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109)

3-2.

가스라기는 너무도 행복한 꿈을 꾸고 있었다. 아니, 요사이는 살아가

는 모든 순간이 꿈과 같았다. 아무리 보아도 싫증나지 않는 하늘님과 

하루 종일 함께 지낸다. 밤이면 하늘님의 팔베개를 하고 잔다. 가스라

기는 이 이상 행복한 삶을 생각할 수 없었다.

잠결에 윙윙, 바람 소리를 느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에 감싸인 

채, 바람 속을 지나는 것 같은 느낌이다. 마치 딱 한 번 올라본 그네

를 탈 때와 비슷했다. 가스라기는 부스스 눈을 떴다. 어둠 속에 하늘

님의 얼굴이 보였다. 그런데 이곳은 저승샘도 아니고, 굴속도 아니다.

"어.‥‥‥."

가스라기가 입을 열자, 천군이 쉿, 하고 주의를 주었다. 그리고 나지

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무 소리 내지 말고, 잠깐 구경하자."

그러면서 천군이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가스라기도 따라서 눈길을 

옮겼다. 이곳은 귓도리숲의 입구인 모양이다. 멀리 마을의 불빛이 

보였다. 그리고 천군은 가스라기를 안은 채 그중에서 가장 높고 울창

한 나무의 우듬지에 앉아 있었다. 체중을 버틸 만큼 튼튼한 줄기가 

아닌데도, 천군은 새처럼 가볍고 편한 자세였다. 가스라기의 무게까지

더해졌지만 나무는 끄떡도 하지 않았고, 울창한 잎으로 두 사람의 모습

을 감춰주었다. 그리고 나무 아래쪽에서는 해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머리에는 높은 도관을 쓰고, 알록달록 광대 같은 옷을 비고, 한 손에

는 칼, 다른 손에는 방울을 든 남자가 숲을 향해 칼과 방울을 떨어대

며 좌우로 어기적어기적 걸어 다닌다. 왼쪽으로 몇 걸음, 오른쪽으로 

몇 걸음 걷다 멈추고는 칼과 방울을 마구 떨면서 '오오오오오' 소리를

내고, 다시 또 걷는다. 춤이라고 하기도 뭐하고, 그냥 걷는다고 하기

도 뭐하다.

해괴한 짓을 하는 그 남자는 가스라기가 처음 보는 사람이다. 아마도

타관내기가 아닐까 싶었다. 그 남자가 숲을 향해 해괴한 짓을 하고 

있는 동안 마을 사람들이 뒤에 잔뜩 모여서 멍청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닌 밤중에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한참 동안 그 난리를 해대더니 남자가 칼과 방울 든 손을 내려 이마의

땀을 쓱 문질러 닦았다.

"됐습니다. 이것으로 어느 정도 방비는 해낸 것 같습니다. 나머지는 

차차 하면 되겠지요."

마을 사람들이 오오오 하고 탄성을 뱉었다. 적이 안심하는 것 같은 

눈치다. 촌장이 앞으로 나서더니 그 해괴한 남자에게 두 손을 모아 인사했다. 

마을에서는 잘 쓰지 않는, 대처의 관인들이 쓴다는 인사법인 공수지례라는 것이다.

"참말 다행입니다. 도저께서 이렇게 와주시지 않았다면 우리 마을은 

꼼짝없이 망했을 겁니다. 감사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

스물을 갓 넘긴 젊은 도사가 한참 나이 많은 촌장의 예를 받고 우아하

게 답례했다.

"그 무슨 말씀을. 도를 아는 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

까. 그게 다 도리라는 것이지요. 하, 하, 핫."

촌장은 감격한 눈치였다.

"이 나이에 이르러 세 가지 복을 한꺼번에 얻게 되는군요. 우리 마을

을 구하러 도사분이 와주신 것이 첫 번째 복, 그 도사분이 저 유명한 

벽혈자 선생이라는 것이 두 번째 복, 세상에 이름이 높은 벽혈자 선생

께서 이렇게 겸손하고 욕심이 없으시다는 것이 세 번째 복이올시다."

"하, 하, 핫,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전혀 몸 둘 바를 모르는 표정이 아니었다. 촌장은 슥 시선을 

돌려 뒤에 서 있는 한 젊은이를 바라보았다. 덩치가 좋고 완악하게 

생긴 장정인데 발에 단단히 동여맨 각반이 흙먼지로 더럽혀진 것이 

막 오랜 여행에서 돌아온 듯했다. 여봐란듯이 그르매 옆에 붙어서 

있는데, 얼굴에는 흡족한 웃음이 가득했다. 촌장은 그 젊은이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억쇠 네가 재처로 가서 요수를 물리칠 수 있는 고명한 도사분을 모시

고 온다 했을 때, 설마하니 이렇게 큰 성과를 거둘 줄은 몰랐다. 

