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진시. 용이 승천하는 기세로 초목의 잎이 자라는 시간.
천군은 눈을 떴다. 창밖은 어느새 밝았다. 차를 올리리까 묻는 선녀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고, 그는 일어나 창가고 다가갔다. 창을 열자 시원한 바람이 밀려
들어왔다. 바람이 드러난 살갗에 닿기 전에 천의 자락이 저절로 여며져
가슴을 덮었다.
오늘은 날이 무척이나 맑았다. 비전천로를 날아가는 비합전서들의 날갯짓도
힘찼다. 저 전서들이 실어 나르는 소식 중에 칠할은 천도봉 주선이 오늘 첫
번째 선몽에 들었다는 소식일 것이다.
선몽은 하나의 선계를 관장할 능력을 가진 진선에게만 나타나는 징조다. 지금껏
보천궁의 후사가 쉬이 결정되지 않은 것은, 화영 이후로 선몽에 든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은 선몽 이외의 능력으로 후사를 결정하고, 화영이 등천하면서
선몽의 능력을 물려주기로 했는데, 참으로 미묘한 시기에 찾아온 선몽이었다.
늦기도 하고, 이르기도 하고.
천군은 아직도 화끈한 통증이 남아 있는 듯한 목을 어루만졌다. 아무 상처도
없었다. 그러나 선몽에서 본 것, 체험한 것들은 너무나 선명했다. 그것은 존재
하지 않는 환통이 아니라, 흔적을 남기지 않는 실제의 고통이었다. 궁주가 된다면
끝없이 긴 세월을 이 고통과 벗하며 살아야 한다. 오늘 체험한 선몽은 단지
일부이고, 시작일 뿐이다. 보천궁의 궁주가 꾸는 선몽은 환주뿐 아니라 흑황까지
포함한 만상의 꿈이며, 실제이며, 총체이다. 기꺼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다. 그러나 그는 받아들여야 했다. 그것이 그가 환주를, 흑황을, 그리고
삼라를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날이 맑습니다. 오늘은 풍광 좋은 곳으로 원족이라도 나가 몸과 마음을 보하심이
어떨는지요?"
차를 가져온 선녀가 부드럽게 권했다. 비전천로를 따라가던 천군의 눈길이 문득,
맑은 날에도 완전히 가시지 않은 운무의 바닷속에서 발돋움하여 고개 간신히
내밀고 있는 자그마한 망후봉에 이르렀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흑기린의 독이 행여 남지는 않았을까. 아니, 그렇지는
않을 거다. 휘하 선녀에게 변고가 생겼다면 수하린이 뭐라고 한마디라도 했겠지
무사한 거다.
그날 이후 소식을 묻고 싶은, 아니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때마다 자신을
타일렀던 말을 되뇌었다. 다시는, 다시는.
하지만 오늘은 다른 생각도 스멀스멀 올라왔다. 아무래도 선몽을 꾼 탓인 모양이다.
그 기나긴 고통을 목전에 두고 한 번쯤, 지한의 눈에만 띄지 않게 조심하며
한 번쯤‥‥‥. 먼 여행을 떠나기 전날 밤 발을 쉬어두는 마음으로 딱 한 번만.
"진선‥‥‥."
대답 없이 먼 곳에 시선만 주고 있는 천군의 기색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선녀가 불렀다.
"어찌하시겠는지요? 출행 준비하리까?"
천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은‥‥‥."
사시. 초목이 자라다 멈추고, 뱀이 교접하듯 넝쿨이 얽히는 시간.
바깥은 훤한 낮이나 방은 어두웠다. 붉은 비단으로 휘감은 거대한 사주명상이
있다. 잠들지 않는 선인의 침상은 침상이 아니라 명상이지만, 지금 이 명상은
육욕과 환란의 침상에 불과했다. 침상 위에는 두 나신이 얽혀 있었다. 얽혀 있는
것은 둘뿐이지만, 늘어져 있는 나신은 그 밖에도 몇이 더 있다. 바닥을 뒹굴거나,
상체를 침상 아래로 늘어뜨린 채 꼼짝도 하지 않는 알몸들.
침상의 기둥 하나를 끌어안은 채, 등 뒤에서 해일 같은 힘이 밀려올 때마다
신음하던 선녀의 목소리가 점점 가늘어지다가 갑자기 흐느낌으로 변했다.
"왜 울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로 지산이 그녀의 어깨에 턱을 얹고
물었다. 묻는 도중에도 하체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고, 선녀는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가 말은 잇지 못하고 다시 신음 할 뿐이었다.
"너도 주음이 두려우냐?"
젖가슴을 쥐고 있던 손이 가랑이 사이로 내려갔다. 활짝 열린 문으로 터진
봇물처럼 흘러나오는 음기의 물살 한가운데 그는 손바닥을 댔다. 장심을 타고
들어오는 흠뻑 젖은 기운을, 그는 아낌없이 마셨다.
"아니면 내가 두려우냐?"
