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장
::반선지애::
문사의 집안에 태어나
어릴 적부터 시를 읊고
술을 좋아하기는 여인보다 더하니
뭇사람들이 나를 일러 시선. 주선이라 했네.
그 이름 그럴듯하여 나 또한 속세의 선인을 자처했으나
이제 나이 들어 몸은 늙고 머리는 백발
돌이켜보니 내 몸은 죽어갈 몸.
선인은 선인이라 해도 반쪽 선인이라
머리는 구만리 구름 속에 닿아도
몸은 진창 속에 묻혀 있구나.
슬프다
반쪽 선인의 삶이여.
ㅡ시선 이보.『만년송』
7-1.
가스라기는 사흘을 내리 잤다. 그녀가 깨어나던 밤, 의선각의 선녀들은 물론이고
천도봉에 속한 모든 선녀와 아직 진선의 반열에 들지 못한 선인들이 황산의 세 주봉
가운데 하나인 천도봉의 무량석벽 앞에 모여들었다. 까마득히 높은 석벽은 천고의
시간동안 빗물과 바람이 닦아둔 거울처럼 매끄러웠는데, 그 중턱에 교룡이 입을 벌린
듯 커다란 동혈이 있었다. 모여든 선계인들의 시선은 모두 그 동혈 입구로 쏠려 있었다.
혹자는 동혈 근처에, 혹자는 맞은편 석벽에, 혹자는 석벽 아래에. 많은 사람이
모였음에도 소란하게 구는 이는 없었다. 간간이 몇 마디가 오가긴 했지만,
조심스럽게 낮춘 목소리였다.
"세성이 가까워지니 전쟁의 기운이‥‥‥."
"천기가 그렇게 흘러가니 조만간 아무래도 환주와 흑황 사이에‥‥‥."
"명년 제석회가 관건‥‥‥."
"그전에 명년 수신회 또한 변수가 될 듯‥‥‥."
"천수는 과연 어느 진선 쪽으로 기운 것인지‥‥‥."
나지막하게 오가던 목소리마저 한순간에 멈췄다. 동혈 안쪽에서 검푸른 빛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어둡고 어두워 안력이 낮은 이들은 처음에는 분간 못할
정도였으나, 이내 그 빛이 한 사람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선기임을 알 수 있었다.
검푸른 머리칼, 검푸른 천의. 신을 신지 않은 맨발로 땅 위 한 치 허공을 디딘 채,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모든 이가 볼 수 있는 동혈 입구에 그가 멈춰 섰다.
한동안은 아무도 말이 없었고, 바람만이 무량석벽을 훑고 지나며 뭇 선인들의
천의를 흩날리고 선녀들의 머리채 위 옥잠 끝에 달린 방울을 흔들었다.
마침내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은, 동혈 앞 허공에 뜬 월륜교 위에 창백한 안색으로
앉아 있던 수하린이었다.
"무량무극. 출관을 경하드립니다, 천군."
그대로 고개를 낮추며 대례 올리는 수하린에게 천군이 대답했다.
"무량무극. 그간 노고가 컸겠소, 상아."
천군은 모여든 사람들을 먼 곳부터 가까운 곳 순서로 찬찬히 둘러보고 말했다.
"오랜만이오, 동도들."
일제히 화답하는 무량무극의 도호가 석벽을 울렸다. 어떤 이는 공수하고 어떤
이는 반례 올리며, 한때 선계를 떠났다가 돌아온 그들의 주선, 내년 제석회를
대비해 폐관수련에 들어갔던 천군의 출관을 축하했다. 홀로 제 동부에 거하며
유유자적하기 좋아하는 정도선인들의 기질에 이렇게나 모인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누가 모이라 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보천궁의 미래가 어떠할지, 돌아온 그들의 주선이 그 미래를 짊어 질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해졌는지.
갑자기 천군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왼쪽 하늘을 돌아보았다. 그곳에서 맑고
교태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연화봉의 지한진선을 대신하여 천도봉 주선의 출관 경하드릴 예물을 전하기 위해
미사린 왔나이다. 무량무극."
뭇 선인들의 시선이 향한 그곳에는 붉은 기 도는 달빛으로 만든 탈것이 떠 있었다.
수하린이 가마 형상의 월륜교인 반면 그쪽은 수레 형상이라 월륜겨다.
