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109)

제 14 장

::수신::

먼 옛날 선인들이 신수와 싸울 때 그 전쟁은 수신대전이라 했는데,

오늘날 선인들이 영수를 맞아들일 때는 그것을 수신이라 하니.

세월이 흘러 선계도 신수도 변하고 말 또한 변한 것이다.

ㅡ환문공.『환수경』내편

14-1.

삼라의 남쪽인 운황에 불을 내뿜는 산이 있는데 이름이 화염산이다. 촉주의 선계인

청성궁에서 맡고 있는 천계의 보물 파초선으로 백 년에 한 번 불길을 식혀주지 않으면

운황과 촉주가 온통 불바다가 될 것이라는 우환거리였다.

천군이 화염산의 상공에 도착한 것은 술초 무렵, 사위는 저물어 곧 밤이 될 시각으로,

하늘의 해는 사라졌고 태양보다 뜨거운 화염산의 불꽃이 산꼭대기 깊게 파인 구멍 

속에서 이글거리고 있었다. 최대한 빠른 어검비행으로 날아왔지만, 아래서는 화안금정

수를 잡아 돌아간다고 해도 자시까지 맞출 도리가 없어 보였다.

게다가 화염산 내부에 타는 불은 명계에서 흘러나온 불이다. 명계의 물이 생명이라면

명계의 불은 죽음이라, 수화불침인 선인이라고 해도 깊게 들어가면 원기를 상할 수

있다. 천군은 잠시 화염산의 시뻘건 분화구를 내려다보았다. 열기가 강해 주변의 모든

풍경이 일그러지고, 돌을 녹이는 뜨거운 용암의 물길이 쿨럭쿨럭 흘러나오고 있었다.

천군은 비검에서 내려 옆의 허공을 밟고 섰다. 먼저 교룡의 흉갑을 풀어 비검에 

걸었다. 기린관도 벗어 검자루에 걸었다. 비검이 미묘하게 떨었다. 마지막으로 천마화

를 벗어 칼날 위에 얹고 손끝으로 검신을 가볍게 두드렸다.

"천부의 예장으로 몸을 보호하고 가면 저 성질 더러운 녀석이 끝까지 나를 인정하지

않을 거다. 여기서 기다려라."

막 아래를 향해 내려가려는 순간, 분화구 속에서 무엇인가가 툭 튀어나와 솟구쳤다.

그것은 몹시 놀라고 당혹한 기세로 날아올랐다가 천군을 발견하고는 후다닥 몸을 틀어

반대편으로 날아가버렸다. 화령신조였다.

이상한 일이군. 천군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보다 늦게 출발했을 화령신조가 화염산에

먼저 도착한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둔법을 쓰면 가능하기 때문이다.

둔이란 '도망치다'라는 뜻인데, 은신과 빠른 이동 두 가지를 다 의미한다. 일종의

축지법이다. 오행에 따라 화수목금토의 둔법이 가능한데, 화둔이라고 하면 불에서

불로 이동하는 것이다. 즉, 천 리가 떨어져 있더라도 그곳에 불이 있으면 그 불의

기운을 찾아 단번에 이동하는 것이 화둔이다. 서견과 같은 신수는 토둔을 쓰고, 

사해바다의 용왕선들은 수둔을 쓴다. 이런 둔법 중에 가장 빠른 것이 오행을 넘어선 

광둔이다. 빛과 같은 속도로 이동하니 그보다 빠른 것은 오직 천계의 상제가 쓴다는

의둔, 생각한 곳에 바로 임할 수 있다는 둔법뿐이다. 화령신조의 혈통 반쪽은 

화안금정수와 같은 태양의 신수라, 화둔이 가능하다. 그러니 화안금정수가 숨은 곳이

화염산이라는 것을 짐작했다면 화둔으로 이동해오지 못했을 리 없다.

천군이 이상하다 여긴 것은, 어째서 화령신조가 저렇게 놀란 기색일까 하는 점이다.

뭔가 두려운 일을 당한 것 같았고, 천군을 마주하기를 꺼리는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저 안에 생각한 것 이상의 위험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미적거릴 입장이 아니었다. 천군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 공기를 한 모금 빨아들이고,

몸을 가라앉혔다.

비검도 예장도 없이 그는 화염산의 분화구를 향해 직하했다. 하늘도 아니고 땅도 아닌,

땅과 하늘 사이를 잇는 산. 태양으로부터 가장 먼 명계에서 발원했으나, 태양을 가장

닮은 불의 심장. 밤이라도 낮처럼 밝고 낮이라도 밤처럼 그 무엇 하나 제대로 볼 수

없는, 삼라의 대지가 내뿜는 날숨 속으로 그는 떨어져갔다.

