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109)

제 4 장

::선총(仙寵)::

선총이란 선기가 없는 인간에게 선인이 내리는 선물을 말한다.

선총은 그 정도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뉘는데, 낮게는 하계인의 성명을

선인이 친히 들어주는 일도 선총이라 한다. 범인의 성명을 선인이 듣는

다 함은 곧 선계에 그 이름자가 새겨진다는 의미이며, 선연은 깊어지고

내세에 선골을 얻기가 더욱 쉬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선총은 무릇 선인이 제 선기의 정수를 직접 나누어주는 

것이다. 선인의 정수는 그 피, 골수, 체액에 깃들어 있으니 요수들이

선인을 해치려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선인이 몸소 인간에게 정수를

나누어주는 방법은 여러 가지고 있다고 전해지나, 그중 알려진 것은 오직

하나뿐이다.

ㅡ선학박사 울지명.『선인록』

4-1.

관인은 나라를 다스라는 사람들을 말하는데, 대부분 큰 도성에 모여 

산다. 외딴 시골 마을에는 일 년에 한 번 관인이 찾아와 소출을 

조사한 후 적은 양의 세곡을 거둬가고, 시골 사람들이 구하기 어려운 

소금 같은 것을 왕의 하사품으로 내리기도 한다. 이렇게 일 년에 한 

번 관인이 찾아오는 것을 순무라 하고, 그 순무의 우두머리가 되는 

사람을 순무사령이라고 한다.

순무사령이 찾아오는 날은 보통 잔칫날이나 다름이 없다. 범처럼 무서

운 왕의 대리인이라면 모를까. 환주의 왕은 어질다. 아니, 사실 

진짜로 어진지 귓도리골 사람들이 알 턱은 없다. 최소한 이런 시골 

사람들을 괴롭히고 싶어 할 만큼 부지런하지 않거나, 관심이 없는 건 

사실일 것이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수무사령이 오는 날을 아무 

생각 없이 반겼다.

하지만 올해는 좀 다르다. 반갑긴 반갑지만 아무 생각 없이 반가운 건

아니다. 마을이 뒤숭숭하기도 하거니와, 순무사령이 다른 해보다 좀 

일찍 찾아온 거다. 촌장 집 마당을 임시 관아로 삼고 집무를 보기 

시작한 젊은 순무사령은 작년에도 왔던 사람이다. 순무사령 뒤에는 

그를 배행한 군졸들이 서 있고, 한옆에는 도망하가 잡힌 가짜 벽혈자,

시혼이 무릎 꿇고 있었다.

'아니! 벽혈자 선생! 어쩌다가?'라는 촌장의 말에 시혼이 뭐라고 대꾸

하기도 전에 대뜸 순무사령이 '벽혈자라면 도사로 이름난 그 벽혈자? 

이자는 벽혈자가 아닙니다'라고 딱 잘라 말했다. 자신은 대도 휘경에

서 벽혈자를 한 번 본 적이 있다는 것이다. 며칠밖에 안 봤지만 

어딘가 행동거지가 의심스러웠던 시혼과, 신원이 확실한 관인의 말 

중에 마을 사람들이 어느 쪽을 더 믿었을지는 뻔한 일이다. 그래서 

시혼이 한껏 불쌍한 몰골로 앉아 있지만 아무도 좋은 눈으로 보지는 

않았다.

순무사령은 촌장과 마을 사람들에게 그간 귓도리골에서 일어난 일들을 

소상히 들었다. 요수의 출현이며, 땅의 기운이 말라버린 일, 곡식이 

전혀 영글지 않는 일 등등. 순무사령은 듣고 나더니 무릎을 꿇고 촌장

집 마당의 흙을 손에 잡아 비벼보았다. 녹슨 것처럼 적갈색으로 파삭

파삭 마른 흙이었다.

"원래는 우리 마을 흙이 그런 색이 아니었습니다. 지난여름부터 차차 

그리 변하더군요. 여기는 그나마 덜 변한 겁니다. 저쪽 귓도리 숲이랑 

논밭 근처의 흙은 아주 새빨갛습니다. 꼭‥‥‥."

피를 먹은 것 처럼요, 라고 촌장이 말을 하려는데 순무사령이 손을 

저어 막았다.

"알겠습니다."

손에 묻은 흙을 털어내더니 도로 일어나서는 촌장과 마을 사람들을 

둘러보고 말했다.

"짐작이 가는군요."

"예에?"

마을 사람들은 놀라기도 하고 한편 기쁘기도 했다. 나라님을 대리하는

관인의 말이니 가짜 도사처럼 거짓말일 리는 없다. 분명히 해결을 

해줄 것이다. 촌장은 거기에 더해, 혹시 순무사령이 일찍 온 이유가 

이 모든 것을 꿰뚫어본 탓은 아닌가 넘겨짚기까지 했다.

