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109)

제 3 장

::요수(妖獸)::

천지의 기운은 그 안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죽는 모든 것을 담고 있어

신성하기도 하고 요사하기도 하다. 그중 요사한 기운이 뭉친 것을

요수라고 한다. 요수의 네 등급을 요마, 요정, 요얼, 요괴라고 칭한다.

요사한 기운에도 청하고 탁한 것이 있어 청한 것은 요정이 되고 탁한

것은 요마가 된다. 탁한 것에서 태어났기에 요마들은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그 넋은 혼혼한 넋이라 오직 한 가지 욕망에 의해 움직인다.

바로 결핍을 해소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허나 어찌 요마만이 그러하겠는가. 요정도 요괴도. 무릇 인간과 

그 이상의 존재들에게도 잃어버린 것,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것.

되찾고자 하는 것이 있지 않은가.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결핍을 만들고 결핍을 해소하는 끝없는 

수레바퀴가 아니겠는가.

ㅡ술사 벽혈자.『만요경』

3-1.

숲의 달빛 아래에 한 여인이 나신으로 서 있었다. 구름처럼 틀어 

올린 머리는 칠흑같이 검고, 살짝 치켜뜬 눈동자와 우미한 곡선을 

그린 눈썹도 검었다. 둥글고 풍만한 나신은 손으로 문대면 흰 가루가 

묻어날 것처럼 뽀얗다. 한마디로 사내 홀려먹기 딱 좋은 몸이고, 얼

굴이었다.

색기와 요기가 함께 흐르는 그 눈으로 여인은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한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뜨거운 김이 문문 피어오르는 저

승샘이 있고, 샘 한가운데는 벌거벗은 남자, 정확히는 선인이 앉아 

있었다. 샘 근처에 풀머리 선머슴 같은 인간 계집도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지만, 여인의 안중에는 들지 않았다. 여인은 핏빛 입술을 혀

로 핥았다.

'저건 최소한 진선 급이야. 운기조식 중이니 위험하지도 않아. 강력

한 선기가 느껴져서 와봤더니 이런 월척일 줄이야!'

다음 순간 여인의 눈동자가 푸른 보석처럼 빛을 냈다. 그녀의 몸 주

변으로 속이 울렁거릴 만큼 강력한 염기가 뿜어져 나왔다.

'아무리 강한 선인이라 해도 색공에는 수가 없지! 미혼술로 녹인 다

음 정기를 빨아먹기만 하면 나는 단번에 요괴가 될 수 있어!'

소리 없는 환호를 내지르며 여인은 샘을 향해 한 걸음 내딛었다. 상대

는 무방비 상태였다. 성공은 바로 코앞에 있었다.

그때, 어둠 속에서 갑자기 무엇인가가 뛰쳐나왔다. 선기를 느끼고 

몰려온 경쟁자인가 생각하며 여인이 움찔한 찰나, 거대한 앞발이 

머리를 내리쳤다. 피하려 했지만 적은 너무 빨랐고 강했다. 도대체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여인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

졌다.

숲은 다시 고요해졌다. 일격에 여인을 쓰러뜨린 적은 크크 하고 낮은

웃음소리를 흘리더니, 큰 아가리를 벌려 여인의 나신을 덥썩 물어 

올리고는 훌쩍 몸을 날려 사라졌다.

여인이 정신을 차린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 눈을 뜨자마자 여인

은 두 발로 벌떡 일어섰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일어날 때 

그녀는 '두 발'이 아니라 '네 발'로 일어서고 말았다. 둔갑이 풀린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 요염한 여자가 아니었다. 황갈색의 탐스러운

꼬리가 다섯 개 달리고, 눈은 비취색인 여우였다.

여우는 꼬리 다섯 개를 부채처럼 펼치며 몸을 도사리고 주변을 둘러

보았다. 자신을 이리 끌고 온 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런 

수고는 필요가 없었다. 미처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커다란 발 하나가

여우를 꽉 눌렀다.

"캥!"

여우는 곧 죽을 듯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상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우를 짓누른 채 내려다보면서 킬킬 웃어댔다.

"어디 보자. 꼬리 다섯 개인 오미호로구나. 둔갑술을 쓸 줄 아는 걸 

보니 요정 신세는 벗어난 것 같고, 이제 막 요얼이 된 여우새끼겠지?

