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진선께 감히 아룁니다."
내가 미쳤지. 그래, 분명히 내가 미친 거야. 숲에서 나와 땅에 엎드려 머리 조아린
채로 여진은 생각했다.
"죽기 싫으면 닥치고 꺼져."
비명을 토하고도 다 못 뱉은 고통 때문에 신음하는 가스라기의 몸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지한이 뇌까렸다. 여진의 뒤에서는 백화가 벌벌 떨며 이빨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어떤 벌을 내리셔도 이 말씀만은 꼭 드려야겠습니다."
신기한 일이로다. 너무 심하게 무서우니 목소리도 안 떨리네.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내 말이 아니라 남의 말 같기도 하고.
"그 아이는 저희 천도봉의 새내기 선녀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던바,
수궁계도 아직 받지 못한 어린아이에 불과합니다."
"기어오르는 게 귀여워 보이는 것도 한도가 있다."
"지금 품으시겠다면 그 명을 끊으시겠다는 것과 다름없는 말씀. 만약 그리되면……."
지한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허리춤에 달려 있던 둥근 쇠붙이 같은
것이 여진 쪽으로 날아갔다. 날아가는 동안 그 둥근 쇠붙이는 회전하며 커져서
핏빛 비륜이 되었다. 비륜은 쇠붙이 갈리는 소리를 내며 여진의 목젖 앞에서 멈췄다.
당장이라도 갈아 버릴 듯한 기세였다. 비륜의 톱니 사이에 낀 살계의 흔적들을 보고,
여진은 당장 올라오려는 구역질을 가까스로 참았다. 선인들은 자신이 속한 선계의
영역 안에서는 일신의 경공만으로 날아다니지만, 그 바깥에서는 비구를 써서
선계와는 이질적인 대기의 흐름을 탄다. 비구는 말하자면 선인들의 장거리
이동 수단인 셈인데, 지한의 비구는 탈것이 아니라 숫제 그 자체가 흉기나 다름없었다.
더 이상 주절거리면 목을 날려버리겠다는 위협을 받은 것이지만,
여진은 이미 호랑이 등에 탄 형국이었다. 내친김에 그녀의 말은 더욱 급박하게 쏟아져
나왔다.
"제석의 결전을 앞둔 천도봉과 연화봉입니다. 두 분 진선께서 모두 심신 맑게 하고
기다리셔야 할 때가 아니옵니까? 선녀의 기운은 상아의 기운이고, 상아의 기운은
그 천수배필이신 진선의 기운입니다. 연화봉에서 천도봉의 선녀 하나라도
상하게 하신다면 정당하지 못한 승부. 화안금정수의 일만 해도 진선께서 과하셨지만,
아직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기수이니 궁주께서도 무훼무예로 넘기셨다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는 분명히 소속이 있습니다. 공정치 못하십니다. 선총 거두어주십시오!"
"후우."
지한이 이마에 손을 얹고 고래를 들었다. 가스라기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지만,
그녀는 부러진 팔을 잡고 경련을 일으킬 뿐 도망치지도 못했다.
"네 말대로, 제석이 다가오기에 은원 무리하게 쌓지 않으려고 내가 요즘 너무 무르게
굴었던 모양이다."
쉭! 비륜이 여진의 목을 훑고 지나갔다. 여진은 흠칫 몸을 떨었지만 다행히 목이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안도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목덜미가 뜨끔하더니 가는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골치가 아픈지 아니면 열을 식히기 위한 건지 양쪽 관자놀이를 엄지와 중지로
누르면서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지한이 중얼거렸다.
"하계의 땟물도 벗지 못한 계집이 눈 똑바로 뜨고 덤비질 않나. 하극상의 결과를
누구보다도 잘 알, 선계의 물 처먹을 만큼 처먹은 늙은 계집이 달린 게 혀라고
아무 말이나 내키는 대로 뱉질 않나."
