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109)

9-2.

하늘이 후덥지근하고 축축하게 꿈틀거렸다. 조만간 비라도 한

바탕 쏟아질 낌새였다.

"가스라기야! 가스라기야!"

목덜미에 밴 땀을 훔치며 비야 오려면 빨리 내려라 더워 죽겠다

하고 있던 가스라기는 미간을 찡그리며 돌아보았다. 저렇게 새된

목소리도 조급하게 불러대는 건 당연히 백화다. 생긴 건 동글동글

한데 목소리는 왜 저렇게 째지는지 모르겠다. 물론 가스라기를

부를 때만 그렇고, 여진이나 다른 높은 선고들에게 대답할 때는

아주 사근사근하기 이를 데가 없다.

여진의 문하로 들어온 지 근 반년. 이제 백화가 무슨 골탕을

먹여도 안 넘어갈 자신이 생긴 가스라기는 곧 잡아먹을 듯이 달려

오는 백화를 시큰둥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백화는 코가 부딪칠

정도로 가까이 와서야 걸음을 멈추더니 눈을 부릅뜨고 앙앙거렸다.

"얘가 정신이 있어, 없어? 오늘이 얼마나 바쁜 날인데 여기서

노닥거리고 있는 거야?"

"무슨 날? 나 닦달하는 날? 그건 어제도 하고 그제도 했잖아."

"아유, 저 말버릇. 바쁜 날만 아니면 그냥 콱! 잔소리 말고 얼른

따라와, 응? 자, 일단 이 소쿠리부터 들고."

백화는 들고 온 빈 소쿠리 두 개 중에 하나를 가스라기에게

덥석 안겼다. 이걸 갖고 뭘 어쩌라는 거냐는 표정으로 가스라기가

바라보자, 백화는 제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너 정말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몰라?"

가스라기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날은 무슨 날? 그저 후덥지근하고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

질 것 같은 날이지. 그러고 보니까 이때쯤 지나면 비가 자주 와서

굴 바닥이 축축했었지. 아!'

가스라기는 퍼뜩 떠올렸다.

"하늘 오르기 하는 날, 수릿날?"

그러자 백화는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이래서 하계 땟물 덜 벗은 애는 안 된다니까. 그건 하계에서나

쓰는 말이고. 오늘은 천중절(天中節)이야, 천중절."

같은 날이라도 하계에서 부르는 이름과 선계에서 부르는 이름이

다른 모양이다. 하긴 그러고 보니 설날은 원단(元旦)이라고 불렀다.

가스라기는 아랫입술을 쑥 내밀고 물었다.

"그거랑 이 소쿠리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

"당연히 있지. 산우방(山牛芳)뜯어야 할 거 아냐."

"산우방?"

"아아, 그래그래. 너 무식한 거 내가 깜빡 잊었다. 수리취 어린잎

을 뜯어야지. 그래야 거륜병, 수리취떡을 만들지. 그게 천중절에

먹는 음식이야."

백화를 따라 걸음을 옮기면서 가스라기는 계속 물었다.

"누가 먹어? 선계에서는 다들 밥 안 먹어도 살잖아."

그건 가스라기가 지난 반년 동안 몸으로 체험한 일이었다. 물론

가스라기는 선총을 받은 이후 먹지 않아 죽을 일은 없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보름 이상 굶으면 팔다리의 기력이 빠지기

는 했다.

그런데 선계에 와서 선계의 공기를 호흡하고 물을 마시니 그런

것조차 말끔히 사라졌다. 여진선고가 시키는 대로 앉아서 토납법

을 수련하고 아침저녁으로 선계의 샘에서 솟아나는 맑은 물로

속을 씻어내니 음식을 먹거나 안 먹거나 늘 똑같은 상태였다.

"누가 먹긴. 선인님들이랑 선녀님들이랑, 우리도 먹지. 스리고

선계에서 음식 먹는 건, 굶어 죽지 않으려고 먹는 게 아냐. 세시에

맞는 절식으로 때가 가는 것을 알고 하늘의 흐름에 몸과 마음을

맞추기 위해서 먹는 거지. 알아듣겠어?"