"대인, 다른 해보다 한 달이나 일찍 오신 것은 혹‥‥‥."

촌장이 조심스럽게 묻자, 순무사령은 딱 잘라 부정했다.

"서둘러 온 것은 다른 일 때문입니다."

왕의 대리인에 대한 예우로 촌장은 존대하고, 연장자에 대한 예우로 

순무사령 역시 존대를 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예법이지만 간혹 오만

한 관인들 중에서는 안 그런 자들도 많은데 이 젊은 순무사령은 행동

거지 하나하나가 아주 똑바르다.

"다른 일이라 하시면, 혹‥‥‥ 저 가짜 도사를 체포하기 위해서?"

갑자기 화살이 자신에게 오자 시혼은 움찔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순무사령 그를 힐끔 돌아보았지만, 언급할 가치도 없는 인간이라는 

듯이 도로 시선을 거뒀다.

"실은 올해 거두어들일 세곡의 양이 전보다 좀 늘게 될 터라 인근 

마을에 두루 알리기 위해 길을 서둘렀던 겁니다. 저자는 운이 좋아 

달아나기 전에 길에서 잡은 것뿐이지요."

'당신한테는 운이 좋고, 나한테는 나쁜 거겠지.'

시혼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세곡이 늘어요? 그건 또 어찌된 영문입니까, 대인?"

"사정이 있습니다만, 일단 이 마을 상황을 보니 세곡 문제를 운운할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점은 염려 놓으십시오. 자세한 속내는 

나중에 차차 들려드리지요."

딱 잘라 말하는 거로 보아 뭔가 나라에 큰일이 있는 모양이다. 이런 

이야기를 다른 사람 없는 자리에서 듣는 것 또한 촌장의 특권이다. 

촌장은 나중에 술자리라도 마련 해야겠다 생각하고 더 묻지 않았다. 

순무사령은 세곡 이야기는 관두고 다시 말길을 돌렸다.

"기왕 말이 나왔으니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혹시 삿된 짐승들을 보시

게 되더라도‥‥‥."

"삿된 짐승이라면 요수를 말씀하시는‥‥‥."

순무사령이 눈살을 찌푸리며 촌장의 말을 끊었다.

"그것을 그리 소리 내어 말하지 마십시오. 대저 삿된 것은 삿된 

이름을 부르는 수만큼 인간 세상을 침범해오는 법입니다. 왕께서도 

양미들이 그 짐승들을 모르고 사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라고 하셨습

니다."

"아, 예."

애초에 '요수'라는 것을 모르던 마을 사람들에게 잘난 척 가르쳐 준 

경력이 있는 촌장은 식은땀을 흘렸다.

"어쨌든, 삿된 짐승을 보게 되더라도 저런 근본 모르는 도사를 찾으려

하지 말고 차라리 관아로 연락을 하시지요."

"하, 하지만 대인들께서는 공무로 바쁘신 분들이라 요‥‥‥ 아니, 그 

삿된 짐승들을 다루는 일로 번거롭게 해드릴 수가‥‥‥."

말이야 공손하지만 나랏일과 이런 쪽 일은 전혀 분야가 다르지 않느냐

는 소리다.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다른 나라라면 모르되, 우리 환주의 관인들은 

삿된 짐승들을 누구보다도 잘 다룰 수 있습니다. 허접한 도사 따위 

댈 게 아니지요. 구주팔황 중에 우리 환주에 왜 삿된 짐승의 흔적이 

가장 적겠습니까? 환주의 왕 되시는 이들은 대대로 척사제요의 신력을

타고나십니다."

마을 사람들은 오오, 하고 감탄을 했다. 무론 태반은 못 알아듣고 

하는 감탄이다.

"설령 저자가 진짜 벽혈자였다고 한들 우리 전하의 신력에는 발끝도 

못 미칠 것입니다. 속세의 도사라고 하는 무리가 대부분 그렇습니다. 

좌도방문, 옆길로 빠진 해괴한 잡술이나 익히는 자들입니다."

"예,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촌장 역시 잘 모르면서도 고개를 주억거린다. 듣고 

있자니 시혼은 점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지금 상황 중에 그의 

마음에 드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비슷한 또래인 저 순무사령은 뭘 

저리 잘난 척을 해대는 건지, 그리고 자신을 향해서는 흰 눈만 흘기던

촌장 집 손녀딸은 뭐가 좋다고 선인이라도 만난 것처럼 저 순무사령에

게 넋을 잃고 있는 건지. 부아가 치밀어서 한마디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허허, 구주팔황에서 가장 이름난 도사인 벽혈자조차 그리 무시 하시

다니. 내 구주팔황 두루 안 다녀본 곳이 없지만 환주의 관인처럼 

오만한 사람들은 또 처음 보겠소이다. 그렇게 자신 있으시면 당장 저 

숲에 들어가서 득실거리는 '요수'들에게 호통 한번 크게 쳐 내쫓아보시

지요, 대인?"