다른 분도 아니고 그 유명한 벽혈자 선생을 모시고 오다니, 게다가 생각보다 

훨씬 빨리 돌아왔구나. 이제 우리 마을은 살았다. 다 네 덕이다."

"운이 좋았지요."

말은 그렇게 해도 억쇠의 표정은 거만했다. 다 제가 사내답고 용맹하

게 길을 떠난 덕분에 이런 성과도 생긴 거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르매

를 제외하고는 그런 억쇠의 표정을 고깝게 보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부모의 허락을 받아 이 자리에까지 쫄쫄 나라 나온 어린 남자아이들은

억쇠를 세상에서 제일 힘센 영웅이라도 되는 듯이 보고 있다. 당장이

라도 억쇠를 졸라 여행길에 보고 들은 것을 묻고 싶은 눈치다.

촌장과 억쇠를 번갈아 바라보던 '벽혈자 선생'께서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을 억쇠가 빼앗아가는 것이 불만이었던지 어흠, 어흠 헛기침으로 

주의를 모았다.

"참 용감한 젊은입니다. 저도 감탄했지요. 생전 처음 마을을 떠난 

거라면서 어찌 그리 당당하던지. 노상 주막에서 국밥을 먹으면 엽전을

내야 한다는 걸 모르지 않겠습니까? 잘못하면 큰 봉변을 당하게 

생겼기에 이 몸이 나서서 국밥 값을 대신 내주고 어디서 왔느냐 물었

지요."

모르긴 몰라도 억쇠의 덩치나 그 무식함으로 미루어볼 때 봉변을 당하

는 쪽은 분명히 주막 주인이었을 거라고 촌장은 생각했다.

"그랬더니 오호라, 사특한 것들을 물리쳐줄 도사를 찾아서 대처로 

가는 길이라고 하더군요. 사실 처음에는 많이 망설였습니다. 본래 

저는 제 이름을 밝히고 나서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삼류 말코 도사들이나 하는 짓이니까 말입니다."

촌장이 맞장구를 쳤다.

"그렇지요. 본시 신인은 자취를 남기지 않는 법이지요."

"허나, 어려운 일이 있다는데 어찌 제 욕심만 차리겠습니까. 저 억쇠 

총각에게 제 이름과 신분을 대고 그 일을 맡아주마 나설 때, 한편으로

는 또 내가 명성을 추구하여 일을 벌인다는 세간의 오해를 사겠구나 

싶어 마음이 씁쓸하였습니다만‥‥‥."

이렇게 말하며 '벽혈자 선생'께서는 정말로 마음이 아픈 것처럼 가슴

에 두 손을 얹고 탄식했다. 약관을 막 넘긴 나이에, 그럭저럭 미끈하

게 생긴 얼굴에, 약간 우스꽝스럽기는 하지만 마을에서는 본 일이 

없는 알록달록한 대처의 옷까지도 마을 처자들의 눈에는 좋게 보였던

지라, 몇몇 여자들 입에서 달콤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벽혈자 선생'

의 목소리는 더욱 호소력 짙게 깔렸다.

"다른 한편으로는 옛 스승님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였던 것입니다. 

내가 일평생 키운 그 어떤 제자보다도 뛰어나며 조만간 능히 나를 

뛰어넘을 수제자야, 내 말을 잊지 말아라. 도를 아는 자, 도사는 무릇 

그 힘을 반드시 만민을 위해 써야 하느니. 민심은 천심임을 잊지 않는 

것이 도의 근본이니라. 내 말 알겠느냐, 하늘이 낸 뛰어난 수제자 

시혼아‥‥‥."

"시혼?"

한참 이야기에 도취해 있던 '벽혈자 선생'께서, 어리둥절 반문하는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그것은 제 스승께서 저를 부르시던 이름이지요. 촌장님처럼 박식

한 어르신이라면 익히 아시다시피, 이쪽 세계에 몸담은 자들은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 하, 핫, 이거 객담이 길었습니다.

"아아, 그렇군요."

촌장은 도사들이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지

만, 박식한 자라면 알고 있어야 한다니 아는 척하고 넘어갔다.

"그건 그렇고 , 어떻습니까? 숲의 요물들은 이제 퇴치가 된 것입니까?"

'벽혈자 선생'께서는 에헴 기침을 하고는 신중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제가 살펴본즉 이 숲의 요기가 보통이 아닙니다. 오늘은 당분간 

마을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예방을 해둔 정도일 뿐입니다. 일단 급하나

마 이것으로 봉창을 해둔 셈이지요."

"하지만 원래 마을로는 안 들어왔는걸요."

