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109)

제 6 장

::천수혼돈::

천수란 하늘이 정한 수를 말한다. 모든 것에 천수가 있다.

혼돈이란 태초에 하늘과 땅이 아직 나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천수가 혼돈이 되면 사는 것도 함께, 죽는 것도 함께한다. 

흔히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ㅡ역학박사 백리문.『역경주해』

6-1.

야구자는 몸은 사람이고 머리는 들개인 요마다. 천지의 기운은 그 안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죽는 모든 것을 담고 있어 신성하기도하고 요사하기도 하다. 

그중 요사한 기운이 뭉친 것을 요수라 이른다. 유사한 기운에도 청하고 탁한 것이 

있어 청한 것은 요정이 되고 탁한 것은 요마가 된다. 탁한 것에서 태어났기에 

요마들은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그 넋은 혼혼하다. 혼혼한 넋이라 오직 한 가지 

욕망에 의해 움직인다. 바로 결핍을 해소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야구자의 경우에는, 자신의 몸에 대한 불만은 없다. 그러나 머리에 대해서는 

불만이 많다. 항상 자기 머릿속에 뭔가가 모자라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리하여 

야구자는 사람의 골을 즐겨 먹는다. 신선한 골을 많이 먹으면 언젠가는 이 결핍이 

해소될 것처럼.

꼴에 입맛은 있어서 죽은 지 오래되어 벌레가 끓기 시작한 골을 먹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야구자가 가장 자주 나타나는 곳은 전쟁터다. 

그것도 막 한차례 피바람이 불고 지나가 시신이 널린 치열한 싸움 자리.

삼라는 구주팔황으로 나뉘어 있는데, 그중 가운데에 위치한 주를 신주, 

혹은 중주라 하고 이 주에는 성황이 거하며 삼라 전체를 다스린다. 신주를 감싸고 

팔방으로 여덟 주가 더 있으니 합하여 구주다. 환주는 그중에서도 동쪽에 있는 주다.

 신주를 둘러싼 팔주는 각각 그 바깥 편에 팔황과 경계를 맞대고 있다. 신주는 

달걀노른자, 팔주가 달걀흰자라면 팔황은 달걀껍질이다. 팔황과 팔주 사이에는 

범인의 힘으로는 넘기 어려운 천연의 장애물이 있어 그것이 절로 나라를 구분하는 

벽이 되어준다. 환주와 맞닿아 있는 것은 흑황, 삼라의 동쪽 변방에 위치한 

야인들의 나라다. 환주와 흑황 사이에는 큰 강이 있는데, 이 강을 환주 사람들은 

불귀하라고 부른다. 가면 다시는 못 돌아온다는 뜻이다.

요즘 불귀하에는 정말로 불귀의 객이 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원래부터도 

사이가 좋진 않았지만, 흑황의 야인군대가 심심치 않게 불귀하를 넘어 환주의 

땅을 침범했다. 조만간 흑황의 한이 대군을 이끌고 환주에 큰 전쟁을 걸어올 

것이라는 소문마저 흉흉했다.

환주군의 작은 부대가 지키고 있는 이 군영에도 한차례 흑황군의 기습이 있었다. 

밤이 지나고 흑황군이 떠난 자리에 남은 것은 시체의 산뿐이다. 시산 꼭대기에 

붉은 수실 달린 창 하나가 꽂혔다.

바람이 불자 창의 수실이 스산하게 흩날렸다. 노을을 머금은 구름도 같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 밖에는 움직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시체는 움직이지도 않고 

생각도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이 시체의 산더미 한곳에 생각하는 시체가 있었다.

'지금쯤이면 다 갔으려나?'

시혼은 눈을 뜨고 주변을 돌아보려 했다. 그러나 보이는 게 있을 턱이 없다. 

머리 위에 몇 구인지 모를 시체들이 쌓여 있으니.

'어이구, 이 양반은 왜 이리 죽어서도 입 냄새가 심해?'

하필 바로 위에 엎어진 시체와 거의 입이라도 맞출 듯 얼굴이 맞닿아 있는지라 

갈수록 견디기가 어려웠다. 물론 싸움이 한창일 때는 입 냄새를 느낄 사치 같은 건 

없었지만.

