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109)

4-3.

달이 차고, 이울고, 다시 찼다. 관인들이 왔다가 나간 후, 귓도리 

숲은 평온했다. 가스라기도 평온했다. 평온하게 생기를 잃고, 평온하

게 죽어가고 있었다.

천군은 잠든 가스라기의 코앞에 손등을 살며시 가져다 댔다. 미약한 

숨결이 느껴졌다. 그의 얼굴에 아픈 표정이 얼핏 나타났다. 잠시 후, 

그는 입술을 깨물고 결심을 굳힌 듯 일어섰다. 굴을 나온 그의 발걸

음은 저승샘으로 향했다.

'돌아가야 한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내가 모질지 못했던 

탓이다. 모질지 못해서 당했어.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전쟁의 징조가 

나타났다. 돌아가서 내 책임을 다해야 해. 전쟁을 막아야 한다. 

모질어져야 해‥‥‥."

점점 빨라지는 걸음으로 저승샘에 당도한 천군은 천의를 벗고 들어가 

하계에서의 마지막 운기를 시작했다. 울지영소를 만난 이후 회복에 

전심전력을 다해왔다. 오늘은 그 성과를 보아야 하는 날이다.

운기란 기를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기는 천지만물 어디에나 있다.

그러나 스스로 자신의 기를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자기 안에 무한히 

되살아나는 힘의 원천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건 곧 마지막 한 

톨의 불씨만 남아 있으면 언제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불과 같다. 

불은 태어나고, 자라고, 늙고, 죽기도 한다. 그러나 스스로 타는 불은

죽지 않는다. 늙지도 않는다. 선인이 늙지도 죽지도 않는 것은 

그래서다.

천군의 머리 위에 피어난 세 송이 기의 꽃은 이제 거의 완전한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삼화의 정기가 쌓이고 모이는 모양이다. 

삼화란 정, 기, 신을 일컫는 것이고, 정을 옥화, 기를 금화, 신을 구

화라고 한다. 이 수련이 경지에 이르면 삼화가 정수리에 모이고 혈기

가 응취하면 만신이 진인을 알현하게 된다 하여, 삼화취정이라 한다.

화는 화와 다르다. 후자가 초목의 꽃, 그것도 피어 있는 그 형태를 

일컫는 말이라면 전자는 모든 만물의 기가 육화된 꽃, 그것도 피어나

는 과정 그 자체를 의미한다. 화는 식물이나, 화는 빛이며 기다. 

선인의 눈에는 그것이 초목의 꽃이 아니라 거대한 기의 웅집으로 

보인다. 그러나 하계인에게는, 자신이 이해하는 것만 볼 수 있는 

인간의 눈에는 그것이 마치 초목의 꽃처럼 보인다.

뿌옇게 흐린 저승샘의 수면에 바람도 없는데 잔물결이 일렁였다. 

잔물결이 점점 크게 번져가는가 싶더니 샘 전체가 전보다 거세게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죽어가는 나무들의 잎사귀에 윤기가 

돌고, 구부러진 가지가 샘이 있는 방향을 향해 퍼졌다. 깨어나지 

않는 알을 품은 채 자고 있던 새들이 눈을 떴다. 숲 어딘가에서 

여우가 주둥이를 치켜들고 울기 시작했다.

귀로는 들을 수 없는 소리가 샘을 중심으로, 아니 정확히는 천군을 

중심으로 몇 겹의 동심원을 그리며 공간을 갈랐다.

그리고 다음 순간, 세 송이의 꽃이 동시에 만개했다. 꽃망울이 터지

면서 분수처럼 솟구쳐 오른 빛의 알갱이 같은 것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가 천군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것들은 한 알도 빠짐없이 

천군의 모공 속으로 스며들었다.

이루었다!

천군의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샘도, 나무도, 새도, 

숲의 짐승도 모두 그 순간만은 천군과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이루었다. 해냈다. 드디어 꽃을 피웠다.

천군의 호흡이 가라앉자 부글대던 샘도 가라앉았다. 잎사귀는 다시 

시들었고, 가지는 구부러졌다. 새는 잠들고 여우는 다시 밤 사냥을 

시작했다.

