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109)

제 8 장

::미물지명::

한 어리석은 자가 물었다.

어찌하면 요수들을 능히 다루고 신수와 벗할 수 있습니까?

현자가 대답했다.

미물의 울음을 들어라.

어리석은 자가 다시 물었다.

미물이 무엇입니까?

현자가 대답했다.

너다.

ㅡ술사 벽혈자.『만요경』

8-1.

"백화야."

다급히 옮기던 걸음을 멈추고. 여진은 절망적인 음성으로 속삭였다.

"네, 선고님."

여진은 자신을 쫓아오느라 숨을 헐떡거리는 백화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앞쪽에 고정되어 있었다.

"나 좀 붙잡아라."

"예?"

여진은 시선을 움직이지 않은 채, 손을 들어 뒷목에 댔다. 뻣뻣하고 뜨거웠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래,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어. 내 이럴 줄 알았어.'

천룡애 쪽으로 간 것 같다는 가스라기를 찾아 허둥지둥 달려온 끝에 목격하게 

된 망극한 장면에, 여진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나, 이러다 아무래도 귀천할 것 같다."

한동안은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제일 먼저 움직인 것은, 지한의 기척을 

느낀 뒤 파랗게 질려서 비명도 못 지르고 오뚝 멈춰있던 아기영지였다. 

살금살금 천군의 다리 뒤쪽으로 숨으려고 하나뿐인 버섯기둥을 꼼질꼼질 움직였다. 

나뭇가지 위에 앉아 싱글거리고 있던 지한이 느닷없이 '슷!' 하고 위협하자, 

아기영지는 꽥 소리 한 번 지르더니 쏜살처럼 천룡애 쪽을 향해 파닥파닥 

달아나버렸다.

키득키득 웃음을 흘리고, 지한은 나무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러나 눈은 

천군에게서 떼지 않고 있었다.

"시끄러운 불청객은 갔고."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다른 불청객이 있긴 하나 감히 시끄럽게 굴 만큼 담이 크지는 않을 테고."

좀 떨어진 수풀 속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는 두 선녀를 두고 한 말이었다. 

나름대로 숨는다고 숨은 백화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이미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 깨달음의 언덕에 올라버린 여진은 '난 더 놀랄 일도 없어, 없어, 

없다니까'라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리기만 했다.

지한은 가는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아니, 사실은 내가 더 불청객이려나? 뭐 아무려면 어떻겠어."

두 선인의 똑같은 얼굴을 번갈아 보고 있는 가스라기에게 지한의 차가운 

시선이 닿았다.

"네가 나를 부른 이름이 어째서 그리 기분 나빴는지도 이제야 알겠구나."

지한의 시선과 마주치자, 가스라기는 움찔했다. 분명히 하늘님의 얼굴이다. 

하지만 하늘님은 저렇게 웃지 않는다. 잘 웃지는 않지만, 혹시 웃음 지어도 

입가에 머물다 사라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저렇게 무서워 보인 적은 없다.

지한이 가스라기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천군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자, 어찌할 테냐? 천군은 움직이지 않았다. 지한이 손가락을 구부렸다. 이래도?

"으앗!"

가스라기의 몸이 가랑잎처럼 지한의 손아귀로 끌려갔다. 저고리 앞섶과 함께 

목을 거칠게 틀어잡고, 지한은 가스라기의 얼굴을 바싹 끌어당겼다. 

그의 숨결이 가스라기의 입과 목덜미에 닿았다. 어째서 전에는 몰랐을까. 

하늘님한테 나는 냄새와 다르다. 비슷하지만 다르다. 같은 대나무라도, 

이쪽은 짐승을 찔러 죽인 죽창이다. 날카롭게 깎인 대나무 끝에서 풍기는 짙은 혈향. 

무섭다. 무섭다. 가스라기는 버둥거렸다. 하지만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목이 막혀서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살점이 뜯어져 나갈 것처럼 아팠다.