느닷없이 물어온 목소리는 그르매의 것이었다. '벽혈자 선생'께서는 

짐짓 못 들은 척했다. 그런데 의외로 그르매는 질겼다.

"도사님께서 그렇게 요수를 잘 잡으신다면 지금 숲에 들어가서 직접 

잡으시는 게 낫지 않나요?"

"하, 하‥‥‥."

"왜요? 겁이 나시나요?"

촌장이 손녀를 꾸짖으려 했으나, '벽혈자 선생'께서 점잖게 손을 

저어 말렸다.

"하, 하, 핫, 모르시는 말씀. 물론 제가 숲에 들어가 요수들을 때려

잡는 것은 일도 아니지요. 그러나 힘으로 우악살스럽게 내쫓는다고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니올시다. 오히려 잘못 건드리면 요수의 원한이 

쌓여 더 무서운 요수들을 불러들이게 될 뿐입니다. 촌장 어르신께서

도 아시다시피, 옛말에 피는 피를 부르고 모자람은 모자람을 낳는다지

않습니까."

"물론이지요.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마을에 피해가 없도록 천천히 일을 해결할 생각입

니다. 천천히, 위로하듯이, 시간을 두고 요수들을 달랠 것입니다. 

위로하듯이, 노래하듯이, 마치 시를 읊듯이 말입니다."

그는 정말 풍류시인처럼 속삭였고, 다시 한 번 처녀들의 탄식이 

흘러나왔다. 분위기가 다시 좋아지자 '벽혈자 선생'께서는 마을 사람 

모두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제가 왔으니 이제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들 

하시지요. 오늘은 마을에 도착한 첫날이니 딱 이 정도만 하겠습니다. 

사실 여행 끝에 이렇게 도력을 쓰는 것은 스승께서 금지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다지 건강한 체질이 아니라서‥‥‥ 아시다시피, 

하늘은 한 사람에게 두 가지 복을 함께 주지 않으시지요."

그러면서 그는 이마에 손을 짚고 살짝 비틀거렸다. 처자들이 가는 

비명을 흘렸다. 촌장이 재빨리 나섰다.

"우리가 궁벽한 시골 사람이라 제대로 예를 못 갖췄습니다. 여독이 

풀리지 않으셨을 테니 오늘은 속히 방을 치우고 푹 쉬실 수 있도록 

합시다. 거기, 향이네, 제일 좋은 방을 치우고 아궁에게 군불 뜨끈하

게 지피게! 당장 주무셔야 할 것 같네."

마을 사람들은 세상에 다시없는 진객을 맞이한 듯 수선을 떨며 

'벽혈자 선생' 주변으로 보여들어 부축을 한다 마을로 모신다 난리법

석이었다. 환대의 파도에 떠밀려 마을로 가면서, '벽혈자 선생'께서는

병색 짙은 목소리로 또렷하게 중얼거렸다.

"아니, 피곤하긴 하지만 바로 자는 것은 몸에 좋지 않습니다. 스승께

서도 말씀하시기를 도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저녁을 거르지 않아야 

도력이 온전히 유지된다 하셨고, 적당한 술도 원기를 보하는 데 

좋고‥‥‥."

'벽혈자 선생'과 마을 사람들은 떠들썩하게 숲 앞을 떠났다. 그리고 

남은 자리에 한동안 괴괴한 침묵이 감돌다가, 푸훗 하고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무 위에서 지금껏 숨을 죽인 채 구경하던 가스라기의 

소리였다. 참았던 웃음이 한번 터지니 아주 걷잡을 수가 없다. 가스

라기는 배를 잡고 웃어대기 시작했다. 너무 크게 몸을 흔들어대다가 

그만 가지가 휘청하면서 가스라기는 아래로 뚝 떨어질 뻔했다.

"조심해야지."

천군이 붙잡아주지 않았다면 진짜로 떨어졌을 것이다. 가스라기는 

천군의 목을 두 팔로 안고 매달렸다. 조심스럽게 천군이 그녀를 다시 

가지 위로, 그리고 자신의 무릎 위로 끌어올렸다. 끌어올려지는 동안

도 가스라기는 힉힉 웃어대고 있었다. 천군 역시 입가에 담담한 미소

를 짓고 있었다. 좁은 우듬지 위에서 두 사람의 얼굴이 코가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밤의 나뭇잎이 드리우는 검은 그늘 아래, 가스라기는 하늘님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녀의 입에서 웃음이 천천히 사라졌다. 가슴이 두근거

렸다. 한 번 고동칠 때마다 심장이 점점 커져서, 뼈와 살을 뚫고 밖

으로 뛰쳐나올 것 같았다. 매일 팔베개를 하고 얼굴을 마주보면서도 

느끼지 못했던 이상한 감정이다. 하늘님의 입술이 열렸다. 꽃잎처럼.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온 달콤한 숨결이 가스라기의 입술에도 와 닿았다. 

