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천군이 수신회를 위해 떠난 뒤, 수하린은 모든 선녀를 데리고 천도각의 대전으로 갔다.
대전에는 중추 가배를 지켜보던 거대한 거울, 백옥조천경이 걸려 있었지만 아직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해가 높이 솟은 시각이라 수하린이 천리안과 순풍이를 쓰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이다.
수하린은 대전 한가운데 놓인 방석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천도각의 선녀들도 함께
그 주변에 무릎을 꿇으려 하자 수하린은 손을 저었다.
"아니, 괜찮아요. 아직은 이른 시각이니‥‥‥. 진선께서 언제 돌아오시든 편히 쉬실
수 있도록 안팎을 정리하고 여러분도 좀 쉰 다음에 저녁 무렵부터 함께 있어주세요."
그리고 가스라기의 손을 잡아 옆에 앉혔다.
"심심하면 이 아이랑 이야기나 하고 놀 테니까, 어서들 가보세요."
선녀들이 물러가자 넓디넓은 대전에는 수하린과 가스라기 단둘만이 남았다.
이갸기나 하고 논다더니 정작 수하린은 눈을 감은 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몸을 작게
좌우로 흔들면서 혼자 놀고 있었다. 한동안은 가스라기의 손목을 꼭 잡은 채로
그러더니, 문득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렇게 된 것이구나. 그래‥‥‥. 어쩐지 그 칼을 보고 진선께서 하시던 말씀이
심상치 않았지."
그러고는 가스라기의 손을 놓아주고 혼자 눈을 감은 채 콧노래를 중얼거렸다.
가스라기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 사람은 누굴까? 천수배필 상아님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상아님은 하늘님의
'무엇'일까? 천수배필이라는 게 무슨 뜻일까? 하늘님 주변의 수많은 선녀들 중 하나로
살아가더라도 행복 할 수 있을 거라고 애써 생각하면서도 상아에 대해 궁금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몹시 조심스럽고도 어딘가 불편한 궁금증이었다.
콧노래 장단에 맞춰 좌우로 몸을 흔들어대던 수하린이 문득 노래를 멈추고 말했다.
"뭐든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렴."
화들짝 놀라서 앉은 채로 뒤로 물러났다. 상아란 마음을 들여다보는 귀신인 걸까?
"귀신은 아니란다."
가스라기는 확신했다. 귀신이구나.
"아니라니까."
수하린이 콧등을 찡그리더니 눈을 떴다. 그리고 짐짓 무서운 표정을 지으면서
엄하게 말했다.
"한 번만 더 귀신이라고 생각하면 큰일 날 줄 알아."
무서운 표정을 지으니 오히려 무섭게 보이지 않아서 가스라기는 조심조심 물었다.
"무슨 큰일요?"
수하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뭘 물어봐도 대답해주지 않을 거다. 그럼 넌 궁금해서 죽을 지경이 될 거야."
그러고 나서 수하린이 킥킥 웃었고, 가스라기도 결국 따라 웃고 말았다.
"그래, 이제 좀 낫구나. 혀가 풀렸으면 물어보렴."
가스라기는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상아님은‥‥‥ 뭐예요?"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수하린은 대답했다.
"나는 그분의 천수배필이다."
천수배필은 또 뭐냐는 질문을 하기 전에 수하린은 말을 이었다.
"한 명의 진선이 등극할 때, 천계에서 내려 보내는 배필이지. 기린관, 교룡갑,
천마화를 혼수로 들고 왔으니 하계의 말로 하면 시집온 거라고 해도 되겠지.
그때부터 지금까지 지금까지 쭉 그분 곁에 있었어."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수하린이 빙긋 웃고는 덧붙였다.
"너와 함께 계셨던 백 일을 빼고."
넓은 대전이 침묵으로 가득 찼다. 한참 후에 가스라기가 물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네 마음을 읽었다."
왜냐고 물어보면 좀 전에 네가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분의 기색이 변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려 했다. 겉으로는 태연 하셨지만, 달의 기운이 상승하는
중추 시기에 상아의 눈은 더욱 밝아져 제 짝인 진선의 몸 주변을 떠도는 대기의 색이
미묘하게 변하는 것까지도 볼 수 있게 된다고 대답해주려 했다. 그분을 둘러싼
대기가 지금껏 보지 못한 색으로 복잡하게 끓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원인이
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일부러 손을 잡고 한동안 네 마음을 읽었다고.
천수배필로서 너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하는 중이라고. 가스라기가 입을 다물고
있는 동안, 무수한 질문들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명멸하는 것을 수하린은 느꼈다.
결국 가스라기가 던진 것은 전혀 다른 질문이었다.
"그럼 왜 지금은 같이 안 갔어요?"
"지금?"
