풀의 이름이 뭔지 아니?"
"네? 아, 저‥‥‥ 저는‥‥‥."
"모르겠지. 모르는 게 당연하지. 천계의 음지에서만 자라는 풀을 네가 어찌 알리."
미사린은 손에 든 화분을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말할 수 없이 차갑고 깊은
미소였다.
"이 풀의 이름은 오랜 세월이고, 피는 꽃의 이름은 사무치는 그리움이다."
상아를 모시던 선녀들에게는 몇 대째 내려오는 궁금증이 해소된 순간이지만, 정작
그 답을 들은 선녀는 어리벙벙했다. 오랜 세월이라니? 사무치는 그리움이라니? 풀과
꽃 이름치고는 너무 이상했다. 게다가 그 뒤를 이은 미사린의 말은 더욱 알쏭달쏭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독초지. 물론 다른 이들이 아니라 여기 선계에 내려와 있는
월인 상아들한테만 말이야. 오랜 세월, 사무치는 그리움.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이
어디 있으랴."
이야기를 듣던 선녀는 미사린의 말을 절반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어쩐지 몸이 으슬으슬
해졌다. 독초라니. 그토록 평범해 보이던 꽃이.
"미사린상아님께 고합니다."
다른 선녀 하나가 급히 월출창으로 들어섰다. 미사린이 서늘한 눈으로 돌아보자
선녀는 부복하며 말했다.
"천도봉의 수하린상아님이 혼절하셨다고 합니다."
"그래?"
미사린은 놀라지도 않고 담담하게 대꾸한 뒤 월출창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거 안됐구나. 곧 지한선인께서 돌아오실 때가 되었으니 모두들 맞이할 채비나
해두어라."
두 선녀가 물러간 뒤 미사린은 들고 있던 화분을 난간 너머로 내민 뒤 손을 놓았다.
잠시 후 저 아래 아득한 곳에서 화분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미사린은 중얼거렸다.
"해야 할 소임을 다했으니, 귀천."
만월이 구름에 가렸다. 빛도 없는 산속을 가스라기는 마구 뛰었다. 길을 잃었어!
귀와 목과 입술을 주먹 쥔 손으로 마구 문질러 닦으며 그녀는 뛰다가 엎어지고, 다시
일어나서 또 뛰었다. 어디로 가야 천도봉이 나오는 걸까? 왜 이렇게 멀리 온 걸까?
하늘님, 제발 돌아와서 나 좀 데려가. 너무 캄캄해. 어두워. 무서워.
나무 사이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빛도 보였다. 푸르스름한 빛이었다. 그리로
뛰어가려다가 가스라기는 머뭇거렸다. 또 가짜 하늘님이 아닐까 싶어서.
"어라?"
푸른 등을 들고 있는 사람에게서 낯선 음성이 흘러나왔다. 차라리 낯선 사람이 더
반가워서 가스라기는 그 사람에게 와락 달려들어 소매를 붙잡았다. 그는 산짐승에게
기습이라도 당한 것처럼 힉 놀란 소리를 냈다. 가스라기는 그 사람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꼭 붙잡고 헐떡거리며 물었다.
"처, 천‥‥‥ 천, 천‥‥‥."
"마, 말을 해요, 말을! 무섭게 그러지 말고."
"천도봉, 데려다줘요. 천도봉."
"‥‥‥."
"천도봉, 천도봉 어딘지 알죠? 데려다줘요, 제발!"
"어험, 어험, 그러니까‥‥‥ 길을 잃은 겁니까?"
"그래요, 잃었어요! 데려다줘요!"
"어허, 그것 참, 살다 살다 보니 선계에서 남한테 길을 다 가르쳐주게 되네. 이쪽으로
갑시다. 도망 안 칠 테니 소매는 좀 놓고."
가스라기는 소매를 더 꽉 붙잡았다. 상대는 포기하고 길안내를 시작했다. 가스라기는
길라잡이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않고 그저 바싹 붙어 따라가기만 했다.
그 사람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등 하나만 들고 길을 잘도 찾았다. 한동안 산길을
오르고 내리다가 기슭 하나를 돌아드니 별처럼 반짝이는 천도각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스라기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의 소매를 놓았다.