"불쌍한 것. 하필 나를 잘못 알아보고 그 이름으로 부르다니. 쓸모없는 눈에, 

경망한 혓바닥이로군."

지한은 즐거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해주랴? 눈을 뽑아줄까, 아니면 혀를 잘라줄까? 오, 그건 좀 너무하겠군. 

미우니 고우니 해도 내 존경하는 '형님'과 인연이 있는 아이 아닌가. 

그에 맞는 대접을 해줘야지. 그렇게 아무 말 없이 보고만 있지 말고 뭐라고 

한마디 가르침을 주시지요, 형님. 내가 이 계집을 어찌하면 좋으리까? 갈기갈기 찢어 

혼은 하늘에 뿌리고 백은 땅에 가라앉히면 되겠소? 아니면 칠 일 밤낮 쉬지 않고 

선총을 내려 말라죽게 하면 그럭저럭 벌이 되리까? 형님의 여자니 

형님이 원하는 방법대로 해주리다. 대답해보시지."

지한이 천군을 돌아보았다. 버둥거리던 가스라기도 캑캑거리면서 하늘님을 보았다. 

함께 지낸 백 번의 낮과 밤은, 그를 찾아 헤맨 천 번의 낮과 밤 건너 

저편 아득한 과거에 있다. 그러나 한 번도 잊은 적은 없다. 그 얼굴이 저 앞에 있다. 

가까이 있는 얼굴과 똑같지만 너무도 다른 얼굴이었다. 하늘님의 얼굴에는 웃음도, 

독기도, 증오도, 안타까움도 없다.

천군의 입이 비로소 천천히 열리고, 한마디 나직한 대답이 들려왔다. 

가스라기에게는 천둥소리처럼 들리는 대답이었다.

"내 여자가 아니다."

지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호, 그럼 내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다는 소리로 받아들여도 되나, 천군?"

"언제부터 네가 내 허락을 받고 움직였지?"

"너그러우신 말씀. 그럼 잠깐 자리를 비켜주시겠소? 계집이 하도 애처롭게 

꼼지락거리니 음욕 강한 이 동생은 연화봉으로 돌아갈 때까지 참기가 어렵군. 

아무리 예의가 없어도 형님 보시는 앞에서 계집의 다리를 벌릴 만큼 황음하지는 

못하다오."

그렇게 말하는 지한의 눈빛은, 음욕에 들떠 뜨겁기는커녕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때? 버리고 갈 테냐, 아니면 참지 못하고 손을 쓸테냐? 대답해봐라, 

천군. 네게 이 계집은 어떤 의미냐? 네 말대로, 네 여자가 아니니 내가 어찌하든 

상관없는 거냐? 아니면‥‥‥.'

 천군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가스라기는 더 이상 버둥대지 않았다. 

지한의 손아귀에 잡혀 축 늘어진 채로 천군의 등만 바라보고 있었다. 

허공을 밟으며, 또다시 멀어져가는 뒷모습만. 투둑, 저고리 앞섶이 견디지 

못하고 반쯤 뜯어졌다. 지한은 가스라기를 땅바닥에 쓰러뜨리고 목을 눌렀다.

"지한."

돌아섰던 천군이 걸음을 멈추고 불렀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그냥 가버리면 시시하지 않은가. 지한은 내심 웃으며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아직 할 말이 남았나?"

"화안금정수에 대한 이야기 들었다."

"아아, 장난 좀 쳤지. 왜, 나무라고 싶소?"

"제석에 일을 끝내기로 한 것은 궁주의 결정이다. 천룡애 나들이는 오늘로 

끝내는 게 좋을 거다."

그 말을 끝으로 천군은 떠났다. 여전히 목이 눌린 채라 소리는 내지 못하고, 

가스라기는 다시 버둥거렸다. 위에서 누르고 있는 지한의 머리칼에 가려서 

떠나는 하늘님 뒷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지한의 머리칼이 흔들렸다. 