지한의 말은 느리고 나지막해서 자못 탄식처럼 들리는데, 비륜은 이빨 드러내고
여진의 몸을 좌우로 매섭게 할퀴며 지나갔다.
옷자락이 찢기고, 피가 배어 나왔다. 치명상은 아니지만 살기는 점점 강해졌다.
등 뒤에서 거품을 물고 있던 백화가 으음 신음하더니 옆으로 풀썩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야무진 것 같지만 아직 속이 충분히 단단하지 못한 아이였다.
제 스승 난자당해 죽는 꼴을 눈으로 보느니 차라리 기절했다가 뒤따르는
편이 낫겠다고 여긴 모양이다. 여진은 이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래, 죽여라. 죽여.
"그래, 네 마음 알겠다."
비륜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여진이 오히려 놀라 지한을 바라보았다.
지한은 관자놀이 누르던 손을 떼고 눈웃음을 치고 있었다. 여진은 비륜의 톱니보다
그 웃음이 더 무서웠다.
"알다마다. 너 또한 아까부터 듣고 있었으니, 나처럼 생각이 복잡하겠지.
네 주선이 무선 심정으로 이 계집을 버리고 갔는지 헤아리다 보니 머리가
터져버릴 지경이겠지. 정말 이 계집이 어찌되든 관심이 없는 걸까. 아니면 관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게 휘둘리고 싶지 않아 참고 간 걸까. 아, 충직한 개로구나.
헤아릴 수 없는 주인의 심기를 위해 목숨 걸고 나서다니. 그런 충직한 개를 어찌
혼백도 없는 비구에 죽게 내버려둘 수 있을까. 내가 직접 거둬주마."
여진은 심장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어차피 죽음을 각오하고 나선 판,
죽인다는 소리가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뭔가 이상하다. 지한선인의 성정이
사선답게 괴팍하고 독선적이며 잔인한 것은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지금 뿜어내는 살기나 광기에 폭 전 중얼거림은 그 도가 지나쳤다.
사도라도 선인은 선인, 넘을 수 없는 선이라는 게 있는데, 그걸 넘어선 것으로 보였다.
혹시…….
사도의 수련을 너무 오래 행하다 보면 간혹 주화입마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고
하던데 그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자신은 물론이고 이 자리에 있는 두 제자
모두 반드시 죽게 될 거라는 생각에 심장이 쿵쿵 큰북처럼 울렸다. 여진이 선계
입문한지 제법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까지 주화입마에 빠진 선인을 본 것은
딱 두 번뿐이었다. 그 두 번 다 큰 참사가 일어났다. 이지를 잃고 마의 경지에 들어
눈에 띄는 살아있는 모든 것을 저주하고 살육하다가 그 자신마저도 결국
파멸하고 마는 것이다. 그건 흡사 요수들 중에서도 가장 저열한 요마와 다를 바가 없다.
게다가 능력 그 자체는 선인의 것이니 요마보다 훨씬 위험하다. 여진이 여태 경험한
것은 가선이나 수행선 급의 주화입마였다. 진선의 주화입마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지한이 후우 길게 숨을 내쉬면서 일어섰다. 그가 손을 들자, 그 손 위의 공기를
가르며 검붉은 핏빛 칼, 그의 보패가 나타났다. 선계에서는 일찍이 느껴보지 못한
한기가 주변에 가득 찼다.
'이상하다! 지한선인의 보패는 화혈삼첨도, 분명히 불의 기운일 텐데 어째서 한기가?'
하지만 분명히 한기였다. 나뭇잎과 땅바닥의 돌멩이에 허옇게 서리가 내렸다.
주변을 모두 얼려버리는 차가운 불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리라. 두려움 때문에
눈이 어두워진 것인지, 다가오는 지한의 모습이 여진에게는 그저 시커멓고
차가운 안개처럼 보였다.
