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불과 며칠 새 온 숲에 가을색이 가득 차 여름 꽃들은 모두 떨어졌다.
그리고 하늘님의 머리 위에 두 송이의 꽃이 완전히 피어났다. 세 번째
꽃의 모양도 흐릿하게나마 보이기 시작했다.
가스라기는 왠지 마음이 헛헛해져서 더 이상 지켜보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저승샘에 몸을 담그고 운기 중인 천군을 두고, 그녀는 비틀비
틀 일어나 숲으로 들어갔다.
예전 같으면 천군의 곁을 뜰 엄두도 내지 못했겠지만 이제는 안 그렇
다. 보기 싫어진 건 아니다. 오히려 전보다 더욱 좋아졌다. 보고 있노
라면 눈이 아릴만큼 좋았다. 단지, 그의 머리 위에 피어나는 아지랑
이 꽃을 계속 볼 용기가 나지 않을 뿐이었다. 저러다가 세 송이가 다
피어버리면 가슴이 무너져 내릴까 봐.
가스라기는 정처 없이 숲을 걸었다. 요새는 걷는 것도, 앉아 있는
것도 모두 힘들었다. 그저 계속 잠만 왔다. 알록달록 예쁜 버섯을
먹었을 때처럼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온 숲과 땅이 춤추듯 흔들렸다.
이제는 돌아가려고 해도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하늘님 혼자 있을 때 요수가 나타나면 안 되는데.'
가스라기는 흐릿한 정신 속에서도 문득 걱정했다. 며칠 전이었던가.
하늘님이 힘들어하는 가스라기더러 샘에 따라 나오지 말고 굴에서 좀
쉬라고 했을 때 일이 떠올랐다. '내가 안 지켜주면 하늘님은 어쩌려
고?'라고 물었더니, 빙그레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더랬다.
쓰다듬어주는 건 좋지만, 가스라기가 지켜주는 건 필요없다는 건가
싶어서 좀 슬펐다.
꽃이 두 송이나 피었으니 이제는 하늘님 혼자서도 충분한 걸까. 아니,
전부터 나는 벼로 도움이 된 적이 없었던 게 아닐까.
비틀비틀, 쓰러질 듯이 걷던 가스라기는 다음 순간 무엇인가에 심하게
부딪히고 진짜로 쓰러졌다. 일어날 엄두도 못 내고 누워있는데, 가까
운 데서 구슬픈 비명이 들렸다.
"아이고, 나 죽네. 박복하다, 운명이여. 삼라천하를 좁다 하던 발걸음
이 오늘 궁벽한 시골 숲에서 멈추고야 마는 것인가. 요수 중에도 급이
있다는데 고상한 것과 천한 것을 분간할 줄 아는 품위 있는 요수라면
건드리지 않고 못 본 척 지나가주련만."
청산유수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어딜 봐도 곧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가스라기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앞에 울긋불긋 화려한 옷을 입고
도관을 삐딱하게 쓴 가짜 '벽혈자 선생', 시혼이라는 남자가 뻗어
있었다. 좀 전에 가스라기와 부딪힌 것이 그였나 보다.
시혼은 누운 채로 너스레를 떨다가 빠끔 시선을 돌려 가스라기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움찔,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가스라기가 빤히 바라보니 잠시 후 조심스레 물었다.
"요괴?"
"아닌데."
가스라기는 찬찬히 대답했다. 그 말을 믿어서인지, 아니면 가스라기의
목소리에 살기는커녕 매가리 하나도 없는 것듣고 안심했는지, 두 다리
로 가볍게 땅을 차면서 엇차 일어났다. 가스라기는 여전히 일어날
힘이 없어서 누운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허허, 그것 참."
시혼은 가스라기 옆에 쪼그리고 앉아 빤히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갸웃
거렸다.
"요괴도 아닌 다 큰 처자가 왜 한밤중에 이 숲에서 얼씬거리고 있을까?
그러고 보니 귓도리골에서는 못 본 얼굴인데."
"마을에서 안살아."
"아하! 그러신가? 그럼 혹시 이웃 마을 처자? 그거 잘되었네. 난 또
귓도리골 사람인가 싶어서 괜히 놀랐잖아."
가스라기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았다. 신기했다. 이 남자는
분명히 나쁜 놈 같은데, 하늘님 말대로 묘하게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엄마가 죽고 난 후로 마을 사람들과는 거의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이 없다. 대화라고 할 만한 것을 해본 상대가 하늘님뿐이었다.
그런데 이 남자와는 말을 나누는 것이 무섭지도, 껄끄럽지도 않았다.
"마을 사람이면 왜 놀라는데?"
가스라기가 말똥말똥 묻자 시혼도 별 경계심 없이 대답했다.
"그야 마을에서 몰래 도망치는 중이니까 그렇지."
