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수하린의 월륜교가 의선각 앞뜰에 내려섰다. 동녘에 해가 떠오르자 월륜교는
곧 자취 없이 사라졌다. 선녀들이 황망히 상아 앞으로 달려갔다. 가스라기는
이불보로 몸을 감싼 채 땅바닥에 홀로 주저앉아 있었다.
'하늘님, 하늘님이 나를 못 알아봤어. 왜? 난 다시 태어난 것도 아닌데.
그때 그 모습 그대로인데. 왜 날 못 알아봤어? 분명히 하늘님이었는데‥‥‥.
하늘님 거짓말쟁이. 선계는 하나도 춥지 않다더니 왜 이렇게 추워. 슬픔도 기쁨도
없는 곳이라더니 왜 이렇게 슬퍼. 왜 날 못 알아봤어, 왜.'
가스라기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늘님이 날 모르면‥‥‥ 나 어떻게 살아. 난 살 수가 없어‥‥‥.'
그녀는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수하린 주변에 모여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해
시시콜콜 고하던 의선각 선녀들이 짤막한 비명을 지르며 모여들었다.
간신히 수라장을 벗어난 의선각 내실. 아까와는 달리 시체처럼 얌전히 천장만
바라보고 있는 가스라기의 맥을 짚은 의선각의 선고 온혜가 당황한 표정으로
수하린상아와 여진선고가 있는 뒤쪽을 돌아보았다. 황망하여 입을 열고도
잠시 머뭇거리던 끝에 온혜는 고했다.
"명이 떠나고 있습니다."
여진은 눈을 부릅떴고, 수하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명이 떠나요? 하지만 분명히 회복되었던 게 아닌가요?"
"분명히 그랬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왜 그런가요?"
오랜 세월 의선각의 일을 맡아온 온혜는 차분하게 답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확실치는 않습니다만, 짐작이 가는 바가 있습니다.
우선은 지금 이 아이가 살아갈 의지를 잃은 것이 첫째 이유입니다. 명이 떠나는
속도가 이토록 급격한 건 그 명의 주인이 놓으려 하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 단지 그것만은 아닌 듯합니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는 듯한데‥‥‥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왜요?"
온혜선고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무한계를 통해 선계로 들어오는 사람은 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단지
무한계를 올라오고 나면 장기간 여독을 앓게 된다는 것만 알 뿐, 세세한
증상은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제 능력이 부족한 탓입니다, 상아님."
의선녀 온혜가 말하는 여독이란 하계에서 말하듯이 긴 여행 끝에 오는
피로가 아니라 한 계에 속한 존재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다른 계로 넘어왔을 때
찾아오는 후유증이다. 이를테면 선계의 인물이 명부의 초대 없이 명계로 간다거나,
명부사자가 혼을 거두는 이외의 목적으로 하계에 출현한다거나 했을 때 겪는 증상이다.
아마 가스라기가 겪는 것도 그 일환이 아닐까 싶지만 정확히 원인은 알 수 없다는
소리다.
"아, 어쩌면!"
수하린 뒤에서 온혜의 말을 듣고 있던 여진이 문득 소리를 냈다. 수하린도
온혜도 한 가닥 희망을 품고 여진을 바라보았다.
"짐작 가는 거라도 있나요, 여진선고?"
"저 아이가 무한계를 제대로 밟아 올라온 것이 아니기 때문은 아닐까요?
이를테면 한 번에 한 계단식 오른 게 아니라 두 계단씩 껑충껑충 뛰어올랐다거나!
부정을 저질렀기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여진은 자신의 의견이 상당히 그럴듯하다고 생각되었는지 점점 목소리가 커졌다.
하지만 온혜는 '그러면 그렇지'하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무한계라는 것은
그냥 계단이 아니다. 아무리 다리가 길다고 해도 두 계단씩 뛰어오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무선녀로 이름난 여진은 주먹 쓰는 데는 일가견이 있어도 머리는
좋지 않다고 정평이 나 있는데, 그녀와 오랜 친분을 맺어온 온혜는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 그런데,
"오."
정작 수하린상아가 손을 마주치며 탄성을 발하니 더욱 기가 막혔다. 수하린이
듣기에는 여진의 말이 제법 그럴싸했던 모양이다.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하죠? 부정하게 올라온 거니까 도로 무한계 아래로
던져버려야 하나?"
온혜도, 여진도 그 말에는 대꾸할 수가 없었다. 무한계가 무슨 이층 누각도
아니고 던지긴 뭘 던진단 말인가. 수하린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졸랐다.
