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둥둥둥, 간밤 내내 망월영창과 회소곡이 가득했던 운중석해에 수신회의 북소리가
거세게 울렸다. 북은 저절로 울리는 수신고라는 물건으로, 이지염광기와 함께
천계에서 하사한 보천궁의 보물이다.
먼 옛날 천선이 살해당하고 그의 남은 제자들이 태고의 영기를 몸 가까이 두기 위해
신수를 부리고자 했을 때 수신고를 울려 신수들을 가까이 모은 뒤 사냥을 시작했다.
그것은 숫제 사냥이 아니라 전쟁에 가까워서 피차 흘린 피가 너무 많았고 선계와 하계
가릴 것 없이 아수라장이 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팽팽했던 전세가 차츰 선인들
쪽으로 기울었는데, 신수들과는 달리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데다 천계의 비호를 받는
선계 쪽이 아무래도 우세했던 것이다. 결국 선계와 신수들 사이에 공순서약이
맺어졌고, 그때부터 수신회는 더 이상 사냥이 아니라 일종의 예식이 되었다.
물론 사냥의 형식을 갖춘 예식이었다.
수신회에 모인 선인들, 특히 신선들의 얼굴에는 은은한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천계에 사는 천선이 아니라 선계에 사는 선인들 중에 가장 높은 진선은 세 가지
조건이 맞아야만 가능하다. 신선으로서의 수행력, 의지, 그리고 천수다. 신선들 중에
그 수행력이 진선에 맞먹는 자들이 많지는 않으나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 진선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지는 않는다. 진선은 아주 골치 아픈
자리이기 때문이다.
진선은 천선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며, 천계에 자리를 맡아둔 선관, 즉 관직을 갖거나
가질 자격을 얻은 선인을 의미한다. 진선으로서 하나의 선계를 맡아 다스리다 일을
무사히 끝내면 천계로 올라갈 자격을 얻는다. 천계에 오르면 더 이상 천수에 영향
받지 않으며 자신만의 별을 갖게 된다고 하는데, 그 별 하나하나가 삼라와 같은
세계라고 하니 선인이라면 누구나 바라 마지않을 경지 같지만 사실 그렇지가 않다.
수행선에서 신선이 되는 와중에 선인들은 누구나 무위와 무소유의 도를 깨닫게
되는데, 무위와 무소유란 쉽게 말해 갖고 싶은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이
천지와 벗하고 양생에 골몰하며 봉황의 노래를 듣고 감로의 맛을 음미하며 살아가는
유유자적한 삶이라, 어떤 신선이든 수행을 오래 하다 보면 이런 의문에 빠지게 된다.
애써 또 하나의 경지를 넘어서려는 것은 욕심이 아닌가? 그렇게 올라가서 이루려 하는
바가 이 안온한 삶과 바꿀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실제로 선계에서 가장 번거롭지 않은 영생을 누리는 것이 바로 신선들이기도 하다.
비록 진선들처럼 선계 하나를 맡아 직접 봉공하는 선녀들을 거느리지는 못하지만
하계에 나가 인간의 모습으로 즐기기도 하고 선경에 젖어들어 수십 년 동안 술에
취해 금을 타기도 한다. 대부분의 신선들은 그런 삶에 만족했다.
신선들의 고민이라면 다만 긴 세월을 함께 살아갈 동반자가 없다는 점이다.
신선끼리의 교분에는 넘을 수 없는 선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하계인이나 반선반인
선녀들과는 한정된 시간밖에 만날 수 없으므로 이런 갈증을 영수를 통해 해소하고자
하는 선인들이 많았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모든 선인이 다 영수를 거느리지는
못한다는 것이었다.
원래 신수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태초에 뭇 짐승과 인간이 빚어지기 전에 먼저
만들어진 극히 적은 수의 짐승들에서 시작 했고, 많은 수가 공순서약 이전의 신수
사냥에서 사라진 데다, 교배나 기연을 통해 새로 신수록에 오르는 숫자도 그리 많지
않아 전체 선계의 선인들과 비교해볼 때 턱없이 적었다.