분화구 안에 들어서기 전부터 이미 숨 막히는 열기가 느껴졌다. 진입 직전에 천군은

빙한강기를 일으켰다. 작은 얼음의 결정으로 만들어진 원기둥 같은 것이 그의 몸

주변에 둘러졌다. 붉고 노란 불꽃들이 혀를 날름거리는 분화구 속에 들어서자 

빙한강기로도 막지 못할 열기가 사방에서 침노했다. 곧은 머리칼이 열기에 조금씩

구부러졌다. 자천잠들조차 이 숨 막히는 열기에 괴로운지, 천의 자락에도 주름이

잡혀갔다.

좀 전에 지나친 위쪽에서 불덩어리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천군은 머리 위로 손을

들어 원을 그렸다. 그가 그리는 궤적대로 얼음의 결정이 둥근 방패 모양으로 맺혔고,

불덩어리는 거기 맞고 튕겨 나갔다.

해소기침처럼 불규칙하고도 격렬한 화염의 공격이 몇 번이나 발작하듯이 덮쳐왔다.

그때마다 천군은 얼음 방패로 그것들을 막아냈다. 내려갈수록 빙한강기의 차가운

기운은 점점 옅어지고, 선인의 시력으로도 위아래와 좌우를 구별하기 힘들 만큼

이글대는 열기와 붉은 기운만이 가득했다. 발아래는 거대한 화염과 용암의 바다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고, 사방을 두른 벽도 불에 달군 칼처럼 뜨겁고 반투명한

붉은빛이었다. 이 혼돈스러운 불의 바다 어딘가에 틀림없이 화안금정수가 숨어 있을

것이다. 천군의 이마와 목덜미에 땀이 배어나기 시작했다.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다.

보패가 있다면 화안금정수의 화둔 은신을 깨고 끄집어낼 수 있을 테지만, 지금은

본신의 힘만으로 찾아내고 끌어내야 했다.

뜨고 있기도 힘든 눈으로 천군은 옆의 벽들을 둘러보고, 자신이 지나온 위쪽 분화구의

벽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발밑의 불바다를 내려봤다. 불 중에 가장

뜨거운 불, 가장 맑은 불, 황금처럼 순수한 불이 그 바다의 중심에서 부글거리고

있었다. 그가 아래로 손을 뻗자, 얼음 방패가 우산처럼 접히며 그의 손과 팔목을 

감싸는 비갑의 형상이 되었다. 천군은 한 겹의 얼음 기운만으로 감싼 손과 팔을 그대로

용암 속에 담갔다.

얼음의 기운은 명계의 불기운에 닿는 즉시 녹기 시작했다. 천의 소매까지 그 불길이

닿을 때쯤 천군은 용암 속에서 무엇인가를 붙잡았다. 그는 힘껏 끌어내려 했으나

상대도 끌려나오지 않으려고 버티며 오히려 그를 불바다 속으로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어깨까지 끌려 들어갔다가 천군은 힘껏 손을 뿌리치며 위로 솟구쳤다.

불바다 속에서 그가 찾던 신수가 가쁜 숨을 내쉬며 머리를 내밀고 그를 바라보았다.

주변의 불과 구별되는 것은 한 쌍의 금빛 눈동자뿐이었다.

"흥, 결국 찾아내기는 찾아냈구나."

천군은 방금 불바다 속에 집어넣었던 팔과 어깨를 지그시 누르면서 대답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화안금정수가 킬킬 웃어댔다.

"몰골 한번 볼만하구나."

천의의 한쪽 소매가 어깨까지 완전히 타버리고, 한쪽 팔에는 화안금정수가 물어뜯은

흰 불의 상흔과, 명계의 불이 남긴 붉은 상흔이 뚜렷하게 남았다.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한 통증이 그 팔에서 펄떡거렸다. 남의 것처럼 생경하면서도 자신의 것임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또렷한 고통이었다. 화안금정수가 신이 나서 약을 올렸다.

"어허, 이 안은 참 딱 알맞게 뜨끈뜨끈하구나. 들어와볼래? 응?"

천군은 아픈 팔을 움직여, 아직 남아 있는 왼손의 소매를 어깨까지 걷었다.

"좋아."

"어이, 어이! 잠깐."

그가 정말 뛰어들 기세로 나오자 화안금정수가 멈춰 세웠다.

"쇠고집 같으니. 아직도 포기 못하겠냐? 어차피 시간이 늦었어. 날 끌어내도 넌 못

돌아가. 이쯤에서 포기하지?"

"말 끝났으면 들어간다."

"아직 안 끝났어!"