"난 아무 생각도 안 나는데, 두 분이 묘안을 좀 내보세요."
그 순간, 의선녀 온혜와 무선녀 여진은 그 기질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선계에서 더 오래 살아오신 것은 상아님이 아니십니까! 묘안을 떠올려 명을
내려주셔야지요!'
하지만 수하린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니면 그럴 능력이 없거나.
별수 없이 두 선녀는 머리를 쥐어짰다. 한참이 지난 후, 먼저 입을 연 것은 온혜였다.
우습게도 그녀에게 단서를 준 것은 의술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여진이 아까 했던
말이었다.
"어쩌면 그게 원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다른 생각이 떠올랐나요?"
"한 달간 저 아이를 살펴본 결과, 두 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습니다."
"뭐죠?"
"하나는‥‥‥ 저 아이 몸에 선총을 받은 흔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에, 여진도 수하린도 놀란 얼굴이 되었다.
"선총을? 하계의 아이가?"
여진이 놀란 목소리고 묻자, 온혜가 대답했다.
"그거야 놀랄 일이 아니지요. 선인들이 하계 여자를 얼마나 좋아하십니까.
단지‥‥‥ 놀랍다면 그러고도 살아남았다는 것이지요."
"내, 내 말도 그 말입니다. 하계 여자의 몸에 선총의 흔적이 있다니요?
아니, 아니. 선총을 받고도 살아 있을 수 있다니요? 수궁계도 없이 어떻게!"
"조용히."
수하린이 두 선녀를 진정시켰다. 늘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던 수하린이
진지하게 말하자, 두 선녀도 얼른 마음을 수습했다. 수하린은 나지막하게 물었다.
"그 일, 누구누구가 알고 있습니까?"
"이 아이를 주로 맡은 것이 저인지라, 저와 제 제자만이 알고 있습니다.
그 밖에 눈치를 챈 사람이 있다 해도 의선각 식구들일 것입니다."
"절대로."
수하린이 한마디 한마디 힘을 주어 말했다.
"이 일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세요. 절대로."
"명심하겠습니다."
"여진선고도 잊지 마십시오. 이 일이 새어나가면‥‥‥
저 아이는 진짜로 죽게 됩니다."
여진이 고개를 세게 끄덕였다. 상아의 걱정을 그녀도 이해했다.
물론 사도선인이라고 해서 모두 저 지한선인처럼 무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하계 여인의 육체에 대한 선인들의 집착은 상상을 초월한다.
선총을 받고도 죽지 않는, 아직 선적을 받지 않은 생생한 하계 계집이
선계에 있다는 소문이 나는 날에는 이 아이 주변에 어떤 선인이 꼬여들지 모른다.
그리고 무슨 사고가 날지도.
"명심하겠습니다."
수하린은 겨우 표정을 풀었다.
"이상한 점이 두 가지 있다고 했지요? 또 하나는 뭔가요?"
온혜가 고했다.
"실은, 상아님께서도 일전에 보고를 들으셨으니 기억하시겠지만‥‥‥."
"할 리가 없지요. 이야기해주세요."
종종 겪는 일이긴 하지만, 수하린의 건망증은 볼 때마다 신기하기만 했다.
어쩌면 저렇게 자주 까먹을까.
"저 아이는, 홀로 무한계를 올라온 것이 아닙니다."
"그럼?"
"미물 하나가 저 아이를 따라왔습니다."
"아!"
"제 생각에, 이것이 아마 가장 합당한 이유일 듯합니다. 본시 홀로 올라와야만
하는 무한계의 관문을, 미물과 함께 올라오면서 문제가 생긴 듯합니다."
"그 미물은 아직 살아 있나요?"
온혜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수하린을 빤히 바라보았다.
"상아님."
"네?"
"그때, 의선각의 의술로 살려두라 명하신 것이 상아님이십니다."
"아, 네."
"왜 그러셨는지는 모르겠사오나 저희들이 짐작하기에는‥‥‥."
"아, 생각났어요. 왜 그랬는지."
수하린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기억의 물그릇에서 실 한 올을 잡아 건지는
것은 때로는 보람 있는 일이다.
"귀여워서 그랬죠. 확실히."
온혜는 못 들은 것으로 치고 계속 말했다.
"짐작하기에는, 무해무구한 미물은 본래 무한계를 통하지 않고도 선계의 출입이
가능한데 굳이 제 주인을 따라 그 고행을 감내한 미물을 어여삐 여기신 것과‥‥‥."