"그럼 저번 설날에도 뭐 먹었어?"

"당연히 먹었지."

"난 안 먹었는데?"

"바보. 넌 그때 선계에 온 지 얼마 안 되니까, 화식(火食) 끊는

연습을 시키려고 음식 가까이 못 가게 선고님이 배려해주신 거지.

덕분에 후배가 들어왔는데도 나랑 운교 언니만 나가서 세찬 준비

하느라 뼈가 빠졌다고. 이젠 너도 익숙해졌으니 절식을 먹어도

된다고 하셨어."

백화는 그렇게 말하면서 히죽 웃었는데, 동무가 드디어 먹을 

것을 입에 넣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서가 아니라 음식 만드는

일에 부려먹을 수 있게 되어 기쁘다는 것이 누가 보아도 확연한

웃음이었다.

"자, 이제부터 산우방을 소쿠리 가득 따는 거야. 양지쪽에 많이

자라니까 게으름 부리지 말고 열심히 일해. 알았어? 일 제대로

안 하면 여진선고님한테 다 이른다?"

가스라기는 주둥이를 불쑥 내밀며 불만을 표했지만 백화의 마지

막 위협에 별수 없이 쪼그리고 앉아 수리취 어린잎을 따야 했다.

무한계를 제 발로 올라온 자의 선적은 파할 수 없다는 선계의

불문율을 모르는 가스라기에게는, 여진선고에게 밉보였다가는 보

천궁에서 내쫓기게 되고, 그러면 하늘님을 볼 수 없게 된다는 사실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웠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가스라기는 한눈을 팔았다. 산 저편 하늘로

무리지어 날아가는 한 떼의 새들을 멍하니 바라보느라고 손을

놓은 것이다. 그걸 놓칠 리 없는 백화가 한소리 빽 내지르려다가

잠깐 멈칫하더니 입술을 삐죽거렸다.

"너 또 그쪽 보는구나?"

가스라기가 바라본 쪽, 새들이 날아간 쪽은 새내기 선녀들이

공부하는 망후봉에서 아득히 먼 높은 봉우리다. 황산 칠십이 봉

중에 손꼽히는 천도봉. 하늘님이 산다는 그 봉우리다. 같은 선계의

공기를 마시고 있지만, 그날 이후 하늘님을 다시는 보지 못했다.

함부로 망후봉을 벗어나려 하면 경을 칠 줄 알라는 여진선고의 

엄명 때문에 차마 저 머나먼 봉우리까지 찾아갈 엄두를 못 내기도

했지만, 설령 선고의 눈을 피할 방법이 있다고 해도 과연 제 발로

혼자 찾아갈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만큼 너무 멀었다. 새가 되어

날아서라도 갈 수 있다면 모를까.

가스라기는 낙담한 표정으로 다시 수리취를 찾아 뒤적거렸다.

백화가 혀를 쯧쯧 찼다.

"아서라. 말아라. 올라갈 수 있는 나무를 올려다봐야지. 우리

진선님이 어떤 분이신데. 게다가 그 옆에 너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천수배필이 계신다고."

"백화야."

"엉?"

"이 소쿠리 튼튼해?"

"그야 선계의 대나무로 짠 거니까 당연히 튼튼‥‥‥. 너, 뭐 하려

고? 꺅!"

가스라기는 안에 담긴 몇 안 되는 수리취 잎이 쏟아지건 말건

아랑곳 않고 냅다 소쿠리로 백화의 머리통을 갈겼다. 선계의 대나

무로 짠 소쿠리는 확실히 튼튼했다. 서너 번을 갈겨도 부서지지

않았다.

"너, 이 계집애!"

백화도 벌떡 일어나 선배 된 체면이고 뭐고 다 잊고 제 소쿠리의

튼튼함을 가스라기의 머리를 통해 시험해보기 시작했다.