호흡을 가다듬은 천군이 샘에서 걸어 나왔다. 이제는 일부러 선인의 

힘을 써서 몸을 말릴 필요도 없다. 물방울들은 그가 원하지 않는 것을 

알기에 스스로 흘러내려 샘으로 돌아갔다. 무른 흙을 디뎌 발이 

더러워질 것을 염려할 필요도 없다. 그의 발은 더 이상 땅에 닿지 

않고 한 치 정도 위 허공을 밟고 있었다. 땅을 디디는 것이 아니라 

땅의 기운을 디딜 뿐이다. 천의가 날아와 그의 몸을 감싸고 저 스스로

옷자락을 여몄다.

천군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만월이다. 팔월, 중추의 달이 천공에 

가득하다. 이대로 저 달의 기운을 좇아 선계의 방향을 잡을 수 있다. 

꽤 긴 여행이 되겠지만 여행이 끝난 뒤 시작하게 될 더 긴 싸움에 

비하면 실로 찰나에 불과할 터이다.

'이제 돌아가자.'

결심을 굳힌 순가, 등 뒤에서 한 목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셈을 마칠 때가 왔군."

화안금정수의 목소리였다.

그 때, 가스라기는 잠에서 깨어났다. 온몸에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깨어나서도 한동안 얼이 빠져 있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무서운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하늘님‥‥‥하늘님?"

주변을 더듬으며 불러봤지만 굴은 텅 비어 있었다. 다시 오한이 

왔다. 가스라기는 두 팔을 안고 부들부들 떨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다리가 덜덜 떨렸지만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만 들었다. 가스라기는 굴을 나와 걷기 시작했다. 걷는 

것이 뛰는 것이 되고 뛰는 것이 구르는 것이 되었다.

꿈을 꾼 것은, 엄마가 죽고 나서 한참이 지난 어느 비 오는 날 밤의 

일이다. 가스라기는 평생 그렇게 무서운 일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그걸 다시 꿈으로 꾸게 되다니.

숨을 거두던 날, 엄마는 가스라기에게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다고 

했다. 가스라기는 울었다. 다시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울면서 물었다.

엄마는 한참이나 가스라기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말했다. 엄마가 

죽거든 큰 나무 아래 묻었다가, 한참 지난 후에 그 자리에서 파란빛

이 나거든 엄마를 꺼내라고. 그러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무슨 

소리인지 몰랐지만 가스라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

ㅡ네가 되고 싶은 것을 용서하렴.

가스라기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뜻이야? 엄마?'

엄마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그리고 그날이 왔다. 무기도 없이 살쾡이와 싸우다가 죽을 뻔한 날이

었다. 그날 밤은 어둡고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할퀴고 긁힌 상처를 

쓰라리게 때리는 비를 고스란히 다 맞으면서 엄마가 잠든 곳으로 

기어갔다. 빗물에 젖은 그 흙 사이로 뭔가 푸르스름한 것이 반짝반짝 

빛났다. 가스라기는 흙을 파냈다. 거기서 나온 것은 한 무더기의 

뼈였다.

뼈 무더기를 안고 한참을 엉엉 울다가 그중에 제일 큰 다리뼈만 

빼고 나머지는 도로 묻었다. 다리뼈는 돌에 갈아 칼을 만들었다. 

지금은 그 뼈 묻은 자리가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기억에서 

지워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날은 가스라기가 가장 잊고 싶은 날이었

으니까. 자신이 정말로 세상 천지에 혼자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날.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날.

"하늘님, 하늘님‥‥‥. 어디 갔어? 응? 어디 있어?"

입술을 부들부들 떨면서 불러보았지만, 소리도 멀리 퍼지지 않고 

돌아오는 대답도 없었다. 가스라기는 무엇인가에 이끌린 듯이 저승샘

을 향해 걸어갔다.

ㅡ그는 널 버렸어. 넌 또 혼자가 될 거야.

어떤 목소리가 그녀의 머릿속에서 계속 속삭이고 있었다.

ㅡ떠나지 못하게 해야 해. 안 그러면 또 혼자가 될 거야.

