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가스라기는 다리가 떨렸다. 손도 후들거렸다. 두 손으로 꼭 잡고 있는 다반이
덜그럭거렸고, 다반 위의 다구들도 따라서 왈각달각 몸을 떨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수궁부라는 곳에 끌려갔더니
옷을 홀랑 벗기고는 뜨거운 물에 집어넣고 목욕을 시켰다. 목욕을 하다가 잠이
들었고, 깨어나 보니 엉뚱한 곳에 와 있었다.
푸른 옷을 입은 선녀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흰옷을 입는
것은 의선각의 선녀들이고, 가스라기와 같은 새내기 선녀들은 평소에는 아래위
같은 색의 녹의를 입다가 가배 날만 특별히 곁마기 녹의홍상을 입는다. 광명정의
선녀들은 주황색 옷을 입고, 연화봉 선녀들은 붉은 옷을, 수궁부 선녀들은 자주색
옷을 입는다. 그리고 푸른 옷을 입은 것은 천도봉의 선녀들, 그중에서도 한 줄
스란을 덧댄 치마를 입는 것이 주선을 모시는 천도각의 선녀들이다.
천도각 선녀들의 가스라기에 대한 호기심은 대단했다. 입선한지 얼마나 되느냐고
묻는 선녀도 있었고, 아직 선적에 정식으로 오르지도 않은 새내기가 무슨 재주로
장원을 땄느냐고 놀라는 선녀도 있었다. 여기가 천도각이라고 알려주는 친절한 음성도
있었고, 다도는 제대로 배웠느냐고 엄하게 묻는 목소리도 있었다.
장원으로 뽑혀 천도각에 사흘간 머무르게 된 선녀는 우선 진선에게 차부터 올리는
법이라면서 몹시 귀해 보이는 다구들을 마구 떠안겼다. 뭘 어떻게 따르고 어떻게
올리고 설명을 잔뜩 들었지만 물론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더니 누군가가
들어와서 차를 올리라는 명이 떨어졌다 전했고, 선녀들이 그녀의 등을 떠밀어
내보냈다.
한 선녀의 뒤를 따라서 길고 긴 주랑을 걸어갔다. 검푸른 주렴을 드리운 곳 앞에
멈추자, 안내해온 선녀가 안에 고했다.
"차를 올리겠나니다."
선녀가 주렴을 한옆으로 걷고는 가스라기에게 안으로 들어가라고 눈짓을 보냈다.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 안으로 들어갔다. 치맛자락을 밟고 엎어지지 않으려고 무척이나
애를 써야 했다. 등 뒤에서 주렴이 다시 차르륵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넓은 방, 달이 내다보이는 월출창 가까이에 다탁이 있었다. 다탁 앞의 의자에
하늘님이 앉아 있었다. 표정이 어쩐지 무서웠다.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입술을 꾹
깨물고 있는 것이 뭔가 단단히 결심한 것 같기도 했다. 아무튼 무서웠다. 아까 가배
때에 본 하늘님과 같은 얼굴이 아니었다. 그때는 멀리 있어도 무척이나 가깝게
느껴졌는데, 지금은 가까이 있는데도 너무나 멀어 보였다.
다구들이 더 크게 덜그럭거렸다. 뭐부터 해야 할지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맨 먼저 무엇부터 하라고 했더라? 찻잎을 어떻게 우리라고 했더라?
아니, 먼저인사를 하라고 했었지!
주렴 밖의 선녀가 나지막하게 헛기침을 했다. 진선을 처음으로 가까이 모시게 된
새내기 선녀가 혹시 실수라도 할까 싶어 귀를 곤두세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가스라기는 얼결에 고개를 숙였다.
"차‥‥‥ 차 가져왔습니다."