보천궁의 궁주이자 진선을 넘어 거의 천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는 화영도 수신회를
치르지 않았다. 대신 그에게는 비합전서인 화령신조가 있는데, 이 신조는 신수와 요수
사이에서 태어난 영물로 화영의 천수배필이 명행에 든 뒤 천계의 명을 받아 화영을
모시게 된 새다. 궁주조차도 천수에 없으면 맞아들일 수 없는 것이 영수.
그러므로 수신회에서 영수를 맞아들이는 것은 선인에게는 큰 기쁨이었다.
이미 영수를 거느린 선인들은 그 영수와 함께, 아직 영수를 거느리지 못한 신선이나
수행선, 가선들은 언젠가 자신들도 치르게 되리라 기대하는 수신회를 미리 체험하기
위해 중추의 태양 아래 모였다. 수신고가 울릴 때마다 선인을 따라온 영수들이 귀를
쫑긋거렸다. 어떤 이의 영수는 선학이고, 어떤 이의 영수는 온몸이 검은 표범이며,
또 어떤 이의 영수는 매화 모양의 반점이 찍힌 사슴이었다. 사슴과 범, 사람과 요수
출신 선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둥둥 울리는 북소리를 들으며 또 하나의 신수와 주인이
맺어지는 순간을 기다리는 오늘의 수신회 풍경 앞에서 먼 옛날 신수들과 선인들이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피를 흘리며 싸웠다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전설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졌다.
오늘은 모두 세 명의 선인이 영수를 맞아들이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수신회를
집전하는 궁주의 자리에는 예고 없이 선몽에 빠져든 화영을 대신해 화령신조가 앉아
있었다. 화영이 보천궁을 맡은 이래 이런 경우가 없었던 것은 아니므로 선인들은
그다지 동요하지 않았다. 조만간 천계의 부름을 받을 화영이 어제 가배 때처럼
선계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오히려 더 희귀했으니까.
수신고가 모두 마흔아홉 번 울리고 멈춘 뒤 화령신조의 집전으로 수신회가 시작되었다.
개회가 선포되고, 공순서약을 선인과 신수 양측에 모두 확인시킨 뒤 첫 번째로
연화봉의 적련동자가 삼두삼목의 신망을 맞아들였다. 신망이란 거대한 뱀을 말하는데
머리가 셋이고 머리마다 눈이 하나씩 달려 있다. 세 개의 머리를 숙이자 적련동자가
손을 얹으니 수신고가 크게 세 번 울렸다. 아직 수행선으로 신선이 되기 전인
적련동자는 크게 만족하며 신망과 함께 자리로 돌아갔다. 신망이 크게 똬리를 틀고
적련동자는 그 가운데 파묻히듯이 앉았는데 몹시 기분이 좋아 보였다.
두 번째로 나온 것은 다리가 짧고 몸이 탄탄한 개였는데, 크기는 보통 개보다 크지만
눈을 뜨지 못하고 걸음걸이가 뒤뚱뒤뚱한 것이 갓 태어난 강아지 같았다. 서견이라는
신수로 불행을 먹이로 삼기 때문에 가까이 두면 평생 우울할 일이 없는 데다 땅 밑을
파고 움직이는 속도가 바람처럼 빨라서 토둔의 술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서견을 맞아들이는 것은 천도봉의 신선으로 선명은 문수인데 그보다는 상애라는
별호로더 많이 불리는 선인이었다. 언제나 지극히 슬픈 표정을 짓고 있다 해서 붙은
별호였다. 상애가 눈을 못 뜬 서견의 머리에 손을 얹자 신수가 그 손바닥을 핥았다.
상애의 얼굴에 보기 드문 웃음이 일어났고, 수신고가 크게 세 번 울렸다.
오늘날 중추 수신회란 이렇게 극히 짧은 행사였다. 애초에 수신의 과정은 이미 이
행사 이전에 다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영수를 원하는 선인이 신수록의 열람을
요청하고, 천계에서는 그중에서 그 선인과 천수로 연결된 신수를 점찍어준다. 그러면
선인은 그 신수를 찾아내어 자신의 뜻을 전하는데 신수들은 대체로 그 뜻을
받아들인다. 서견이나 삼두삼목 신망이나 모두 이 자리에 오기 전에 그 과정을
거쳤고, 수신회에서는 공공연하게 그 사실을 공표함과 동시에 수신고를 울려 천계에
정식으로 등록하는 것이다.