가스라기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아, 맞아.

ㅡ해쳐서라도 못 떠나게 만들어야 해. 알겠지?

응, 응. 또 혼자가 되는 건 싫어!

가스라기는 칼을 뽑았다. 엄마의 뼈, 엄마의 칼이다.

ㅡ떠나지 못하게 만들어. 너를 혼자 내버려두지 못하게.

머리속에서 속삭이는 목소리에게 가스라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흐흐, 식은 죽 먹기로군."

어두운 숲 속에서 키는 작고 몸은 왜소한데 머리통만 부담스럽게 

커다란 사내 하나가 킬킬 웃고 있다. 추하기 그지없지만 영락없는 

사람 형상이었다. 몸에 걸치고 있는 것도 도성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멋 부린 장포였다. 그 장포의 겨드랑이 사이로 미끈한 팔이 

사내의 몸을 끌어안고 있었다. 사내의 등 뒤에 찰싹 달라붙어서 마치 

천하에 다시없는 호남자를 보는 듯이 감탄을 연신 뱉고 있는 나체의 

여인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전에 화안금정수에게 혼쭐이 났던

비취호다.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마에 하얀 상처가 남아 있다는

정도다.

"어머, 정말로 솜씨 좋으시네."

"훗, 이르다 뿐인가. 머리를 쓸 줄 모르는 하금 요수들이나 무턱대고 

달려들다가 선인에게 당하거나 그 미친 신수에게 잡아먹히지. 나는 

급이 달라, 급이. 난 여기를 쓸 줄 아는 몸이라 이 말씀이야."

그러면서 사내는 유달리 커서 흉하기만 한 머리통을 손에 쥔 부채로 

톡톡 두들겨댔다. 말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이 사내도 숲에 몰려든 

수많은 요수들 중 하나인데, 겉모습이 거의 멀쩡한 사람꼴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시시때때로 사람 모습을 취할 수 있는 요얼이

거나, 언제나 사람 모습을 취할 수 있는 요괴 급은 될 것이다.

"으흥, 하지만 이해가 안 가는걸요. 어째서 선인이 아니라 저 인간 

계집에게 술법을 쓰신 건가요?"

"그야 선인에게는 몽혼술이 먹힐 리가 없으니까 그렇지. 내 며칠 쭉 

지켜보았는데 그 선인이 저 계집한테만큼은 틈을 보여주는 것 같거든.

그러니 저 계집이 지금 건 술법대로 선인을 해치려고 달려들어서 

정신을 흐려놓으면 그 틈을 타 이 어르신께서 재빨리 나가 선인을 

제압하고 선기를 후룩후룩 마셔버리는 거지."

"뭐라고 술법을 거신 건데요?"

"그건 나도 몰라."

"네에?"

"이 몽혼술의 신묘한 점이 바로 그거지. 난 그저 저 계집에게 꿈을 

꾸게 하는 거야. 그 꿈의 내용이 뭔지는 나도 몰라. 아무튼 저 계집이

가장 싫어하는 꿈을 꾸었겠지. 그리고 기분이 울적해지는 거야. 그 

원인은 무조건 저 선인 때문이라고 여기게 되지. 선인을 해치고 싶다

는 생각이 마구 들게 되는 거야. 물론 저 계집이 선인을 진짜로 해칠 

수 있을 리는 만무하지만, 분명히 그 순간에는 선인도 빈틈을 보이게 

될걸."

묘한 눈빛을 빛내며 사내의 말을 귀 기울여 듣던 비취호가 콧소리를 

내며 물컹한 젖가슴을 사내의 등에 대고 비볐다.

"몽혼 나리의 명성을 들으면서 흠모해왔는데 오늘 직접 그 신통하신 

술법을 보게 되니 이 비천한 계집은 손발 끝이 다 저려서 숨도 못 

쉬겠사와요."

"하핫! 그렇게 몸이 저리면 내가 좀 주물러주지."

"어머, 어머, 고맙기도 하셔라. 앗, 벌써부터 그리고 손이 오시면 

어쩌시려구요! 미워요."