선계에서 소식을 주고받는 데 쓰는 새를 비합전서라고 한다.

원래는 비둘기에서 비롯되었다. 새들은 하늘을 나는 짐승이라

땅을 기는 물짐승들과는 달리 본래 선계와 친근했다. 그중에서

도 비둘기는 하계로 날려 보내도 곧장 선계를 찾아 돌아오는 신통

한 힘을 지니고 있어서 선인들의 연락 수단으로 애용되었다. 하지

만 지금은 비단 비둘기에 그치지 않고 온갖 종류의 새들이 비합전

서로 쓰인다. 매나 제비 같은 보통 날짐승도 있고, 수하린상아가

키우는 눈동자 두 개인 쌍정 같은 기이한 새도 있다. 물론 하나같이

선인과 영통하여 육식을 하지 않고 성미가 온순하다.

아득한 운해 가운데,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바람을 타기 좋은

길이 있어 비전천로라고 부르는데, 비합전서들은 그 길로 소식을

물어다 날랐다.

지금도 비전천로로 서너 마리의 각기 다른 새가 날고 있다.

온몸이 흰 비둘기가 두 마리, 매가 하나, 황조롱이가 하나다. 하계

에서라면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일 이 새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유유히 한 항로를 나는 것은 오직 이곳의 하늘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별안간 저 뒤편에서 눈부시게 흰 점 하나가 새들의 뒤를 쫓아왔

다.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순식간에 앞선 새들을 따라잡은 그것은,

새가 아니라 한 자루 검이었다. 쐐애액 공기를 가르며 검이 뒤쫓아

오는데도 비합전서들은 놀라 흩어지지 않고 제 날 길을 날았다.

짐승의 본능으로 살기가 있는지 없는지 알아차릴 수 있는 까닭이다.

비둘기와 비둘기 사이, 매와 황조롱이 사이를 깃털 하나 차이로

통과한 검은 그대로 새들을 따돌리고 구름을 가르며 지나가, 한 산정에

도달했다. 산정에는 마치 손님을 맞는 것처럼 허리를 깊이 숙인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소나무 아래 서 있던 천군이 쥐고 있던 빈 검집을

앞으로 내밀자, 검은 한순간도 멈칫하지 않고 날아가 검집에 꽂혔다.

천군은 말없이 검집을 쓰다듬었다. 말이 없음에도 손끝에서 말을 느낀

듯, 검집 안에서 우우웅 기분 좋은 검명이 흘러나왔다.

검집을 토닥이자 검명이 가라앉았다. 수고했다. 기쁩니다. 쉬어라,

예. 이런 대화가 필요 없는, 비검과 그 주인 사이의 공명이었다.

딱 사 년 전이다. 보천궁 밖 창공에서 지한의 기습을 받아 불리한 싸움을

하던 중에 그만 비검을 깨뜨렸는데, 천하의 명검 중에 고르고 골라 오랜 

시간 길을 들인 끝에 드디어 다시 온전한 비검을 손에 넣은 것이다.

비검 연성이 종료된 것을 자축할 틈도 없이, 몇 마리의 비합전서가 

다급한 날갯짓으로 맞은편 천도각의 높은 창을 향해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천군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급한 소식인 모양이다.

그리고 정말 급한 소식이라면, 조만간 자신에게도 연락이 올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일각이 채 지나기도 전에 천도각의 선고 하나가 천군이

수련 장소로 쓰는 영객송 아래로 다급히 들이닥쳤다.

"무량무극. 진선께 아룁니다."

"무슨 일인가?"

"천룡애‥‥‥ 천룡애의 기린에게 변고가 생겼다 합니다."

고하는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천군은 안색을 굳히고 물었다.

"변고?"

"워, 원인은 알 수 없사오나‥‥‥ 그, 그만 흑기린이 되어‥‥‥."

흑기린이라는 한마디에 천군은 상황을 알아차렸다. 심각해도 보통

심각한 변고가 아니었다. 그는 재빨리 검집을 쥐고 물었다.