"왜 도망쳐? 들켰어?"
"들키긴. 저 촌무지렁이들이 무슨 수로‥‥‥ 어라? 그런데 처자가
그건 어찌 아시나?"
시혼은 다시 눈을 휘둥그레 떴다.
"봤으니까 알지."
태연한 가스라기의 대답에 고개를 갸웃한다.
"아무래도 요괴 아니신가? 뭐, 하긴 요괴라도 이 정도 말이 통하는
상대면 큰 걱정 없지. 사실 요괴보다 더 무서운 게 사람이니."
"그럼 무서워서 도망친 거야?"
"하, 하, 핫, 딴은 그 말도 맞지.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아서 좀
무서워졌거든."
그러면서 머리를 긁적거렸다.
"가짜 도사 노릇이나 하며 한철 신세를 좀 져볼까 했더니, 이 촌 무지
렁이들 생각보다 영악하대. 온 지 며칠 됐다고 자꾸 숲에 들어가서
요수를 몰아내달라는 거야. 나 원, 요수라는 게 그렇게 무조건 힘으로
때려잡는다고 해결될 것이 아니라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안 믿어요.
큰 도성에서는 그렇게 말하면 다 믿는다고. 이건 벽혈자가 쓴 [만요경]
에도 나오는 말이거든. 무식한 것들이 제일 무서워, 하여간. 게다가
좀 있으면 세곡 거둘 때가 되어서 관인이 온다는 소리도 있고 말이지.
오래 있을 동네가 아닌 것 같아 빠져나가려고 하는데 그 촌장 집
계집애는 무슨 눈치가 그렇게 밝은지 계속 눈길을 안 떼네? 허허,
혹시 그 아이가 나를 마음에 몰래 두고 있었던 건 아닐까 몰라. 아무
튼, 그래서 숲을 돌아 큰길로 해서 행운유수처럼 또 길을 떠나볼 생각
이었지. 아무리 공밥이 좋다 해도 내가 요수랑 맞서줄 성싶은가. 세상
에서 제일 귀한 게 목숨이야. 숲 깊은 곳에 들어가면 가스라기라는
요괴 두령이 요수들을 부리고 있을 거라는데 무슨 배짱으로 그 짓을
해."
"난데."
"응?"
"내가 가스라긴데."
시혼은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러다가 손가락을 들어 가스라기를
가리키며 물었다.
"가스라기?"
가스라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괴 두령?"
이번에는 고개를 저었다. 시혼은 멍한 표정을 짓더니 허, 웃었다.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다는 얼굴이다. 가스라기가 이상한 작은
짐승을 발견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것은 시혼의 등 뒤에 나타났다. 처음에는 무슨 애벌레인 줄 알았다.
엄지손톱보다 조금 컸다. 하지만 네 다리가 다 있는 것이 애벌레는 아니다.
회색 몸에 주름이 쪼글쪼글하고, 자세히 보니 머리 위에 뿔도 두 개 났다.
꼬리도 있다. 작아서 그렇지 다리도 굵은 것이 꼭 소처럼 생겼다.
송아지를 닮은 둥근 눈에서는 파란빛이 반짝거렸다. 아직 시혼은 등 뒤의 그놈을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요수다."
가스라기가 가리키며 불쑥 말하자 화들짝 놀라며 펄쩍 뛰어 뒤를
돌아보았다. 긴장한 표정이더니 그 작은 요수를 보고는 하, 하, 핫
웃었다.
"뭐야, 이건. 괜히 놀랐잖아!"
가스라기는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그게 뭔지 알아?"
"그럼 알고말고. 전에도 본 적 있지. 가짜 도사 노릇을 하려면 진짜
도사보다 더 이런 것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니까."
시혼은 에헴 헛기침을 하더니, 사람 둘의 시선을 받고도 달아나지
않고 빤히 바라만 보는 그 요수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놈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름이 환. 근심이라는 뜻이지. 이 요수가
왜 생겨났는지 알아?"
"왜?"
"아주 옛날에 말이야. 삼라 구주팔황의 기초를 세운 시황이라는 황제
가 있었어. 그런데 그 시황이 워낙 무시무시한 분이었거든. 가혹한
왕이 범보다 더 무섭다는 말도 있잖아. 양민들의 근심이 그칠 날이
없었지. 그때 태어난 것이 바로 이 환이라는 요수야. 하지만 보라구.
요만할 때는 성질이 아주 순해. 해를 안 끼치지."
시혼은 히죽 웃더니 허리를 굽혀 그 요수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요수는 말대로 순했다. 시혼의 손바닥 위에 올라가서도 파란 눈을
반짝거릴 뿐 얌전했다. 시혼은 몇 번 손바닥 위에서 그것을 공처럼
통통 띄워보더니 도로 내려놓았다.