말을 하고 나서야 뒤늦게 생각났다. 먼저 입구에 들어서 반례와 함께 '가배에서 장원
한 누구누구입니다'라고 자기소개를 하고 '진선께 차를 올리라는 명을 받들고 왔습니
다'라고 하라 했다. 이제 와서 새삼 다시 고쳐 말할 수도 없었다. 이다음부터 제대로
하면 된다. 가스라기는 비지땀을 흘리며 그런데 다음이 뭐더라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아, 그래. 탕관을 들어 차해에 부으라고 했어. 다반 위에는 비슷비슷하게 생긴
그릇과 주전자 같은 것들이 너무 많았다. 이것이 자수기요, 저것이 차호요, 차해는
여기 있고, 문향배와 차칙과 차건과 차협, 차루가 이것과 저것이다, 라는 설명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도대체 어느 게 어느 거란 말인가. 탕관은 무엇이고
차해는 무엇인가. 아니, 그것보다 두 손으로 다반을 받쳐 들고 있는데 도대체 무슨
손이 남아서 들고 붓고 한단 말인가.
가스라기가 끙끙거리며 서서 어떻게 하면 없는 손을 하나 더 만들어낼 수 있을까
고민하는 동안, 입을 다물고 지켜보기만 하던 천군의 얼굴에도 곤란한 표정이
떠올랐다. 가배에 장원한 선녀와 첫날 다례를 가지는 것은 천도각의 관례였다.
그는 이 관례를 그야말로 관례답게 치르고 싶었다. 차를 마시고, 치하하고, 돌려보낸
다. 그것으로 끝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첫 순서부터 틀려버렸다. 저대로 내버려두면
백 년이고 천 년이고 다반을 든 채 쩔쩔매다가 돌이 될 것 같았다.
그는 들키지 않게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이리 가져와."
가스라기가 놀라서 눈을 깜빡거리며 쳐다보았다. 천군이 다탁을 손으로 가리켰다.
가스라기는 속으로 환호를 질렀다. 그래, 저기다 다반을 올려놓으면 되는 거였지!
만세! 하늘님이 또 구해줬어. 아무리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어도 역시 하늘님이야.
가스라기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옮겨 다가갔다. 댓잎 냄새가 점점 짙어졌다.
다탁에 다반을 내려놓을 때 큰 소리가 났다. 천근만근의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다음도 문제였다. 탕관을 들어 차해에 부으라고 했는데 어느 게 탕관이었던
가. 머리를 좀 굴려보니 탕관은 끓인 물이 담긴 주전자일 게 틀림없었다. 주전자처럼
생긴 것이 두 개 있는데 그중에 뜨거운 물이 담겨 김이 솔솔 피어나는 것이 하나
있다. 가스라기는 얼른 그것을 잡았다. 그리고 뜨거운 물을 부을 만한 그릇을 눈으로
찾았다. 둥근 바리 같은 것이 보였다. 냅다 그리고 물을 부으려고 탕관을 갖다 대는데
하늘님이 또 입을 열었다.
"그건 수우다."
무슨 소린지 몰라서 눈을 말똥거리며 쳐다보니 하늘님이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목소리를 가라앉혀서는 대답했다.
"물을 식힐 때는 여기 차해에 붓는 거야. 수우는 차호나 차배 헹군 물을 붓는 것이고."
"아."
가스라기는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늘님이 시킨 대로 뚜껑이 없는 주전자처
럼 생긴 다구에 끓인 물을 따랐다. 천군은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으나, 저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초조하게 두드리고 있었다.
다구를 헹군 물이나 다 우려낸 찻잎을 옮겨 담는, 한마디로 찌꺼기를 처리하는 바리에
개끗한 찻물을 부으려는 시도를 막는 것은 간신히 성공했으나, 일은 거기서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탕관을 든 자세도 어설프고, 첫 순서부터 틀리는 걸 보니 그다음도 모를 건 뻔했다.
이런 식으로 계속 하나하나 가르치다가는 언제 끝날지 모를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다음에는 차해를 들어 차호에 붓고, 그 물을 다시 차배에 부어
차호와 차배를 모두 같은 온도로 데워야 하는 것이 순서인데 가스라기는 대뜸 차통을
열고 찻잎을 차해에다 훌훌 털어 넣으려 들었다.
다원의 선녀들이 일 년간 정성스레 키운 훌륭한 찻잎들이 뒤죽박죽 다도에 덧없는
생을 마감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결국 천군은 가스라기의 손목을
잡아 막았다. 찻잎을 부으려다 말고 가스라기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는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천군은 눈을 내리감고 손을 뗐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관둬라. 내가 할 테니."
