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109)

11-4.

"피를 보게 해준다더니 저거였나?"

지한이 피식 웃었다. 미사린이 고개를 숙였다.

"흡족하지 못했다면 송구할 뿐입니다."

뭔가 한마디 하려고 이을 열던 지한이, 말은 하지 않고 미사린의 어깨너머로 눈길을

던졌다. 미사린이 돌아보자 술병 하나가 미끄러지듯이 날아오고 있었다. 

술병과 함께 바로 옆에서 말하는 듯한 목소리가 도착했다.

"그저 구경만 하려니 무료해 보이는군. 한 모금 하게."

아래 운중석해의 선인 선녀들에게는 들리지 않고 미사린과 지한에게만 들리도록 보낸

궁주 화영의 전음이었다. 원륜거 앞에 와서 멈춘 술병을 미사린이 손 내밀어

잡으려 하자, 지한이 제지했다.

"급히 나오면서도 술을 잊지 않으시다니. 과연 궁주다운 도량. 고맙게 마시리다."

지한이 손가락을 까딱하자, 술병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지한은 목을 젖혔다.

흘러내린 황금빛 술 줄기가 그의 입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마실 만큼 마신 뒤 소매로

대충 입을 닦고, 그는 술병을 밀어냈다. 술병은 물 위를 떠가듯이 달빛을 타고

화영 건너편 멀리 수하린의 월륜교를 향해 날아갔다.

"나만 마시려니 섭섭하군. 천도봉 주선께서도 한잔 하시지?"

화영이 술병을 보낼 때처럼 부드럽게 밀려가는 듯했지만 그건 눈속임이었다.

수하린과 천군 가까이 다가가자 갑자기 술병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만약 천군이

술병을 멈춰 세우거나 잡으려 들면 그 순간 술병을 깨버릴 생각이었다. 몸을 상하게

할 수야 없겠지만 수하린이든 천군이든 술 한 방울이라도 뒤집어쓰게 만들 속셈이었다.

선인들끼리 주고받기에는 치졸한 기 싸움이었으나, 지한은 왠지 심사가 뒤틀려 참을

수가 없었다.

술병은 그가 원하던 지점에서 깨어졌다. 파편이 터지고, 반 넘어 들어 있던 술도

방울방울 흩어졌다. 여기까지는 계산대로였다. 계산에서 어긋난 것은, 파편과 술이

그대로 허공에 얼어붙어버렸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얼어버린 것이었다. 수하린이

목을 움츠리고 소매 속으로 손을 감췄다. 팔월 중추, 난데없는 한기가 천군을 

중심으로 수하린의 월륜교 주변에 퍼졌다. 시린 숨결을 내뿜으며 천군이 말했다.

"술이 너무 차서 마시기 힘들군. 마음만은 고맙게 받지."

빙한지기의 호신강기가 펼쳐진 것을 보고 얼어붙었던 지한의 얼굴이 잠시 후 피식

웃음을 그렸다.

"사람들은 사도의 선인을 보고 냉혈하다 말하지만, 정작 얼음 같은 것은 정도 중의

정도인 우리 형님이 아니신가."

양측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화영이 혀를 차며 팔짱을 꼈다.

"천수배필도 없이 가운데 앉아 있자니 진짜 추운 건 날세. 세번째 겨루기가 곧

시작될 모양이니 그만들 하지?"

"세 번째 겨루기는 익히 아시다시피 선어 겨루기입니다."

의선각 선고들이 백화를 데려가고 상황이 어느 정도 수습된 후, 설화선고가 다시

가배를 진행시켰다.

"두 선녀는 앞으로 나오십시오."

연화봉의 선녀가 먼저 앞으로 나가 단정히 섰다. 가스라기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여진을 쳐다보았다. 여진은 아직도 분이 다 식지 않은 듯,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고 있었다.

"가라."

가스라기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여진이 말했다.

"선고님, 하지만 난 선어를 한마디도‥‥‥."

"알아, 안다고. 그러니까 나가서 그냥 지고 와."

"내가 지면 다 지는 거잖아요. 운교 언니 이겼고, 백화 졌고‥‥‥."

여진이 손을 내리고 가스라기를 똑바로 쳐다봤다. 뭔가 할 말이 많은 듯 입을 

실룩거리다가, 그녀는 가스라기의 등을 떠밀었다.

"이미 틀렸다. 그냥 문제 나오거든 전 모르겠습니다 하고 인사나 꾸벅 하고 

돌아오너라."

등을 떠밀려 나가며 가스라기가 물었다.

"져도 안 때릴 거죠?"