보이는 것은 없어도 들리는 것은 있다. 다행히 까마귀들이 푸득거리며 시체를 

쪼아 먹는 소리뿐이다. 하긴 지금쯤이면 적군도 대충 떠났을 것이다.

'자, 그럼 슬슬 일어나볼까?'

시혼은 자신의 몸 위에 몇 겹이나 시체가 쌓여 있을지 내리누르는 무게로 대충 

가늠해보았다. 만만한 무게는 아니지만 어찌어찌 용을 쓰면 곧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일어나면 최대한 빨리 이곳을 벗어나서 가까운 민가에 숨어들어가 

옷부터 훔쳐야겠다. 물론 누룽지 부스러기 같은 거라도 있으면 그것도 당연히 

훔쳐야 한다. 그다음에는 개울이라도 찾아서, 죽은 척하려고 얼굴에 처덕처덕 

바른 이 말라붙은 피며 시체 속에 숨어 있다 보니 자연히 묻게 된 온갖 오물들부터 

씻어내야겠다. 그다음에는 군병의 옷을 벗어던지고 평복으로 갈아입은 뒤 천리만리 

도망치는 거다.

어찌 보면 전화위복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귓도리골에서 가짜 도사 노릇을 하려다 

붙잡힌 후 삼 년째, 이 환주의 변경에서 꼼짝 못하고 군역을 살아야 했다. 

이제 도망치면 두 번 다시 환주 쪽을 향해서는 침도 뱉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 몸은 봉황처럼 전쟁을 싫어하고 평화를 사랑한단 말씀이야. 전란이 일어난 

나라 따위는 싫다고. 그동안 좋은 기회를 몇 번이나 놓쳤다만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달아나줄 테다!'

입 냄새 지독하신 바로 위의 시체님부터 밀어내보려고 끄으응 힘을 쓰며 시혼은 

속으로 외쳤다. 한차례 힘을 쓰다가 어허, 이거 만만치 않구나 싶어서 헉헉거리는데, 

문득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까마귀가 내는 기척과는 다른 것이었다. 수르릅, 

수르릅.

어라, 뭐지? 시혼은 하던 일을 멈추고 눈알을 굴렸다. 뭔가 안좋은 예감이 들었다. 

아직은 좀 거리가 있지만 이쪽으로 오고 있는 소리인 건 분명하다. 떠난 줄 알았던 

적군이 돌아온 것 같지는 않다. 사람의 기척이 아니다. 이곳은 전쟁터고, 

갓 죽은 시신들이 잔뜩 널려 있고, 이런 곳에는 반드시‥‥‥.아이고, 맙소사!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지 알아챈 시혼은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물론 기회가 

있었더라도, 생존 본능이 강한 시혼은 비명을 억눌렀을 것이다. 그런데 참고 

자시고 할 기회조차 없었다. 바로 그 순간, 위에 엎드려 있던 입 냄새 지독하신 

시체님이 눈을 번쩍 떴기 때문이다.

"큰일이다!"

입을 벌려 외치니 그 입 냄새가 더욱 짙었다.

"야구자가 온다!"

그 양반뿐이 아니다. 한 다섯 층 위에서도 또 어느 돌아가신 분이 외쳐댔다.

"야구자가 온다! 야구자가 와!"

허둥대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고, 시체의 산이 들썩거렸다. 목 잘린 시체 

하나가 벌떡 일어나자 산이 한 귀퉁이부터 우르르 무너지기 시작했다. 

죽은 자들 중에 몇몇이 꽥꽥 비명을 질렀다. 시혼처럼 죽은 척하고 있던 시체가 

아니라 진짜 시체들이다. 이봐, 차례차례 일어나! 아, 밀지 마. 다리 치워! 

시혼도 그 와중에 휩쓸려 함께 버둥거렸다.

'어이구, 맙소사! 야구자도 야구자지만 이건 또 웬 사단이냐. 

시체들이 일어나질 않나, 말을 하질 않나!'

불행 중 다행인지, 오십보백보인지 몰라도 모든 시체가 다 그런 건 아니었다. 

