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109)

2-4.

유월이라 보름, 물맞이 날이다. 원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냇가로 나가 찬물에 머리를 감아 더위를 쫓고, 물맞이 음식을 먹으

며 노는 날이다. 하지만 올해 귓도리골 사람들은 물맞이를 할 형편

이 아니었다.

"요순지 요괸지 그런 것들이 여직도 동구 밖에서 어슬렁거리는

데 물맞이는 무슨 물맞이래요?"

조심성 많은 아낙들은 물맞이의 '물' 소리만 듣고도 손사래를

쳤따. 한 달이 넘는 동안 딱히 요수들에게 피해를 본 일이 없는데도

그렇다. 분명 촌장의 말로는 요수들은 사람을 보면 다짜고짜 해치

려 든다고 했는데, 기이하게도 그것들은 마을을 침노하지 않고

무엇인가에 홀린 것처럼 귓도리숲으로 들어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사실 요수보다 더 큰일은 따로 있었다. 그러니까 요수가 나타나

기 시작한 오월부터, 기묘하게도 귓도리골의 논과 밭에 곡식이

여물지 않는 것이다. 많이 쳐봐야 절반이나 건질 정도다. 어디

곡식뿐인가. 키우는 가축들도 새끼를 통 낳지 않거나 낳더라도

빌빌거리는 것들만 낳았다. 한마디로 올해 농사는 완전히 망친

것이다.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날씨가 궂었던 것도 아니다. 마치 땅이

힘을 다한 것처럼, 그 땅에서 자라는 것들 전부가 시들시들했다.

흙도 이상하다. 색이 전에 없이 불그죽죽해지는 것이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쁘다. 작년에 거둔 곡식으로 올가을까지는 어찌어찌 버

틴다고 해도 당장 겨울부터가 문제다. 이런 마당에 물맞이를 할

마음이 들 리가 없다. 농사를 망친 것도 알고 보면 요수들이 득실거

려서 땅이 놀라 그런 것이다 싶고, 그 또한 결국 가스라기 탓인

것만 같았다.

"대도로 간 억쇠는 왜 소식이 없는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물맞이 날 아침에 촌장 집 마당에 모여서는 이런 푸념이나 하고

앉았다. 촌장은 혀를 찼다.

"대도가 어딘데 한 달 만에 갔다 오겠는가? 게다가 생전 처음

마을 밖으로 나가본 아이인데. 너무 조바심들 내지 말게. 될 일도

안 되니."

"혹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 봐 그러지요. 아이고, 내 새끼."

촌장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아낙은 한 달 전 마을을

떠난 억쇠의 어미다. 촌장은 눈살을 찌푸리며 통박을 주었다.

"어허, 말이 씨 된다는 소리도 못 들었는가? 입 조심하시게."

억쇠네는 촌장 뒤편을 힐끔 보더니 되받아쳤다.

"어쨌거나 내 새끼가 마을을 위해서 목숨 걸고 나간 것이니,

돌아오거들랑 약조했던 거 없던 일이라 입이나 닦지 마세요. 어이

구, 내 새끼."

억쇠네가 힐끔 본 것은 촌장의 손녀 그르매였다. 억쇠네의 다짐

을 듣고 그르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촌장 역시 눈살을 찌푸리더

니 억쇠네한테서 눈을 돌려 마을 사람들을 둘러보고 말했다.

"어찌됐든 간에, 이 좋은 날 모여서 아침 댓바람부터 이 무슨 

맥 빠지는 소리들인가. 물맞이를 어찌할 것인가 이야기나 해보세."

"아니, 그러니까 이런 판국에 물맞이는 무슨 물맞이란 말입니

까? 어디서 그 흉측한 것들이 나타날지 모르는 판국에 멱이나

제대로 감을 수 있겠어요?"

자발없이 또 톡 쏘아대는 억쇠네를 곁눈으로 흘기고, 촌장은

에헴 수염을 쓰다듬었다.

"어허, 이런 못 배운 사람들을 봤나. 자네들 대관절 물맞이를

왜 하는지도 모르나?"

촌장은 그저 나이만 많다고 되는 건 아니다. 아는 것도 많아야

한다. 촌장 할아버지는 이 마을에서 유일하게 외지에 나갔다

온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고, 그때 들은 무수한 이야기가 그 아들로,

손자로 전해져 내려왔다. 마을 사람들은 새카맣게 모르는 요수니

물맞이니 하는 것을 자세히 아는 것도 다 그런 집안 내력 덕분이다.

"더워서 하는 거 아니래요?"

촌장이 유식한 체를 하기 시작하면 어쩐지 기가 죽는 마을 사람

들이 호기심을 드러내며 물었다.

"그것도 있지. 하지만 사람이 몸에 열이 많아지면 당연히 사특

한 병이나 귓것이 꼬이기 마련이거든. 그래서 물맞이를 하는 걸세.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으면 몸에 달라붙은 요사한 기운

들이 다 씻겨 나가지. 그게 다 놀고먹는 것 같아도 옛사람의 지혜가

담긴 일일세. 그러니 오히려 지금 같은 때야말로 물맞이를 꼭 해내

야지."