일부러 '요수'를 또렷하게 발음해 상대를 자극했다. 그러자 순무사

령이 그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아니 저놈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야 할 텐데 아직도 뚫린 

구멍이라고!"

대신 버럭 성을 낸 것은 촌장이었다.

"대인, 저 가짜 도사 놈은 어찌하실 겁니까? 다시는 거짓말을 못하도

록 혀라도 자르시겠지요?"

"환주의 율령에는 그런 혹형이 없습니다. 처벌은 대도로 압송해서 

결정해야겠지요."

차갑고 딱딱한 순무사령의 표정을 보아서는 그런 혹형이 없다는 것이 

몹시 아쉬운 것 같았다. 시혼은 버럭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거 왜 이러십니까? 비록 벽혈자의 이름을 사칭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요수들을 물리쳐보려고 노력은 했습니다!"

"또 속을까 보냐! 공밥 축내다가 야반도주하려던 주제에."

"진짜라니까요! 도망을 치려던 게 아닙니다! 숲에 들어가서 그 요괴 

우두머리인 가스라기와 싸웠지요! 이요제요의 수법으로 간신히 놈을 

퇴치했나 싶었던 순간에 그만 숨어 있던 다른 요괴의 사술에 걸려 

아침까지 길가에 쓰러져 있었던‥‥‥."

"뭐라고?"

순무사령의 표정이 일순 확 변하던, 시혼의 말을 중단시켰다.

"방금 뭐라고 했지?"

묻는 말투가 하도 삼엄해서 기세 좋게 소리치던 시혼이 다 움찔 놀랄 

정도였다. 순무사령의 눈치를 슬슬 보면서 대답하는 말투가 어물어물

해졌다.

"그러니까, 숨어 있던 요괴한테 당해서‥‥‥아니, 뭐 제가 눈으로

본 건 아니고 그냥 정신을 차려보니 그렇게 되었‥‥‥."

"그거 말고. 요괴 두령 뭐라고?"

시혼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가스라기 말입니까?"

화안금정수가 어둠 속에서 스며 나왔다. 신성한 짐승의 거대한 

동체가 굴 입구를 향해 사뿐사뿐 나아갔다. 고개를 안쪽으로 디밀어 

보니, 가스라기는 천군의 무릎을 베고 죽은 듯이 자고 있다. 천군은 

그 머리에 손을 올린 채 앉아 있었다. 

잠시 그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화안금정수가 입을 열었다.

"또 숲에 속세인이 들어왔다."

이미 알고 있었을 천군이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들어온 건 숫자가 꽤 많다. 게다가 숲 가장자리가 아니라 

안쪽 깊이 들어왔다. 내버려두면 여기까지 올 기세다."

천군은 조심스레 가스라기의 머리를 내려놓고 일어나더니 화안금정

수를 향해 돌아섰다.

"다녀올 테니, 그동안 이 아이를 지켜다오."

 화안금정수가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너와 약속한 내용 중에 저 계집을 지킨다는 건 없었는데?"

노려보는 천군의 눈빛이 짙고 푸르렀다. 그러나 화안금정수도 물러

서지 않았다.

"게다가, 정확히 따져보면 나는 네 신변을 지켜주었건만 너는 아직 

아무 약속도 안 했지. 이렇게 불공평한 거래는 처음이다. 이제 그만 

슬슬 답을 해줘야 하지 않나? 삼화취정이 멀지 않다는 것쯤 알고 

있다."

"이 아이를 지켜줘. 내가 없는 동안."

"어이, 내가 한 말을 뭐로 들은 거야? 다시 말해줘? 거래란‥‥‥."

"거래가 아니라, 부탁이다."

딱 잘라 말하니 화안금정수는 순간 멈칫거렸다.

'저 고집불통 녀석이 지금 부탁이라고 했어, 부탁!'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이다.

"그럼."

천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화안금정수는

얼빠진 표정으로 천군이 간 방향과 굴속의 가스라기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뒷발로 머리를 득득 긁었다.

"하여간‥‥‥ 빌어먹을 천수에 정해진 주인이라는 것이 뭔지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면 저도 모르게 들어주고 마니. 젠장! 좀 더 정신을 

차려야지. 나라고 호락호락 네놈 요구대로 다 해줄성싶으냐. 다 

생각이 있다. 계략이 있다 이 말씀이야."

혼자 구시렁거리던 화안금정수가 입을 쩍 열고 굴 밖의 어둠을 향해 

요수의 귀에만 들리는 울부짖음을 토했다. 잠시 후, 어둠속에서 

파랗게 빛나는 눈동자가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어르신?"

"잘 왔다. 내가 전에 한 말 잊지 않았겠지? 난 볼일 좀 보고 

올 테니 여기를 지켜라."

제게 맡겨진 짐을 또 다른 자에게 대신 떠넘기고, 화안금정수는 

천군이 간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