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 장
::선계일일(仙界一日)::
선업을 쌓아 선계에 입문한 지 어언 수십 성상. 속세의 미망 아직 끊지 못해
어머님을 그리니 다음 생에라도 선골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머님, 이곳은 겨울에도 홑옷을 입고 지낼 수 있을 만큼 따스합니다.
별에 그을려 낯이 상하는 일도 없답니다. 하루하루. 세세연년이 꿈같습니다.
예, 어머니, 꿈같습니다.
ㅡ무명선녀.『선계서간』
10-1.
선계의 밤은 깊고, 태초의 고요가 산과 산 사이로 흐른다. 하늘은 검고
유현하며, 땅은 누르고 광대하다는 최초의 선어 그대로의 풍경이다. 해는
멀고 달은 가까워 누른 땅, 검은 하늘 모두 가를 수 없는 어둠으로
충만하다.
자시. 눈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만물이 움직이는 시간. 천도봉의 주선이
거하는 전각, 창 하나가 활짝 열렸다. 선녀 하나가 그리로 윗몸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에서 비합전서가 푸드덕 날아올랐다.
"어서 상아각으로 가거라, 어서! 수하린상아님께 전해. 천군께서 선몽에
드셨다!"
선인은 잠을 자지 않는다. 다만 명상할 뿐이다. 잠든 것이 아니기에 꿈꾸지
않는다. 그러나 천군은 꿈을 꾸고 있었다. 꿈은 꿈이되, 그가 살아가는
선계의 나날들보다 훨씬 생생한 꿈이다.
그곳은 언젠가 그가 지냈던 하계의 땅. 그러나 숲은 죽었고, 저승샘은 말라 붙
었다. 숲 근처 마을은 이미 폐허가 되었는데, 그 폐허를 뒤지는 대여섯 명의
군졸들이 보인다. 군졸은 군졸이되 환주의 사람이 아니다. 짐승 가죽 옷에
조악한 군장, 흑황의 군졸이다.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흑황 군졸 하나의
목을 꿰뚫는다. 천군은 목에 불같은 통증을 느낀다. 흑황의 군졸이 비명을
지른다. 폐가의 문을 박차고 두 사람이 뛰어나온다. 창과 칼이 부딪치고
화살이 난다. 혹자는 배가 갈리고, 혹자는 목이 떨어진다. 베는 자의 환희,
베이는 자의 고통이 천군에게 고스란히 옮겨온다.
"빌어먹을! 영소님, 도대체 왜 여기까지 흑황군이 얼쩡거리는 겁니까?"
"끌려가고 싶지 않으면 닥치고 싸우기나 해!"
천군의 귀에 대고 외치는 것처럼 그 소리들은 우렁차다. 며칠째 칼을 놓지
못해 헐어버린 손바닥에서 진물이 배어 나온다. 그 손이 칼을 휘두르고,
그 칼에 누군가의 팔이 떨어진다. 그 팔이 전쟁터로 떠나오기 전 마지막으로
안았던 여자의 어깨가 떨린다. 그 여자의 두 다리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난다.
그 아이가 자라 또 손에 칼을 들고, 그 칼에 또 누군가‥‥‥.
축시. 얼어붙은 땅거죽을 밀어 올리며 초목의 싹이 느리고 무겁게 트는 시간.
수하린은 천군 옆에 앉아 있었다. 죽은 듯이 눈을 감은 천군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의 입술 사이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오고, 이마에는
진땀에 배었다. 경련은 끝나는 듯하다가 다시 시작되고, 시작되는가 하면
어느새 멈췄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은 때로 천군 자신의 목소리였으며,
때로는 전혀 낯선 사람의 목소리였다. 길고도 깊은 꿈이었다. 가슴을
쥐어뜯으며, 뒤척이며, 깨어나고 싶어도 마음대로 깨어나지 못하고, 깨우고
싶어도 깨울 수 없는 꿈이었다.
수하린은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늘의 달이 그렇게 하듯이 그저 보고 있을 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미명이 스며들어 천군의 얼굴을 비추었다. 들먹이던 천군의
가슴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조각처럼 앉아 있던 수하린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광명정에 전서를 날리세요. 선몽이 이제 끝났다고."
"예!"
주렴 밖에 대기하고 있던 선녀가 고개를 조아리고 달려갔다. 수하린은 소매
속에서 모시 수건을 꺼내 들었다. 천군은 아직 깨지 않았다. 아마도 오늘은
평소보다 오랫동안 깨지 못할 것이다.
'나는 가끔 당신들이 정말로 가여워요.'
수하린은 깨어나지 않은 천군의 젖은 이마를 향해 수건을 가져갔다. 옆에 서
있던 선녀가 약간 놀란 음성으로 불렀다.
"상아님."
수하린의 손이 멈췄다. 그녀는 웃었다. 그 웃음은 허탈하고 맥없었다.
"아, 그래요. 내가 해서는 안 되지요."
그녀는 웃으며 수건을 옆의 선녀에게 건넸다. 황송한 얼굴로 수건을 받아 든
선녀가 땀이 밴 천군의 이마를 그것으로 조심조심 눌러 닦았다. 수하린은
그 모습을 잠자코 바라보기만 했다.