수신회의 본 순서로 남은 것은 이제 하나의 신수와 한 명의 선인뿐이었다. 천계가
중재하고 선계와 신수들이 합의한 공순서약에 의하여 수신회의 본 행사는 순식간에
끝나고, 영수와 선인들이 함께 술을 나누고 선계의 일을 논하는 뒷자리가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것이 상례였으나, 오늘은 일이 그렇게 돌아가지 않았다.
많은 선인들이 그렇게 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진선 천군이 맞아들이기로 되어
있는 영수인 화안금정수가 벌써 몇 번째 수신회를 거부해왔다는 것은 보천궁에서 더
이상 비밀도 아니었다. 천군 역시 앙탈부리는 짐승을 구태여 잡아 꿇릴 생각은 없는
듯 거두어들일 생각은 하지 않고 제멋대로 살도록 내버려두었던 일이며, 결국 보다
못한 천계에서 남화궁의 신수부를 통해 이번 중추 수신회에서 이 일의 종지부를
찍도록 최후통첩을 했다는 이야기는 한동안 보천궁 선인들에게 큰 화제였다.
사실, 사 년 전 천군이 한때 실종되었던 것도 이 일과 연관이 있다. 화안금정수의
일로 남화궁의 부름을 받고 외출했다가 한동안 소식이 끊겼던 것이다. 암암리에
떠도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때 남화궁에서 천군의 보패를 압수했고, 보패가 없는
상태로 보천궁으로 돌아오던 천군이 모종의 암습을 받아 한동안 선계로 돌아올 힘을
잃었다고 한다. 물론 그 '모종의 암습'이 무엇인지 대부분의 선인들은 짐작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천군의 실종도 이미 지난 일이다. 오늘은 천계의 최후통첩이 어떤 방식으로
실현될지에 대한 호기심, 어차피 신수는 선인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으니 신수중의
신수이며 교배나 기연을 통해 태어난 후천 신수가 아니라 태초에 만들어진 선천
신수인 화안금정수가 무릎 꿇는 순간을 지켜보고 싶은 기대감, 공순서약 이전에
선인들과 대등하게 싸움까지 벌였던 선천 신수 중 하나인 화안금정수가 어쩌면 천수를
거슬러 진선의 구속을 뿌리치지 않을까 하는 또 다른 기대감까지 섞인 시선들이
석해의 가운데로 모였다.
"그럼, 세 번째 수신의 예를 시작하‥‥‥."
화령신조가 세 번째 예식을 거행하려는 순간, 석해 위에서 사자후가 울려 신조의
음성을 덮었다. 충천한 태양에서 떨어진 것처럼 느닷없이 허공에서 튀어나와 내려선
이글대는 신수, 화안금정수였다. 요수의 기운이 아직도 남아 있는 도력 낮은 요선들이
움찔 몸을 떨었다. 반절의 피가 요수에 속하는 화령신조의 노을빛 불꽃도 잠시 기세가
가라앉았으나, 평범한 반요는 아닌지라 이내 기운을 되찾고 물었다.
"요란한 등장이십니다. 속 시원하게 지를 만큼 지르셨다면 이제 예를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화안금정수는 딱 잘라 대답했다.
"안 돼."
"이미 최후통첩이 내려진 마당에 공순서약을 파하고 끝내 천계로 소환되실
생각이십니까?"
화안금정수는 으르렁 소리를 내며 앞발로 석해의 바닥을 긁었다.
"그걸 지키지 않는 것은 내가 아니라 너희들이야. 나는 애초에 맺어진 서약대로
할 것을 요구한다."
"무슨 말씀이신지?"
"신수는 선인에게 주인 될 자격이 있는지 알아볼 권리가 있어. 그 권리를 쓰지 않는
건 짜고 하는 노름판이지 수신회가 아니다!"
"뭐가 어째?"