가스라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차마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 않은 마음속의
중얼거림이 수하린에게 느껴졌다. 나라면, 내가 상아님이라면 어디든 같이 갈 텐데.
떨어지지 않고 옆에 붙어서. 수하린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한참 만에야 대답을 했다.
"수신회는 선인들만의 자리다. 나나 선녀들은 참석하지 않아."
"왜요?"
"왜라니? 수신회는 본래 천선의 제자들이 영수로 삼을 신수들을 쫓던 사냥
풍습이니까‥‥‥. 그건 선인들의 일이고 우리가 할 일은 배웅하고 기다리는 거니까."
그래도 나 같으면 숨어서라도 볼 텐데. 하늘님이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고 싶을 텐데.
가스라기의 소리가 자꾸 들려와 수하린은 점점 마음이 답답해졌다. 애초에 기대한
것은 이런 대화가 아니었다. 철없으리만큼 진선을 앙모하느라 속 끓이고 있는 어린
선녀를 잘 타이르고 다독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정작 수하린 자신의 속이
끓었다.
이유는 잘 알 수 없지만, 가스라기의 마음속 소리를 들을수록 그녀가 생전 느껴본
일이 없는 기묘한 감정이 부글거렸다. 수하린은 무엇인가를 진심으로 미워해본 일이
없었다. 질투일까? 내가? 미사린처럼? 오, 안 돼. 말도 안 돼. 수하린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렇게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면 안 돼!"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약간 높아졌다. 가스라기가 놀란 것만큼이나 수하린 자신도
놀랐다. 몇 차례 숨을 고른 뒤에야 겨우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러고 나니
가스라기의 마음속 질문이 또 들려왔다. 왜 가려고 하면 안 되는 거지? 난, 나는
그냥 많은 선녀들 중 하나일 뿐이니까 그렇지만‥‥‥ 상아님은 아니잖아.
아닌데 왜?
수하린은 허탈하게 웃음을 흘렸다. 이런 아이에게 질투를 느낀다면 천계 월궁
태황성모의 딸이자 천계와 선계 사이를 잇는 상아라는 신분이 부끄럽지 않은가.
"옛날이야기 하나 해줄까?"
수하린의 음성이 평소대로 돌아왔다. 그녀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백옥조천경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옛날, 아주 먼 옛날에 한 분 진선이 다른 선계를 방문하러 잠시 나갔다 돌아오시는
길에 하계 여자 하나를 주워온 일이 있단다.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니 주워왔다 말하는
것이 좀 이상하지? 정확히 말하자면 낚아채온 거지. 그 하계 여자는 그네를 타고
있었는데 하늘을 날아가던 진선께서 낚아채신 거지."
수하린은 짧게 웃었다.
"진선께서는 당신의 상아에게 횡설수설 변명을 하셨단다. 얼핏 보니 여자에게 선기가
엿보였다고 말이야. 그것도 아주 꽉 찬 선기라서 다음 생에는 선골로 다시 태어나지
않겠는가 여겨져 키워보고 싶은 생각에 데려왔다고. 하지만 그게 말도 안 되는
변명이라는건 기색을 볼 수 있는 천수배필이 아니라도 다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어.
선인들이 하계 여자에게 쉽게 반하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그리고
그게 또 뭐 그리 크게 흉 될 일도 아닌데 말이지. 선인들은 참 별걸 다 민망해하고
부끄러워한단다."
가스라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님도 그랬다. 무척이나 수줍음을 많이 탔다.
그리고 수줍어할 때마다 괜히 화를 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어. 그분 진선께서 아끼신 그 하계 여인은‥‥‥ 진선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단다."
가스라기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왜요?"
"물어보았지. 왜 받아들이지 않느냐고.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하더구나.
감히 받을 수 없다고."
"그게 무슨 소리예요?"
"글쎄다. 나도 참 이상하게 생각했지. 불로불사, 부족한 것도 없고 일도 없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줄 수 있는 선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도 그걸 감히 받을 수
없다니. 하계 여자의 속은 참으로 알 수 없구나 생각했어. 그 여인이 또 말하더구나.
하늘의 별은 두고 바라보는 것이 좋지요. 별을 메고 다닌다고 생각해보세요. 나약한
하계 여자가 감당할 짐이 아닙니다. 못합니다. 못하겠습니다. 그녀는 끝까지 진선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선녀로 몇 십 년을 지내다가 선골로 환생했단다. 아마 수행을
열심히 했다면 지금쯤 어딘가 선계의 선인이 되어 있겠지."
가스라기는 묘하게 입 안이 탔다. 이 상아님은 하늘님의 천수배필이다. 그런데 지금
들려주는 이야기는 수하린이 남에게 들은 것이 아니라 직접 지켜본 이야기 같다.