가스라기가 후아 한숨을 내쉬었다. 몹시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다도 따위는 배운 적도
없다는 걸 숨기지도 않았다. 천군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젓고 차해를 잡았다.
가스라기는 두 손을 마주 잡고 다탁 옆에 서서 하늘님이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차해를 잡고 차호에 물을 부은 다음, 다시 차호를 잡고 차배에 물을 부었다. 그리고
다시 탕관을 들어 차해에 물을 붓고, 차해의 물을 다시 차호에 채웠다.
동작 하나하나가 익숙했고, 물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선녀들이 설명해줄 때는 도대체 차 한 잔 마시는 데 무슨 일이 그리 번잡한가
싶었는데, 하늘님이 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다도라는 것이 좀 더 길어도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차를 나르는 것이 오늘 그녀의 임무라면, 하늘님이 차를 다 마시고
나면 도로 나가야 할 것이 아닌가. 차 마시는 시간이 아주 길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이렇게 옆에서 계속 지켜볼 수 있는 텐데. 가까이에서 보는 하늘님의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댓잎 같은 체취도, 눈썹도, 콧날도, 무엇인가를 들여다볼 때 약간 고개를
기울이는 버릇도 변함이 없었다. 천 번이 넘는 낮과 밤이 지났지만 하늘님은 여전히
하늘님 그대로였다. 괜히 히죽히죽 웃음이 났다. 드디어 차시로 차통의 찻잎을 담아
차호에 넣은 하늘님이 가스라기를 힐끔 쳐다봤다. 얼른 웃음을 지웠다.
하늘님이 말했다.
"앉아라."
"에?"
차만 날라주고 나가야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앉으라니.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자
하늘님이 말했다.
"서서 차를 마실 수는 없잖아. 앉아."
그러고 보니 차배와 문향배가 각각 두 개였다. 하늘님이 차배와 문향배 하나를
가스라기 쪽의 탁자에 놓아두었던 것이다. 가스라기는 잽싸게 앞에 앉았다.
가슴속에서 불꽃이 펑펑 터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늘님하고 차를 마신다! 함께 술을
마신 것이 몇 년 전이었던가. 이제 같이 차를 마시게 되었다. 그것도 마주 앉아서.
가슴이 벅차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뜨거운 물이라도 좀 마셔야 할 것 같았다.
가스라기는 앞에 놓인 차배를 잡았다.
"그건 마시면 안 돼."
하늘님이 또 말렸다.
"그건 잔을 데우는 물이야. 차호의 물과 차배의 온도를 똑같이 맞추기 위해서다."
"아."
왜 맞춰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마시면 안 된다니 일단 내려놓았다. 하늘님이
또 뭔가 말해주지 않을까 기대하며 바라보는데, 찻잎이 우러나기를 기다리며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마주 봐주지 않으니 좀 섭섭했지만, 눈 감은 하늘님 모습을 보는
것도 또 나름 좋았다. 보고 있는 동안 가스라기는 뜨거운 물에 우러나는 찻잎이
된 것처럼 기분이 몽롱해졌다.
이윽고 천군이 눈을 떴다. 눈이 마주쳤다. 천군의 손이 가스라기 쪽으로 뻗어왔다.
두근거리며 지켜보니, 차배를 들어 그 안의 물을 수우에 부었다. 자신의 차배도
똑같이 비우고는 차건을 들어 두 개의 차배를 닦아냈다.
마침내 차호를 들고는 두 개의 문향배에 찻물을 붓는데 한 번에 채우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잔을 오가면서 거듭 부어 채우기를 반복했다. 두 찻물의 농도를 동일하게
맞추기 위한 다도의 기법인데, 가스라기는 그건 몰랐지만 하늘님과 자신의 마실
찻물이 뒤섞이는 듯한 느낌이 들어 그저 좋았다.
천군이 차호를 내려놓았다. 이제는 마셔도 되는가 싶어서 그 길쭉한 문향배를 두 손으
로 잡고 입으로 가져가려는데 다시 천군이 입을 열었다.
"마시는 게 아니다."
