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대도 휘경을 둘러싼 사방의 땅에는 대대로 지위 높은 관인을 배출한 명문세족의
장원이 있다. 그중 하나가 울지세가의 장원이었다.
오늘 장원의 한 구역은 울지 가문의 대들보 노릇을 하고 있는 장남 영소가
데리고 돌아온 휘하 초혼부대가 점령하고 있었는데, 몇 달 만의 귀환이라
장원의 식솔들은 기꺼워하며 술과 밥을 내어 군졸들을 위로했다. 때마침
어제가 수릿날이라 시원한 술을 마시며 군졸들은 더위를 씻었다.
하지만 위로받지 못하는 병사도 있었다. 시혼은 말없이 다른 군졸들의 입으로
들어가는 술과 닭다리를 바라보기만 했다. 식욕이 없어서가 아니다. 헤벌린
입에서는 끝없이 군침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누가 한입만, 아니 한 모금만
권해주면 고마워서 눈물도 기꺼이 흘려줄 수 있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권하지 않았다. 슬슬 부아가 치밀었다.
'내 입은 입이 아닌가. 내 입도 술 마실 줄 알고 고기 뜯을 줄 아는데!
반년 넘게 같은 초혼부대의 일원으로 굴러온 전우로서 어찌 저렇게 무심할
수 있단 말인가'
시혼은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 뱉었다.
"거, 목구멍으로 편하게 잘 넘어들 갑니까?"
사실은 이렇게 심통 맞은 소리를 내려고 한 게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인정과
양심에 호소하고 싶었던 것뿐이다. 그대들이 맛난거 먹고 있는 동안 변경에서는
수많은 백성들이 굶고 있다. 아니,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바로 코앞에서
그대들의 전우가 굶고 있다. 사람의 껍데기를 쓰고 태어난 자로서 어찌 그것을
모른 체할 수 있겠는가? 오늘 내게 한 점 고기와 술을 나눠주는 것은 나를
복되게 하는 일이 아니라 그대들 스스로를 복되게 하는 것이며 그 선업으로
내생에는 선골을 얻어 태어날 수 있게 될 것이다. 뭐 그런 도리를 알려줄
생각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최대한 짧게, 최대한 불쌍하게
말하고 싶었다. 한입만.
먹고 마시던 군졸들이 시혼을 돌아보았다. 몇몇은 좀 안됐다는 표정이고,
다른 몇몇은 킬킬 웃었다.
"한잔 생각이 간절한 모양이군. 하지만 어쩌겠나. 자네는 먹을 처지가
못 되는 것을."
음식을 날라다 주던 예쁘장한 처녀가 그제야 구석에 앉은 시혼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분은 입병이라도 나셨나요? 어째서 이리 와서 들지 않으세요?"
나 입병 났소. 맛있는 거 먹으면 당장 낫는 입병이오. 시혼은 그렇게 답하고
싶었지만 다른 군졸의 대답이 더 빨랐다.
"저 친구한테는 그냥 맨밥에 나물이나 좀 갖다 주시오. 술이랑 고기는
절대 주지 말고."
"어째서요?"
"저 친구는 우리와는 다른 처지거든. 죄인이야."
그 말에 처녀가 흠칫 몸을 떨었다. 시혼을 힐끔 보는 눈길이 조금 전과
확 달라졌다.
"죄인이라고요?"
"죄인 된 몸으로 군역을 살다가, 또 탈영의 죄를 지었지. 우리 별장님이
너그럽게도 백의종군을 명하셔서 우리와 함께 다니고 있지만 같은 처지가
아니라오. 술이나 고기는 일체 금지지. 물론 녹봉도 못 받고. 어쨌거나
저것도 옥살이의 일종이니까."
"죄인이 어째서 차꼬도 차지 않고 있나요?"
"만약 도 도망치다가 잡히면 바로 목이랑 몸뚱이랑 작별을 하게 될 테니
생각이 있으면 설마 섣불리 도망을 치겠나. 우리 별장님이 어떤 분인데."
영소를 언급하자 처녀의 얼굴이 조금 발그레해졌다. 절망에 빠져 있던 시혼은
그 얼굴을 보자 어딘가 낯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도 덜도 아니고 딱 밥
한 그릇에 나물 한 접시를, 그것도 멀찍이 내려놓고 슬쩍 물러가려는 처녀를
곰곰 보다가 시혼은 갑자기 '앗' 하고 소리를 냈다.