"근심이라는 게 원래 이렇지. 사실 뭐 근심걱정이 배를 째고 들어
오나? 다 마음먹기 달린‥‥‥ 어이!"
시혼이 말릴 틈도 없이, 가스라기는 손을 뻗어 환을 잡아보았다.
귀엽고 신기해서 꼭 만져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가스라기가
놈을 손바닥 위에 올리자,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났다.
환이 송아지 같은 입을 짝 벌리더니 가늘게 울어댔다. 그 앵앵대는
울음소리가 꼭 모기 소리 같다. 무슨 말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응?"
가스라기는 귀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러자 엄지손톱만 하던 것이 조금
커졌다. 보고 있는 동안 조금씩 더 자라났다. 이제는 애기주먹만
하다. 다리는 굵고 통통해서 소가 아니라 돼지 다리 같고, 얼굴은
송아지처럼 슬프게 생겼다. 입을 열고 빼애 우니 제법 짐승새끼 같은
소리가 났다.
갑자기 손이 아래로 축 늘어졌다. 손만이 아니라 팔도 그랬다. 천근만
근 쇳덩이를 든 것처럼 무거웠다. 그러고 보니 손바닥 위의 작은
요수가 아까보다 좀 더 커져 이젠 새끼 돼지만 했다. 그렇다고 해도
무게가 이렇게 나갈 리는 없는데 이상했다. 시혼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큰일 났네."
"어, 어?"
놀라는 사이에 요수는 점점 자라났다. 엄마 돼지만 해지고, 큰 소만
해졌다. 이젠 손과 팔이 문제가 아니라 온몸이 놈에게 깔렸다.
가스라기는 버둥거렸지만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주름진 회색 살집에
눌려 앞도 보이지 않았다. 좀 전까지는 그리 구슬프고 귀엽게 들리던
빼애 하는 울음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숨쉬기도 힘들었다. 얼이
반쯤 빠진 데다 겁이 덜컥 난 가스라기는 울음이라도 터뜨리고 싶었다.
시혼의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가스라기는 물었다.
"이거 왜 이래? 왜 이렇게 무서워?"
대답이 들려왔다.
"말했잖아. 그놈은 근심의 요수라고. 근심이 많은 사람이 만지면
한없이 무거워지고 커져. 옛 기록에 보면 나중에는 키가 스무 척을
넘고 무게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가 된다더군. 환에 깔린 근심 많은
자는 결국 거기서 인생 종친다니까."
"꺼내줘. 숨 막혀!"
"난들 무슨 수로. 내 눈에는 여전히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것으로
보인다니까. 근심 많은 사람한테만 그렇게 크게 보이는 거지. 허허,
나야 죄지은 게 없고 걱정거리도 없는 사람이라 전에도 환을 만졌을
때 아무 탈 없었던 거지만, 처자는 많이 다르시네. 도와주고 싶지만
능력이 없으니 어쩌겠어. 하긴, 처자가 사람들 말대로 요괴 두령인
가스라기라면 나는 요수로 요수를 제압한 이요제요의 경지에 이르렀으
니 진짜 도사라고 해도 무방하겠군."
"도와줘!"
"큰 깨달음을 주어 고마워, 처자. 그럼 이만 가볼게. 옆에 계속 있어
주고 싶지만 나도 바쁜 몸이라서‥‥‥."
역시 저놈은 나쁜 놈이다. 가스라기는 울화가 치밀었다. 환 밑에
깔려 버둥거리는 와중에도, 욕이라도 한 사발 퍼부어주고 싶었다.
그런데‥‥‥
"어?"
시혼이 뭔가를 보고 놀란 모양이었다. 바람이 부는 피리처럼 짧은
외마디 소리가 들려왔다. 그다음에 털썩하고 무엇인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짧은 피리 소리 같은 것은 하늘님의 목소리였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듣기는 하되 알 수가 없었다. 마치 천군의 이름을 가스라기가
표현할 수 없는 것처럼. 어쨌거나 가스라기는 그가 이 자리에 왔다는
것을 알았고 기뻤다.
"하늘님!"
환 밑에서 버둥거리며 외치니,
"움직이지 마라."
천군의 음성이 가까이에서 들렸다.
"버둥댈수록 점점 커진다. 환은 그런 요수야."
가스라기는 그 말을 듣고 버둥대던 것을 당장 멈췄다. 환의 무게가
온몸을 짓눌러 내장이 튀어나올 것 같지만, 그래도 하늘님이 시킨다면
뭐든 할 수 있다. 하늘님은 가스라기에게 그런 존재였다. 가스라기가
그에게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하늘님이 떠나지 않는 것.
그렇게 생각한 순간 환이 좀 더 크고 무거워졌다. 가스라기는 금방
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어떻게 해? 그래도 안 작아져, 하늘님."
"움직이지 마. 그리고 마음을‥‥‥ 마음을 편히 다스려라."