그 월륜거 위에 다소곳이 무릎 꿇고 대례 올리는 금발벽안, 마노처럼 탐스러운
밝은 갈색 피부의 미인이 있었다. 그녀를 찬찬히 바라보던 천군이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오랜만이오, 미사린상아. 귀 봉의 명승 연화지는 여전히 향기 그윽한지?"
"안부 물어주시니 망극하오나, 저희 연화봉에 속한 것 중에 무탈한가 궁금하신
것은 오직 꽃들뿐이라는 말씀으로 들려 자못 섭섭하옵니다."
간드러지는 음성에, 수하린이 슬쩍 고개를 들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쪽에서는 아마 천도봉의 꽃씨 하나 돌멩이 하나도 별로 걱정해줄 것 같지가
않은데‥‥‥."
미사린의 푸른 눈동자가 수하린을 향했다. 수하린은 옷소매에 묻지도 않은
먼지를 털었다.
"그래, 그는 무엇을 전하라 하였소?"
천군이 묻자, 미사린은 수하린에게서 시선을 떼고 교태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가져온 청옥 소반을 들어 앞으로 내밀었다. 소반위에는 한옥으로 만든 다리 세 개
달린 술잔이 놓여 있었다.
"근 천 일 폐관수련에 심신이 많이 상하셨으리라 염려하시며, 술 한 잔 올리라
하셨나이다."
고개를 한 번 조아린 뒤 달콤한 숨을 내뿜자 술 담긴 한옥배가 둥실 떠서 동혈
입구 쪽으로 달빛을 타고 날아갔다. 지켜보던 선인선녀들의 얼굴이 잠깐 어두워졌다.
적이 보내는 잔에 독배 아닌 것이 어디 있으랴."
"동도의 정으로 감사히 받지."
천군이 손을 뻗어 허공의 술잔을 잡았다. 술잔을 입에 가져가려는 순간,
미사린이 간드러지는 음성으로 말을 덧붙였다.
"그 잔은 공공의 잔이며, 그 술은 공공의 술이라. 천하를 다투던 신인의 고사로 진선
출관을 축하드린다 전하라는 말씀 계셨습니다."
한옥배의 표면에는 사람의 얼굴, 뱀의 몸, 붉은 머리카락의 무서운 형상이
상감되어 있었다. 바로 전설에 전하는 공공의 모습이다. 공공은 태고의 신인으로
천하를 두고 다투다 또 다른 신인 축융에게 패했다고 전해진다. 패장의 잔,
패장의 술이 축하의 예물이 될 리가 없다. 주변에서 나지막하게 술렁이는 분노의
소리를 무시하고, 천군은 잔을 한 번 들어 올려 예를 표하고는 단숨에 마셔버렸다.
"명배에 명주. 폐관의 피로를 식히는 데 더한 약이 없군. 잘 마셨소. 답례 따로
준비하지 못한 데다 술은 마셨으니 잔을 돌려드리리다. 내 답이라고 전하시오."
한옥배가 왔던 대로 달빛의 길을 밟아 돌아갔다. 웃으며 청옥 소반을 내밀어
잔을 받은 미사린의 입술이 잠깐 굳었다. 공공의 문양이 있던 자리가 매끈해져 있었다.
만년한옥으로 만든 술잔이라 세공에 도가 튼 선인의 보패로 겨우 무늬를 새긴 것인데,
씻은 듯이 뭉개져버린 것이다. 눈이 좋아 그것을 알아본 선인들 사이로 술렁이는
소리가 지나갔다. 얼굴을 굳혔던 것도 잠시, 미사린은 다시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이대로 전하겠나이다. 귀 봉의 상아께서 오랜 시간 독수공방 외로우셨을 테니
그만 방해하고 물러가겠습니다. 강녕하소서."
달빛을 수레바퀴 삼아 미사린의 월륜거가 멀어지고, 무량석벽 앞에 가득했던
짙은 꽃향기도 사라졌다. 이곳저곳에서 안도의 한숨 소리가 나직하게 흘러나왔다.
월륜거가 가버린 연화봉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천군이 문득 입을 열었다.
"상아."
"예, 천군."
"외로웠소?"
"아, 아뇨! 그럴 리가 있나요?"
수하린은 윗몸을 일으키고 긴 소매를 펄럭이며 두 팔을 저었다. 빤히 내려다보는
천군의 시선을 느끼고는 얼른 팔을 내리고 고개 조아리며 뒷말을 덧붙였다.
"진선께서 계신 곳이 상아가 있는 곳. 떨어져 있다 해도 어찌 외로움을 느끼겠나이까."