대부분은 점잖게 죽어 있는데 몇몇 시체만 일어나 설쳐댔다. 목 잘린 시체가 

무너진 산 한 귀퉁이에서 제 목을 찾아 안아 들더니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 뒤를 팔 잘린 시체가 어째 몸이 한쪽으로 자꾸 기운다고 투덜대며 따라갔다. 

다리 잘린 시체는 도망도 못 치고 아직 깨어나지 못한 다른 시체 사이로 

까투리처럼 머리를 박고는 발발 떨었다. 고요하던 들판이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 혼돈의 절정은 야구자의 등장이었다. 신선한 식탁을 발견한 야구자는 

두 팔을 높이 쳐들고 올빼미 천 마리가 함께 울어대는 것 같은 괴성을 내질렀다.

"꾸어어어어어어어!"

시혼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저 소리는 마치 '잘 먹겠습니다!' 

라고 하늘에 고하는 것 같지 않은가. 얼른 도망쳐야 하는데 다리가 도통 떨어지지를 

않는다. 아니, 그것보다도 신선한 골 좋아하는 저 요마 앞에서 괜히 생기발랄하게 

도망쳤다가 '저 지금 무척 신선해요'라고 알려주는 꼴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야구자의 커다란 눈은 제일 먼저 달아나기 시작한 목 잘린 

시체를 향했다. 그 시체는 동작은 빨랐지만 불행히도 머리를 거꾸로 들고 있던 탓에 

방향 감각이 좀 엉망이었다. 뛴다고 뛴 게 야구자가 붙잡기 가장 좋은 방향이었다. 

야구자는 커다란 손으로 시체를 후려쳤다. 몸뚱이가 날아가면서 머리통을 

떨어뜨렸고, 야구자가 그것을 손등으로 한 번 튕겨 올렸다가 덥석 움켜잡았다.

'오오, 날렵한 몸놀림이로군. 제대로 가르치면 무술 좀 하겠는데‥‥‥. 

아, 아니 내가 지금 이런 생각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야구자는 먼저 두 개의 날카로운 송곳니로 머리통을 으적 깨물어 구멍을 냈다. 

그리고 긴 혀를 수루룩 내밀어 그 구멍에 들이대는데, 혀 끄트머리에 구멍이 뚫려 

있어서 그게 대롱 역할을 한다. 끈끈하고 고소한 골을 후루룩 들이마시자 그 흉악한 

얼굴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성취를 이룬 요마만이 지을 수 있는 미소가 떠오른다. 

한순간이나마 결핍이 해소된 것이다.

한 손으로 머리통을 들고 골을 마시면서도 달아나는 시체들을 쫓아가 때려눕히고 

다음 먹이를 준비하는 일에 소홀함이 없었다. 참으로 직분에 성실한 야구자였다. 

그래서 시혼은 좀처럼 달아날 틈을 잡지 못했다.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바로 잡히고 

말 테니까.

길길이 날뛰다가 일착으로 먹혀버린 시체들과는 달리 죽은 자의 본분을 지키는 

점잖은 시체들 사이에 함께 누워 있는 것이 고작인데, 이것도 썩 전망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야구자의 식욕은 끝이 없다. 여기 널린 시체들 전부를 먹고도 

또 다른 시체 밭을 찾아 떠날 놈이다. 그러니 대충 먹고 가주기를 기다리는 것도 

부질없는 짓이다.

'그냥 아까 흑황군이 물러갈 때 나 살았소 외치고 포로로 끌려갈 걸!'

만사지탄은 서글픈 일이다. 쩝쩝 후룩 후룩, 맛있게 식사하는 소음을 듣는 동안 

그러고 보니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또한 

서글픈 일이다. 바로 옆 시체의 머리통을 잡아채는 야구자의 손을 샛눈으로 

지켜보면서 '돌이켜보면 그럭저럭 괜찮은 인생이었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도 서글픈 일이다.

그날 시혼에게 일어난 일들 중에 유일하게 서글프지 않은 사건은, 귀를 찢는 

듯한 삐이익 소리와 함께 날아온 한 대의 화살이 야구자의 목에 꽂힌 것이다. 

잇달아 날아온 화살이 야구자의 몸을 퍽퍽 꿰뚫었다. 그걸 다 맞고도 벌떡 일어난 

야구자가 갑자기 들이닥친 한 무리의 기마대를 향해 괴성을 지르며 달려갔다. 