"어떻게?"
가스라기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천군은 가스라기 가까이 다가가지
도 못하고 근처를 초조하게 돌면서 어떻게 그 이치를 설명해야 하나
마음 졸이고 있었다. 다가가지 못하는 것은, 환을 들고 있는 사람
가까이 다른 근심 있는 자가 다가가면 그 크기와 무게가 더욱 자라기
때문이다. 자신의 근심이 가스라기를 더욱 힘들게 할까 봐 다가갈
수가 없는 것이다. 땅바닥에 누워서 꼼짝도 못하고 간신히 숨만 쌕쌕
쉬고 있는 가스라기의 가슴 위에 환이 올라타 울고 있다. 천군의 눈에
도 환의 크기는 작아 보였지만, 울음소리만은 우렁차게 들렸다.
천군은 그 울음소리로 지금 가스라기가 느끼고 있는 환의 크기, 즉
근심의 크기를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해?"
가스라기가 울먹거렸다. 천군은 초조하게 입술을 빨다가 말했다.
"근심을 하지 마. 걱정을 하면 할수록 더 커진다. 대체 무슨 걱정을
하고 있‥‥‥."
그는 묻던 말을 그쳤다. 뼈아픈 표정이 얼굴에 떠올랐다. 가스라기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걱정이 무엇일지는 뻔했다. 그리고 그 일에
대해서라면 그가 도와줄 방법은 아무것도 없다.
"안 돼. 아무리 해도 안 돼."
숨이 막히는지, 가스라기의 목소리는 갈수록 희미해졌다.
"걱정‥‥‥안 할‥‥‥ 수가 없어. 무서워. 슬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해‥‥‥ 죽을 것 같아. 하늘님‥‥‥하늘‥‥‥"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 한마디만 해주면 저 환의 무게는 단박에 가벼워
질 것이다. 거짓 약속이라도 상관없다. 가스라기는 그가 말하는 것이
라면 뭐든 믿을 테니까. 천군은 그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할 수
없다. 그는 선인이므로 거짓 약속은 할 수 없었다.
이대로 저 아이가 근심의 무게에 눌려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하나?
가뜩이나 땅과 함께 생기를 잃어가고 있는데. 목숨을 구해준 저 아이
를 원칙 때문에 죽이는 것과 거짓 약속을 하는 것, 둘 중 어느 쪽이
더 무거운 업보일까. 천군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이럴 때 화안금정수라
도 나타나준다면 문제가 간단하련만 이 제멋대로인 기수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를 않았다. 천군은 초조한 표정으로 가스라기 주변을
빙빙 맴돌다가, 갑자기 퍼뜩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삼화취정도 멀지 않았다. 이 정도면 꽤 많은 힘을 되찾았다. 그러니
까‥‥‥ 어쩌면 가능할지도 몰라.'
천군은 결심하고 힘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천의 자락이 펄럭였다. 아니, 사실은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다. 힘을
끌어올리면 선인은 대지가 될 수 있다. 삼라의 대지가 아니라 또
하나의 강건한 대지가 그 자리에 출현하자, 가을 숲의 고요한 공기가
그 대지와 부딪쳤다. 그러면서 바람이 일었다.
충분히 힘을 끌어올린 뒤에 천군은 가스라기를 향해서 나아갔다.
발걸음 또한 대지처럼 무거웠다. 그는 가스라기 위에 몸을 굽히고,
느린 동작으로 환을 잡아들었다. 근심은 무겁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은 대지다. 대지의 무게는 잴 수가 없다.
엄지손톱만큼 작은 요수가 네 개의 다리를 굼실거리며 선인을 바라보
았다. 환은 사실 사악하지 않는 요수다. 사악한 군주의 압제에 시달린
원혼들이 만든 요수이니, 어찌 보면 피해자다. 가련한 존재지만,
어쩔 수 없었다. 천군은 환의 눈을 보며 속삭였다.
"미안하다. 하지만‥‥‥ 불가불."
천군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환의 푸른 눈은 마치 그 말을 알아듣는 것
같았다. 천군은 천천히 말했다.
"귀천."
환이 선인의 손아귀 안에서 파랗게 빛나더니 빛으로 녹았다. 그
빛들은 반딧불이 무리처럼 둥둥 떠다니다가 천천히 밤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본래 야구자나 빙백귀사도 이렇게 귀천시키는 것이 선인의
힘이다. 잊고 있던 사이 회복의 진전이 컸던 것이다. 천군은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늘님!"
환이 사라지면서 겨우 숨을 쉬고 움직일 수 있게 된 가스라기가 그의
품으로 뛰어 들어왔다. 천군은 그녀를 받아 안았다. 그리고 말없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환은 귀천시켰으나, 아직 그의 품안에는 무엇보다
도 큰 근심이 안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