"다행이군."
그 음성에 담긴 서늘한 기운을 느끼고 수하린이 놀라 고개를 들었을 때,
천군은 이미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밤은 운곡에서 잠시 취하고, 날이 밝는 대로 광명정에 올라 궁주 배알하리다.
내일 밤 상아각에 들를 테니 그간 있었던 대소사는 그때 들려주시오.
안색이 좋지 않은 듯하니 오늘은 그만 가서 쉬고."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운곡을 향해 몸을 날리니, 검푸른 어둠이 곧 그의
신형을 감췄다. 수하린은 잠시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하지만‥‥‥ 분명히 어딘가 전보다 차가워지셨다.'
그녀는 곧 고개를 젓고, 아래쪽의 선녀들에게 명했다.
"운곡에 청등을 밝히고, 준비해둔 술을 내어가세요. 주선께서 안거하실 수 있도록
미물들을 재울 탄금과 금접진도 준비하시고."
운곡에 일부 선녀들을 먼저 보내고, 남아 있는 선인들이 천도봉의 앞날을
이야기하며 술과 차를 나눌 수 있도록 다른 선녀들에게 일을 나눠주면서도,
수하린은 내내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았다. 무엇이었을까. 너무 오랫동안 갈아버린
칼의 지나친 예기였을까? 아냐, 그런 것이 아니었어. 그보다는 훨씬 스산한‥‥‥.
오래전의 일도 아닌데, 수하린은 머릿속이 가물거려 도무지 생각의 실마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뭇 선인 선녀들 모르게 탄식했다.
'천수배필, 진선을 섬기는 상아라는 이름이 부끄럽구나. 세상에서 가장 알기
어려운 것이 가장 가까워야 할 분의 마음이라니.'
천도봉의 모든 선녀들이 주선 출관을 맞이해 분주한 그 시각, 오직 여진만이
무량석벽에 가지 않고 의선각에 남았다. 그녀는 단정히 가부좌한 채 눈앞에 있는
선머슴 같은 계집아이를 엄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여진 앞에 앉은 가스라기는 여전히 죽은 자에게 입히는 삼베명의를 입고,
토끼를 가슴에 안은 채였다. 무릎 단정히 꿇은 것도 아니고 웅크리고 앉아
요리조리 눈알을 굴리면서 한편 여진을 뜯어보고 한편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
꼬리 괘씸하기는 했지만, 저번처럼 치뛰고 내리뛰지 않으니 그것만 해도
다행이라 더 허물삼지 않고 여진은 한껏 위엄을 실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이제부터 너를 가르칠 여진이다. 네 속명은 무엇이냐?"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오르는 열을 삼키고 다시 물었다.
"속명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속‥‥‥ 그게 뭐야?"
예상은 했지만, 보통 무지렁이가 아니다.
"이름말이다, 이름!"
"가스라기."
듣도 보도 못한 괴이한 이름이지만, 어차피 정식으로 선적에 오르게 되면
더 부를 일도 없을 테니 그 이상 뭐라 말하지 않기로 했다.
"좋다. 몸은 대충 추스른 것 같으니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나와 함께 후자암으로
가자. 거기 너와 함께 공부하게 될 동무들이 있다. 동무라고 해도 너보다 적게는
십 년, 많게는 오십 년 먼저 입선한 새내기들이니 선배라고 생각해라.
원래 첫 한 해는 선계에서 살아가는 데 가장 기초가 되는 토납부터 익히게 되어 있다.
토납(吐納)이란 숨쉬는 법을 말하는데, 하계와 선계의 대기가 달라 하계 사람이
별다른 준비 없이 선계로 오면 쉽게 질식하기 마련이다. 너는 무한계를 천 일
동안 올라오는 사이 이미 선계의 공기를 숨쉬는 법을 자연히 익혔을 테니 그
다음으로 넘어가서‥‥‥."
"저기"
"뭐냐?"
"나, 뭐 배우러 온 거 아닌데."
"그럼?"
"찾으러 왔는데."
"누굴?"
"하늘님."
여진이 짐작컨대 찾는 이란 아마도 선총을 내린 선인이 아닐까 싶었다.
잠시 머리를 굴려보았다. 하지만 선인들 중에 그런 선명을 가진 이는 생각나지 않아
고개를 저었다. 하계의 비속한 언어로 만들어진 이름인 것을 보면 선명이 아니라
속명 같지만, 선인의 속명을 선녀가 알 턱도 없다.