아냐. 저건 아냐. 아무래도 저건 선인의 모습이 아니야. 아무리 사선이라고 해도
저럴 수는 없어. 주화입마에 빠진 선인들도 저렇지는 않았어. 진선이 주화입마하면
저렇게까지 되는 건가? 여진은 마음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다가오는 죽음의
손길을 그저 지켜볼 수박에 없었다. 비명을 지른다고 해도, 그 비명조차도 얼어붙어
땅에 떨어져서는 산산조각이 날 것 같은 한기였다.
퍼덕퍼덕,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아직 아침이 오려면 멀었는데 주변이 갑자기
환해졌다. 강렬한 빛은 아니었다. 이글대는 모닥불, 혹은 타는 노을과 같은
환하면서도 여리고, 여리면서도 짙은 빛이었다. 지한이 뿜어내는 기운에 완전히
얼어붙어 있던 여진의 몸이 녹기 시작했다.
지한이 굳은 표정으로 돌아섰다. 가까운 나무 꼭대기에 노을빛 새가 앉아 있었다.
몸은 비둘기보다 조금 큰 정도지만, 날개와 꼬리가 흘러넘치는 불꽃의 분수처럼
높이 이십 척에 달하는 노송의 꼭대기에서 땅바닥까지 늘어지고, 머리 꼭대기부터
등골을 따라 용의 갈기 같은 새빨간 벼슬이 솟아 있는 새. 보천궁주 화영의
비합전서인 화령신조였다.
"보천궁주의 전언입니다."
화령신조는 부리를 꾹 다물고 있었지만, 여진과 지한의 귀에는 똑똑히 그 소리가
들렸다.
"명년 제석은 아직 아득하니 궁주 전에 맹세하신바 잊지 않으셨다면 연화봉으로
돌아가 심기 가라앉히기를 바란다 하셨습니다."
화령신조의 붉은 노을빛이 어른대는 지한의 얼굴이 일그러진 웃음을 물었다.
"약속? 물론 잊지 않았지. 그러나 어쩌면 좋을까. 정해진 시각, 정해진 곳에서,
정해진 방식으로 싸우는 신선놀음은 나 같은 사도선인의 기질에는 맞지 않는 것을.
나는 이렇게 닥치는 대로 싸우는 것을 좋아하니까."
화령신조는 잠시 침묵했다. 여진은 손에 땀을 쥐고, 지한은 입가에 비웃음을 물고
다음 전언을 기다렸다.
"궁주께서 말씀하시기를."
화령신조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두 진선이 보패를 겨루는 것은 제석회 아닌 다른 날에 보고 싶지 않다. 어느 쪽이든
명년 제석 이전에 상대를 향해 보패를 뽑는다면, 그것을 상대하는 것은 나,
화영의 보패일 것이다. 상대로 하여금 보패를 뽑게 만드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며,
천도봉과 연화봉 사이에 어떤 식의 충돌이든 일어나도 마찬가지다."
잠깐 침묵했다가, 화령신조는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이런 말을 제 입으로
전하는 것이 조금은 불만이라는 듯이 나지막하게.
"정 뭣하면 이번 등천을 취소하고 한두 겁 궁주 노릇 더 할 각오도 되어 있다."
지한의 비틀린 입술이 조금씩 움직였다. 그러다가 가슴을 들먹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좋아. 그거 정말 무서운 협박이군. 삼가 명을 받들지."
지한이 아직 보패를 잡고 있던 손을 내렸다. 보패는 씻은 듯이 사라졌고,
여진은 화령신조의 온기가 일대를 감싸는 와중에도 남아 있던 지한의 섬뜩한 기운이
동시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여전히 잔인하고 사이하기는 해도, 이제 그는 최소한
그녀가 익히 알고 있는 연화봉의 주선, 진선 지한이었다.
어깨뼈가 부서진 가스라기는 신음을 안으로 삼키며 아직도 그자리에서 뒹굴고 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이마는 땀으로 촉촉이 젖어 있었다. 지한이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손을 들어 턱을 잡아 올리더니 부드럽게 물었다.