선녀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신음과 함께 뱉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속눈썹
끝에 맺혀 있던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고개를 기울여 그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지한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그래, 무섭겠지. 다들 똑같지 않던가.
두려워하며 들어섰다가, 쾌락에 몸부림치고 신음하다가,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선총이란 여염의 계집과 사내가 합궁하듯이 적당히 안아주고 끝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몸으로 알게 되는 거지. 쾌락은 고통이 되고, 정념은 죽음에 대한 예감이
되고, 사물은 분별할 수 없고, 몸은 아득한 혼돈의 바다를 떠도는 것 같고‥‥‥.
"울 힘이 남아 있다니. 먼저 늘어져버린 저 계집들과는 좀 다른 것 같구나.
어디‥‥‥."
지한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손목 안쪽에 찍힌 세 개의 붉은 점이 거의
흐릿해져 있었다. 수궁계의 효력이 다했다는 뜻이다. 그는 쯧 혀를 찼다.
'상아와 약속한 게 있으니 어쩐다.'
곰곰 생각하는 와중에도 그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고, 품안의 선녀는 신음도
흐느낌도 더 이상 낼 수 없을 정도로 꺼져갔다.
'그냥 죽일까. 미사린도 어차피 각오하고 들여보냈을 텐데.'
잠깐 갈등하다가, 그는 손을 올려 선녀의 눈두덩을 어루만졌다. 눈물이 묻어
손가락이 축축해졌다. 충동적으로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짠맛이 났다.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깊게 담그고 있던 몸을 갑작스레 빼고, 혼자서는 서 있을 힘도 없는 선녀를
귀찮은 듯 밀어 바닥에 쓰러뜨렸다. 곧바로 침상 아래로 내려서서는 알몸으로
성큼성큼 문을 향해 걸어가며 두 팔을 벌렸다.
"나간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린 것과 거의 동시에 바닥에 떨어져 있던 천의가 펄럭
날아와 지한의 몸에 둘러졌다. 열린 문밖에는 미사린이 공손히 시립해 있었다.
미사린은 서늘한 눈으로 방 안을 훑어보고는 웃으며 물었다.
"더 불러드리리까?"
"됐어. 이미 몸은 충분히 식혔다."
확실히 아까처럼 양화가 치솟는 것 같지는 않지만, 다른 방향으로 기분이 상한
듯 보이는 지한의 표정을 살피며 미사린이 물었다.
"하면‥‥‥."
"바람이나 쏘이고 오지. 배생은 필요 없고."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서서 성큼성큼 주랑 저편으로 멀어져갔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미사린은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한 명 한 명
늘어진 선녀들의 코에 손을 대고 맥을 짚어보면서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래도 약속은 지키셨네. 얘는 한 달, 애는 보름은 자리보전해야겠지만‥‥‥."
마지막까지 버텼던 선녀 앞에 걸음을 멈추고 미사린은 신기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는 아직 정신이 남아 있구나."
"상아님‥‥‥."
벽을 짚으며 힘겹게 윗몸을 일으키고, 상아에 대한 절을 올리려는 그 선녀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미사린이 물었다.
"울었니?"
선녀는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모,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면서, 선녀는 다시 눈물이 나올 것 같은지 손으로 입을 막았다.
미사린이 부드럽게 물었다.
"말해보렴. 진선 모시는 것이 아마 처음일 테지? 왜 울었느냐?"
"저는, 저는‥‥‥모르겠습니다. 다만, 다만‥‥‥."
"무서워서? 아파서?"
"아니, 아닙니다. 그저, 그분이‥‥‥괴로워하시는 것 같아서‥‥‥우시는 것
같아서‥‥‥ 그런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아서‥‥‥아프고 무서우면서도‥‥‥
그것이 그저 슬펐습니다. 제가 아무것도 해드릴 수 없다는 것이‥‥‥."
선녀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끄윽끄윽 흐느끼기 시작했다. 미사린이 그 선녀의
이마를 향해 손을 뻗었다.
"착하기도 하지."
이마를 쓰다듬어주던 미사린의 손길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흐느끼던 선녀가
컥, 숨 막힌 소리를 냈다. 미사린이 목을 움켜잡았기 때문이다.
"내가 갖지 못하는 것을 너는 갖는구나. 그러니 네가 가진 것을 내가 빼았겠다."
미사린은 화사하게 웃으며, 선녀의 명을 거두어들였다. 명이 떠난 몸이 옆으로
쓰러졌다. 비단 수건을 꺼내 손을 닦고, 미사린은 창가로 갔다.
멀어져가는 지한의 선흔이 보였다. 그녀는 중얼거렸다.
"이름뿐인 배필에게도 투기는 있답니다."
오시. 초목은 번성하고, 말은 원기왕성하게 달리는 시간.
"중추가 코앞이다."
여진은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걸으며 말했다. 그 앞에는 세 새내기 선녀가 단정히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다들 알고 있겠지?"