"어이, 거기, 잠깐!"
느닷없이 벌떡 일어나 다가오는 시혼을 보고 처녀가 움찔 물러났다.
"우‥‥‥ 우‥‥‥ 그러니까‥‥‥ 기억이‥‥‥."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며 머리를 쥐어뜯는 시혼을 보고 군졸들은 저놈이
이젠 자포자기하고 여자라도 덮치려나 싶었던지 마시던 술병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귓도리!"
시혼이 소리치며 처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처녀가 다시 움찔거렸다.
"그렇지? 맞지? 귓도리. 사 년 전에! 응? 그렇지? 이야, 반갑다!
이제 몇 년 만이냐, 귓도리!"
좀 놀란 듯하긴 했지만, 처녀도 어지간히 야무진 성격인지 시혼을 노려보면서
대답했다.
"내 이름은 그르매예요. 귓도리가 아니라."
그리고 덧붙였다.
"살던 곳은 귓도리골이 맞지만요."
"그래, 내 말이 그 말이야! 이야, 살다 보니 이렇게도 다시 만나게 되네.
정말 반갑다, 응?"
예전에 알던 사이를 만난 것 같은 눈치가 보이니, 군졸들은 이내 관심을 끊고
도로 자리에 앉아 술병을 들었다.
그르매도 얼굴을 제대로 보고서는 가짜 도사를 기억해냈지만 전혀 반가운
표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시혼은 넉살 좋게 계속 친한 척을 했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 있는 거야? 응? 얼핏 듣기에 귓도리골은 왕명으로
소거되었다던데."
"달리 터전 잡을 곳이 마땅치 않았는데, 울지세가에서 저희 마을 사람들
모두를 거둬주셨어요. 예전처럼 모여 살면서 이곳 장원의 논과 밭을
붙여먹고 있어요."
"오오, 그랬구먼. 이야, 역시 우리 별장님, 정말 대단한 분이란 말이야. 그냥
왕명만 집행하고 나 몰라라 해도 되는데 가문의 재산을 떼어 유민까지
보살피시다니."
시혼이 입에 침이 마르게 영소를 칭찬하자 그르매의 눈빛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정작 시혼은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계집애가 분명히 그때 나무토막 놈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으렷다.'
'나무토막 놈'이란 바로 영소다. 시혼의 인생을 망친 것은 모두 그 나무토막
이다. 고기를 못 먹게 한 것도 나무토막, 술을 못 마시게 한 것도 나무토막,
자유를 빼앗은 것도 나무토막이다. 한마디로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단, 시혼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상대라는 게 문제였다. 때문에 지난 반년간, 시혼은
영소의 약점을 잡기 위해 절치부심했다. 아무리 곧이곧대로 살았어도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나올 리 있겠는가. 부정행위를 했다거나, 부하들을 학대했다
거나, 하다못해 치질이라도 앓고 있다거나, 뭐 그런 걸 알아내기 위해 틈만
나면 여기저기 쑤시고 묻고 다녔다. 소득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여기 그
귓도리골의 계집애를 다시 만났다. 이건 하늘이 준 기회였다.
'이 계집애가 몇 년 사이 인물이 제법 피었으니 나무토막 그놈도 사내라면
가만 놔뒀을 리 없겠지. 게다가 제 장원의 가솔이나 마찬가지니 분명히 손을
댔으렷다. 오호라, 잘만 하면 부녀자 희롱의 증거를 잡을 수 있겠어!'
시혼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마을 어르신들은 다 무탈하신가, 새로 사는
곳은 전보다 마음에 드는가 이것저것 물어댔다. 물론 머릿속으로는 어떻게
이 계집애를 꼬드겨서 영소와의 관계를 불게 하나 궁리 중이었다.
"별장님!"
"별장님 오셨습니까?"
술 마시던 군졸들이 자리 털고 일어나며 인사하는 소리에 시혼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과연 영소가 막 말에서 내려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젠장, 어제
입궁했다더니 왜 이리 빨리 오는 거야. 조금만 더 늦게 오지.
