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그럼, 겨루기로 들어가겠습니다. 첫 번째는 무공 겨루기입니다.
겨루기에 나설 두 선녀는 앞으로."
설화선고가 외치자 운중석해의 동서 양쪽에서 각각 한 명씩 몸을 날려 가운데에
내려섰다.
"천도봉의 운교, 인사 올립니다. 무량무극."
"연화봉의 무혜, 인사 올립니다. 무량무극."
두 선녀 모두 가배 출전 새내기 선녀의 복식대로 녹의홍상에 곁마기 차림이며
겉보기는 비슷한 또래인데, 연화봉 무혜선녀의 경우 생김새가 다소 특이했다.
단정하게 하나로 묶은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마치 잘 제련된 강철 같은 쇳빛이었다.
"어머, 어머!"
백화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탄식을 뱉었다.
"연화봉이 올해도 이기려고 아주 작정을 했네. 세상에나, 요선녀를 내보냈어!"
"요선녀!"
하늘님을 찾다 지친 가스라기가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묻자, 백화가 소곤거렸다.
"그래, 저 머리칼, 저 눈빛. 저건 사람 여자가 수행을 쌓아서 선녀가 된 게 아니야.
요수들 중에 수양이 깊은 것들이 간혹 선적에 오르는 일이 있어. 선인이 되면
요선이고, 선녀가 되면 요선녀지. 원신이 뭔지는 몰라도 저 무혜선녀는 분명히
요선녀야. 정말 이기려고 작정을 했다니까."
"그렇게 세?"
"당연하지! 사람이 선계에 입문하는 건 빠르면 태어나자마자, 늦어도 오륙십 년
속세에서 수행을 쌓고 난 다음이지. 하지만 요수들은 달라. 수백 년, 경우에 따라서는
수천 년 수행을 쌓고서야 겨우 높은 선인의 눈에 들어 선적을 허락받는 거라고,
선계의 배분은 선적을 받고 난 다음부터니까 명목상은 새내기라 해도, 그전에 쌓은
수행의 세월이 달라. 저 무혜선녀는 최소한 수백 년 묵은 여우,
아니면 꿩이거나‥‥‥."
"그럼‥‥‥ 운교 언니가 져?"
가스라기의 질문에 백화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돌아가는 판세로 봐서는 그렇겠다. 어쩌면 좋니. 원래 사도선인들이 득실거리는
연화봉에는 저런 요선, 요선녀들이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친목을 다지는 가배에는
적당히 연수가 되는 인간 출신들을 내보냈었다고. 저건 엄밀히 따지자면 반칙이야.
상대가 될 리 없잖아. 휴우, 이렇게 된 이상 세 판 중에 운교 언니 지고 너 지고,
이기는 건 나 하나뿐이구나. 나라도 체면을 세워야‥‥‥. 악!"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백화가 머리를 감싸며 주저앉았다. 어느새 등 뒤로
다가온 여진선고가 눈을 부라리며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말이 씨 된다. 아까부터 너희들 왜 그리 말이 많으냐? 닥치고 조용히 관전이나 해라."
가스라기와 백화 둘의 머리를 잡고 흔들어대는 여진의 얼굴도 그다지 밝지 못했다.
연화봉에서 요선녀를 내보낸 것은 계산 밖의 일이었다. 여진의 필승 전략은, 운교와
백화가 반드시 이겨서 이승을 취하고 가스라기가 나가는 겨루기는 애초에 포기하는 것,
즉 이 대 일의 승리를 얻는 것이었다. 때문에 운교에게 비장의 한 수를 주어 무공
겨루기에 내보냈고, 이다음의 천잠 겨루기에는 백화를 내보내기로 했다. 백화는
작년에도 나가 이긴 적이 있고, 운교는 진작 내보냈어도 손색이 없을 실력이지만
작년까지 선배들이 있었기에 출전한 경험은 없었다.
운교와 백화의 재능에 숨겨둔 수까지 더하면 그 두 시합은 따놓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했고, 마지막 선어 겨루기는 가스라기가 지더라도 별 상관이 없었다.
아니, 지는 것이 당연했다. 가스라기는 제대로 된 선어라곤 단 한마디도 할 줄
모르니까.
재가 가진 최하급의 말로 적의 최상급 말을 상대하고, 중급 말로 적의 하급 말을
누르고, 상급 말로 적의 중급 말을 이기는 병법에 입각해서 필승 전략을 세워둔
여진은, 적이 뜻밖에도 첫 겨루기에 요선녀를 내보내자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동도 여러분께서도 다들 아시다시피, 가배의 무공 겨루기는 상대의 무기를 상하게
만드는 쪽이 이기게 됩니다. 겨루기를 시작하기 전에 두 선녀의 무기를 먼저‥‥‥."