"누구를 말하는지 모르겠구나. 어쩌면 도량에 거하지 않는 떠돌이 선일지도 모르고,
삼라의 선계가 여기 보천궁만 있는 것도 아니니‥‥‥."
"여기 있어. 봤어."
확신에 찬 음성으로 또박또박, 가스라기가 말했다. 얼굴을 실룩거리며 울 듯한
표정을 하고 그다음 말을 중얼거렸다.
"나, 못 알아보는 것 같지만."
여진은 떠오르는 것이 있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고 보니 이 아이가
지한선인에게 유달리 달라붙지 않았던가. 물론 지한이라면 얼마든지 하계의
여자에게 멋대로 선총을 내리고, 게다가 상대를 새카맣게 잊어버릴 만도 하다.
"천 밤 넘게 지나서 잊어버린 걸 거야. 하늘님 그렇게 머리 나쁠 줄 몰랐어.
가스라기는 안 잊어버렸는데 하늘님은 벌써 잊어 버렸네."
'천 밤이라‥‥‥. 그럼 저 아이가 무한계를 올라오기 조금 전에‥‥‥.
잠깐! 그, 그때라면‥‥‥.'
여진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무너져버렸다.
"너‥‥‥ 잠깐. 그, 그‥‥‥ 네가 말하는 하늘님이라는 이가 분명 선인이냐?"
가스라기가 고래를 끄덕였다. 여진은 후들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가스라기에게
몇 마디를 더 물었다. 언제 어디서 만났는가. 그분의 생김새는 어떠했는가.
가스라기는 어눌한 말로 수걱수걱 대답했다. 한동안 멍하니 침묵하고 있던
여진이 문득 고개를 돌리더니 말했다.
"상아님과 심어로 약속한 것을 기억하느냐?"
"응?"
꼬치꼬치 캐묻기에 하늘님 있는 곳을 알려 주려나 기대했던 가스라기는 눈만
껌뻑거렸다.
"그 토끼 말이다. 네가 안고 있는 것. 약속한 것이 있지?"
"아‥‥‥ 응."
"배사지례 전에 예법부터 가르쳐야겠다만, 일단 미루자.
가서 약속대로 행하고 오너라. 어서."
"저, 하늘님‥‥‥."
"약속부터 행하고 오래도!"
억지로 등을 떠밀어 가스라기를 내몬 뒤, 여진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고
도호를 중얼거렸다.
무량무극, 무량무극. 이 일을 어쩐다. 무한계를 제 발로 올라온 아이라
각오는 했다만 큰 파란을 일으킬 씨앗이로다. 하필 이런 중요한 때에!
온 보천궁이 천도봉과 연화봉의 대립으로 신경이 곤두서 있는 이런 때에!
무량무극. 마음 가라앉혀라, 여진. 무슨 수가 있을 것이다. 천도봉을 위해,
보천궁을 위해, 선계를 위해 가장 좋은 수가 있을 것이다. 내가 해야 한다.
어차피 내게 지워진 짐이니, 내가 지고 가야 한다.
"거봐, 이 바보야. 왜 따라왔어."
타박타박, 품에 안은 한입을 쓰다듬으면서 가스라기는 맨발로 걸었다.
밤바람이 삼베 옷자락을 서걱서걱 들썩였지만 전처럼 춥지는 않았다.
"너 때문에 혼날 뻔했잖아. 죽도록 고생해서 올라왔는데."
한입이 가스라기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추운 건지, 아니면 이제부터 일어날
일을 예감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너 풀어주래. 내 옆에 두면 안 된대. 넌 내 토끼가 아니니까. 그렇지? 맞잖아."
가스라기는 의선각에서 가장 가까운 숲 입구에 멈춰 섰따. 푸른 서기를 뿜어내는
수풀 속에서 이름 모를 짐승이 우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다행인 줄 알아. 여기 살기 좋은 곳이래. 슬픔도 없고, 배고픔도 없고.
너 같은 토끼들도 혼자서 살 만할 거야."
가스라기는 허리를 굽혀 한입을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팔 안에 갇그하던
부드러운 털의 촉감도, 따스한 온기도 떠나갔다. 반쯤 졸고 있던 한입이 힘없이
귀를 세우며 가스라기를 올려다봤다.
"가.
한입은 움직이지 않았다.