"신경 쓰지 말고 계속 요기들 하게. 난 따로 볼일이 있으니."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영소가 군졸들에게 말했다. 그러고는 곧 바로 돌아서서
시혼과 그르매 쪽으로 걸어왔다. 그르매는 얼굴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숙였다.
시혼도 비슷하게 고개를 숙였다. 물론 이쪽은 수줍음 때문이 아니라 눈
마주치면 또 무슨 잔소리를 들을지 몰라서였다.
그런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흘끔 눈을 드니 자신을 바라보는
영소의 눈빛이 기묘했다.
'오늘 잔소리는 보통 잔소리가 아니겠구나.'
시혼은 불길한 예감에 몸을 떨었다. 한참 말없이 시혼을 그렇게 바라보던
영소가 불쑥 말했다.
"일이 있네. 따라오게."
그러고는 그르매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고 앞장서서 성큼성큼 걸어가버렸다.
그르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시혼은 잠시 얼떨떨해하다가 어찌된 영문인지
깨달았다. 일부러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아예 영소의 안중에는 그르매가 들어
있지 않았다. 한마디로, 제 집에 붙어먹는 무수한 가솔들 중 하나일 뿐 전혀
특별한 존재가 아닌 것이다. 꼴을 보아하니 이름도 기억 못할 것 같다.
'저런 무심한 놈.'
그르매의 표정을 보니 지난 사 년간 영소를 바라는 마음이 깊어 졌으면
깊어졌지 덜해지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러니 상처도 더 클 것이다.
'살 곳 주고 먹을 것 주면 뭐 하나. 사람이 밥만 먹고 살 수 있나. 거시기도
좀 하고 살아야 할 것 아닌가. 저건 인간이 아니라 나무토막이 분명하다.
어이고, 이걸 어쩌나. 이 계집애로 어떻게 해보려던 것도 꼴을 보아하니
물 건너갔고‥‥‥.'
"따라오지 않고 뭘 해?"
"옙!"
저벅저벅 앞서가는 영소와 고분고분 비굴하게 뒤따라가는 시혼의 발길이 향한
것은 울지세가의 마장이 있는 곳이었다. 울지세가는 세가들 중에서도 다소
특이한 배경의 세가다. 원래 이 가문의 뿌리는 구주가 아니라 팔황에 있다.
즉, 오래전 조상이 팔황에 있다. 즉, 오래전 조상이 팔황에서 구주로 귀화한
것이다. 거칠고 싸움 좋아하는 팔황 출신에 대한 시선을 조심하기 위해서인지,
울지세가의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무관이 아니라 문관으로 출사했다. 비주류인
자신들의 입장을 고려한 조심스러운 정치적 행보였던 셈이다. 선학을 가문의
학문으로 삼은 것도 그와 비슷한 맥락이라 볼 수 있다. 구주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선인에 대한 끝없는 집착.
그런 연고로, 울지세가의 마장은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말들 하나하나의
수준만은 남부럽지 않아 보였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말이라는
짐승에 대해서는 구주의 백성들보다 훨씬 정통한 야인의 피가 완전히
씻기지는 않은 모양이다.
'이 나무토막이 왜 마장으로 나를 데려온 거지?'
시혼은 머리를 굴려보았다. 그동안 미안했네. 자네 같은 뛰어난 사람을
시기하는 마음 때문이었네. 이제 그간의 죄를 뉘우치고 자네를 보내줄 테니
이 말을 타고 멀리멀리 달아나게. 영소가 그런 말을 모습을 떠올려보고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잘도 그러겠다, 저놈이.
그다음에 떠오른 것은 훨씬 끔찍하지만 그럴듯한 상상이었다.
난 원래 전부터 자네에게 유감이 많았네. 사실 초혼부대에 백의종군시킨 것도
그 때문이지. 하지만 더 괴롭히고 싶어졌네. 흐흐, 비명을 질러도 소용없어.
도와줄 사람 따위는 없을 테니까. 말에 올라타 채찍질하면서 달려가는 영소와,
손목을 묶인 채 질질 끌려가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자 속이 메슥거렸다.
영소가 손짓해서 마장의 관리인을 불렀다. 말을 훈련시키고 있던 관리인이
손에 밧줄 뭉치를 든 채 달려왔다. 시혼은 밧줄 뭉치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언제 도망가는 게 가장 나을까.