게다가 눈알 색이 비취인 걸 보니 비취의 정기를 쏘여서 요수가 된 

비취호로군?"

비취호는 버둥거리면서도 기죽지 않고 대꾸했다.

"캑, 캐앵. 뭐라고 부르든 네놈 밸 꼴리는 대로 해라! 하지만 날 해치

면 뒤끝이 좋지는 않을걸. 동업자끼리 이렇게 뒤통수를 치다니, 후환

이 두렵지 않느냐. 그 선인이 탐났으면 정정당당하게 요력으로 승부

할 것이지 비겁하게 기습이나 하고‥‥‥."

"하, 동업자?"

갑자기 여우를 짓누르던 발에서 약간 힘이 빠졌다. 하지만 숨을 쉴 

정도의 여유만 줬을 뿐이었다.

"아직 이 어르신을 못 알아보셨군. 이 한입거리도 안 되는 여우새끼

야. 두 눈 크게 뜨고 날 봐라."

그제야 상대를 살펴볼 여유를 얻은 비취호는, 잠시 후 주둥이를 쩍 

벌렸다. 눈에 보이는 것은 어둠에 동화된 검은 불꽃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동체의 윤곽과 불타는 듯한 화안금정의 눈동자뿐이었다. 하지

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여우요얼은 요수들 중에서도 제법 귀동냥

한 것이 많아 영리했으니까.

다가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앞발 한 방에 기절한 것도 당연했다.

상대는 동업자가 아니다. 요수와는 격이 다른 신성한 짐승이다. 낮에

는 햇빛 속에 숨고, 밤에는 어둠 속에 숨을 수 있다는 화안금정수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비취호의 얼굴에는 '이젠 죽었구나' 하는 표정

이 떠올랐다.

앙칼지게 대꾸하던 기세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비취호는 주둥이를 

벌리고 캐애앵 서러운 소리를 토해냈다.

"아이고, 잘못했습니다. 미처 못 알아뵈었습니다. 선인을 지키는 

영수님이셨군요."

"어이, 잠깐."

"제발 한 번만 이 불쌍한 요물을 살려주십시오. 사실 영수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저희들은 그렇게 흘러나오는 선기에 저항 할 수 

없다는 걸요. 먹어달라 먹어달라 꼬드기는데 어떻게 안 먹으러 올 

수가 있습니까."

"잠깐이라니까. 닥치고 내 말‥‥‥."

"커허허헝. 영수님께서 지키고 계신 줄 알았으면 절대 오지 않았을 

겁니다. 그저 다 어리석은 죄입니다. 용서해주십시오. 한 번만 용서

해주세요.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니까!"

"그래도 오백 년이나 수행해온 몸인데 이제 와서 요괴 반열에도 오르

지 못하고 죽는 건 싫습니다요, 예? 제발."

크르르 소리가 한 번 나더니, 화안금정수가 입을 쩍 벌리고 소리 

없는 포효를 토해냈다. 사람은 듣지 못하고 요수들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다. 비취호의 귀에는 그야말로 바로 옆에서 울리는 천둥소리 같

아서 귀가 먹먹해지고 혼백이 살짝 외출했다 돌아올 지경이었다. 사

자후 맛을 보여주고서야 겨우 비취호의 주절거림을 멈추게 한 화안금

정수가 앞발로 툭툭 건드리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나는! 영수가 아니다! 응? 알아들었어?"

"엥?"

"영수가 아니라고!"

"하지만‥‥‥ 화안금정수님이 아니십니까?"

"맞다."

"그리고‥‥‥ 제가 선인님을 미혼술로 해치려고 하는 걸 막지 않으셨

습니까?"

"그, 분명히 그랬다만."

"신성한 짐승이시며, 선인을 모시는 분이라면 당연히 영수가 아니신

가요?"

"아니라니까!"

"그럼 뭔데요?"

"난 아직 영수가 아니다! 기수야!"

잠시 침묵이 흘렀다. 비취호가 멀뚱멀뚱 화안금정수를 올려다 보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

공손하긴 하지만, 어딘가 측은해하는 말투였다.

"그러니까, 아직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신 거로군요?"