고맙다는 말을 대충 던지고 천도각을 향해 뛰는 가스라기의 뒤에서, 난데없이
길라잡이 노릇을 했던 시혼은 혀를 쯧쯧 찼다. 어제 선계에 도착한 이후 여독 때문에
한동안 뻗어 있다가 이제야 일어났는데, 함께 온 영소는 아직도 제정신이 아니라
혼자 있기 심심해서 밤나들이를 나온 참이었다.
"선녀라고 다 똑같은 선녀는 아니네. 뭐 저렇게 덤벙대는 선녀가 다 있어?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얼굴인데‥‥‥. 어디서 봤지?"
등을 들고 돌아서는 그의 앞에 한 마리 검은 새가 후드득 날아들었다. 시혼은 깜짝
놀라 등을 떨어뜨릴 뻔했다.
밤에 산책 나간다고 하니 지객선녀가 내준 등이었는데 안에 불을 붙이는 심지 같은
것도 없으면서 빛이 나는 신기한 물건이라 깨뜨리면 물어낼 일이 아득했다.
"깜짝이야. 오밤중에 웬 새가‥‥‥. 어가? 눈동자가 두 갤세?"
신기해서 보고 있자니, 새가 부리를 열었다. 그리고 그윽한 여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오랜만이에요."
새가 말을 한다기보다는 새의 입을 빌려 누군가가 말을 전하는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새의 눈동자 안에 어떤 여인의 얼굴이 비치는 것 같기도 했다. 시혼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뺨을 긁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누구시더라?"
"모르겠어요? 저예요."
"글쎄, 전혀 기억이‥‥‥."
"어떻게 잊을 수가 있어요? 만났잖아요. 바로 이곳에서. 당신이 왔었죠. 나를‥‥‥
나를 위로해줬어요. 그걸 잊었나요?"
새의 말투는 흡사 한때 정을 나눴던 여인의 무심한 남자를 원망하는 것 같았다.
시혼은 자신이 아무리 문란하게 살았다고 해도 설마 새랑 연애를 했겠나 싶었다.
"저, 뭔가 착각하신 모양인데요."
"난, 나도 잊었지만, 그래도 다 잊지 못해서, 때마다 쌍정을 날려 보내 하계의 소식을
듣곤 했어요. 그땐 기억을 못해서, 단지 내가 하계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어요. 당신 소식을 듣고 싶었던 거야. 그런데 잊었어요? 정말?"
"그러니까, 저기 말이죠, 제가 아래로는 열네 살 소녀부터 위로는 마흔 넘은
부인네까지 두루두루 마음을 위로해드리는 것을 천직으로 알고 사는 사람은 맞습니다만,
그래도 넘지 못할 선이라는 게 있거든요? 아무리 말을 할 줄 안다고 해도 말이죠,
에 도, 새하고는 아무래도 좀‥‥‥. 그러니까 제가 건망증이 좀 심하기는 하지만
새랑 그렇고 그랬을 리는 없다 이 말씀이죠."
새는, 아니 여인은 절규했다.
"하무린상아가 명행에 들었던 때예요! 정말로 생각 안 나요?"
새의, 아니 여인의 절규에 피가 묻어나는 것 같아서 시혼은 움찔거리며 대꾸를
못했다. 하지만 이윽고‥‥‥.
"안 나는데요."
새는, 아니 여인은 잠시 침묵했다.
"오랜 세월‥‥‥."
한참 후, 두 개의 눈동자가 들어 있는 새의 왼쪽 눈에서 검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무치는 그리움."
새는 눈물을 떨구고 푸드덕 날아올랐다. 시혼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검은 새가 검은
밤하늘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 시각, 천도봉의 상아각에서는 혼절한 수하린을
명상으로 옮긴 선녀들이 어쩔 줄 모르며 선향을 피운다 의선각에 연락한다 법석을
떨고 있었다.
때마침 도착한 가스라기는 수하린의 얼굴을 보았다. 정신을 잃은 수하린의 얼굴에
깊은 슬픔이 배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