여진의 음성은 점점 열기를 더해갔다. 여진이 그렇게 물을 때는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세 선녀 모두 알고 있었다.
"가배가 다가왔다는 뜻이다, 가배!"
과연, 여진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기가 답했다.
"가배가 뭘 하는 자리인지는 알고 있겠지? 천도봉과 연화봉 선녀들의 친선을
다지는 겨루기다! 그래, 친선! 친선 좋지. 친선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겨야 한다는 뜻이다!"
운교는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라는 표정을 지었고, 백화는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하면서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였고, 가스라기는 철석같이 그렇게 믿는
얼굴이었다. 사실 여진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중추 가배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 가스라기였다. 여진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세 선녀를 돌아보았다.
"가배에는 새내기 선녀들만 내보내 세 종목을 겨루게 되어 있다."
그녀의 목소리가 불길하게 낮아졌다.
"세 번을 겨루는데 그중 두 번을 이겨야 우리가 장원을 먹는다. 선어 겨루기,
천잠 겨루기, 무공 겨루기 세 종목이다. 작년까지 가배에 나갔던 너희 선배들은
이미 수련을 마치고 각처에 배속되었고, 예전만큼 입선하는 자가 많지 않아
올해 내보낼 새내기 선녀는 딱 너희 셋뿐이다."
여진은 백화를 내려다보았다. 백화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미소를 지었다.
"백화는 천잠을 다루는 데 재능이 있으니, 천잠 겨루기는 일단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러고는 가스라기를 바라보았다. 가스라기도 자세를 고쳐 앉으며 미소를 지었다.
"문제는 나머지 두 겨루기다."
여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가스라기, 네가 문제다. 운교는 수련이 깊은 아아니
어느 쪽에 내보내도 상관이 없다. 하지만 넌! 너는 곤란해. 선어 진보는 단
한 글자도 없고, 선명호법은 아직 익히지도 못했고! 절대로 선어 겨루기에는
내보낼 수가 없어! 그렇다고 무공이 뛰어나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하지만
다른 수가 없구나. 머리가 나쁘면 몸으로 굴러야지! 그러니 원망하지 말고
일어나라."
"예?"
여진은 다짜고짜 쌍추를 꺼내 들었다. 평소 매타작에 쓰는 수련용 추가 아니라
금빛 추, 그녀의 보패인 금련쌍추였다. 백화와 운교도 놀란 표정이 되었다.
애를 얼마나 잡으려고 보패를 직접 꺼내시는 걸까. 여진은 단호한 표정으로
외쳤다.
"비록 그다지 가망은 없어 보인다면 내 너를 가배 전까지 단단히 조련시켜주마.
무공 겨루기는 서로의 몸을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무기를 공격하는 것이다.
무기를 떨어뜨리거나 망가뜨리는 쪽이 진다. 그러니 이제부터 내 보패를
받아내 보거라. 네가 단 한 번이라도 성공한다면 희망이 없지는 않겠지.
자, 반례!"
가스라기는 허둥지둥 일어나 반례 올리고 뼈칼을 두 손으로 움켜잡은 채
기다렸다. 지난 반년간 여진선고에게 한두 번 매타작을 당한 게 아니다.
몇 번인가는 수련용 추를 뼈칼로 받아낸 저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받아내고
나면 약 오른 여진에게 더 많이 맞았다. 이따금 여진이 보패를 꺼내 들고
시범을 보일 때도 있었는데, 일단 보패를 손에 들면 수련용 추를 들었을 때와는
판이했다. 휘두르는 속도도, 바람을 가르는 소리도 월등해졌다. 수련용 추도
백 번에 한 번 막을까 말까 한 형편인데 보패를 막으라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다.
"간다!"
한 소리 외침과 함께 여진의 금련쌍추가 회오리처럼 덮쳐왔다. 어디를 어떻게
맞는지 맞는 사람도 구경하는 사람도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였다.
그래서 추 끝이 가스라기의 몸에 닿기 직전 살짝 힘을 뺐다는 사실도 여진
자신 외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타격을 줄여봤자 보패는 보패라, 맞는 가스라기는
수련용 추에 맞을 때보다 몇 배나 아팠지만.
"눈 떠, 눈! 막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여진이 호령하면서 다시 한 번 추를 휘둘렀을 때였다. 가스라기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되는대로 뼈칼을 앞으로 힘껏 내밀었다. 금빛 추와 뼈칼이 부딪쳤다.
"오호, 장님 문고리 잡은 격이로‥‥‥."
여진의 말이 뚝 그쳤다. 들려서는 안 될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쩍. 쩌적.
가스라기의 칼에서 들린다면 차라리 당연하다. 그러나 여진의 보패에서 나는
소리였다. 불길한 예감에 가스라기는 눈을 반짝 떴다. 뼈칼과 맞닿은 부분에서
시작된 균열이 여진의 금빛추 전체로 퍼져가는 것이 보였다.
여진이 입을 떡 벌렸다. 가스라기는 파랗게 질렸다.
"서, 서, 선고님! 잘못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