요수들과 달리 천지의 신성한 기운을 받아 태고에 태어난 짐승들의 

혈통을 신수라 하는데 그중 선인을 섬기는 것을 영수라 한다. 사실 

이 구분은 거의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신수들은 누구나 선인과 벗하

기를 좋아해서 적당한 기회를 만나면 바로 영수가 되기 때문이다. 

아주 극소수지만 섬길 선인을 만나지 못했거나 섬기던 선인을 잃은 

영수를 기수라고 한다. 비취호 같은 요얼에게야 기수든 영수든 태산

보다 높은 존재인 것은 매일반이지만, 그래도 역시 영수보다는 기수

가 아주 조금은 낮게 보이는 것이다. 그 기색을 눈치 챈 화안금정수

가 당장 눈에서 불똥을 튀겼다.

"이 비천한 요물이 어딜 감히! 나는 일자리를 못 구한 게 아니라 

내가 원해서 이러고 있는 거란 말이다!"

"아니, 대체 왜요? 우리 같은 요수들이야 감히 선인을 모실 처지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그저 운 좋게 선기나 한번 맛보기만 바라고 

살지만, 어르신 같은 분들은‥‥‥."

뭔가 설명하려고 입을 열었던 화안금정수는 적당한 대꾸가 생각나지 

않는지 잠시 그대로 입만 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자못 멍청해보여서, 

비취호는 잔머리를 굴렸다. 원래 신수들은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그럼 말대로 그 선인을 지키던 자는 아닐 것이다. 어쩌면 살아날 방

도가 있을지도 모른다.

"에잉, 관두자! 너 따위에게 이 어르신의 큰 뜻을 알려줘서 무얼 

하겠느냐. 그냥 한입에 삼켜버리면 그뿐이지."

그러더니 화안금정수가 입을 쩍 벌렸다. 비취호는 다급하게 말했다.

"잠깐, 잠깐만요. 하지만 말씀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뭐가?'

"선인을 지키시던 것도 아니라면서요."

"그렇지."

"그런데 왜 저를 잡아드시려고요?"

"몰라도 돼!"

"사실은 선인을 지키시던 거죠?"

"아니라니까!"

"그럼 잡아드시면 안 되죠. 전 어르신께 덤빈 게 아닌걸요. 원래 신수

님네들은 꼭 필요한 살생이 아니면 안 하시잖습니까."

이 교묘한 요설이 먹혀들었는지, 화안금정수의 말문이 막혔다. 비취

호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혹시, 그동안 저 선인의 선기를 느끼고 이곳에 왔던 동업자들을 어르

신께서 다 잡아드셨습니까?"

"아니래도!"

버럭 화를 낸 화안금정수는 비취호를 잡아먹으려던 건 까맣게 잊고 

자신의 엉성한 논리를 채울 방법을 생각해내려고 끙끙거리기 시작했다. 

희망을 본 비취호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요력이 낮은 여우요얼이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그저 믿을 건 머리뿐이었다.

"어르신, 영수가 아니고 저 선인을 지킬 의무가 없으시다면, 저는 어

르신께 해를 끼친 바가 없으니 보내주세요. 제가 감히 어르신께서 머

무시는 숲에 들어온 것이 죄라면 머리 조아려 용서를 빌고 다시는 이

곳에 오지 않겠습니다. 네?"

"잠깐!"

기껏 콧소리 섞어 아양을 부렸는데 화안금정수가 벼락처럼 소리를 

지르더니 득의양양한 웃음을 지었다.

"생각났다. 널 잡아먹어도 되는 이유!"

어이쿠, 큰일나버렸다. 비취호는 사색이 되어서 발발 떨면서 물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러니까, 이 어르신은 저 선인 나부랭이를 지키는 영수는 아니다."

"예. 그런데요?"

"하지만, 저 선인 나부랭이가 살아 있어야 이 어르신의 오랜 소망을 

이룰 수 있거든. 그래서 지켜주기로 한 거다. 이건 거래다. 약속이다!"

비취호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기수로 남아 있는 것도 괴상하다 여겼더

니, 이 작자는 정말 괴팍하다. 아무래도 미친 신수인 모양이다. 

정상적인 신수라면 어찌 말로 좀 꼬셔볼까 했는데 미친놈을 만나다니,

팔자가 사나워도 이리 사나울 수가!