그러자 마을 사람들의 표정이 조금씩 달라졌다.

"하, 그러고 보니 요새 통 입맛이 깔깔해서 뭘 제대로 목구멍에

넘겨본 적도 없네. 물맞이 날에는 역시 상추쌈을 먹어야지."

"그 집 텃밭에는 제대로 자란 상추가 있는 모양이네? 그럼 한번

맛이나 보자고."

물맞이 음식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입맛들이 되살아났는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무릎을 짚고 일어서더니 온 마을이 물맞이를

하러 냇가로 나가게 되었다. 냇가는 동구 밖이긴 하지만 요수들이

자주 나타나는 귓도리숲과는 반대편이라 조심만 하면 큰 탈 없을

거라고 말하면서도, 남정네 몇몇은 박달나무 몽둥이를 일단 챙겼

다. 다들 동구 밖에 모였을 때, 촌장의 손녀인 그르매는 아침나절

부터 준비해두었던 음식과 술을 깜빡 부엌에 두고 온 것이 생각나

서 잠시 기다려 달라 부탁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텅 빈 마을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그르매의 표정은 착잡했다.

약속을 어기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듯이 자신을 흘겨보던 억쇠

네의 눈빛이 떠올랐다. 한 달 전에 마을의 대표로 대도를 향해

떠난 억쇠는, 자신이 무사히 일을 마치고 돌아오게 되면 그르매를

각시로 달라고 했다. 촌장은 흔쾌히 승낙했고, 때문에 그르매는

억쇠의 일이 잘되기를 바랄 수도, 안 되기를 바랄 수도 없는 신세였

다. 억쇠의 일이 잘 풀려야 마을도 안전해지겠지만, 그렇게 되면

올해가 가기 전에 꼼짝없이 시집을 가야 한다. 억쇠가 마을 장정들

중에서는 제법 괜찮다고 해도 그녀가 꿈에 그리는 젊은 관인에

비하면 수사슴과 돼지처럼 격이 다르다. 어쩌면 좋을까나. 어찌해

야 좋을까나.

무거운 발걸음으로 부엌간에 막 들어서려는 찰나, 어둑한 부뚜

막 쪽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후다닥 튀어나오더니 그르매를 냅다

밀쳤다. 그르매는 꺄악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혼이 쏙 빠져서 주저앉아 있다가 간신히 고개 들어 막 울짱을

넘어 달아는 그 시커먼 그림자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그르매는

울컥했따.

"가스라기!"

가스라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숲 쪽으로 달아났다. 두 팔에

커다란 보따리 하나를 안고 있는 걸 보니, 한동안 뜸하던 도둑질을

다시 시작한 모양이다. 그르매는 벌떡 이러나서 손에 잡히는 대로

돌멩이를 집어 들어 힘껏 가스라기를 향해 던졌다. 물론 맞을 리

없다. 멀어도 한참 멀다. 그르매는 발을 구르며 외쳤다.

"너 때문이야! 다 가스라기 너 때문이야!"

가스라기는 품에 보따리를 꼭 끌어안은 채 숲길을 내달렸다.

보따리 안에는 그녀가 하늘님을 위해 훔친 음식과 술이 들어 있다.

하늘님, 하늘님. 그 이름을 입으로 소리 내어 부르는 것만으로도

가스라기는 너무나 기분이 좋아서 발바닥이 간질간질해지는 느낌

이었다. 팔짝 뛰고도 싶고, 데구루루 구르고도 싶었다. 하늘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해주고 싶었다. 해줄 수 있는 일이 적다는

것만이 그로 인해 그녀가 겪는 유일한 슬픔이었다.

선인은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된다고 했고, 실제로 지금껏 멀쩡

했지만 가스라기는 안심할 수 없었다. 내놓은 음식들이 입에 맞지

않아서 잘 먹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다. 물맞이 날 마을 사람들이

먹는 음식은 곱고도 맛이 있으니 하늘님도 좋아할 거다. 그것만

생각하며 달리는 가스라기의 발걸음은 그야말로 날아갈 듯했다.

핏빛으로 붉은 숲의 땅 위, 말라붙은 가시덤불과 이끼조차 벗겨진

허연 바위, 쓰러진 나무를 단숨에 뛰어넘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눈앞이 아찔하여 걸음을 멈췄다. 속에서 쓴물

이 올라오는 것도 같고, 팔다리에서 기력이 쭉 빠졌다. 잠시 서서

숨을 고르니 이내 나아지긴 했지만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불쑥불쑥 이렇게 어지럽고 힘이 없다. 어디 아픈것도 아닌데.

왜 이러지? 뭐 잘못 먹었나? 가스라기는 잠깐 생각했다. 하지만

답은 알 수 없었다. 만약 그녀에게 하늘님이 없다면, 좀 더 그

문제로 머리를 싸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는 하늘님이

있다. 다른 문제는 모두 그다음이었다.