"그러니까, 귀엽다는 이야기죠."
"그 외에도, 미물이 무한계를 오른 예가 없으니 혹 천수에 다른 안배가 있을지
모르는지라 일단 시침하여 명을 붙여두는 쪽을 택하였습니다만."
"다만?"
"역시 미물인지라 여독을 버티지 못하고‥‥‥."
"죽었나요?"
"의선각이 그리 허술하지는 않습니다, 상아님."
"살았나요?"
"살았다 죽었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명이 떠났어도 진작 떠났어야 하는데
시침과 부로 붙잡아두고 있는 상태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더 탈이었는지도 모르지요."
"무슨 소리죠?"
"동반하면 안 될 미물을 동반하여 올라오면서, 저 아이와 미물의 천수가
꼬여버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게 답이군요."
수하린이 명쾌하게 결론을 내렸다. 마치 그녀 자신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한 얼굴이다. 온혜와 여진은 서로 눈을 마주치고 말없는 대화를 나눴다.
'알다가도 모를 분이야.'
어쨌거나 수하린의 동의를 구하니 점점 확신이 들었다. 온혜는 의선녀로서
이 상황에 대한 최종적인 진단을 내렸다.
"미물과 저 아이의 천수가 무한계에서 단단히 꼬여버린 것이지요.
분별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미물이 죽어가니 저 아이도
죽어가게 된 것이지요. 바로 천수혼돈입니다."
"하면 해결책은?"
"해결책은‥‥‥."
그렇게 운을 떼고 막상 답할 말의 무게를 떠올리니, 온혜의 음성이 조금 떨렸다.
수하린이 약간 슬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보세요. 우리들은 어차피 죄인이 아닙니까."
듣고만 있던 여진의 표정도 무거워졌다. 온혜가 천천히 답을 말했다.
"천수박리‥‥‥."
수하린은 고개를 끄덕이고, 가스라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발가벗은 몸으로
송장처럼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말라붙은 입술을 이따금 달싹이는 가련한 하계인.
"천수박리. 살릴 것을 남기고, 그 나머지 껍데기는 벗겨낸다."
명촉 밝혀두고, 경면주사를 개어 붓끝에 찍고, 괴황지에 명부사자를 부르는
선어를 적어 넣으니, 이것이 바로 초명부다. 부를 태우며 거기 적힌 선어를
입속으로 나직하게 외우는 것으로 초명의 의식은 완성된다.
수명과 관계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의선각에서는 이 초명부로 명부와
직접 대화하는 방법을 써왔다. 의선녀가 익히는 것 중에 침술과 단약 제조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그래서 이 초명부 쓰는 법이다.
하지만 결코 기꺼운 일은 아니었다. 명부사자란 하계의 인간만큼이나 선녀에게도
꺼림칙한 존재였다. 아니, 명부와 선계 사이의 거리가 명부화 하계보다 더 아득하니
거리끼는 마음은 더욱 크다고 해야 할 것이다.
수하린과 여진의 입회하에 초명부를 쓰고 삼매진화로 부를 태운 온혜의
이마에서는 송골송골 진땀이 배어 나왔다. 이제 의식이 완성되었으니 곧 명부의
음울하고 차가운 기운이 방 안에 가득 찰 것이다. 꿈틀거리는 검은 안개나 뱀과 같은
목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초명부로 명부사자와 대화한 경험이 몇 번 있는 온혜였지만,
아무래도 그 목소리에는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한 번 명부와 대화를 하고 나면
최소한 사나흘은 햇볕을 쬐면서 보양을 해야만한다. 실체가 오는 것도 아니고
그저 소리만 오가는 것인데도 그렇다.
꼭 해야만 하는 일인 줄 알면서도, 명부사자의 음성을 기다리는 동안 온혜는
소름이 끼쳐 견딜 수가 없었다. 꽉 움켜쥔 손바닥에 땀이 찼다. 이제 곧 들릴 것이다.
먼저 촛불이 흔들리겠지. 문도 열지 않았는데 어디선가 찬바람이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다음에 바로 그 목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명명무한,
명부사자를 청하는 것은 선계의 누구인가.' 하고. 온혜는 몸을 떨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일각이 자났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눈을 살그머니 떠보았다.
명촉의 불빛 여전하고, 나란히 눕혀둔 두 생명 또한 여전하고,
입회한 수하린과 여진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고 있다.
"어째 답이 없습니다?"