"기린이 간 방향은?"

"운곡, 운곡 쪽이라 하옵니다."

운곡, 천중절을 맞아 천도봉 소속 선인들이 모여 주연을 벌이고 있는

곳이다. 천군은 혀를 쯧 차고, 손가락으로 검자루를 튕기듯이 밀어

올렸다. 비검이 맑은 소리와 함께 검집에서 튀어나와 허공에서 한 번

크게 호를 그리더니 그의 발 근처로 돌아왔다. 가볍게 몸을 날려 검 

위에 올라선 뒤 그는 검과 한 몸이 되어 날아올랐다. 수직으로 잠깐

상승한 검은 그대로 운곡 방면을 향해 쏜살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본래 선계에서는 비구를 타지 않는 법이지만, 지금은 비상하태,

일각이 여삼추였다.

운곡은 때를 가리지 않고 구름 같은 물안개가 도도히 흐르는 계곡이다.

계곡을 흐르는 물이 계절과 상관없이 차갑고 맑아 요즘처럼 무더운 날에는

더욱 선인들이 즐겨 찾는 장소다.

천도봉에 소속된 정도선인과 선녀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운곡 이곳저곳에

자리를 펴고 앉았다. 천중절을 맞아 선인들은 웅황주를 준비하고 선녀들은

수리취로 빚은 거륜병을 마련하여 함께 나누어 마시고 먹으며 더위를 씻는다.

선계에서의 직급은 아무래도 반선인 선녀들보다 선인들이 더 높지만, 그래도

이런 세시명절에 모여 술자리를 할 때는 그런 상하의 위계를 따지는 이가

없다.

술기운이 거나하게 오르면 성격 드센 선녀는 평소 마음에 들지 않던 수행선

에게 주사도 부리곤 한다. 물론 그런 사치도 제법 묵은 선녀한테나 가능한

일이다. 새내기 선녀는 이런 날도 잔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것이 고작이다.

운교, 백화, 가스라기는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술을 나른다, 떡을 갖다 드린다,

엉덩이가 한 번 마음 편하게 내려앉힐 틈이 없었다. 힘겹긴 하지만 가스라기는

신이 난 표정이었다. 조용하기 그지없던 선계가 이렇게 시끌벅적 놀자판이

된 걸 보니 괜히 좋았다. 알고 보면 하늘님도 이렇게 신나게 살았던 게

아닐까, 자신도 선계에서 인정받는 선녀가 되면 하늘님과 함께 이렇게 먹고

마시고 노래도 부르면서 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덕분이었다.

'이상하다. 그런데 하늘님은 왜 안 보이지?'

문득 거기에 생각이 미쳐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더니 지나가던 운교가

옆구리를 툭 치면서 싸늘하게 물었다.

"뭘 찾니?"

백화랑은 치고받고 싸우면서 이름도 쉽게 부를 수 있는데 운교랑은 아무래도

그게 잘 안 됐다. 어지간한 가스라기도 운교의 차가운 얼굴을 보면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게 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겉보기는 비슷한

또래로 보여도 선계 입문한 지 오십년이 넘었다고 하는데 그 탓도 있는 듯했다.

"아니, 아무것도‥‥‥."

가스라기가 어물어물 대답을 흐리자 운교는 눈을 똑바로 한 번 쳐다보더니 그

속 다 안다는 듯이 냉정하게 내뱉었다.

"진선님은 이런 자리 안 오신다. 여기는 높아야 신선님네나 모이는 자리야."

선계인은 크게 다섯 등급으로 나뉘는데 진선, 신선, 수행선, 가선, 반선이

그것이다. 반선은 선녀들을 말하는 것이고, 가선은 선인이 거둔 제자를 

말한다.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선골을 가지고 태어나 선계에 정식으로 입문한

'선인'이라 칭할 수 있는 것은 수행선부터인데, 스승의 그늘과 속세의 

미망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수행의 초입에 들었다는 뜻이다.