"말 두 마리와 두 사람 분의 한 달 길양식을 준비하게."
서, 설마! 한 달 동안 끌고 다닐 셈인가!
"어떤 말로 할까요, 도련님?"
"월영과 분소로 하게."
말의 이름을 듣고 시혼은 풋 터져 나오는 웃음을 손으로 간신히 막았다.
월영과 분소는 둘 다 삼라 구주팔황의 첫 번째 황제로 알려진 시황이 부렸다는
천마들의 이름이다. 월영은 해를 쫓아 달리는 말로 제 그림자를 넘어설 만큼
빠르다고 해서 월영, 분소는 밤에 더욱 빨리 달렸던 천마로 하룻밤 새 오천
리의 하늘을 가로질러 갔다고 해서 분소다. 물론 이 마장의 말들은 다 좋은
말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보통 군마에 그런 이름을 붙이다니 참 허풍도
세다 싶었다.
"다른 사람들이 모르도록 조심하게. 밤에 다시 오겠네."
마장 관리인에게 명하고 영소가 돌아섰다. 시혼은 또 허둥지둥 그 뒤를
따라갔다.
"저, 별장님."
대답이 없었다.
"어이구, 답답해라. 별장님, 제게 하실 말씀이라는 게 대체 뭡니까? 예?"
갑자기 영소가 걸음을 멈추고 시혼을 돌아봤다.
"모르겠나?"
시혼은 눈만 껌뻑거렸다.
"모르겠는데요?"
한참이나 그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영소는 한숨을 훅 내쉬었다.
그리고 돌아서면서 말했다.
"오늘 밤, 자네는 나와 함께 황산으로 가야 하네."
"예? 아니, 제가 왜요?"
영소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건 너보다 내가 더 궁금하다! 대체 왕명의 진의가 무엇일까!'
그는 가능한 한 명령을 착실히 수행하는 관인답게 절도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왕명일세. 선계 보천궁에 전할 밀지를 우리 두 사람이 가지고 가라는."
푸른 유리기와 아래 대전에서, 환공 기백은 홀로 앉아 왼손에 오십 개의
산가지를 잡고 마음을 고르고 있었다. 그 산가지는 서죽으로, 복서에 쓰는
도구다. 천기를 읽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마음을 비운 뒤, 그는 서죽 하나를
뽑아 앞에 내려놓았다. 태극을 뽑고, 천책과 지책, 인책을 뽑고, 어느 것은
손가락 사이에 끼워 넣고 어느 것은 바닥에 두었다가 도로 집기도 하고
덜어내기도 하는 등, 그의 손놀림이 점점 빨라졌다. 효를 찾고 괘를 얻는
서법, 작괘를 펼치는 중이었다.
손이 바람처럼 움직였음에도 불구하고 괘를 뽑기까지 걸린 시간은 길었다.
마침내 괘를 얻은 뒤, 서죽을 앞에 펼쳐놓은 채 기백은 이마에 두른 홍사건을
끌러내고 송골송골 배인 땀을 소매로 닦았다. 그리고 문득 허공을 보며
중얼거렸다.
"죽지도 못하는 뒷방늙은이 같으니라고, 어디 뜻대로 해주었으니 내 부탁도
들어주나 두고 보겠소. 유야무야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 하면서
넘어가면 가만있지 않을 테니."
도성 내에 잠입해 있을 것이 뻔한 간세의 눈에 띄지 않도록 두 밀사가 밤을
틈타 은밀히 출발하는 시각, 환공 기백은 뽑아둔 괘를 읽으며 미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택천쾌
아래가 건이며 위가 태.
못이 하늘에 올라간 택상우천의 괘다.
못은 물이 모인 것이며 땅에 있어야 하는데 하늘로 올라갔다.
하늘에 올라간 물은 터져서 쏟아져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위험하다.
결단하라.
위험하다.
서둘러야 한다.
기백은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언제나 우리한테는 시간이 없지. 망할 선계의 놈들은 남아서 썩어나가는 게
시간인데."
하지만 지상의 왕인 그에게도 선인과 비슷한 점은 있었다. 선인들이 그러하듯,
그도 역시 패를 던지고 기다리는 것이다. 그가 던진 패, 영소와 시혼은
그 시각 휘북평원 너머 황산을 목표로 말을 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