여진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수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바쁜가 봐요?"
온혜는 뭔가 깨달은 듯 '아'하고 소리를 냈다. 중생의 생명을 관장하는
명부가 바빠서 대답할 시간도 없다는 것은 우스운 노릇이긴 하지만,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떠올랐다. 여진이 눈을 깜빡이자, 온혜가 설명했다.
"하계의 일 때문일 겁니다."
"예?"
"구주팔황 중에 환주와 흑황 사이에 요즘 살겁이 잦다니 바쁘겠지요."
여진은 그제야 납득했지만 오히려 미간을 찡그렸다.
"분명히 바쁘기는 하겠습니다만,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요!
선계에서 부르는데 대답도 안 하다니 이건‥‥‥."
선계의 일원으로서 자존심이 상하는지 투덜거리는 여진을 보며 온혜는
내심 혀를 찼다. 저이가 명부사자를 접해보지 않아서 저렇지.
나는 안 보게 되어 기쁘기 그지없구먼.
"그나저나, 명부의 조력을 받을 수 없다면 이 일을 어쩐다?"
수하린이 뺨을 긁으며 중얼거리는 혼잣말을 듣고, 온혜의 얼굴이 도로 창백해졌다.
무엇 때문에 명부사자를 청했던가. 천수박리 때문이다. 생명의 경중을 재는 것은
명부의 일이다. 어느 쪽을 먼저 거둬가야 할지 가장 잘 아는 것도 명부다.
그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것과 함께, 버릴 쪽을 거둬가는 역할 또한 명부사자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선계의 사람 된 도리로 살계를 함부로 열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대답이 오지 않았다. 명부에 짐을 떠맡길 생각이었는데,
그럴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온혜는 백지장 같은 얼굴로 두 생명을 바라보았다. 밑이 터진 삼베자루에 머리와 팔
내민 구멍만 뚫은 명의를 입혀둔 하계의 계집아이가 죽은 듯이 누워 있다.
그 옆에는 팔다리와 머리에 커다란 침을 꽂고 두 귀 사이에 착명부를 붙여
삼베 조각으로 돌돌 말아놓은 토끼가 있다.
토끼는 다 자란 듯하나 가죽과 뼈만 남아 자그마하고, 계집아이도 빼빼 마르기는
매일반이지만 토끼보다는 커 보인다. 한쪽은 이미 죽은 것이나 진배없는
미물의 생명이고, 한쪽은 선총을 받은데다 이제 선적에 들 자격을 얻은 사람의
생명이다. 하지만 어느 명이 무겁고 가벼운지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하물며 선계의 인간이.
망설이는 사이에 계집아이의 숨결은 점점 미약해져갔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에 붙잡아둔 명은 식어가고, 떠나려는 명은 짐을 챙겼다.
"온혜선고."
수하린은 식은땀 흘리는 온혜를 말끄러미 바라보고만 있는데,
여진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결정하기 힘들다면 제게 맡기세요. 살계를 열더라도 무선녀인 제가 좀 더 익숙하니."
온혜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살리기 위한 것이니 제게 속한 일입니다."
입술 질끈 깨물고 대답한 다음 그 결심이 사라지기 전에 행동에 옮기기 위해 토끼를 향해
다가갔다. 어차피 진작 떠났어야할 명을 붙잡아둔 터라 착명부만 떼어내면 되는 것.
무겁고 괴로운 일이라 해도 집행은 한순간일 뿐이며, 그 무게를 감당하는 것은 사후의
일이다. 온혜는 토끼의 귀 사이에 붙여둔 부적을 잡았다.
"비록 미물이라 해도 주인을 따라 여기까지 왔으니 그 공이 크구나. 네 주인을 위해
네 명을 대신 거두니, 내세에라도 복락을 누리거라. 무량무극. 보천궁의 온혜,
잡고 있던 명을 놓겠습니다."
하늘에 고하고 착명부를 떼어내려는 순간,
"‥‥‥니야."
앙상하고 작은 손 하나가 온혜의 팔목을 잡았다. 수하린은 눈을 조금 크게 떴고,
여진은 움찔했다. 온혜는 놀라 움직이지 못했다. 명이 거의 떠나간 줄 알았던
아이가 힘없이 고개를 젓고 말라붙은 입술을 달싹여 힘겹게, 그러나 고집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아니야."
온혜는 혼란스러웠다. 이 아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뭐‥‥‥ 뭐라고?"
"내 토끼‥‥‥ 아니야."