수행선이 불멸의 양생과 조화를 얻으면 신선이 된다. 수행선 중에 신선의 

경지에 이르는 자는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신선 중에 진선에 이르는 자는

더욱 적다. 만중일선이라 하여 사람 만 명 중 하나 꼴로 선골이 태어난다는

말이 있다. 선골을 가지고 입문한 수행선 열 중 하나가 신선의 경지에

도달하지만 신선들 중에 진선에까지 이르는 자는 극히 적다. 이런 머리 팽팽

돌아가는 등급 이야기를 가스라기는 지난 반년 동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물론 아직 다 못 외웠다.

하지만 '높아야 신선님네나'라니. 신선은커녕 수행선의 발밑에도 못 미치는

반선인 선녀, 그중에서도 새내기 선녀인 운교가 하기에는 되바라진 말이었다.

하지만 운교는 아랑곳없이 계속 말했다.

"속세의 사람들은 선인 선녀라고 하면 세상 걱정 없이 유유자적 살아간다고

생각하지. 사실 그래. 신선까지는 말이야. 하지만 신선을 넘어서 진선이 되면

그대부터는 제 한 몸의 즐거움만 찾을 수는 없게 돼. 왠지 아니? 진선의 

일거수일투족이 바로 하계의 운명과 이어지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운교는 잠깐 멈췄다가 나지막하고 차갑게 말을 맺었다.

"쓸데없는 짓 좀 하지 마."

그러고는 홱 돌아서서 다시 술과 떡을 나르러 가버렸다. 가스라기는 멍하니

서서 방금 운교가 한 말이 무슨 뜻인가 되짚어보았다. 답은 이내 나왔다.

결국 백화가 한 말과 비슷한 거다. 오르지 못할 나무 쳐다보지도 말라는.

속에서 뭔가가 울컥 올라왔다. 손에 든 음식 쟁반을 한 번 내려다보고,

멀어져가는 운교의 뒤통수를 한 번 쏘아보았다. 이 쟁반을 확 던질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흥! 높으면 얼마나 높고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합니까?"

술자리 한쪽에서 드센 목소리 하나가 쩌렁쩌렁 울렸다. 계류 변에 흩어져 술을

마시던 선인 선녀들의 시선이 모두 그리로 쏠렸다. 목청을 돋우고 있는 것은

여진이었다. 얼굴이 발그레한 것이 술이 꽤 들어간 모양이다. 여진과 함께

술자리를 하고 있던 수행선들은 곤란한 표정이고, 여러 번 이런 일을 겪은

경험 많은 선인 선녀들은 몰래 빙긋이 웃으며 '또 시작이군'하는 얼굴이다.

"나 또한 무선녀로 수련을 해온 세월이 적지 않아요. 물론 선녀가 선인을

이길 수야 없겠지요. 하지만 수행선 정도라면 평수를 이룰 만큼은 된다고

자부합니다. 못 믿겠어요? 못 믿겠으면 당장 일어나보세요."

떽떽거리며 손끝으로 가리키는 것은 앞자리에 앉은 해사한 외모의 선인이다.

수행선이 되어 이런 자리에 참여한 것이 처음인지라 곤란해서 어쩔 줄 

모르고 있다. 아마 실수로 여진의 자존심을 건드린 모양이다. 동석한 선인

중에 연배 지긋한 이들은 느긋하게 술잔을 기울이며 담소를 나눴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는 여진선고께서 확실히 수행선 하나를 땅바닥에

눕혀버렸지요."

"아아, 아직도 기억납니다. 그 수행선, 창피해서 그 길로 하산하여 유선이

되었다 하던데 아직 안 돌아왔지요, 아마?"

선배 선인들의 농까지 받고 보니 이 앳된 수행선은 더욱 어쩔 줄 몰라 했다.

여진의 기세는 물론 더욱 등등해졌다.