"밤은 짧고 할 일은 많다는 소리도 못 들어봤냐? 저 계집이 선인을 

찾아내서 일 치르기 전에 후딱 재미나 좀 보세."

"흐응, 선기를 빨게 되면 저도 좀 나눠주시는 거죠?"

"그럼, 그럼."

"저어기, 그런데 나리."

"응?"

"만약 술법을 중지하시더라도 저 계집애는 하려던 일을 계속 하게 

되나요?"

"아니, 아쉽게도 내 몽혼술이 아직 그 경지에는 이르지 못해서 

말이야. 뭐 하지만 내가 중지할 턱이 있나. 어허, 바동거리지 말고 

좀 가만있게."

"어머, 그럼 이를 어쩌죠?"

"응? 우으 오이아?"

뭘 입에 물었는지 '무슨 소린가'라는 말을 제대로 발음 못한 채 

비취호의 얼굴을 올려다보던 사내의 얼굴이 다음 순간 흙빛이 되었다. 

비취호의 손이 사내의 장포 속으로 들어가 사타구니를 틀어잡더니, 

두 눈의 동공이 비취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회음부를 통해 생기를 

빨아들이는 요력이었다.

뜨악하고 놀라 입도 떼고 몸도 떼려고 해도 이미 늦은 뒤였다. 일단 

급소를 잡혔으니 빼도 박도 못하는 것이다. 자신의 몸에서 요력이 

급격하게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면서, 사내는 버둥거렸다.

"너‥‥‥너! 하찮은 여우요얼 따위가 나, 나, 나를‥‥‥ 너, 

후환이 두렵지도 않으냐!"

처음에는 바늘구멍만 하던 눈동자 속의 비취색이 점점 커져 동공을 

채우고 이제는 눈자위 전체로 번져가고 있었다. 그런 눈으로 사내를 

내려다보면서 비취호는 방긋 웃었다.

"난들 어쩌겠어요? 나리보다 더 힘센 분이 시키신 일인데."

"누, 누구‥‥‥."

사내는 질문을 끝내지도, 대답을 듣지도 못하고 쭈글쭈글해지더니 

가죽만 남은 몸이 되어 허무하게 그 자리에서 축 늘어졌다. 유달리 

머리통이 큰 가죽이었다. 손을 탁탁 털어낸 뒤에, 비취호는 한숨을 

내쉬면서 들을 사람도 없는 대답을 뇌까렸다.

"누구긴 누구야. 영수인지 기수인지 그 미친놈이지."

 그러고 나서 비취호는 이마에 긁힌 상처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화안금정수의 아가리 안에 삼켜져서 거의 먹힐 뻔하다가 그놈이 마음

을 바꿔먹는 바람에 간신히 목숨을 구했을 때 생긴 상처다. 하지만 

언제든 집어삼킬 수 있다는 말을 빠뜨리지 않았고, 상대가 능히 그럴 

수 있다는 것을 비취호도 잊지 않았다. 그러니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이제는 보통 색으로 되돌아온 한 쌍의 눈으로 비취호는 저승샘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내 팔자야. 어쩌다 사람 계집을 다 지키게 되었는고."

몽혼술이 깨어진 순간 가스라기는 실이 끊긴 인형처럼 우뚝 멈춰 

섰다. 제정신이 들었을 때는 자신이 왜 이 밤중에 칼을 듣고 나온 

것인지 얼떨떨했다. 방금 전 있었던 일을 모조리 잊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술법에 걸렸을 때나 깨어났을 때나 그녀가 제일 먼저 찾게 

되는 것은 역시 하늘님이었다. 마침 그녀는 거의 저승샘 가까이 와 

있었고, 이내 먼발치에서 천군을 발견했다. 그러나 천군은 혼자가 

아니었다.

"이젠 삼화취정에 이르렀으니 네 몸도 선계에 진입하는 데 큰 무리가 

없겠지. 이 어르신께서 눈 깜짝할 사이에 너를 선계로 돌려 보내주마. 

자, 가자."

이글대는 검은 불꽃의 사자, 화안금정수가 말했다. 천군은 잠자코 

고개를 저었다. 화안금정수가 움찔했다.

"왜 그러지? 설마 안 돌아가려고?"