'아직도?'라는 말을 얼굴 가득 담고 바라보니, 천군이 문향배에 채운 차를 차배에
옮겨 부으면서, 따라하라는 듯이 손을 까딱거렸다. 똑같이 하니, 빈 문향배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문향배는 차를 마시기 전에 향기를 취하는 잔이다."
그러고는 눈을 지그시 감고 빈 잔을 코끝으로 가져갔다. 가스라기도 똑같이 했다.
과연 차의 향기가 따스한 온기와 함께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기분이 좋아졌다.
한껏 향기를 위한 뒤, 천군이 몹시도 힘든 일을 마친 것처럼 길게 숨을 내쉬고 말했다.
"이제 차를 들자."
두 손으로 차배를 감싸는 천군을 보고 가스라기도 똑같이 따라했다. 차배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천군이 문득 중얼거렸다.
"십 년 만이로군."
어라, 그렇게 오래된 것 같지는 않은데? 가스라기가 고개를 갸웃하며 쳐다보자
천군의 말이 이어졌다.
"천도봉에서 장원이 나온 것 말이다. 장원으로 뽑힌 선녀와는 이렇게 차를 같이 했지."
가스라기의 표정이 굳었다.
"장원을 하다니 재주도 놀랍지만 애도 많이 썼을 테지. 편하게 마셔라. 다원의 선고
들이 가꾼 선매차다. 몸을 맑게 하고 마음을 가라앉혀준다고 들었다."
하지만 가스라기의 마음은 답답했다. 천군은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단지 장원을 했기 때문에 같이 차를 마셔주는 거라는 소리처럼 들렸다. 이런 게
아닌데, 이런 걸 바라지는 않았는데.
하지만 천군은 할 말 다 했다는 듯이 차배를 들어올렸다. 가스라기도 천군이 하는
대로 흉내 내어 차배를 들었다. 천군이 차배를 입으로 가져갈 때, 그녀는 불쑥 입을
열었다.
"사 년 만입니다."
존대를 썼지만 목소리는 불퉁했다. 이번에는 천군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
"같이 뭐 마시는 거요."
그녀는 냅다 말해버리고 찻물을 훌쩍 들이켰다. 화가 난 속에 뜨거운 찻물을 들이붓자
불이 확 일었다.
"앗, 뜨거!"
차배를 떨어뜨렸다. 뜨거운 찻물이 엎질러졌다. 들이켠 찻물을 토하고 콜록콜록 기침을
해댔다. 벌떡 일어나 젖은 치마를 털고 깨진 찻잔 조각을 주우려고 허둥거렸다.
진선들만 마시는 선매는 향과 맛뿐 아니라 공력 증진에도 도움이 되는 선차로, 가배
장원에게 특별히 주는 상이나 다름없는데 그 찻물이 모두 쏟아져버리고 말았다.
가스라기는 그런 건 몰랐다. 그렇지만 화가 치밀었다. 그녀는 갑자기 깨진 찻잔
조각 옆에 주저앉아버렸다. 그리고 무릎에 얼굴을 박았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천군은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아니, 꼼짝도 하지 못했다. 차배가 떨어질 때,
그의 몸은 그것이 깨지기 전에 받아내기 위해 움직이려 했다. 그의 머리는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말렸다. 그는 두 마리 황소가 각각 반대편으로 끌어대는 밧줄에 묶인
사람처럼 우뚝 멈춰버리고 말았다. 순식간에 난장판이 된 다탁 주변과, 대성통곡을
터뜨릴 것 같은 가스라기를 보면서도 뭐부터 해야 할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아직 철이 없어 당황한 모양입니다. 그만 물러가게 하리까?"
주렴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선녀가 안의 기척을 듣고 초조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제야 천군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다."
그는 고개를 젓고, 잠깐 가스라기를 내려다본 후에 다시 덧붙여 명했다.
"잠시 주위를 물려라. 이 아이와 조용히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주렴 바깥의 선녀는 그 명에 내심 크게 놀랐다. 가스라기가 아니라 자기더러 물러가라고
했기 때문이다. 무슨 심경으로 저러는지 너무나 궁금했지만 감히 물어볼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는 신속히 고개 조아리고 물어나면서 얼른 수하린상아를 찾아 이 일을
고해야겠다고 결정했다. 분명히 어디선가 미사린상아에게 술을 얻어 머시며 몹시 취해
있을 테지만, 진선의 심기를 속속들이 헤아릴 수 있는 이는 그나마 천수배필인 상아밖에
없지 않은가.