여윈 얼굴 때문에 더 커다랗게 보이는 두 눈으로 온혜를 똑바로 보면서 가스라기는
말했다. 온혜가 그래도 부적에서 손을 떼지 않자, 있는 힘을 다해 그 손을
쳐내고 한입의 축 늘어진 몸을 확 잡아당겨 끌어안으며 울부짖었다.
"내 토끼 아냐. 죽이지 마! 나랑 아무 상관없어!"
온혜가 놀라 뒤로 주춤 물러났고, 여진은 저번처럼 난동을 피우는 것이 아닌가 싶어
앞으로 나섰다. 진정시키고 잠을 재우기 위해 수혈을 먼저 짚었다.
분명이 제대로 짚었다고 생각했는데 웬걸, 한 손으로는 토끼를 안고 나머지
한 손으로 무작스레 여진의 손을 뿌리치는 것이었다.
"놔! 놔!"
발끈한 여진이 손을 들어 올리려는 찰나, 수하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기다려요!"
여진과 온혜는 늘 맹하고 나른하게만 보이던 상아가 이렇게 빨리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지금껏 몰랐다. 어느 사이엔가 여진과 가스라기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온
수하린이 가스라기의 얼굴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버둥거리던 가스라기가 피할
사이도 없을 만큼 빠르게, 수하린과 가스라기의 이마가 맞닿았다.
그 순간 가스라기의 움직임이 뚝 그쳤다. 수하린도 마찬가지였다.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는 여진의 소매를 온혜가 잡아당겼다.
"물러나세요. 물러나."
"예? 하, 하지만 지금 이게 대체‥‥‥."
영문 모르는 여진에게 온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우리는 그냥 물러나서 구경만 하면 됩니다. 심어가 시작되었으니."
가스라기는 차갑고 서늘하면서도 다정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기운과 비슷한 음성이 머릿속에 들려왔다.
ㅡ대답해보렴. 이 토끼가 네 것이 아니라고? 정말?
그게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가스라기는 대답했다.
ㅡ아냐. 절대 아냐. 원래 먹으려고 했지만 올라오기 전에 풀어줬어! 지 멋대로
올라온 거야. 나랑 상관없어!
ㅡ정말 그렇다면 약속할 수 있겠니?
ㅡ뭘?
ㅡ그 토끼가 앞으로 무슨 일을 당하든, 네 것이 아니니 상관하지 말아야 한다.
비바람을 맞으며 떨더라도, 굶주려서 네게 먹이를 청하더라도 너는 상관하지
말아야 한다. 네 앞에서 죽어가는 것을 보더라도 말이야. 네가 약속을 깨고
인연을 만들면, 토끼와 네 천수는 다시 얽힐 거다. 한번 얽힌 천수, 내가 잠시
풀어주마. 남은 건 네 몫이다. 네 손으로 해야 한다.
ㅡ할게! 시키는 대로 할게.
ㅡ네가 선계에 들어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 이것이로구나. 이 또한 천수에 정해진
일일 테니, 무량무극. 아프고 슬프더라도 잊지 마라. 그것이 네가 너의 것이 될 수
없는 생명에게 베풀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여진은 심어가 행해지는 것을 이야기로만 들었지 실제로 본 일은 없었다.
그녀의 눈에는 그저 상아가 잠시 이마를 대고 있다가 뗀 것처럼 보였다.
길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계집아이의 몸이 축 늘어지더니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수하린은 가스라기에게서 떨어지더니 토끼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손에서
월광처럼 서늘한 빛이 번뜩이더니 한입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그러고 나서
비틀거리는 수하린을, 지켜보던 온혜와 여진이 부축했다.
"됐어요."
"상아님, 몸이‥‥‥."
"아, 오랜만에 기운을 써서 그래요. 이제 나도 돌아가서 쉬어야겠군요. 온혜선고."
"예."
"저 아이의 명은 이제 괜찮을 겁니다. 한동안 쉬면 나아질 거예요."
"예? 하지만‥‥‥."
"걱정 마세요. 맹세를 받았습니다. 착명부를 떼어보세요."
미심쩍은 표정으로 망설이다가, 온혜는 조심스럽게 토끼의 착명부를 떼어냈다.
이미 차갑게 굳은 몸뚱이라 곧 명이 떠날 것이라고 여겼는데, 놀랍게도 침을
꽂아둔 자리가 바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상아님‥‥‥ 이건?"