"자! 그러니까 어르신께서는 너를 잡아먹어도 되는 거다! 이의없지?"

대꾸도 기다리지 않고 화안금정수는 대뜸 어흥 하고 아가리를 벌렸다.

비취호는 다섯 개의 꼬리를 마구 흔들며 부질없는 마지막 하소연을 

했다.

"자, 자, 잠깐만요. 어르신! 저, 저는 알고 보면 무척 쓸모 있는 요물

입니다! 제발 잡아드시기 전에 한 번만 생각해보시‥‥‥."

그러나 화안금정수는 더 이상 비취호와 대화할 의사가 없는 모양이었

다. 거대한 아가리가 비취호의 대가리를 덮쳤다. 어둠이 비취호를 감

쌌다. 처량한 비명 소리는 그 아가리 속에 삼켜졌다.

칠월 초사흗날. 그믐에서 막 벗어날까 말까 하는 달이 중천에 떴을 때

천군은 운기를 끝내고 눈을 떴다. 주변은 조용했다. 화안금정수가 제

대로 일을 하고 있는 모야이다.

샘에서 나와 천의를 걸친 뒤, 천군은 가스라기를 향해 걸어갔다. 가스

라기는 나무 그늘 아래에 죽은 듯이 쓰러져 자고 있었다. 요사이 더욱

잠이 많아졌다. 얼굴은 더욱 여위었다. 조금씩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샘까지 따라 나올 필요 없으니 굴에서 쉬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는다.

하늘님을 지켜야 한다고.

천군은 허리를 굽혀 가스라기를 안아 들었다. 가랑잎처럼 가벼웠다. 

그러나 천군은 한없는 무게를 느꼈다. 육신의 무게가 아니라 생명의 

무게였다. 부스럭, 등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어둠 속에서 화안금정

수가 걸어 나왔다. 천군이 안아 든 가스라기를 보더니 주둥이를 일그

러뜨리며 웃었다.

"박복한 계집이군. 선인 나부랭이 하나 주웠다가 제 모든 것을 잃게 

생겼으니."

"무슨 일이지?"

천군은 가스라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용건을 물었다.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짐승은 되물었다.

"벌써 백 일의 절반은 흘렀다. 이제 슬슬 대답해줄 때도 되지 않았나?"

"대답?"

"내 요구를 들어준다는 대답 말이다! 생각해보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천군이 비로소 화안금정수를 돌아보았다.

"더 생각해봐야겠다. 네 말대로, 아직 백 일의 절반밖에는 흐르지 

않았으니."

"흥,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지. 설마 딴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천군은 별말이 없었다. 무표정한 그 얼굴에서 어떤 내심도 읽어 낼 

수가 없어서, 화안금정수는 초조해졌다.

'흥, 백 일이 지나면 삼화취정의 단계를 회복할 테니 선계 진입을 

혼자서도 이루어낼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건 진입에 필요한 힘일 뿐 

여기서 선계 입구까지 네 힘으로 가려면 고생이 몹시도 심할걸. 네가 

내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있나 어디 두고 보자. 혹시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내게도 다 계산이 있다. 나도 머리를 쓸 줄 안다 이 말씀

이야!'

화안금정수는 한껏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뭐, 좋다. 더 기다려주지. 어쨌든 그걸 이야기하러 온 건 아니고‥‥‥."

"숲 입구에 기이한 인간이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해주러 온 거냐?"

"알고 있었나?"

"안 그래도 지금 가보려던 참이다."

천군은 가스라기를 안은 채 미끄러지듯이 화안금정수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어쨌거나 알려주러 오다니, 기특하군."

"아, 알려주러 오다니? 내가 언제! 나는 그저 네놈이 그것도 못 알아

차리면 비웃어주려고 한 것뿐이야. 진짜다! 게, 게다가 요수라면 내가

어찌해볼 수 있지만 인간이기 때문에‥‥‥."

"궁색하군."

천군은 한마디를 남기고 다음 순간 나무들 사이의 어둠 속으로 훌쩍 

몸을 날렸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화안금정수가 크르르, 목을 

울렸다.

"삼화취정이 멀지 않았군. 곧 때가 올 거야!"

그것은 천군이 선계로 돌아갈 순간이 머지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