이 말에 발끈하며 일어선 것은 갓 영수를 맞아들인 적련동자였다. 상애선인 역시 가히
기분 좋은 표정은 아니었으나, 서견이 옆에 붙어 몸을 비비니 표정을 가라앉히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벌써 몇 번이나 수신회를 미룬 해괴한 기수라더니 말이 참으로 방자하군."
화안금정수는 금빛 눈동자로 적련동자를 한 번 쓱 훑어본 뒤 뒷발로 귀를 긁었다.
"뭐야? 제가 물어 죽인 어미의 품을 잊지 못해서 영수까지 그런 놈을 거둔 살모사
출신의 요선이로구만."
주변의 선인들이 말리지 않았다면 적련동자와 삼두삼목 신방이 똑같이 혀를
날름거리며 화안금정수는 향해 달려들 뻔했다. 뛰쳐나가는 것까지는 참았지만
적련동자는 반드시 사과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삿대질을 하며 따졌다.
"도대체 어디가 짜고 하는 노름판이라는 거냐? 천수에 정해졌으면 됐지 무슨 자격이
필요하다는 거야?"
화안금정수는 적련동자뿐만 아니라 그 자리의 모든 선인을 비웃듯이 시시시 웃으며
대꾸했다.
"그놈의 천수, 천수! 너희들이 기대는 것은 생전 직접 본 일도 없는 그 해괴한
숫자뿐이지. 물어보자! 너희 선인 나부랭이들 중에 서죽으로 천수의 일부를 읽는 것
말고 실제로 천수를 본 자 누가 있나?"
화안금정수는 아예 선인들 전체와 싸우기로 작정한 것처럼 대놓고 이죽거렸다.
"없지? 없지? 응? 본 적도 없으면서 보는 척하는 거잖아. 안그래?"
적련동자가 펄펄 뛰었다.
"저, 저런 건방진! 당장이라도 버릇을 고쳐줘야!"
보패라도 뽑아 들 기세인 적련동자의 어깨에 누군가가 손을 얹었다.
적련동자는 화난 얼굴로 돌아보다가 힉 놀라 목을 움츠렸다.
"내게 속한 신수이니, 버릇을 고치는 것은 내게 맡기게."
나직한 말을 듣고서야 적련동자는 겨우 눈앞에 있는 것이 지한이 아니라 천군임을
분별했다. 두 선인이 쌍둥이라 외모가 같기는 하지만 기색이 완전히 다른데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한눈에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사실이 부끄럽기도 하고 자존심이
상하기도 해서 적련동자는 투덜거렸다.
"그렇다면 어서 고삐를 잡으시지요. 미친개가 날뛰니 선계가 시끄럽지 않습니까."
천군이 걸음을 멈추고 적련동자를 돌아보았다. 특별히 살기를 일으킨 것도 아닌데
적련동자는 갑자기 소름이 오싹 끼치며 몸이 얼어붙었다. 왜 지한과 천군이 형제인지,
일순이나마 가까운 거리에서 두 선인을 분별하지 못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화안금정수를 미친개에 비하는 것은 과하다 싶지만, 충고는 고맙게 받지."
다행히 천군은 그렇게 말한 뒤 석해 가운데로 나아갔다. 적련동자는 신망의 똬리
속에 풀썩 주저앉았다.
천군이 화안금정수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두 쌍의 눈이 서로를 바라보았고,
화령신조는 마치 제 주인ㅇ니 화영처럼 만사 될 대로 되라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럼 어찌하시겠습니까? 천계의 통첩에 의하면, 이번에도 수신례가 행해지지 않을
경우 신수께서는 천계로 소환되고 서인께서는 보패를 돌려받지 못하게 됩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천군이었다.
"신수가 원하는 대로 시험을 치르고 수신례를 행하지."
이미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으나, 화령신조는 확인을 위해 거듭 물었다.
"만약 오늘 수신회가 폐하기 전까지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영수를 포기하게 된다는
점을 선인께서는 알고 계시겠지요?"
천군이 고개를 끄덕였고, 화령신조는 집전자로서 마지막 말을 하고 물러났다.
"그럼 이제 신수께서는 주인의 자격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말씀하십시오. 공순서약에
따라 그것은 다른 생명을 해치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에서, 화안금정수는 씨익 웃었다.