온혜는 묻다가 말을 멈췄다. 수하린은 천수박리를 택하는 대신 자신의 수명을
토끼에게 나눠준 것이 분명하다. 토끼의 명이 떠나지 않게 되었으니 계집아이도
무사해진 것이다. 천수박리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지만 대신 수하린의 천수가
그 혼돈 속에 더해진다. 이만저만한 위험이 아닌 것이다. 측은지심 때문에 그 위험을
감수한 수하린은 그냥 담담히 웃고 말했다.
"며칠 푹 자고 일어나면 토끼는 저 아이가 놓아줄 겁니다. 그리고 여진선고."
"네, 상아님."
"아이가 깨어나거든, 배사지례를 행하고 맞아들이세요. 선적에 정식으로 이름을
올릴 때까지 저 아이는 선고의 책임입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상아님, 어서 돌아가서 며칠은 정양을 하셔야."
"아니‥‥‥ 쉴 틈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수하린이 희미하게 웃었다.
"곧 우리 천도봉의 주선께서 폐관을 푸시는 날이 다가오는데."
수하린이 상아각으로 돌아간 뒤, 간밤부터 엉망진창이 된 의선각 안팎을 정리하고 난
다음에야 온혜와 여진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선고는 선녀들 중에서도 이백 년 이상 수행해 각자의 방면에서 일정한 성취를 이룬
선녀들에 대한 존칭이다. 의선각과 후자암으 대표하는 두 선고는 함께 큰 사고를 치고
뒷감당을 모의하는 어린 선녀처럼 얼굴에 근심을 가득 담은 채 약속이나 한 듯이
가스라기가 자고 있는 내실로 모였다.
죽은 이에게 입히는 명의의 삼베 자락을 입에 문 채 몸을 웅크리고, 이제 조금씩
배를 움직이며 숨쉬는 토끼를 꽉 끌어안은 상태로 갓난아기처럼 자고 있는
가스라기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두 선녀는 시름에 잠겼다.
"어찌된 영문일까요, 이 아이는."
"무한계를 올라왔다는 것부터가 일단 범상치는 않아 보입니다만‥‥‥."
"확실히 선골은 없죠?"
"선골 있으면 왜 그 고생을 합니까. 그것 참, 어느 눈먼 유선의 선총인지 몰라도
어쨌거나 얻었으면 그냥 다음 생을 기약할 일이지 왜‥‥‥."
"여진선고."
"예?"
"새로 거둔 제자가 영 마땅치 않아 보입니다?"
"제가 언제요!"
"그거 혹시, 들은 이야기대로 부아가 나서 그런 것 아닙니까?"
"무슨 부아요!"
"저 아이가 다 올라오는 쪽에 거셨다면서요? 그래서 저 아이 거취 문제를 논할 때
패물도 쓸어갔으니 애도 같이 데려가라고‥‥‥."
"아닙니다!"
"아, 네."
"아, 아니래도요!"
"예, 알아들었다니까요."
"어차피 연화봉 화정대와 우리 후자암 둘 중 한군데에서 맡아야 할 아이인데 화정대
백련선고는 아시다시피 귀찮은 일 맡기를 싫어하잖습니까. 조금이라도 책임감 있는
제가 맡아야지요. 그래서‥‥‥."
"네, 네. 소리 낮추세요. 아이 깨겠습니다."
온혜는 감은 눈을 움찔거리는 가스라기의 몸에 이불을 덮어주고 잠시 토닥거렸다.
문득 아득하게 먼 옛 기억이 온혜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입선하기 전, 속세에
남겨두고 온 딸의 나이가 딱 이 정도였다. 지금은 이미 이 세상에 없지만. 아서라,
속세의 기억. 온혜는 고개를 젓고 입속으로 사자도호를 외웠다.
무량무극. 천존의 자비로움이 도인무량하며, 대도의 법력이 광대무량하며, 제천의
신선이 무량무수하니, 삼라의 만상에 끝이 없다‥‥‥.
"여진선고."
여진이 불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예."
"그래도, 참 다행입니다."
"무엇이요?"
온혜는 말없이, 가스라기가 안고 있는 토끼를 내려다봤다. 여진도 그 시선을
따라가더니 잠시나마 눈빛에 온기가 돌았다. 그러나 이내 한숨을 내쉬고 말하기를.
"후우, 온혜선고."
"예?"
"상아님마저 저 아이를 저보고 거두라 이미 못을 박으셨으니, 이젠 어쩔 수 없겠지요,
정녕?"
"울지 마세요."
"제가 언제 울었다고 그러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