'해와 달은 척지지 않는 법이라지요. 하지만 닿을 수도 없지요. 당신들이
가엾긴 하지만, 정말로 가여운 건 나 자신일 거예요.'
인시. 땅이 녹고, 갇혀 있던 기운이 범처럼 맹렬하게 뛰쳐나오는 시간.
선인은 잠들지 않으므로 그 침상은 침상이라 하지 않고 명상이라 한다.
지한은 명상 위에 앉아 있고, 미사린은 그 아래 부복하고 머리 조아린 채였다.
"선몽?"
지한이 물었고,
"예."
미사린이 대답했다. 지한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머리는 조아렸지만 눈까지
낮추지는 않았기 때문에, 미사린은 말없는 지한의 기색을 몰래 살필 수 있었다.
늘어진 천의 자락 사이로 목과 가슴, 배가 드러났다. 말은 없으나 근육이
부풀었다 가라앉는 모습이 보였다. 가쁜 호흡은 아니었다. 그러나 위험했다.
"잘되었다고 해야 하는 건가?"
한참 만에 지한이 입을 열었다. 이죽거리는 비웃음이 가득 담긴 음성이었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만약 제석회에서 결정하기로 약속해두지 않았다면, 궁주가 지금 당장 그놈에게
자리 넘겨주고 등천해버려도 할 말이 없게 될 뻔하지 않았나. 기뻐해야 하는
거로군! 그 두 놈의 장단에 놀아나는 꼴이라 내심 불만이었는데 전화위복이라!"
말을 할수록 그의 목소리는 높아지고 빨라졌다. 늘어진 천의 자락 사이로
드러난 그의 살결은 검붉은 쇳덩이처럼 달아올랐다.
"게다가 축하할 일이지. 친애하는 형님께 경사가 아닌가! 중극에 들지도 못한
놈이 선몽이라, 하!"
지한은 별안간 팔을 들어, 등 뒤에 벽을 후려쳤다. 우르릉, 벽이 흔들리고,
방이 흔들리고, 누각이 흔들렸다. 잠을 자던 연화봉의 선녀들은 화들짝 눈을
떴고, 번을 서던 선녀들은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진정시켰다. 하지만 지한의
노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그의 몸은 여전히 달아오른 채였고, 눈은 점점
뜨거워졌다. 미사린은 몰래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열기 과하십니다. 조금만 가라앉히시지요."
지한의 입술이 비틀렸다.
"좋은 충고로군. 상아, 채음을 해야겠다. 계집들을 들여."
미사린이 고개를 들었다. 이글대는 지한의 눈동자가 서늘한 벽안과 마주쳤다.
"싫습니다."
눈이 마주쳤으되 미사린을 보고 있지 않았던 지한이, 새삼 그녀를 훑어보았다.
"천수배필의 입에서 싫다는 소리를 다 듣게 될 줄은 몰랐군.
오래 살고 볼 일인가?"
그는 큭큭 웃다가 뚝 멈추고, 두 팔을 벌렸다.
"그럼 상아가 이리 오면 되겠군. 사실 멀리서 찾을 필요 있나? 극음과 극양이
부딪치면 어떤 운우지정을 느낄 수 있는지 진작부터 알고 싶었지. 사실
시시한 규칙이 아닌가. 상아와 선인더러 서로 닿지 말라니."
미사린이 천천히 일어섰다. 푸른 눈동자는 차가운 열기로 가득차 있었고,
몇 가닥 금발이 흘러내린 목덜미는 발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미사린은 지한의 빈정대는 얼굴과, 옷깃 사이로 드러난 단단한 몸을 천천히
눈으로 훑었다. 언제든지 안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이 지한은 빙긋이 웃었다.
"황공하오나."
미사린도 웃었다. 그녀의 웃음은 좀 더 서늘했다.
"화영궁주의 상아처럼 최고 싶지는 않습니다. 명행은 너무나 지루한 일이니까요."
미사린은 선 채로 고개를 조아렸고, 지한은 피식 웃으며 손을 내렸다.
"그럼 시킨 대로 해."
"받드오리다. 다만‥‥‥."
"다만?"
"중추 가배 멀지 않으니, 아이들 너무 상하게 하지만 마소서."
"감안하지."
돌아서서 나가는 미사린의 등 뒤에서, 나른한 표정으로 등을 벽에 기댄
지한이 불렀다.
"미사린."
"예."
"강권은 아니지만, 정말 생각 없나?"
그는 가는 눈웃음을 지었다.
"나는 하지 말라는 짓은 다 하면서도 여기까지 왔네. 상아만 동의한다면
언제든지 일월률도 깰 용의가 있지."
미사린은 심호흡을 하고 고개를 돌려 빙긋이 웃었다.
"저는 꽃이 아니라 달이니, 꺾지 말고 그저 보기만 하소서."
묘시. 싹이 드디어 땅 위로 나왔으나 아직은 여리고 미숙한 시간.