주렴 밖의 선녀가 물러가자 천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스라기는 고개를 들지도, 우는
소리를 내지도 않은 채 그대로였다. 천군은 그녀에게 다가가다가 멈췄고, 돌아서서
서성거리다가 다시 돌아보았다. 일이 틀어져도 단단히 틀어졌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화가 났느냐고 물어볼까? 아니, 묻지 않아도 뻔했다. 화도
나고 슬프기도 한 게 분명했다. 왜 화가 나고 슬프냐고 묻는 것도 부질없었다. 무슨
이유인지 뻔했다. 이유는 뻔하지만 해결책은 없다. 최소한 그가 내놓을 수 있는 해결책은
없었다. 무력하구나. 다구를 앞에 두고 쩔쩔매는 얼치기 선녀에, 그 얼치기 선녀를 앞에
두고 쩔쩔매는 진선이라니.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오려는데 가스라기가 입을 열었다.
"이런 거 싫어."
어설프게 흉내 내는 존대가 아니라, 막무가내로 조르던 그때의 말투 그대로였다.
"하늘님이 하늘님 같지 않아. 이런 거 보려고 악을 쓰면서 올라 온 게 아니란 말이야.
왜 모르는 사람처럼 구는 거야? 싫어!"
가스라기는 고개를 들고 노려보면서 또박또박 말했다. 천군의 심장이 오직 그에게만
들리는 큰북소리처럼 쿵쿵 울렸다. 그래, 저 눈이다. 내가 정말로 두려워한 것은 칼이
아니라 그 칼의 주인이다. 그때도 그러했던 것처럼. 오늘 가배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저 눈으로 무엇인가를 부탁하면 움직이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기분이 되고 만다.
이유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은원의 빚 청산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직도 갚아야 할 빚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혹은 길고 긴 선인의 삶에서
경험했던 단 한 번의 일탈에 대한 목마른 희구 때문일지도 모른다. 혹은‥‥‥. 아니,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 이유를 생각하는 것 자체가 두려웠다.
지금도 가스라기가 주저앉은 자리 옆의 깨진 사기 조각들이 불안하게 눈에 밟혔다.
움직이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다가가서 하나하나 주워 치우고 싶었다. 달래주고,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천도무친이라지만, 그저 어여삐 여기는 선녀 하나를
가까이 두는 것 정도로 천도가 깨어질 리는 없다. 어차피 무수한 선녀들을 옆에 두고
긴 세월의 무료함을 달래는 것이 선인의 삶이 아닌가. 하지만‥‥‥.
갑자기 눈앞이 아찔해졌다. 가스라기의 얼굴 위로 무엇인가 다른 것이 보였다.
지금보다 조금 더 자란, 완전히 성숙한 여자가 된 가스라기의 모습이었다. 얼굴이 땀과
흙투성이인 그녀 앞에 누군가가 있었다. 그가 모르는 존재였다. 선인은 아니었다.
하계인, 사내. 그 사내가 가스라기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잡아 귀 뒤로
넘겨주고 있었다. 가스라기는 무척이나 행복한 얼굴이었고‥‥‥.
거기서 환각은 끝났다. 이게 단순한 환각이 아니라는 사실을 천군은 깨달았다. 선몽을
꾸게 된 진선이 볼 수 있는 좀 더 자세한 천수의 예지였다. 언제나 볼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각별히 집중한 대상의 미래, 혹은 내세를 잠시 백일몽처럼 보는 것이다.
그녀는 그의 몫이 아니었다. 현재도 그러하고, 미래에도 마찬가지다. 혹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옆에 둔다고 해도 언젠가는 그 자신의 천수를 찾아 떠나게 될 것이다.
찬물을 뒤집어쓴 듯이 그는 정신을 차렸다. 내가 무슨 생각을 했단 말인가. 이 아이는
옆에 두면 그저 어여삐 여기는 것으로 끝낼 수 없을 게 분명하다. 화영도 그걸 눈치
챘으니 경고를 했을테고, 어차피 마실 수 없는 잔이다. 책임질 수 없는 다정은 무정보다
저열하다. 그는 차라리 거짓 무정을 택하기로 결정했다.