웃고 있는 것이다. 가스라기의 목을 누른 채, 어깨를 떨면서 소리없이 

웃다가 마침내 입 밖으로까지 웃음이 흘러넘쳤다.

"아아, 망할. 끝내 꼬리도 머리도 보여주지 않고 가는군. 조금 기대했는데 

역시 실망이야, 형님."

한참 키득키득 웃어대다가 가스라기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혀를 찼다.

"대답해봐라. 넌 저놈과 무슨 사이냐? 아마 삼 년 전 하계에서 만난 게 분명할 텐데."

그러고 나서 가스라기의 목을 죄고 있던 손을 풀었다. 가스라기는 급하게 

숨을 들이마시고 벌떡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목을 풀어준 대신 지한의 

두 손이 가스라기의 팔목을 단단히 누르고 있었다. 발로 차려고 해도 허벅지를 

무릎으로 누르고 있으니 꼼짝 할 수가 없었다.

"어서 대답해. 난 점혈 같은 미지근한 수법은 안 쓴다. 대신 뼈를 부러뜨리는 

쪽을 선호하지."

가스라기는 씩씩거리며 지한을 노려보았다. 하늘님은 가버렸다. 말도 몇 마디 

못 나눠봤다. 내 여자가 아니다. 천둥처럼 들린 그 말만이 아직도 귀에 쟁쟁했다. 

울고 싶은데 눈물도 안 났다. 이 가짜 하늘님이 미워서 마음 놓고 슬퍼할 수도 없었다. 

그런 형편이니, 선계의 위계질서는 고사하고 연화봉의 주선은 정도선인과 달리 

살계와 음계를 뜻대로 어기며 오히려 거기서 공력을 얻는 사도에 속하니 함부로 

심기 건드리지 않는 게 좋다는 보천궁의 상식 따위는 일체 모르는 가스라기가 

하극상의 대죄를 범해버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는 넌 뭐야?"

지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흑자색 눈빛에서 붉은 기운이 조금씩 짙어졌다. 

숲에 숨어 오들오들 떨고 있던 백화가 사색이 되어 여진의 소매를 당겼다.

"선고님, 선고님, 쟤 죽겠어요. 어째요?"

 여진은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몰라. 난 아무것도 못 봤다. 나보고 뭐라고 하지 마. 난 못 봤어. 정말이야."

기세등등하게 지한을 노려보던 가스라기도 온몸에 소름이 오싹 끼치고 

팔다리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짐승의 살기, 아니 그 이상이었다. 

요수들보다도 더 무서웠다. 너무 무서워서 버둥거릴 힘도 없었다. 

이가 딱딱 부딪쳤다. 가스라기는 눈을 질끈 감고 필사적으로 되뇌었다.

'안 무서워! 안 무서워! 그런다고 내가 말 들을 줄 알아? 저리가, 이 가짜 하늘님!'

갑자기 무서운 기운이 사라졌다. 그리고 가스라기의 뺨에 부드러운 손등이 와 닿았다. 

예전에 하늘님이 눈물을 닦아주던 그 손길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가스라기는 놀라서 눈을 떴다. 살기를 거둔 지한이 빙그레 웃고 있었다.

"내가 너무 다그친 모양이로군. 겁내지 마라."

 가스라기는 얼떨떨해서 보고만 있었다.

"나는 지한이다."

그 이름은 하늘님의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가스라기의 

입으로는 소리 낼 수가 없었다. 입만 벙긋거렸더니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선명호법도 배우지 못했구나. 그래서 하늘님이라고 부른거겠지?"

 아직은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 가스라기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진선의 이름은 선어 중의 선얼, 그 이름 안에 천수가 모두 녹아 있으니 

부르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누구도 부를 수가 없지. 어떠냐. 원한다면 

내가 가르쳐주랴?"

하늘님의 이름을 원래대로 부를 수 있다는 말에 가스라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물론이지."

아까와는 달리 가짜 하늘님이 웃는 모습도 그리 무섭지 않아 보였다. 