"돌아간다."

"그런데 왜 그러고 있어? 너는 선계로 빨리 돌아갈 수 있으니 좋고, 

나는 원하던 것을 얻게 되니 좋잖아. 뭘 망설여? 약속했잖아."

"약속하지 않았다."

검은 불꽃의 움직임이 뚝 그쳤다.

"뭐?"

천군은 변함없는 어조로 또박또박 말했다. 냉정하고 모질게.

"네게 그것을 준다고 약속하진 않았다. 생각해본다고 했을 뿐이지."

"그래서?"

"생각해봤다. 그리고 주지 않기로 결정했다."

얼이 빠진 것처럼 한동안 멈춰 있던 검은 불꽃이 이글이글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화안금정수가 물어뜯을 듯이 입을 열었다.

"진심이냐?"

"그래."

"머리가 이상해진 거 아니냐? 넌 지금 그저 선계에 진입할 때 견딜 

수 있을 정도의 힘만 회복했을 뿐이다. 그런데 나 없이 혼자 돌아가

겠다고?"

"시간은 좀 걸리겠지."

"왜 사서 고생을 해! 그냥 내가 데려다준다니까!"

천군은 딱딱하게 말했다.

"내가 선계로 돌아가서 해야 할 일에 네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지금 

그 거래에는 응할 수 없어."

"젠장! 네놈 뜻대로 되어줄까 보냐! 비겁한 놈! 나를 속였어! 선인씩

이나 되어서!"

화안금정수의 불꽃이 회오리처럼 감겼다. 짐승은 솟구치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씨근거리다가 마지막 희망이라도 되는 듯 물었다.

"그럼 그 계집은 어떻게 할 셈이냐?"

천군은 대답하지 않았다. 화안금정수가 시시시 소리를 내며 웃었다. 

드디어 약점을 잡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버려두고 가면 그 계집은 죽는다. 너도 알고 있겠지?"

여전히, 천군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데려갈 수도 없겠지. 아무리 킁킁 냄새를 맡아보아도 그 

계집에게는 선기가 없으니. 그렇다고 죽게 내버려둘 수도 없겠지. 

안 그런가?"

화안금정이 흥분으로 점점 타올랐다.

"내게 부탁해. 그 계집을 지켜달라고. 그 아이가 천수를 누리면서 살 

수 있도록 여기서 보위해달라고. 나라면 할 수 있다. 하룻밤 사이에 

이보다 훨씬 비옥한 곳으로 데려가줄 수도 있다. 거시서 저 계집이 

뿌리내리고 살 수 있도록 도와줄 수도 있다. 아니, 영기를 좀 나눠

주면 나야 손해가 크지만 이 땅도 그럭저럭 살 만한 곳으로 만들 수 

있다. 한마디로 네 고민을 끝내줄 수 있어! 네가 딱 한마디 부탁한

다고만 하면‥‥‥."

"그러면?"

짐승은 간절하게 떨리는 소리로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것을 직접 

소리 내어 말했다. 그가 받고 싶어 했던 건, 오직 천군만이 줄 수 

있는 것이었다.

"내게 자유를 다오."

"안 돼."

힘겹게 꺼낸 소망을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화안금정이 이글대고 

검은 불꽃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저, 정말이냐? 진심이냐고! 네놈에게도 불리하지 않은 조건일 텐데? 

응? 다시 생각해볼 수 없나? 응?"

"이미 대답했다."

사실 화안금정수도 알고 있었다. 다시 생각해보라는 말이 부질없다는

것을. 선인들이란 그런 존재다. 영수가 거짓말을 할 수 없는 것처럼,

선인은 한번 뱉은 말을 물리지 않는다. 말의 무게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자들이다. 그것을 알기에 화안금정수의 절망은 더욱 컸다. 절망

은 한순간에 분노가 되었다.

불꽃으로만 이루어진 짐승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불꽃 속에서 추악하게 오그라드는 쇠붙이 같았다. 짐승은 입을 

크게 벌리고는 앞발로 땅을 후려쳤다. 가뜩이나 무른 땅이라 한 자가 

넘게 움푹 파였다.