밥 먹는 걸 방해한 이 치사하기 이를 데 없는 족속들을 전부 갈아 마셔버리겠다는 

듯이.

기마대 선두에 있던 장수가 침착한 얼굴로 옆에 선 부관에게 손을 내밀었다. 

부관이 거대한 언월도를 장수의 손에 넘겼다. 장수가 야구자를 향해 말을 달렸다. 

말이 야구자를 스치고 지나갔다. 야구자의 목이 떨어졌다. 언월도의 날에서 요마의 

피가 떨어졌다. 여기까지가 기분 좋은 사건의 전부다.

"만세!"

시혼이 환호를 울리며 일어났다. 절도 있게 다가오는 기마대의 머리 위로 환주의 

깃발이 보였다. 뭐, 여기까지도 그럭저럭 나쁘지는 않은 상황이었다.

방금 야구자를 벤 장수가 시혼 앞에 말을 멈춰 세우더니 천천히 투구를 벗어 들었다. 

그러자 시혼이 꿈에라도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 드러났다. 귓도리골의 순무사령,

울지영소의 얼굴이었다. 시혼이 입을 떡 벌리고 있는 동안 영소가 물었다.

"자네 여기서 뭐 하나?"

그날 시혼에게 일어난 사건들 중에 가장 서글픈, 아니 끔찍한 일이었다.

"아하하, 그러니까 이게 몇 해 만입니까? 그때 이후로 통 뵙지 못했으니 

한 삼 년 되었나요? 살다 보니 이런 인연도 다 있네요. 정말 반갑습니다, 나리!"

삼 년 전 대도로 압송되는 동안 말도 좀 나누고 했던 사이니 어떻게는 친하게 

굴어 난관을 뚫어보겠다고 시혼은 안간힘을 썼다. 엄밀히 말하면, 말은 나눈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자신이 애걸하고 상대는 무시했던 거라는 사실은 가능한 한 

잊으려고 애썼다. 군장을 보아하니 삼 년 사이에 품계가 꽤 오른 모양이다.

"정말 반가우면 그 울상 좀 지우고 말하지. 아니면 아예 말을 말든가."

'삼 년 아니라 삼백 년이 지나도 안 변할 통뼈 같으니라고!'

시혼은 속으로 이를 득득 갈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영소는 시혼에게 신경을 끊고 

기마대가 시신들을 정돈해 차곡차곡 쌓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가본 시혼은 뭔가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니까, 시체 정돈하는 

모습이 너무 질서정연하달까.

대장이 따로 지시하지 않았는데도 역할을 척척 나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은 

군율이 엄격한 부대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적과 싸우는 것보다 지금 이 일이 

더 중요한 일인 양 사뭇 진지한 저 눈빛들은 뭐란 말인가. 게다가 고작해야 시체 

뒤처리나 하면서 이토록 긴장된 분위기는 또‥‥‥ 시혼은 무심코 입을 열어 평했다.

"이야, 훈련이 참 잘되어 있군요. 꼭 온 나라를 뒤져 성실한 장의사들만 모아놓은 

부대 같습니다. 아하하! 농담입니다."

"맞네."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툭 돌아온 대답에, 시혼은 깜짝 놀라 영소를 돌아보았다. 

영소의 시선은 여전히 기마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들은 이제 가지런히 정돈한 

시체들 위에 군마에 실어온 향유를 뿌리는 중이었다.

"못 뵌 사이에 농담이 느셨습니다."

"농담 아닐세."

"그럼‥‥‥ 성격이 음침해지신 거로군요."

"흰소리."

딱 잘라 말한 뒤 영소는 시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자신이 이끌고 

온 기마대의 깃발을 가리켰다.

"저걸 보면 모르겠나? 자넨 주워들은 게 많아서 아는 것도 많아 보이던데."

시혼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군기네요."

 영소가 말없이 쳐다보는 표정이 꼭 '바보'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시혼은 할 수 없이 

몇 마디 감상을 덧붙였다.

"여느 부대와 달리 깃발에 검은색을 쓴 것이 좀 색다른긴 하지만‥‥‥뭐 그건 말 

그대로 색이 다른 것뿐이고, 그 외에는 다른 점이‥‥‥어라?"