"걱정 마라. 나는 그런 쩨쩨한 것은 요구하지 않는다. 내 요구는 간단하다. 이 몸의
주인씩이나 될 자는 두 가지를 갖춰야 해. 첫째, 나보다 머리가 좋아야 한다."
천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정말 간단하군."
"그렇지, 간단하지! 난 쩨쩨하지 않으니까."
선인들과 영수들이 웃어댔다. 화안금정수는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갑자기 시뻘겋게 불꽃을 일으키더니 천군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다.
"너, 또 나를 가지고 논 거냐?"
"두 번째는?"
"나를 가지고 논 거지? 응? 지금 내가 머리 나쁘다고 놀린 거잖아!"
화령신조가 끼어들었다.
"해는 금세 저물고 달이 중천에 뜨면 수신회가 끝납니다. 신수께서는 시간 끌지 말고
어서 시험을 제시하십시오."
"두고 보자. 두 번째도 간단‥‥‥. 아니, 아니, 어렵다! 무지 어렵지!
나보다 힘이 세야 한다!"
"그래서, 그 두 가지를 증명할 시험 방식은?"
"나를 찾아라."
화안금정수가 정색을 하고 요구했다.
"나는 하늘에도 없고 땅에도 없을 것이다. 나는 태양으로부터 가장 먼 곳에 있겠지만
가장 가까운 곳에 있을 것이다. 나는 낮도 밤도 없는 곳에, 삼라가 내쉬는 숨 속에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나를 끌어내라. 너는 한 시진 후에 나를 쫓아와야 한다."
화안금정수의 신형이 햇빛 속으로 녹아들었고, 마침내 목소리만 남긴 채 완전히
사라졌다.
"네가 내 주인이기를 원한다면, 내 땅에서 나를 이겨야 한다."
목소리의 마지막 여운이 사라지고, 화안금정수의 기척이 완전히 잦아들었다.
화령신조가 한숨을 내쉬며 천군을 향해 말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천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 정좌하고 눈을 감았다. 한 시진의 유예를
요구했으니 기다렸다가 출발하겠다는 뜻이었다. 화령신조는 궁금했다. 하늘도 아니고
땅도 아니며, 태양으로부터 가장 먹고 가장 가까운 곳, 낮도 밤도 없는 삼라의 날숨
속이 어디인지 천군은 알고 있을까?
지한과 겨루게 될 제석회 때 진선은 보패, 비구, 그리고 영수까지 쓸 수 있다. 천군이
일단 수신례를 치르게 되었으니 시험 결과와 무관하게 남화궁에 맡긴 보패는 조만간
돌려받을 수 있겠지만, 영수까지 맞이해야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화영이 생각하는 대로
일이 매끄럽게 흘러갈 수 있을 것이다.
신조는 화안금정수가 숨은 곳이 어디인지 짐작 가는 바가 있었지만 그것을 몰래
알려줄 수도 없었다. 천수에 정해졌건 어쨌건 이것은 신수가 요구한 시험이니까.
시험은 시험답게 치러져야 한다. 섣부른 간섭이 또 어떤 화를 불러올지 알 수 없다.
쏟아지는 햇볕 아래에서 시간이 흘러갔다. 한 시진 뒤, 미시 말. 천군이 눈을 떴다.
그리고 일어나 화령신조를 향해 말했다.
"그럼, 자시 전까지 돌아오지."
어디로 가십니까 묻기 전에 천군의 비검이 챙 소리와 함께 검집을 떠나 날아갔다.
그 뒤를 따라 천군이 몸을 날렸고, 다음 순간 천군은 비검 위에 서 있었다. 비검이
잠깐 몸을 떠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눈부신 빛과 함께 강렬한 선흔만 남기고 단숨에
운중석해를 벗어났다. 집전자의 자격으로 시험이 공정하게 치러지는지 지켜보아야
하는 화령신조도 급히 날갯짓해 올라가며 석해의 선인들에게 고했다.
"자시까지 잠시 휴회하니, 선인과 영수들게서는 그 시각에 다시 모여주십시오!"