"가! 얼른 가! 이젠 정말 안 돼. 나 쫓겨나기 싫어! 하늘님 여기 있단 말이야.
안 쫓겨나야 만나지. 얼른 가!"
그래도 한입은 귀만 쫑긋거릴 뿐 여기는 많았다. 가스라기는 아무거나 집어 들었다.
그리고 던졌다. 바로 옆에 돌이 떨어지고 흙이 튀자, 한입이 움찔거리며 몸을 떨었다.
"가! 얼른 가라니까! 이 바보야, 남아 있으면 네가 죽는단 말이야. 난 너 대신
못 죽어. 안 죽어! 그러니까 가! 또 던진다? 이번엔 맞힌다, 응?"
절뚝절뚝, 아직 몸도 다 낫지 않은, 가죽만 남은 앙상한 한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숲을 향해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어휴, 이제야 가네. 그래, 잘 가. 다신 오지 마. 왜 또 멈춰.
얼른 가! 뛰어!"
또 안 가고 멈추기에 돌 하나를 더 들었다. 겨냥을 잘하려고 했지만,
눈앞이 흐려서 한입의 희끄무레한 윤곽만 보였다. 꿈결에 들었던,
그리고 약속을 나눴던 서늘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귀에 쟁쟁했다.
ㅡ아프고 슬프더라도 잊지 마라. 그것이 네가 너의 것이 될 수 없는 생명에게
베풀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한입의 작은 몸이 몇 번이나 멈칫멈칫하다가 조금씩 멀어졌다.
숲의 초입에 도달하자 한 번 돌아보더니, 드디어 결심했는지 절룩절룩
위태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함께했던 백 일의 여행, 천 일의 무한계. 낮이면 풀 한 줌 뜯어주면서도
먹을 만하게 살찌라고 주는 거라며 구박했고,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받아먹으면서도 고마운 줄 모르고 할퀴고 차던, 그러면서도 추운 밤이면
어미를 찾는 것처럼 파고들던 기억들이, 한입의 작은 발자국을 따라 점점 멀어졌다.
이윽고 선계의 숲 속으로 한입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가스라기는 손등으로 얼굴을 닦았다. 그리고 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먹어버릴‥‥‥."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손가락 사이로 목 메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래, 잘살아야 해. 나도 잘살 테니까. 나, 해냈어. 선계에 왔어.
하늘님은 나 못 알아봤지만, 금방 다시 생각나게 만들어주면 되니까. 그렇지?
가스라기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한입은 달렸다. 목숨을 위협하는 맹수의
살기는 느껴지지 않지만, 낯선 밤하늘과 숲, 어디에도 머물 곳을 찾지 못한 채
절룩거리는 다리를 끌며 그저 내달렸다. 한입이 달려가는 앞쪽 저 멀리 숲이
끝나는 곳에는 황산 보천궁에 거하는 신수영물들의 보금자리인 천룡애가 있다.
천룡애 어딘가 벽오동이 자라는데, 그 벽오동에 깃든 한 쌍 봉황이 겁에 질린 작은
미물의 기척에 잠이 깼다. 봉황이 부리를 열고 울음을 토했다. 그 소리는 명인
악공이 부는 퉁소의 구슬픈 울림을 닮았는데, 한번 퍼지자 흔들리던 밤 숲이
잠잠해졌다. 그제야 한입은 달리던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보았다.
초사흘의 달은 비월이다. 그믐의 어둠 속에서 막 벗어난 실낱같은 달.
멀지 않은 운곡의 계류 옆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천군도 고개를 들었다.
손을 들어 근처에서 금을 타던 선녀의 연주를 멈추게 하고 천군은 침묵 속에
귀를 기울였다. 봉명(鳳鳴)의 그윽한 여운, 계류의 불길 흐르는 소리,
근처를 지나가는 잔잔한 바람 소리만이 들렸다. 이윽고 선녀가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봉명 때문에 그러시나이까?"
"아니다."
천군은 천천히 고개를 젓고 다시 술잔을 들었다. 끊어졌던 금음이 다시 이어졌다.
봉황보다 더 구슬프게, 더 서럽게 울 줄 알았던, 저 산 아래 하계에 버려두고 온 한
생명, 아마도 이제는 더 이상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을 생명이 잠시 생각났다.
차가운 술잔을 비우자 가슴속에서 술이 파도쳤다. 천군은 술잔 안으로만 떨어질
정도로 낮게 중얼거렸다.
"봉황이 아니라, 누군가 우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