이야기 속의 진선은 누굴까? 혹시 하늘님이 아닐까?
"그럼, 그 진선은 어떻게 되었나요?"
수하린은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음성이 점점 낮아졌다.
"그 하계 여인이 환생한 후로, 그분은 반쯤 정신이 나가버리셨지. 보천궁 모든 선인
선녀들의 근심이 태산 같았단다. 저러다 그분께서 눈물이라도 흘리게 되면
어쩌느냐고."
ㅡ 우리는 울어서는 안 되니까.
오래전, 하늘님이 했던 이야기가 불현듯 떠올랐다.
"왜요? 울면 왜 안 되는데요?"
"선인이‥‥‥ 진선이 아닌 보통 신선이 울기만 해도 그 일대의 초목과 바위와 짐승과
땅이 함께 운다. 진선이, 그것도 한 선계를 맡은 진선이 눈물을 흘리면 만물이 함께
울게 돼. 게다가‥‥‥ 한번 흘린 눈물은 멈추지 않는단다. 눈물을 흘린 진선은
울다 울다 결국은‥‥‥."
수하린은 말을 잠깐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태세(太歲)가 된단다."
"태세?"
"그래. 불사하는 선인 또는 몇 가지 죽음이 가능한데, 그중 하나가 태세다. 태세가
세상에 나타나면, 세상이 멸망한다고 하지."
"그럼, 그 진선은 태세가 되었나요?"
"그랬으면 우리가 이렇게 앉아서 이야기할 수도 없게?"
"그럼 울지 않은 거예요?"
"울지 못했지."
"왜‥‥‥."
"눈물을 흘리려고 했을 때, 그분의 상아가 그분을 감싸 안았기 때문이야."
가스라기가 보기에, 수하린은 무척 슬픈 표정이었다.
"극양과 극음은 가까이 있으되 닿으면 안 된다고 정해져 있다. 우리는 그분들의
천수배필이나 안을 수도 없고 안길 수도 없어. 다만 마음을 보살펴드리며 탁한 기운이
강할 때 정하게 만들고 지나치게 뜨거울 때 식힐 방도를 찾아드리고, 천계인만이
가능한 술법으로 도와드리는 것, 그것이 우리의 일이다. 거리를 두고 아껴 드려야
하며, 사랑하거나 집착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선이다. 그 선을
넘는 순간‥‥‥."
"어떻게 되었는데요?"
"그 상아는 명행에 들었지. 영원히 깨지 않는 잠에."
하늘님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여기 하늘님의 상아는 생생하게 눈을 뜨고 있으니.
하지만 슬펐다. 수하린이 긴 한숨을 내쉬고 돌아보자 가스라기는 울먹울먹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불쌍하니?"
가스라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말이지. 천수배필이 그리 되고 나서 그분 진선께서는 정신을 차리셨단다.
눈물 흘리지 않았고, 그 뒤로는 아주 오랫동안 당신의 선계를 잘 다스리셨지.
그러니 아마 명행 속에서도 그 상아는 아주 기쁘지 않을까?"
아마도 그럴 테지요, 하무린상아. 그래서 나는 당신이 부럽답니다. 다른 상아라면
차라리 그 하계 여자의 환생을 막거나, 진선을 꾸짖어 정신 차리게 하거나, 천계에
고해 폐적을 시켰겠지요. 하지만 당신이 그러지 않은 것은‥‥‥ 당신이 이름뿐인
배필이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나나, 미사린과는 달리.
"상아님도‥‥‥ 하늘님을 좋아해요?"
수하린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네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우리는
한 존재가 아니라 한 존재의 천수에 짝지어져 있으니까. 수하린은 가스라기의 손을
잡아 옆으로 당겨 앉혔다.
"그래, 너나 나나 같은 분을 좋아하는 같은 처지니까, 심심하더라도 돌아오실 때까지
이렇게 같이 기다리자꾸나. 많이 다치지 않으시기를 빌면서."
가스라기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다쳐요? 하지만 여진선고님은 수신회는 전혀 위험한 게 아니라고 했는데‥‥‥."
아차 싶었지만, 수하린은 어차피 이 아이도 오늘 밤에는 알게 될 테니 굳이
숨실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선인들은 안 위험하지만‥‥‥ 아마 그분의 경우는 좀 다를 거다.
길들이려는 신수가 좀 성질이 고약해서."
가스라기의 얼굴이 금세 근심으로 뒤덮였다.
"그, 그럼 어떻게 해요?"
수하린은 가스라기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랍시고 말했다.
"너무 걱정 마라. 내 보기에는 그분도 만만치 않게 고약한 면이 있으니 이기고 오실
거다. 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리는 것뿐이라고 했지? 기다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