그 목소리가 좀 컸다. 알아들은 선인 선녀들이 참지 못하고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여진선고가 악의는 없지만 손버릇 나쁘기로 연화봉 천도봉 가리지 않고 

유명했던 탓이다.

스승에게 등을 떠밀려 앞으로 나간 가스라기는, 가배를 맞이해 새로 갖춰 입은

곁마기 녹의홍상 긴 치맛자락이 어색해서 쭈뼛쭈뼛하다가 설화선고의 헛기침을 

듣고서야 겨우 자리를 잡고 섰다.

그 어리승한 모습에 연화봉 척의 분위기가 한층 좋아졌다.

"연화봉의 취종, 동도 여러분께 인사 올립니다. 무량무극."

눈 둘 곳도 모르는 얼치기에 비하면, 서 있는 자태도 맵시 있고 반례 올리는 모습도

우아한 연화봉의 선녀는 얼마나 여유가 넘치는가.

생전 이렇게 많은 시선 앞에 서본 적이 없는 가스라기는 설화선고의 눈짓을 몇 번

받고서야 주눅 든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가스라기입니다."

나머지 말은 싹 빼먹고 덜렁 그 말만 하고 나니 제 생각에도 너무 뒤가 허전했던지

고개를 두 번이나 꾸벅거렸다. 선계 사람의 이름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가스라기라는

말에 연화봉의 몇몇 선녀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미 이번 가배도 진 것이나 

다름없다고 아예 팔짱 끼고 뒤돌아 앉아 있던 여진이 성질을 못 참고 버럭 외쳤다.

"아직 선명을 받지 못해 속세 이름 그대로 쓰는 진짜 새내기입니다! 나는 누구처럼

배분만 새내기고 정작 수행은 수백 년 넘게 한 요얼 요괴 출신들 내보내는 치졸한

수는 쓰지 않습니다!"

연화봉 측에서 백련선고가 질세라 일어나 소리쳤다.

"그거 꼭 나 들으라고 하는 말씀 같습니다. 여진선고?"

"뭐 찔리는 게 있으신 모양입니다, 백련선고? 어디 그럼 이번에 내보낸 선녀는 

무슨 출신인지 밝혀보시지요."

"규칙에 어긋남이 없는데 내가 못 밝힐 게 뭐 있습니까? 우리 취농은 속세에서 수행을

쌓다가 석 달 전에 입선한 여우요얼 출신이올시다. 모르긴 몰라도 댁네 제자 아이보다는

입선한 시기도 늦을 겁니다."

"오호, 그래요? 그럼 이것도 대답해보시지요. 대체 몇 백 년 묵은 여우입니까?"

"겨우 오백 년밖에 안 됐습니다!"

"겨우 오백 년! 아하, 그거 참 짧은 세월이로군요. 오백 년이면 백련선고도 아직

입선하기 전이 아닙니까. 내 알기로는 그때쯤이면 백련선고는 아직 속세에서

기저귀 차고‥‥‥."

설화선고가 굳은 얼굴로 측근의 광명정 선녀를 손짓해 불렀다.

"어서 가서 말리게. 작년 가배 끝날 때처럼 또 저 둘이 드잡이 시작하기 전에.

세 분 진선께 흉한 꼴 보이기 전에 어서!"

정작 화영은 흥분한 두 선고를 뜯어말려 진정시키는 모습을 상당히 아쉬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 앞에서는 그렇게 얌전을 떠는 선녀들에게도 이런 면이 있었군. 반인반선이라

그런가. 사람 사는 꼴 같아서 보기가 좋아. 좀 내버려두어도 재미있을 것을."

하지만 천군도 지한도 화영의 농담에 응해줄 기분이 아니었다. 이번 겨루기에 나온

새내기 선녀의 존재에 온통 눈과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두 선고를 진정시키고도 한동안 운중석해의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가배도 막바지에

이른지라 선인 선녀들은 웃어대며, 곧 승부가 결정 나는 대로 이어질 술자리를 

기대했다. 마지막 선어 겨루기의 두 출전자에게 주의가 집중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들었다. 