그제야 '환'이라는 큰 글자 아래 보일 듯 말 듯 회색으로 수놓인 초혼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영소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초혼부대일세."

"초혼부대라면‥‥‥."

"그래. 근자 흑황군의 난동으로 국경에서 죽은 자의 숫자가 너무 많아. 말하자면 

명계의 업무가 폭주해버린 거지. 그래서 채 거둬지지 못한 혼들이 떠돌기 시작했네. 

그냥 떠도는 것도 아니고 제 육신에 들러붙는 거야. 그래서 우리 부대가 만들어졌네. 

명계의 사자들이 감당하지 못하는 일을 거드는 게 우리 임무일세. 적아 구별 없이 

시신을 정화해서 혼을 일단 구유계로 보내는 거지."

그제야 시혼은 야구자가 왔을 때 벌떡벌떡 일어나 소리도 치고 달아나기도 하던 

시신들을 떠올렸다. 하도 황당한 상황이라 되레 그러려니 하고 봤던 그 일에 명계와 

관련된 사연이 담겨 있었다니. 한때 요수조차 흔치 않은 축복받은 땅이라고 불리던 

환이 이제는 귀마저 창궐하는 땅이 되었다는 것은 씁쓸한 일이었다.

"하아, 팔황과 구주의 대립은 언제쯤이나 끝날까요? 인간의 한 평생 길어야 백 년, 

무에 그리 얻을 게 있다고 살육이 그치지 않는지."

모처럼 진지하게 한숨을 길게 내쉬고 중얼거렸다. 진지라면 네 놈에게 질 수 없다는 

듯 영소도 무거운 목소리로 화답했다.

"그나저나 자네도 큰일이군."

"예?"

"군율을 어기고 탈영하려 했으니 그 죄가 무겁지 않은가. 게다가 관병으로 부임한

것도 아니고 죄를 지어 군역을 살면서 말이지."

"아, 아, 아하하하하."

이실직고도 안 했는데 이놈이 어떻게 그걸 다 알아냈지! 시혼은 삐질삐질 

땀을 흘렸다. 순간 그의 눈에 정말 무서운 것이 보였다. 영소가 그를 돌아보며 

웃은 것이다. 대충도 아니고 확실히 빙그레. 안 웃던 놈이 웃는 건 화내는 것보다 

더욱 무섭다.

"자네 부대의 상관은 이미 전사한 것 같으니 하는 수 없이 내가 군율대로 

집행해야겠군. 오랜만에 다시 만났는데 참 안되었네. 그래도 너무 걱정은 말게. 

사감 없이 법대로 할 테니 말이야."

그렇게 또박또박 말한 뒤, 영소는 모든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는 초혼부대를 향해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점화!"

향유가 뿌려진 시신들에 횃불이 떨어졌다. 불길이 솟구쳐 한순간 주변이 환해졌다. 

매캐한 연기가 사방으로 퍼졌다. 시혼은 눈이 매워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지금 눈에 고인 이 눈물은 어디까지나 연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나 서러웠다.

'내 팔자야.'

치솟아 오르는 불길 때문에 검은 하늘도 붉게 보였다. 그 하늘에 웬 자그마한 점 

하나가 지나가는 것이 얼핏 보였다.

"저게 뭘까요?"

인생의 불합리를 깨달아버린 초탈한 목소리로 시혼이 중얼거렸다. 영소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뭐?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시혼은 영소의 대꾸를 못 들은 척하고 횡설수설을 시작했다.

"떨어지는 별이었을까요? 그렇다면 제 운명이 곧 끝난다는 예조 겠군요. 아아, 

미인박명이라더니. 아니, 아니. 이렇게 좌절해서는 안 되지. 

저건 선흔이었을 겁니다. 선흔을 본 사람은 운이 좋다지요? 

하늘은 사람을 아낀다고 했으니 분명히 제게도 희망이 있을 겁니다. 

아냐, 아냐. 난 끝났어. 완전히 끝장이야."

영소는 딱 잘라 말했다.

"미친 사람에겐 혹형을 가하지 말라고 율령에 정해져 있긴 하지만, 그래봤자 난 

안 속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