"저주한다! 나는 네놈을 저주한다! 네놈의 그 외고집을 저주해! 

네놈에게 묶여버린 내 천수를 저주한다! 저주한다!"

퍼억, 퍼억! 젖은 흙이 튀고 땅이 푹푹 파이도록 짐승은 앞발로 

후려치고 불꽃의 갈기를 흔들어대고 머리를 크게 들더니 우우 울부짖

었다. 그 모습을 천군은 그저 냉정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울부짖던 

짐승이 이글대는 눈으로 천군을 노려보았다. 인내가 사라진 화안금정

은 금빛 불꽃이 활활 넘쳐흐르는 커다란 등잔 같았다.

"좋다! 어차피 이대로 묶일 몸이라면 차라리 같이 죽자!"

천군이 미처 방어를 하기도 전에, 짐승은 천군을 향해 그 거대한 

동체를 날렸다. 짐승은 천군의 어깨를 물었고, 천군은 짐승의 갈기를 

움켜잡았다. 짐승도 천군도 고통으로 얼굴이 일그러지고, 살을 찢어발

길 듯한 파동을 일으키며 몸부림쳤다.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과 길들이지 못한 주인의 육골이 맞닿으면 

어느 쪽이나 무한의 고통을 얻게 된다는 것을, 둘 다 알고 있었기에 

지금껏 피해왔다. 때로는 그 선을 넘을뻔 하기도 했지만 여기까지 

어떻게든 견뎌냈다. 하지만 이제 더는 견딜 수 없다. 차라리 공멸

하겠다! 짐승은 그렇게 결정했다. 눈동자에서 흘러내린 금빛이 검은 

불꽃의 몸뚱이를 타고 녹아내렸다. 그것은 마치 금으로 만든 눈물 

같았다.

천군의 손아귀 사이로 짐승의 검은 불꽃이 북슬북슬한 털가죽처럼 

빠져나왔다. 생사를 걸고 싸우는 두 마리의 야수처럼 그들은 떨어질 

수도, 상대를 쓰러뜨릴 수도 없었다. 짐승의 불꽃은 천군의 손가락 

사이에서 미친 듯이 일렁였다. 천군은 놓지 않았다. 뻗어 나간 

불꽃이 천군의 손목과 팔을 타고 기어 올라갔다. 열기가 눈을 찌를 

듯했다. 누구도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누구도 상대를 위해 

고개 숙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둘은 그대로 물러서지 않은 채 서로를 

태워버리다가 그대로 끝장이 나버릴 것만 같았다. 그 양패구상의 

싸움이 그친 것은, 있는 힘을 다해 천군이 단 한마디의 말을 내뱉은 

순간이었다.

"수안니!"

 화안금정수의 동작이 우뚝 멈췄다. 눈은 계속 천군과 함께 죽음의 

길을 가고 싶노라 말하고 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천군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

"꺼져라."

화안금정수는 천군의 몸에서 튕겨져 나갔다. 땅 위를 몇 바퀴 뒹굴

다가 발딱 일어난 짐승이 크아아악 하고 비로소 소리를 내더니 

천군을 노려보았다.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다음 순간, 화안금정

수는 홱 몸을 돌려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자던 새들이 놀라 후두두 

날아오른 뒤 죽음 같은 정적이 가라앉았다.

화안금정수가 사라진 뒤에야 천군은 비로소 천천히 손을 들어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짐승의 불꽃 갈기를 움켜잡았던 바로 

그 손이다. 피는 흐르지 않지만 불로 지진 듯한 상처가 남았다. 

선인의 살은 불에 타지 않는 법이다. 오직 태고의 불만이 이런 

자국을 남길 수 있다. 짐승이 물었던 어깨에도 똑같은 상처가 남았다.

'그래도 원기는 상하지 않았다. 선계로 돌아가는 데는 무리가 없어.'

상처 자국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천군은 문득 인기척을 느끼고 

돌아섰다. 그곳에 가스라기가 있었다. 언제부터 거기 서 있었는지, 

무슨 말을 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이 짐을 피할 수 없었다. 

떠나기 전에 해결해야 할 마지막 빚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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