다시 봐도 역시 하늘님하고 너무 닮았다. 하늘님과 닮은 사람이 나쁜 사람일 리 없다.

"가르쳐줄 테니, 대신 먼저 대답해봐. 네'하늘님'과 너는 무슨 사이였지?"

"‥‥‥."

대답하려다 말고 '믿어도 될까'라는 표정으로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자, 

지한은 더욱 부드럽게 말했다.

"걱정 마라. 너도 들었겠지만 그는 내 형이다. 나는 그의 쌍둥이 동생이지. 

사이가 좀 나쁘긴 하지만, 그래도 형제는 형제야. 형의 일을 궁금해 하는 것이야 

당연한 일 아니겠느냐."

"아아, 그래서 똑같이 생겼구나? 정말 똑같았어!"

지한의 눈 깊은 곳에 또 잠깐 살기가 떠올랐지만, 가스라기가 알아차리기 

전에 그것은 재빨리 사라졌다.

"그래, 그래서 너는?"

"난‥‥‥ 가스라기야."

가스라기는 대답했다.

"하늘님이 아플 때 내가 도와줬어."

"오, 기특한 일을 했군. 그래, 네 '하늘님'이 네게 고맙다고 무엇을 해주더냐?"

"선계로 데려다달라고 했는데, 난 선골이 없어서‥‥‥ 안 된다고 했어. 

그래서 하늘님이 선총을 줬어."

"호오."

"다음에 다시 태어나면 보자고 했는데‥‥‥. 못 기다릴 것 같아서 그냥 왔어."

"그냥 왔다? 그럼 무한계로 올라왔겠구나."

"응. 겨우겨우 올라와서‥‥‥ 이제야 겨우‥‥‥ 다시 만났는데."

갑자기 코끝이 시큰해졌다. 겨우 다시 만났는데, 말 한마디 못해보고 헤어지다니. 

가스라기는 훌쩍 눈물을 들이켜면서 지한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흐, 하고 싸늘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기척이 판이하게 달라졌다. 

놀라 눈을 들기도 전에, 거친 손길이 가스라기의 옷깃을 잡아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다시 만났는데, 임께서는 널더러 자기 여자가 아니라 한다?"

반쯤 뜯어졌던 저고리 앞섶이 완전히 찢어져, 동여맨 가슴이 드러났다. 

지한의 불처럼 뜨거운 손이 가스라기의 목을 움켜잡았다. 다시 숨이 막혔다. 

뼈까지 얼릴 듯한 살기가 온몸을 찔렀다. 속았다고 분해할 여유도 없었다.

"그렇군. 네가 내 일을 방해했던 계집이구나. 사실 무척 궁금했었지 비검만 

부수고 떨어뜨렸을 때, 언젠가 돌아올 거라고 예상하긴 했다. 

하지만 너무 빨리 돌아왔어. 예정대로 몇 년 만 늦게 돌아왔다면 궁주 위에 앉아 

놈을 맞이할 수 있었을 텐데. 확실히 뭔가 있긴 있었군. 별 볼일 없어 보이는 

계집이기는 하지만, 하늘이 결정하기만 하면 등에 한 마리가 장수의 말을 물어 

전쟁의 판도를 바꿀 수도 있는 것이 그 빌어먹을 천수가 아니던가. 

네가 내 등에였구나."

가스라기를 움켜잡은 지한의 팔목에 힘줄이 솟았다. 웃는 입매도 떨리고 있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살기에 그 자신마저도 취해버린 것이다. 가스라기의 눈에 

핏줄이 드러났고, 벌린 입에서는 불분명한 말이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혀…… 혀…… 형제라고……."

지한은 빙그레 웃으면서 그 말을 잘랐다.

"그래. 형제다, 우린. 난 거짓말은 하지 않았지.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만큼 설 닮은 

형제가 어디 있겠어?"