연화봉의 출전자, 오백 년 묵은 여우요얼 출신인 취농은 처음 나와 인사할 때와는

사뭇 표정이 달랐다.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굳어 있었던 것이다. 맞상대로

나온 가스라기의 이름을 들으면서 부터 그러했다. 취농이라는 선명을 받기 전까지

그녀는 비취호라고 불리는 요얼이었다. 세상에은 비취의 정기를 받은 여우요얼이 

한두 마리가 아니고, 비취호라는 요명을 가진 요수도 한 둘이 아니겠지만 인간

계집에게 놀라 재채기를 하고 꼬리까지 밟히는 수모를 겪어본 비취호는 오직 취농

하나뿐이었다. 불과 삼사 년 사이에 인간 계집은 겉모습이 훌쩍 변해버리는지라

처음에는 기연가미연가했는데 이름을 듣고 보니 확실히 그 얼굴이다. 악연도 이런

악연이 없다고 취농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고치고 마음을

다잡았다. 온갖 고생 끝에 잡은 선연의 끈이고, 입선하자마자 이름을 날릴 기회가

아닌가. 여우의 명석한 머리로 선어에 대한 공부는 남부럽지 않게 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이참에 저 계집과의 악연도 승리로 종지부를 찍어버리겠다고 취농은

결심했다.

처음에는 서 있는 모습조차 불안하기만 하던 가스라기도 두 선고가 소동을 피우는

사이 달라졌다. 그녀는 머리 위를 바라보며 마음을 잡았다. 하도 멀어서 하늘님이

자기를 보고 있는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그곳에는 하늘님이 있었다.

운중석해를 메운 뭇 선인 선녀들이 아니라 하늘에게 자신이 그사이에 많은 것을

배웠다는 걸, 어엿한 선계의 사람이 되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뭐로? 의욕은 가득했지만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공부를

열심히 해둘걸, 하고 후회해봐도 무의미했다. 그녀가 열심히 안 해서가 아니라, 

선어라고 가르쳐주는 것 자체를 단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원래 무재는 뛰어나도 문재는 그리 밝지 않은 여진이 '살다 살다 너 같은 돌머리는

처음 본다. 네 눈에는 애초에 선어가 보이지 않는 모양이구나. 까막눈에 청맹과니라는

말이 다 너 때문에 만들어진 것 같다'는 소리까지 했을 정도다. 그러니 도대체 무슨

수로 어엿한 선계인이 되었다는 걸 보인단 말인가. 여태까지는 겨루기에 별 관심도

없었으면서 새삼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어 억울했다. 어째서 선어니 무공이니

수놓기니 이상한 것만 겨루는 걸까. 계단 오르기 같은 걸 겨룬다면 자신 있는데!

"그럼, 선어 겨루기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간신히 주변이 수습되자, 설화선고가 주의를 집중시키며 손짓했다. 광명정의 두 선녀가

커다란 청동 궤를 들고 앞으로 나왔다. 궤를 가스라기와 취농 사이 한가운데로

운반하는 동안 설화선고는 설명을 이었다.

"선어를 겨루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호명법과 명명법입니다. 호명법은 이미

잇는 선명을 제대로 부르는 기량이고, 명명법은 아직 선명이 정해지지 않은 것에 가장

합당한 이름을 주는 기량입니다. 오늘 겨루기는 후자, 명명법이 주가 될 것입니다."

궤가 가운데 놓였다. 설화선고가 궤를 가리켰다.

"그 궤 안에는 아직 천계 신수록에 오르지 않은 한 마리 짐승이 들어 있습니다. 오늘

겨루기를 위해 저와 광명정의 선녀들이 천룡애에서 신중히 골라온 것입니다. 오늘

두 선녀가 짓는 이름 중에 합당하다 여겨지는 선명대로 신수록에 올릴 예정입니다."

청동 궤의 뚜껑 부분에는 들여다보기엔 작지만 숨을 쉬기에는 충분할 정도의 자잘한

구멍들이 뚫려 있었다. 그 구멍 사이로 어떤 짐승이 움직이는 기척이 들렸다.

"명명에 도움이 될 세 가지 단서를 드리겠습니다. 첫째, 이 짐승은 작으나 약하지

않고, 영리하나 교활하지 않습니다. 둘째, 천계 월궁 태황성모께서 가장 어여삐 

여기는 짐승이기도 합니다. 셋째, 이 짐승은 애초에 신수가 아니었으나 신수가

되었습니다. 자, 이번에도 주어진 시간은 일각. 시작하겠습니다!"

가스라기와 취농 앞에 지필묵이 펼쳐졌다. 취농은 붓을 잡은 채 신중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가스라기는 붓에는 시선도 던지지 않았다. 그녀는 빤히 청동 궤를 바라보고

있었다. 궤 안의 짐승이 움직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불안한 듯 벽을 긁다가, 차츰

답답하고 화가 나는지, 쿵, 쿵 발을 울리기 시작했다. 쿵, 쿵, 청동 궤의 바닥을

울리는 뚜렷한 소리를 가스라기는 홀린 듯이 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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