설화선고가 문득 말을 멈췄다. 짤랑짤랑 방울 소리와 함께 머리위가 환해진 탓이었다.
선인 선녀들이 고개를 들었다. 붉은 기운 도는 월륜거, 그 위에 앉은 금발벽안의
상아와 옆의 허공에 떠 있는 진선 지한.
연화봉 쪽 선인 선녀들 사이에서 탄성이 울렸다.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연화봉
주선의 친람에 따른 술렁임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하나의 월륜교가 서편에서
나타났다. 이번에는 운중석해의 서편, 천도봉 선인 선녀들의 얼굴에 희색이 가득했다.
꽤나 서둘러 온 탓인지 발그레 상기된 수하린이 미사린을 향해 방긋 웃어 보였다.
"늦지 않아 다행이군요."
조각처럼 굳어 있던 미사린의 얼굴에도 미소가 그려졌다.
"늦으실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요."
두 상아가 공손한 예기 서린 인사를 주고받는 동안 두 진선은 똑같은 얼굴, 똑같은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겉치레 정도의 인사조차 없었다. 둘 사이의 공기는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진선 배알의 대례를 올려야 할 선인 선녀들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얼어붙은 석해 상공을 녹인 것은, 북쪽 광명정에서 나타난 빛이었다. 만월 충천한
밤에 난데없는 노을이었다.
"아아, 다들 모이셨군. 늦기는 내가 제일 늦은 모양일세."
화영이 신형을 드러내자, 양쪽에서 뿜어지던 차가운 기운이 거두어졌다.
"무량무극. 궁주 배알."
양 주선과 상아를 비롯해 모든 선계인들의 대례를 받은 화영이 답례했다.
"무량무극. 오랜만이오, 동도들. 무료함을 참지 못하고 이리 나온 것을 너무
나무라지들 마시기를. 예는 이만하면 됐으니 모두들 자리에 앉으시오. 가배는
선녀들의 잔치인데 쓸데없는 구경꾼 때문에 흥취를 망가뜨려야 쓰겠소?"
화영이 허공에 좌정하자, 천군과 지한도 잠깐 서로를 바라보다가 각자 상아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서릿발 같던 예기가 가라앉는 것을 느끼고 운중석해의 선인
선녀들은 내심 안도했다. 그리고 새로운 기대감에 눈을 빛냈다.
"선고님, 이게 웬일이래요? 한 분도 아니고 세 분이 몽땅! 요번 가배는 정말
이상하네요."
백화가 긴장 때문에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말했다. 여진은 짐칫 침착한 척
말하지만 표정은 난리도 아니었다.
"올해가 그만큼 중요한 해이기 때문이지. 당연한 걸 가지고 뭘 그리 야단법석이냐.
후후후, 이렇게 된 이상 올 가배는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데‥‥‥."
"그러는 선고님도 다리 떨고 계시잖아요."
"내가 언제! 백화 너는 다 좋은데 너무 경망스럽다. 십 년 수련이면 이제 선계 물
먹은 것이 적지도 않은데, 어째 가스라기보다도 네가 더 들떠서‥‥‥."
여진은 문득 고개를 돌려, 이상하리만치 조용한 가스라기를 보았다. 백화도 그 시선을
따라갔다. 가스라기는 고개를 든 채 하늘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표정을 지은 채. 가스라기가 바라보는 것은 물론 그녀의 하늘님이었다. 대략의
사정을 아는 여진과 백화는 서로 눈을 맞추고 무언의 대화를 나누었다. 또 시작이네요.
그러게 말이다. 올라갈 수도 없는 나무, 바라만 보는 게 뭐가 그리 좋다고.
그러게 말이에요.
하지만 가스라기는 행복했다. 비록 하늘님이 그녀가 있는 쪽을 봐주지 않는다고해도.
아니, 숫제 이 많은 사람들 속에 그녀가 있다는 것조차 몰라준다고 해도. 하늘님 옆에
그림처럼 아름다운 이가 앉아 있어, 마치 한 쌍의 꽃과 나비, 나란히 뜬 해와 달처럼
보인다고 해도. 가스라기에게는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아래에서 위를 바라보는 일에 익수했기 때문에.