"네가 나를 어떻게 보았는지는 모르겠다만."
천군이 한참 만에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게 바로 나다."
가스라기는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아냐."
"그렇게 믿고 싶으면 믿어라. 하지만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이미 한 번
겪어보지 않았더냐. 나는 내 동생이 네게 무슨 짓을 할지 뻔히 알면서도 너를 버렸다."
"나를 걱정해서 그런 거잖아."
천군은 잠깐 말문이 막혔다. 말이야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심중에 들어와본 것도
아니면서 어쩌면 저렇게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는 오래 머뭇거리지는
않았다. 그는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어린아이와 대화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 하는
표정으로 웃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너를 멀리하려는 것은 똑같은데, 왜 그때는 너를 걱정해서고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때랑은 달라. 꼭‥‥‥꼭‥‥‥."
가스라기는 말을 더듬었다. 정확히 뭐라 표현할 말을 찾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천군은 그녀가 적당한 말을 찾아내기 전에 재빨리 잘라 말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네가 다르다고 믿고 싶을 뿐이겠지."
가스라기가 눈을 크게 떴다.
"왜? 왜 그래? 내가 싫어서?"
"싫은 게 아냐."
"그럼?"
그래,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나는 네가 싫은 게 아니다. 단지 네가 무서울 뿐이다.
"너는 내게 각별한 존재가 아닐 뿐이다. 싫을 리가 없지. 무한계를 올라오기 전에 너는
환주의 한 인간이었고, 올라온 후에는 보천궁의 한 선녀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가스라기의 몸이 흔들렸다. 그녀는 바닥을 손으로 짚으며 중심을 잡았다. 그녀의 손바닥에
사금파리가 박히는 거을 그는 그저 지켜보았다. 가스라기는 손에서 피가 흐르는 것도
모르는지 멍한 표정이었다. 외려 제 손바닥이 찔리는 것 같은 아픔을 맛본 것은 천군
쪽이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괜찮아. 돌아가면 누군가가 치료해주겠지.
저 정도 외상쯤이야 금세 낫게 할 약이 있으니까. 그는 빨리 그녀를 돌려보내기 위해
말을 이었다.
"하긴 오늘만은 특별하다고 생각해도 좋다. 너는 장원을 한 선녀니까. 장원한 데 대한
상으로 선매차를 주려 했는데 아쉽게도 쏟아버리고 말았구나. 나중에라도 뭔가 달리
원하는 게 있다면 선고들을 통해 청을 올리도록 하고, 그만 물러가거라."
"지금‥‥‥."
피가 흐르는 손을 붙잡고 일어나면서 가스라기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지금‥‥‥ 청하면 안 될까요?"
거짓 무정은 그것을 거절할 만큼 완전히 차갑지는 못해서 그도 힘겹게 대답했다.
"말해봐. 하지만 청을 들어줄지 어떨지는 듣고 나서 결정하겠다."
가스라기는 고개를 끄덕이고, 가슴을 들먹이며 숨을 고르고 나서 입을 열었다.
"나, 여기까지 오는데‥‥‥ 무지 힘들었어요."
잠깐 옛날 생각을 하는지 말이 끊어졌다.
"다리도 많이 아팠고, 그렇게 쉬지 않고 걸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계단을 올라올 때는
한 단 한 단 발을 뗄 때마다 발바닥이 벗겨지는 것 같았어. 계단 옆에 흐르는 물을
마시면 속이 다 타는 것 같았고. 올라와서는 그렇게 아팠던 적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여진선고님은 너무 자주 때리고, 구박하고, 배우는 건 별로 없고, 장원인지 뭔지도
사실은 운이 좋아서 받은 거고. 선계에 들어왔지만 아직도 내가 선계 사람인지 잘
모르겠어요. 바보 같아."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다가 그녀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도 딱 하나 바라는 게 있었어요. 그것만 얻으면 고생한 거 다 잊고, 그냥 살 수
있을 것 같아. 하계에서도 뭐 별로 다른 건 없었거든. 여기서는 먹을 거 걱정 안 해도
되고, 여진선고님이 자주 때려도 끝나고 나면 꼭 침도 놓아주고, 사실은 잘해주려고
하니까. 운교 언니랑 백화랑도 그냥저냥 잘 지낼 수 있고‥‥‥. 아니, 그냥저냥이 뭐야.