화안금정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무튼 성질머리하고는‥‥‥. 도대체 네놈이 어디가 정도선인인지 가끔 의심스럽다

니까. 생각해봐라. 청성궁의 선인 나부랭이들도 백 년에 한 번 와서 부채질 한 번

해주고 후딱 가버리는 곳이다. 네가 나를 여기서 끌어내지 못했다고 해도 누구도 널

비웃지 않을 거다. 공순서약대로 수신례를 치른 거니까 너는 보패를 돌려받고 나는

천계에 소환되지 않아도 되고, 우리 사이의 천수도 이것으로 되돌릴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이쯤에서‥‥‥."

"잠깐."

천군이 말을 막았다.

"지금 타협하자고 말하고 있는 거냐?"

"바로 그거다."

"네놈이야말로 태양신수인지 의심스럽군."

"확‥‥‥. 아니, 아니지. 하루라도 더 오래 산 내가 참아야지. 조금만 더 들어봐라.

네게 쓸모 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테니까."

"미적거리면서 시간을 끌 속셈이냐?"

"그럴 생각이 없는 건 아‥‥‥. 아니, 아니다! 정말이다! 네놈도 들으면 귀가 

번쩍할 거다. 어떠냐? 이 이야기와 교환해서‥‥‥."

"셋을 셀 동안 이야기를 마쳐. 셋을 세고 나서 들어가겠다."

"아, 알았어! 화영이 지금 무슨 선몽을 꾸는지 말해주겠다는거다!"

"그게 왜 거래 조건이 되는 거지? 그리고 어떻게 알아낸 거냐? 하나."

"그야 네놈이 들으면 귀가 번쩍할 이야기일 테니까! 그리고 집전한답시고 온 화령신조

놈을 족쳐서 알아냈다. 화영 놈도 이번 수신회에는 관심이 없지 않을 텐데 안 나온

것이 아무래도 이상하다 싶어서 말이지. 화령신조 그놈은 어쨌거나 내 계통인데 족보로

치면 이 몸이 더 높단 말씀이야. 흐흐, 호되게 굴려줬지. 뭐 이건 신수들끼리의 

이야기니까 그렇다 치고."

"그래서 그 이야기 내용은 뭐지? 둘."

화안금정수는 이야기를 털어놓기 전에 먼저 거래 의사를 확인해야 한다는 것을 잊고,

천군이 세는 숫자에 그만 마음이 조급해져서 입을 열고 말았다. 그는 역시 거래나

음모에는 익숙하지 않은 태양신수였다.

"화영은 천수를 조작하러 들어갔다."

세 번째 손가락을 접지 않고 천군은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낌새를 봐서는 전부터도 개입을 안 했던 것이 아닌 듯하다만, 아예 선몽을 통해 

본격적으로 조작을 시작한다는 거다. 네놈과 네놈의 동생, 그리고‥‥‥ 그 계집."

천군의 얼굴이 굳었고, 그의 몸을 둘러싼 빙한강기의 마지막 잔재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열기와 불꽃이 본격적으로 그를 감싸기 시작했다.

"화영은 네가 이기기를 바라겠지. 같은 정도선인이니까. 그 때문에 그 계집이 혹시라도

네 발목을 잡지 않기를 원할 테고, 그래서 그놈은 제 권한 안에서 천수를 움직이기로

한 거다. 너나 네 동생 놈의 천수가 아니라 그 계집의 천수를. 그 계집은‥‥‥."

천군의 검푸른 머리카락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붉은 불빛이

어렸다.

"네가 아니라 네 동생의 것이 될 게다. 몸도, 마음도. 네 동생은 그 계집에게 푹 

빠지게 될 거고, 제석에도 너의 상대가 되지 못할거야. 친애를 알아버리면 약점이

생기니까 말이지. 화영이 원하는 게 바로 그거다."

"허튼소리."

"허튼소리라면 내가 아니라 화령신조가 했겠지. 하지만 그놈도 반은 신수다. 내 

앞에서 감히 거짓말을 하지는 못했을걸."

"그 애의 천수는 원래 내 것이 아냐. 화영이 일부러 조작할 필요도 없다."

"헹, 어쨌거나 난 분명히 그렇게 들었는데? 그리고 아마도, 그 천수 조작은 이미

시작되었을 테고‥‥‥."

천군은 잠시 말이 없었다. 불바다 속에서 화안금정수는 눈을 껌뻑였다.

"자, 그래서 어쩔 테냐? 내가 없어도 너는 궁주가 될 수 있을텐데? 구태여 고통을

참아가며 이럴 필요가 있‥‥‥."

그 순간, 갑자기 천군이 입을 열었다.

"셋."

그리고 천군은 불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 노한 화안금정수의 울부짖음이 화염산의

분화구 위까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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