화영이 어서 시작하라고 손짓하자, 설화선고는 잠시 맥이 끊어졌던 가배 겨루기를
다시 진행시켰다.
"그럼, 두 선녀가 오늘 겨루기에 쓸 무기를 먼저 확인하겠습니다.
먼저 천도봉의 운교선녀."
설화선고가 지명하자, 운교는 공손히 머리를 숙인 뒤 허리 뒤에 차고 있던 것을 끌러
두 손에 얹고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들어올렸다. 설화선고는 물론이고 모여든 선녀들
모두 조금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무공 겨루기는 무기를 부수는 것으로 승패가 결정 나는 터라, 선녀의 기량만큼이나
무기 자체도 중요했다. 보통 겨루기에 나서는 선녀는 새내기라 아직 자신의 보패를
갖고 있지 않으므로, 선배 선녀가 보검을 빌려주거나, 드물게는 보패를 내주기도 했다.
만의 하나 보패가 상하면 다시 벼르는 수고가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라 보패를 빌려
나오는 일은 드물었고, 보패로 벼르기 위해 모으는 천고의 신병이기들 중 하나를
빌려주는 일이 더 흔했다.
그런데 운교가 꺼낸 것은 붉은 비단에 싸인 작은 막대기처럼 보였다. 크기도 단검
정도에 불과한 데다, 보검 특유의 서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천도봉의 여진선고가
첫 번째 시합을 포기하기로 한 것인가 의아해하는 기색이 선인 선녀들 사이로
술렁술렁 지나갔다.
"운교선녀, 비단을 걷고 안의 무기를 보이십시오."
설화선고가 침착하게 말했다. 평소에도 딱딱하던 운교의 표정이 좀 더 딱딱해졌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얼굴이다. 설화선고의 말 때문이 아니라, 그 무기를 들고 나온
사실 자체가 원인이었다. 어쨌든 수장선녀의 명이 떨어졌으니 운교는 비단을 걷었다.
비단속의 물건을 보고 설화선고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설화선고뿐 아니라 그
'무기'라는 것을 본 이들 모두가, 감탄과는 다른 의미에서 놀람을 표시했다.
그것은 뼈를 갈아 만든 한 자루의 초라한 단검이었다.
"그것이 오늘 겨루기에 쓸 무기가 맞겠지요?"
설화선고가 확인차 묻자, 운교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설화선고는 더 묻지 않고
무혜선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연화봉의 무혜선녀, 무기를."
운교의 단검을 가소롭다는 듯이 흘겨보던 무혜선녀가 대답했다.
"저는 따로 무기를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또 한 번의 파란에, 운중석해가 술렁였다. 설화선고는 음성을 다스리며 물었다.
"무혜선녀, 가배는 무기로 겨루는 것입니다. 무기를 가져오지 않았다면 연화봉의
부전패가 됩니다. 그건 알고 있겠지요?"
"물론입니다, 선고님."
무혜는 쇳빛 눈동자로 사람들을 오연히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무기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따로 준비하지 않았다는 뜻일 뿐입니다.
저 자신이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하계의 무인들 사이에서라면, 무기를 손에 쥐지 않아도 나는 충분히 강하다고 과시할
때나 쓰는 말이다. 하지만 선계에서는 그 의미가 달랐다. 여진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설화선고도 놀란 듯이 눈을 치켜떴다.
"검귀‥‥‥ 아니 검령?"
검귀는 검에 붙은 귀신을 말하고, 검령은 검귀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무혜가 긍정의
뜻으로 목례를 했다.
"제 원신은 사람이 아니라 한 자루 검이었습니다. 시해를 거쳐 검이 아니라 사람의
형상을 취하게 되었으나 제 혼은 아직도 검의 혼이니 저 자신이 무기나 진배가
없지 않겠습니까."
"과연, 그러고 보니 영성을 띤 한 자루 검이 곤륜의 적운진선님 소개로 연화봉에
귀의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군요. 놀라운 선녀입니다. 무량무극."
설화선고는 감탄을 아끼지 않았으나, 이내 주재자의 입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것은 친선을 위한 겨루기입니다. 무혜선녀. 설령 그대 자신을 무기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연화봉의 운교선녀가 이기기 위해 그대의 몸에 상처를 입힌다면
화기를 상하게 되는 일이니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일은 일어날 리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무혜가 빙그레 웃으면서 간단히 부정했다.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운교가 날카롭게 눈을 치켜떴다. 운교는 딱딱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 일이 아무래도 일어날 것 같으니 선고님께서 부디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시작하기도 전부터 둘 사이의 살벌한 기운이 예사롭지 않아서 수백 년 동안 가배를
지켜본 설화선고는 내심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양측 주들의 예기가 가배
분위기까지도 이리 삼엄하게 만드는구나 싶었다.