"많이 아프냐?"
가스라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도 열기만 하면 비명이 쏟아져 나올 것 같은
입술을 꽉 다문 채 노려보기만 했다. 지한은 혀를 쯧쯧 찼다.
"네 원망을 나눌 수 있거든, 아홉 정도는 나를 원망하고, 하나 정도는 무정하게
너를 버리고 떠난 네 하늘님에게 나눠주어라. 그게 공평하겠지."
그쯤하고 가려고 했다. 머리를 달구던 기운도 서서히 가라앉았고 아무리 사도의
선인이라는 들끓는 심화를 계속해서 터뜨리는 것이 좋지만은 않기에 오늘은
이 정도에서 참아줄 작정이었다. 그런데, 막 턱을 놓고 일어서려는 참에 들려온
희미한 한마디가 지한의 발목을 잡았다. 지한은 걸음을 멈추고 가스라기를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지?"
지한이 떠나려는 기색에 만세를 외치던 여진은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으윽, 안 돼. 가라. 가라. 가라. 제발 가주세요. 가주십시오!'
가스라기가 목을 쳐들고 입을 달싹거렸다. 여진은 빌고 또 빌었다.
'넌 좀 닥쳐라. 닥쳐. 닥쳐라, 이 바보 같은 것아.'
"안 밉다고."
기어코 또렷이 들릴 목소리로 말하고야 말았다. 지한은 무표정한 얼굴로
가스라기의 말을 들었다.
"당신은 미워. 날 아프게 했으니까. 그리고 하늘님을 미워하니까…….
하지만 하늘님은 밉지 않아."
아픔 때문에 온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도 있는 힘을 다해 느릿느릿 말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지한은 한참 만에 대꾸했다.
"그는 널 자기 여자가 아니라고 했다. 돌려받을 길 없는 마음이다."
"상관없어."
찢긴 옷, 흙투성이,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도 웃는 시늉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해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난 알아. 하늘님이 무슨 마음인지."
지한이 미간을 찡그렸다.
"무슨 소리를……."
"얘기 안 해줘."
미간을 찡그린 채로, 지한은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결국 후 하고 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만난 지 고작 삼 년, 그것도 얼마 같이 있지도 않았을 네가,
속세에서부터 지금까지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싸웠던 나보다 그를 더 잘 안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가스라기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지한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조금 굽혔다.
여진에게는 들리지 않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가스라기가 할딱할딱 숨을 몰아쉬며
속삭였다.
"토끼, 키워본 적 없지?"
땀을 비질비질 흘리면서도 가스라기는 마치 승자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절대로 모를 거야. 영원히."
지한은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다. 여진은 다시 간이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이윽고 지한이 손을 뻗어 가스라기의 부서진 어깨 쪽 팔을 붙잡았다.
가스라기가 비명을 질렀다. 여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사실은 널 죽이면 그가 어떻게 나올지 좀 궁금했다."
발버둥치는 가스라기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며 지한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제는 다른 게 더 궁금해졌다."
"놔! 놔! 아파!"
지한이 다시 부서진 가스라기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조각나 뼈와 뼈가 서로
부대끼는 소리가 났다. 숨넘어가는 비명을 지르는 가스라기의 어깨를 움켜쥔
지한의 손에서 불그스름한 기운이 일어났다. 가스라기의 비명이 뚝 멈췄다.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가스라기를 향해 지한은 빙긋 웃었다.
"너라는 패가 앞으로 어떤 식으로 쓰일지 지켜보고 싶어졌다. 한번 잘 살아남아봐라.
기대하고 있을 테니."
다음 순간, 지한은 가스라기를 밀어냈다. 가랑잎처럼 날아간 가스라기의
몸뚱이가 여진의 품으로 떨어졌다. 허겁지겁 받아 안은 여진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지한의 신형은 이미 먼 하늘로 사라져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