예전에는 그렇게 티격태격하는 동무도 없었는걸. 그래, 나 여기 오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해요. 하늘님 때문이 아니라도. 오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해. 저 아래에 있었으면
사냥하고, 훔치고, 혼자 데굴거리는 것 빼고는 할 일도 없었을 거야. 그러니까 하늘님
때문이 아니라도 선계에 오길 잘했어요. 딱 하나만 있으면 다 괜찮을 것 같아."
가스라기는 감히 말하기 어렵다는 듯이 머뭇거리면서 천군을 쳐다보았다.
천군이 입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다시 태어날 때를 기다리지 않고."
그녀는 말했다.
"내 힘으로 여기까지 올라왔으니까, 좀 엉망이지만 그래도 선녀가 되려고 애쓰고
있으니까."
그는 들었다.
"하늘님이 보면, 기뻐해주길 바랐어. 고생했다고, 애썼다고 칭찬도 해주고, 발은 안
아팠느냐고 물어봐주고‥‥‥. 그것뿐이야. 사실은 특별히 아껴주는 거, 그런 거
바라지도 않았어. 좀 기대했을지도 모르지만 지내는 동안 나도 듣고 본 게 있는걸.
그냥 남들 눈 신경 안 쓰고 진짜로 반가워해주고, 칭찬해주고, 앞으로도 잘하라고
‥‥‥ 머리도 쓰다듬어주고, 어깨도 토닥여주고, 그냥 그러면 정말로 좋겠다고
생각했어."
천군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역시 들어주기 어려운 청일까? 가스라기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목소리도 다시 기어들어갔다.
"힘든 거면 안 해도 돼요. 언제 다시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몰라서,
그냥 말해본 거니까."
머리에 손이 와 닿았다. 서늘하고 시원한 느낌을 주는 손이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려고 하니 손이 머리를 꾹 눌렀다. 다른 손 하나가 어깨로 올라왔다. 보이는
것은 하늘님의 가슴뿐이지만, 하늘님의 손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또 다른 손이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그리고 하늘님의 목소리.
"고생했다."
한마디 후에 침묵이 잠깐 흘렀고 말이 덧붙여졌다.
"네가 올 줄은 정말로 몰랐고‥‥‥ 그래서 놀랐다."
굉장히 힘겹게 짜내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고생했다."
한마디 후에 침묵이 잠깐 흘렀고 말이 덧붙여졌다.
"네가 올 줄은 정말로 몰랐고‥‥‥ 그래서 놀랐다."
굉장히 힘겹게 짜내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음‥‥‥ 무한계는‥‥‥ 직접 올라와본 적이 없어서 듣기만 했다.
천수를 거스르다니 보통 일이 아니었을 텐데‥‥‥. 무척 아팠겠지?
발은 다 나았고?"
가스라기는 어깨를 떨면서 웃었다. 무색해진 천군의 음성이 들려왔다.
"왜 웃는 거지? 뭘 잘못 말했나?"
"됐어. 그 정도면 충분해요. 그냥‥‥‥."
가스라기는 피가 흐르지 않는 손으로 눈가를 닦았다. 고개를 들고 방을 나갈 때는
눈물 뚝뚝 떨구는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잠깐만 더 이대로 있어요. 그 정도는 괜찮죠?"
대답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서늘하고
부드러운 손길에 머리를 맡기고, 가스라기는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이 자리에서, 이 말을 듣기 위해 걸어온 시간에 비하면
턱없이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자신에게 속삭였다.
그 이상을 바랄 수는 없으니까. 그네를 타고 하늘로 솟구칠 때, 누가 진심으로
날기를 원할까. 단지 조금 더 하늘 가까이 가고 싶어할 뿐.
중추 가배의 밤, 천도각에서 멀리 떨어진 운중석해에는 아직도 선녀들의 노래 소리가
끊어지지 않았다. 오르려 하지 말라고, 잡으려 하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