누군가가 요를 홱 잡아당기는 바람에 가스라기는 잠에서 깨어났다.
"일어나."
오늘도 그녀를 깨운 사람은 운교였다. 깨우는 방식도, 말도 달라 진 것이
없다. 일단 깨운 뒤에는 말없이 이불을 척척 개어 올리는 것도 똑같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세수하러 갈 때 셋이 나란히 나가게 되었다는 정도다.
"와아, 오늘 날 맑다. 저기 봐. 천도봉이 다 보이네."
백화가 기지개를 켜다 말고 눈을 반짝거렸다. 황산 칠십이 봉중에 광명정,
천도봉, 연화봉 세 봉우리가 가장 높고, 나머지 봉우리들은 그 세 주봉의
권역에 들어 있다. 새내기 선녀들의 처소인 망후봉부터 천도봉까지의 거리는
아득해서, 운무 가득한 날은 눈 밝은 선계인이라 해도 쉬이 볼 수가 없었다.
"날이 맑아서 그런가. 오늘도 춥다. 우우우."
하계에 비하면 추운 것도 아닌데 백화는 엄살이 심하디. 팔을 감싸 안으며
칭얼거리다가 가스라기를 힐끔 보더니 삐죽거렸다.
"아무래도 너 때문인 것 같아."
가스라기는 하품을 찢어지게 하는 것으로 백화의 시비를 무시했다.
"어머, 어머, 버르장머리 좀 봐. 너, 손윗사람이 뭐라고 하면 눈 내리깔고
심기부터 살펴야지 어디서 하품이니, 응?"
가스라기는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저건 뭐든 잘못되면 내 탓이야."
"뭐, 뭐? 저건? 야! 너 내가 이렇게 뽀송뽀송해 보여도 너보다 십 년은
위라니까. 아니, 설령 나이가 적다고 치자! 그래도 먼저 입선한 서열대로
배분은 정해지는 거야. 어서 언니라고 부르지 못해?"
"싫다."
"싫‥‥‥. 아우, 복장이다. 운교 언니! 얘 버릇없는 것 좀 보래요!
뭐라고 따끔하게 한마디 좀 해주세요."
"둘 다 시끄러."
백화는 찍소리 없이 목을 움츠렸다. 가스라기는 운교의 등 뒤에서 백화를
향해 혀를 날름해 보였다. 부아가 치밀었지만 운교 때문에 백화는 꾹 참았고,
셋은 함께 샘에 도착해 세수를 하려고 쪼그려 앉았다. 물결에 비친 제 얼굴을
황홀한 표정으로 꼼꼼 살펴보던 백화가 다시 꽥 고함을 질렀다.
"아악! 주름살, 주름살 생겼어! 이거 봐. 이거 봐."
수선을 떨며 가스라기에게 얼굴을 들이밀고는 제 눈 가장자리를 가리켰다.
가스라기는 세수하다 말고 물을 뚝뚝 떨구며 백화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 보이는데?"
"이런 둔치! 여기 요만큼 주름 잡힌 거 안 보여? 아, 몰라, 몰라. 어쩌면 좋아.
이거 다 네 탓이야."
가스라기는 콧등에 주름을 잡고 실룩거리다가 백화의 살랑거리는 음성을
흉내 냈다.
"어머, 나보다 십 년이나 손위니까 주름살 생길 때도 된 걸 가지고
왜 다 내 탓이래요?"
모처럼 존대를 해줬지만 백화가 그걸 가지고 기뻐할 리는 만무했다.
"그야 당연하지. 선녀들이 왜 나이를 천천히 먹는데! 수련도 수련이지만
하계처럼 더웠다 추웠다 기후에 변화가 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전보다
날이 쌀쌀해지니까 나도 주름이 생기는 거 아냐."
"이게 뭐가 춥다고 그래? 그리고 날씨가 나랑 무슨 상관인데?"
"그야, 너 오고 나서부터 부쩍 그렇게 되었으니 네 탓이지. 운교 언니, 그쵸?"
절도 있는 동작으로 세수를 마치고 머리를 털며 일어난 운교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진선 두 분 기세가 날카로우시니 선계의 대기도 민감하게 변하는 걸 뻔히
알면서 무슨 얼빠진 소리야? 을 제석 지나면 도로 나아질 테니 걱정 말고
얼른 세수나 마쳐."
"난 끝났어요."
가스라기는 대충 물기를 닦으며 일어섰다. 백화가 한숨을 푹 내쉬며 수면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입선한 지 십 년밖에 안 됐는데 벌써 주름이라니. 몰라, 몰라. 이건 다
저 이상한 애 때문이야. 어디나 꼭 재수 없는 애가 있다니까."
백화가 세상 다 끝난 것처럼 한숨을 내쉬다가 비로소 손으로 물을 움켜 얼굴에
가져가는 순간, 운교를 따라 샘터를 떠나려던 가스라기가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섰다. 백화의 등은 완전 무방비 상태였다. 동무 된 도리로,
가스라기는 그녀를 힘껏 밀어주었다.
첨벙 소리와 함께 백화의 비명이 울렸다. 새내기 선녀들의 하루 일과가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