그리고 목소리도.

"어떻더냐?"

가스라기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응?"

"방금 본 것 말이다."

여전히 얼굴은 가까이 있지만, 방금 전의 일은 선잠결에 본 꿈처럼 

잊혀졌다. 가스라기는 다시 헤죽거리면 웃었다.

"웃겨. 바보 같아. 뭐야, 저 사람?"

"너도 들었지 않느냐. 벽혈자라고."

천군은 기묘한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원래 벽혈자라는 도사는 속세의 도인들 중에서도 제법 이름을 날린 

자인데, 요수를 퇴치하는 좌도방문의 술법에 뛰어난 자다."

"하늘님도 아는 사람이야?"

"이름만 들어보았다. 하지만 언행만 보아도 알겠구나. 저자는 벽혈자

가 아니다. 시혼이 진짜 이름이겠지."

"그럼 가짜야?"

"아마도."

"나쁜 놈이네."

"정직하지 못한 인물이긴 하다만, 그리 느낌이 나쁘지는 않구나. 

묘하게도‥‥‥."

천군은 잠깐 말을 멈칫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시혼이라는

자, 어딘가 낯익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 느낌은 이내 가뭇없이 

사라졌다. 묘한 일이었다.

"숲에 요수가 많아 사람들이 들어오게 되면 좋지 않은 일을 당하겠기

에 걱정이 되어 와봤는데, 저런 인물이라면 아마 앞으로도 들어오려고

하지 않을 거다. 염려할 것 없다."

"요수가 많아?"

가스라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주 많지."

사실 가스라기가 지금껏 제 눈으로 본 것은 처음 나타났던 야구자, 

그리고 심장을 물릴 뻔했던 빙백귀사뿐이다. 천군이 이 숲에 깃들게 

된 지 근 오십 일, 귓도리숲에 귀도리보다 요수의 숫자가 더 많아졌

다는 것을 그녀는 전혀 몰랐다.

그중 대다수는 그리 위협적이지 않은 요수로, 단지 지상에 내려온 

선인의 주변을 감돌려 선기를 맡는 것만으로 만족하면서 숲에 거했다. 

어느 정도 힘을 회복한 이후 천군은 의도적으로 선기를 흘려 내보니고 있었다. 

선기로 요수들을 홀려 숲에 잡아두고 있는 셈이다. 마을로 나가 사람들을 해치지 

못하게 위함이다. 아예 선인을 공격해 선기를 흡수하려 드는 위험천만한 

것들은 화안금정수가 막아주고 있다. 그런 모든 일이 가스라기의 눈 밖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그녀는 잘 몰랐다.

"난 하나도 안 보이는데?"

"보지 않는 편이 낫다."

"왜?"

"가짜 벽혈자가 한 말 중에도 틀리지 않은 것이 있다. 피는 피를 부르

고 모자람은 모자람을 낳는다고. 요수처럼 결핍을 느끼는 자의 눈에는

더욱 요수가 잘 보이는 법‥‥‥."

말하다가 천군은 우뚝 멈췄다. 그렇다면 가스라기가 이 숲에 창궐하는

요수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물론 화안금정

수가 지키고 있는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가스라기가 지금 어떤 

결핍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아무런 부족함도 느끼지 못하는

 전한 행복 속에 빠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천군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가스라기를 내려다보았다. 커다란 눈이 여윈 얼굴 때문에 더 

커 보였다. 가슴이 또 답답해졌다.

"피곤해 보이는구나. 그만 돌아가자."

"응. 그런데 나무가 너무 높아. 어떻게 내려가?"

"올라올 때처럼. 잡아."

가스라기의 팔을 목에 단단히 감고, 천군은 나무에서 나무 사이로 

가볍게 몸을 나렸다. 우듬지에서 우듬지로, 둥치에서 둥치로, 땅이 

아니라 나무들 사이로 난 허공의 길을 밟으며 캄캄한 밤의 숲을 지나

갔다. 나무를 차고 다음 나무로 건너뛰어도 가지 하나 이파리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휙휙 발 아래로 지나가는 땅, 옆을 스치는 나무들. 가스라기는 어지럼

증이 일었지만 끝까지 눈을 감지 않았다. 가을 숲에서 귓도리들이 

울어댔다. 어딘가 멀리서 여우가 우는 소리도 들렸다. 가스라기는 

천군의 목을 더 세게 안으며 매달렸다.

이 숲에 나뭇잎보다 더 많은 요수들이 득실거린다고 해도, 가스라기의

눈에는 하늘님 하나를 빼고는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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