지한의 살기 앞에서는 어지간한 선인도 숨을 쉬기가 어렵다. 선고라 칭해지는 

높은 급수의 선녀들 역시 마찬가지다. 하물며 아직 선적에 오르지도 못한 무한계 

출신의 계집 따위야. 그런데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도 가스라기는 계속 뭔가 

말하려고 입을 뻐끔거렸다. 그 모습이 재미있어서, 지한은 목을 조인 

손을 조금 풀었다.

"안…… 닮았……."

"안 닮았다고? 오호, 눈물나는 연정이로군. 네 눈에는 널 버리고 간 그 임이 

그리도 좋아 보이는 모양이지? 하지만 말이다. 그는 네가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존재다. 이야기해주랴? 내가 왜 이리도 그를 증오하게 되었는지?"

 지한의 손이 맨살을 파고들자 가스라기의 목덜미에서 조금씩 피가 흘렀다. 

단번에 힘을 넣어 목을 부러뜨릴 수도 있지만, 그는 천천히 즐기고 있었다.

"그는."

가스라기의 귓불 가까이에 입을 대고 지한은 천천히 속삭였다.

"삼라가 개벽한 이래, 가장 많은 생명을 죽인 자다."

부들부들 떨리는 목덜미에 입술을 대고 불길처럼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어떤 요수보다도 잔인하게, 어떤 요마보다도 분별없이 죽이고, 강간하고, 

불태웠던 자다. 명계를 가장 바쁘게 했던 자다. 또한 나의 어머니, 나의 아버지, 

내가 가장 사랑한 여자와 그 아이도 죽였지. 선인이 되면서 모든 걸 잊었지만, 

나는 그것만은 잊지 않았다."

입술을 떼고, 가스라기의 눈을 내려다보면서 그는 빙긋이 웃었다.

"천수란 참으로 모순 덩어리가 아니던가. 그렇게 천하를 시산혈해로 만들었던 

장본인이 이룰 것 다 이루고 나더니 정도의 선술을 익혀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진선이 되더군. 개미 같은 미물조차 함부로 밟아 죽이지 않기 위해 언제나 

땅 위 일 촌 지기만을 밟고 다니는 대자대비한 진선 말이야. 난 선술 따위 관심 

없었지만, 그를 잡기 위해 선계에 입문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계집? 

우리는 무척 닮은 형제가 아니냐?"

목에서 흘러내린 핏줄기가 가슴을 타고 내려갔다. 가스라기가 입을 달싹거렸다.

"거짓말."

지한은 웃었다.

"너 또한 나를 그로 착각하지 않았느냐. 그 얼굴 하나 보겠다고 무한계를 

올라온 것치고는 참으로 민망하게도. 하긴, 하계 계집이 품은 연정 따위 어차피 

선인의 껍데기에 홀린 것에 불과하지. 선총을 받고도 살아남은 건 좀 신기하다만, 

정도선인이 된 후로 위선의 갑옷을 두른 우리 형님께서 널 대단히 살살 

다루신 모양이군. 안됐다만……."

지한의 목소리가 위험하게 가라앉았다.

"나는 그럴 생각 없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지한은 가스라기를 밀어 쓰러뜨렸다. 가스라기는 잠깐 

목이 풀린 사이 발버둥을 치며 일어나려고 했다.

"말했지?"

지한이 한 손으로 저고리를 찢으며 다른 한 손으로 가스라기의 어깨를 잡았다.

"나는 이쪽을 더 좋아한다고."

우두둑, 제 몸의 뼈가 부러지면서 나는 것인데도 이상하게 아득히 먼 곳에서 

들리는 소리 같았다. 가스라기는 눈을 크게 떴다. 잠시 동안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하지만 아주 잠깐이었을 뿐이다. 

그 잠깐 후에는 비명이 울렸다. 계곡을 울리구, 나뭇잎들을 떨게 할 만큼 길고 

처절한 비명이었다. 모든 이가 들을 수 있더라도 아무도 귀담아 들어주지 않는, 

하잘것없는 가스라기의 비명.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