석해의 선인들은 흩어지지 않았다. 술을 꺼내고 친분 있는 이들끼리 모여 이 일의
결말이 어찌될 것인가, 제석의 싸움은 또 어찌될 것인가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는데,
그들이 첫 번째 술잔을 비우기도 전에 천군은 보천선계를 벗어나 삼라의 남쪽으로 긴
선흔을 그으며 날고 있었다.
"나가셨구나."
수하린이 문득 말했다. 수하린의 옆에 똑같은 자세로 앉아 백옥조천경을 바라보고
있던 가스라기가 돌아보았다.
"선계를 벗어나셨어. 숨바꼭질이 시작된 모양이다."
"상아님은‥‥‥."
"응?"
"상아님은 어떻게 그런 걸 다 알아요?"
"그거야‥‥‥."
천수배필이니까, 라고 대답하려다가 수하린은 가스라기의 얼굴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부러운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 얼굴이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이렇게 속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산다면, 심어 따위는 필요가 없을 텐데.
"그렇게 자세히 아는 건 아냐. 그냥 선계에 계시는 것과 안 계시는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정도지."
물론 거짓말이었지만, 그렇게 줄여 말해도 가스라기의 부러운 표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하늘님을 원래 이름으로 부르지도 못하는데, 나는 하늘님을 가짜 하늘님하고
구별도 못하는데, 나는 하늘님 옆에 있는 많은 선녀들 중 하나일 뿐인데‥‥‥.
그런 마음속 소리가 수하린에게 흘러들어왔다. 수하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뭐라고 말해도 이 아이가 나를 부러워할 뿐이겠지.
수하린은 다시 눈을 감았다. 가스라기도 그녀를 따라 다시 눈을 감았지만 불편한
듯이 발을 꼼지락거렸다.
'이렇게 있어봤자 나는 상아님처럼 하늘님이 어디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무슨 소용이 있을까.'
"발 아프니?"
"조금."
"그럼 바람 좀 쐬고 오렴."
"그래도 돼요?"
수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제발 그래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한번 읽기
시작한 네 마음의 소리가 걷잡을 수 없이 흘러들어와 견디기 힘들다고.
가스라기가 일어나 힘없는 걸음으로 대전을 나갔다. 홀로 남은 수하린은 겨우 다시
정신을 집중할 수 있었다. 추일의 맥이 이어졌다.
아직 뜨지 않은,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만월의 기운을 빌려 그녀는 그의 마음을
더듬어보았다.
윙윙 바람, 웅웅 칼 울음, 뜨거운 태양, 무더위. 그는 남으로, 환주를 벗어나 더 먼
남으로 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환주의 경계를 넘어서자 추일의 맥이 거의 끊어질 듯
가늘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그것은 가물거리다가 끊어졌다.
수하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겠다. 나는 해를 좇고 그 분은 달로 돌아오게 되어
있는, 날 때부터 정해진 천수배필로 기색을 읽고 있는 것이 정녕 그분의 마음인지
언제나 자신이 없어. 그래, 그때도 그러했지. 석 달이 넘도록 소식이 없으셨을 때.
그때 조차 나는‥‥‥ 천수배필이면서 동요하지도 않았지. 정작 내 마음 속을 채운
것은 전혀 다른 번뇌였어. 가스라기야, 네가 부러워할 것은 하나도 없단다.
수하린의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오늘따라 기분이 묘하다. 왜 이리 갑자기
잡념이 파도를 칠까? 무엇인가, 사무친 그리움 이 뱃속 깊은 곳에서 꾸역꾸역
올라왔다. 무수한 기억들, 얼굴들. 평소에는 떠올려보려고 해도 떠오르지 않던
것들이 마구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중극에 이르기 전의 진선에게 그러한 것처럼, 망각은 그와 같은 세월을 살아야 하는
월인 상아들의 힘이었다. 잊어야 살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그 망각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수하린은 추일의 맥을 끊고 신음하며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왜‥‥‥ 왜 갑자기 이러지? 어제‥‥‥ 미사린의 그 술‥‥‥ 너무 많이 마셨나 봐.'
숙취인 걸까? 수하린은 정신을 잃으며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창가에 앉아 있던 그녀의
비합전서인 쌍정이 놀라 홰를 치며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