"자, 뭘 우물쭈물하십니까? 사내대장부라면 어서 일어나세요! 하계에서는 

천중절에 씨름으로 힘겨루기를 하는 풍습도 있다더군요. 우리라고 못할 거

뭐 있겠습니까. 내 단숨에 저 앞산까지 고이 던져드리‥‥‥."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우르릉 쾅 소리와 함께 땅이 흔들린 것은 그 순간이었다.

말하던 여진도 어안이 벙벙해졌고, 흥미진진하게 상황을 구경하던 선인

선녀들도 모두 놀라 술잔에서 입을 뗐다.

소리가 들려온 것은 천룡애 쪽이었다. 모두 그쪽을 바라보니 천룡애 상공으로

시커먼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선인 선녀들이 웅성웅성

일어났다. 신선들 중 몇몇이 운곡의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어찌된 영문인지

자세히 보기 위해서다. 잠시 후, 올라갔던 신선들이 창백한 안색으로 도로

내려왔다.

"뭔가가 운곡 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아주 빠른 속도로."

"뭐, 뭐죠?"

"글쎄, 내가 보기엔 저 기운은 요수‥‥‥."

"여기가 어딘데 감히 요수가 침범을 합니까. 저건 요수가 아닙니다!"

"얼핏 본 것이지만 기린과 닮았습니다."

"기린? 하지만 성수인 기린이 소란을 피울 까닭이 없지 않습니까."

선인 선녀들이 웅성웅성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운곡의 상공에서 퍼덕퍼덕

큰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보라보니 깃에 푸른 기운이 도는

선학이다. 선학 위에 타고 있는 것은 몇몇 선인 선녀들과는 안면이 있는, 

천도각 내전 담당 선고였다.

"무량무극. 내려가 예를 취하지 못함을 용서하십시오. 동도들께서는 어서

자리를 피하시기 바랍니다."

"무슨 일입니까, 명련선고?"

"흑기린입니다. 곧 이곳까지 들이닥칠 겁니다. 지금 진선께서 막을 방도를

찾고 계시니 동도들께서는 일단 이 자리를 어서 피하십시오."

경험 많은 선인 선녀들은 흑기린이라는 말에 사태가 어떻게 된 것인지

알아차렸다. 그들은 우왕좌왕하는 후배들을 챙겨 비구를 타거나, 직접 경공으로

날거나, 익숙한 산세를 타고 날듯이 뛰어서 운곡을 사방팔방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여진 또한 단번에 취기를 날려버리고 새내기 선녀들을 챙겨 운곡을 빠져나왔다.

흑기린이라는 것이 대체 뭔지 모르는 백화조차도 여진의 심각한 안색을 보고는

겁을 잔뜩 집어먹고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한참 후에야 여진은 이 정도면

됐다면 제자들을 멈추게 했다. 여진의 빠른 걸음을 쫓아오느라 숨이 가빴던

백화는 헉헉거리며 물었다.

"선고님, 선고님, 대체 흑기린이라는 게 뭔데‥‥‥."

"말 마라. 아이고, 이게 무슨 사단이냐. 갑자기 흑기린이라니.

대저 흑기린이 출현할 때는‥‥‥. 어라?"

여진은 장광설을 늘어놓으려다가 우뚝 멈췄다. 뭔가가 이상하다. 다급한

상황임에도 미주알고주알 캐물어야 직성이 풀리는 몹쓸 제자 하나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봤다. 백화와 운교뿐이다.

여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가, 가스라기는 어디 있지?"

모든 선인 선녀들이 천룡애 반대 방향으로 운곡을 빠져나가던 때에, 가스라기는

홀로 천룡애 쪽으로 내달렸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흑기린에 대한 호기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ㅡ 지금 진선께서 막을 방도를 찾고 계시니‥‥‥.

선학을 타고 나타난 선고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걱정과 기대가 뒤범벅된

얼굴로 가스라기는 허둥지둥, 검은 연기가 솟구치는 방향으로 그저 내뛰었다.

'하늘님, 하늘님!'

하루 종일 후덥지근하던 하늘이, 그때부터 빗방울을 떨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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