"연화봉 화정대의 백련선고 계십니까?"
설화선고가 외쳐 부르자, 동편의 선인 선녀들 중 한 사람이 일어나 대답했습니다.
"여기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여진선고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백화는 여진이 혹시라도
이성을 잃고 뛰쳐나가 드잡이를 시작하지 못하도록 스승의 소매를 붙잡았다.
"원신이 검이니 자기 자신이 무기라는 무혜선녀의 말도 일리가 있으나, 행여 상처를
입히면 곤란하다는 운교선녀의 말 또한 일리가 있습니다. 연화봉 측에서 따로
무혜선녀의 무기를 준비하지 않으셨다면 이 겨루기를 진행할 수 없습니다.
달리 준비해둔 바라 있으신지요?"
부름을 받고 일어난 백련선고는 선계의 여인들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백발에, 얼굴에는
노색이 완연했다. 고의인지 우연인지 여진선고가 있는 쪽에 눈길을 한 번 힐끔
던지더니 입을 열었다.
"천도봉 측에서 그리 트집 잡고 나오실 줄 알고 준비해둔 바가 있지요.
무혜야, 어려워 말고 그것을 꺼내어라."
마치 이야기가 이렇게 전개될 것까지 계산에 넣었다는 듯이, 무혜는 제 스승에게
예를 표하고는 곧바로 허공으로 손을 치켜들며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멀리서 그 휘파람에 화답하는 검명이 울리고, 사아악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뒤따랐다.
이윽고 한 자루의 붉은 기운 도는 검이 무혜의 손에 날아와 잡혔다.
무혜는 검을 가슴 앞에 세우고 운교를 향해 돌아섰다.
"자초한 일이니 후회 마시기를. 곤륜의 진선이신 적운님의 비검으로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운교는 별다른 대꾸 없이 붉은 비단을 땅에 떨어뜨리고는 뼈칼을 손에 잡았다.
설화선고가 신호했다.
"그럼, 반례."
두 선녀가 십오 척 거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에게 반례를 취했다.
긴장으로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백화가 물었다.
"여진선고님, 계산대로 될까요? 그냥 명검 정도를 상대하게 될 줄 알았는데
저건‥‥‥. 진선이 다루던 비검이라면 거의 보패나 다름이 없잖아요."
대답하는 여진의 목소리도 떨렸다.
"그러게 말이다. 백련선고가 저렇게 강수를 쓸 줄은 몰랐다. 아니, 지난 십 년간
장원해먹었으면 됐지 명색 선녀가 저렇게 욕심이 많아서야."
"그것도 그렇지만, 저 정말 선고님 생각대로 저 단검이‥‥‥."
"쉿."
여진은 백화에게 입을 다물라고 눈짓하고, 서로를 탐색하며 빙글빙글 돌고 있는
운교와 무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운교가 들고 있는 것은 바로 가스라기의
칼이었다. 자신의 보패가 저 칼과 부딪쳐 금이 간 것 때문에 여진은 이런 계획을
세우게 된 것이다. 가스라기는 그 칼이 제 어미의 뼈라는 등 해괴한 소리를 했지만
여진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인간의 뼈가 아무리 단단해도, 선인의 보패에 금이
가게 만들 수는 없다. 설령 반인반선인 선녀의 보패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여진은
그 뼈가 분명히 용골의 일종일 거라고 믿었다. 어찌 보면 지독하게도 운이 없고,
어찌 보면 이가 갈리게도 운이 좋은 저 가스라기라는 아이가 하계에서 기연을 얻은
것이 틀림없다. 용골 정도의 기물이 아니고서야 보패에 금은커녕 작은 생채기 하나도
낼 수가 없다. 그래, 저건 분명히 용골이다. 용골로 만든 단검이라면, 게다가 성품
차분하면서도 냉정하고 무재 또한 뛰어난 운교라면, 설령 상대가 검귀에 진선의
비검을 쥐었다 해도 뭔가 기적을 이루어낼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제 칼을 쥔 동문이 중요한 싸움을 시작한 마당에도 여전히 하늘만 쳐다보는 가스라기를
보고 울컥 부아가 치민 여진은 그녀의 머리채와 목을 잡아 운교와 무혜 쪽으로
홱 돌렸다.
"한눈팔지 말고 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