가스라기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나중에 생각하자. 지금은

빨리 하늘님에게 가야지. 그녀는 마른 삭정이들을 밟아 부수면서

하늘님을 향해 달려갔다.

가스라기가 수풀을 헤치고 샘터에 도착했을 때, 샘에 몸을 담그

고 있는 하늘님의 벌거벗은 등이 보였다.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다가가려던 가스라기는, 순간 하늘님의 맞은편 숲 속에 뭔가 흰

불꽃같은 것이 굼실거리는 모습을 보았다.

"어?"

눈을 한 번 깜빡이고 나니 그 불꽃은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방금 눈으로 본 것이 진짜 본 것인가 의심스러울 정도였

다. 하지만 가스라기는 눈보다는 코를 믿었다. 킁킁거려보니, 저승

샘 근처에 하늘님의 댓잎 냄새가 아니라 낯선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건 설명하기 지극히 어려운 냄새였다.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불

꽃 한가운데 코를 들이밀고 냄새를 맡을 수 있다면 아마 이런

냄새가 아닐까. 불에 타는 머리카락이나 살코기의 냄새가 아니라,

불 그 자체의 냄새 말이다.

하지만 불꽃에 무슨 냄새가 있고, 하물며 세상에 하얀 불꽃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가스라기는 고개를 한 번 갸웃하고는 저승샘

을 향해 다가갔다.

샘에서 솟아나는 김 때문에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지만, 그 안에 앉아 있는 하늘님의 머리 꼭대기에서 예의 그

아지랑이로 만든 꽃이 또 피어났다.

가스라기는 샘가에 주저앉아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꽃은

전보다 훨씬 또렷해지고, 오래도록 피어 있었다. 한 송이는 이제

거의 손에 잡힐 만큼 확실히 피었고, 그 옆에 또 다른 꽃 한송이가

보일락 말락 모양을 갖춰가고 있다.

꽃이 세 송이가 되면 ‥‥‥.

가스라기는 그다음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하늘님 옆에 앉아서 그 모습을 보고 있을

수 있다는 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깨어나면 가져온 음식을 보여줘

야지. 이걸 보면 하늘님이 좋아할 거야. 많이 기뻐할 거야. 가스라

기는 무릎에 턱을 고이고는 방실방실 웃으면서 그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

"눈 뜨면 안 돼. 아직이야, 아직."

밤이 되어 굴로 돌아온 뒤 가스라기가 깜짝 놀라게 해줄 일이

있다면서 눈을 감고 기다리라고 너스레를 떨어댔지만, 천군은 사

실 가스라기가 내밀 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치료가 많이 진전되어 그는 선인의 감각을 거의 되찾고 있었다.

선인의 오감은 매우 예민해서, 가스라기가 보따리 속에 꽁꽁 숨기

고 있는 음식과 술의 냄새를 진작부터 맡고 있었다.

그걸 모르는 가스라기가 눈을 감고 기다리라고 졸라댄 터라

귀찮아서 감고는 있는데, 그러자니 처지가 한심하기도 하고 우습

기도 해서 천군은 저도 모르게 담담한 웃음을 물었다.

"좋아! 이제 눈 떠도 돼!"

천군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근 한 달 사이에 부쩍 마른 가스라기

가 보였다. 광대뼈가 다 드러날 정도로 바싹 여윈 얼굴이라 두

눈은 더욱 커 보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숲의 나무들이 죽어가는 것을, 땅의 기운을

먹고사는 짐승들이 병드는 것을 천군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 원인

이 다름 아닌 자신이 흘린 피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가스라기는

이 숲에서 살고 이 숲에서 먹을 것을 구하는 처지니, 숲과 함께

조금씩 죽어가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스스로는 전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천군은 명치에 무엇인가 얹힌

것처럼 답답했다.

"내가 뭐 가져왔게? 자, 봐!"

자랑스레 내보이는 투박한 옹기 술병, 그리고 뚜껑이 달린 질그

릇 안에 든 음식들. 앵두만 하게 썬 가래떡을 데처 꿀물에 띄운

떡수단이며, 보리를 삶아 오미자 물에 띄우고 잣을 뿌린 보리수단,

곱게 부친 맨드라미전. 모두 물맞이 날 특별히 먹는 음식들이다.

"놀랐지? 놀랐지?"

하나도‥‥‥.

천군은 약간 웃었다. 가스라기는 훨씬 환하게 웃었다.

"먹어! 하늘님 주려고 가져왔다. 어서 마셔!"

천천히 술병을 향해 손을 뻗으면서도 천군은 가스라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아싿. 철퍼덕 앉아서 두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기대에

찬 눈으로 보고 있다. 분명히 조금씩 죽어가고 있는 저 생명이

어쩌면 저렇게 활기 있어 보이는 걸까. 내가 떠난 뒤에도 저럴

수 있을까.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이 인간 계집도 알고 있을까.

천군은 다른 음식은 제쳐놓고 술병부터 잡았다. 잠깐 망설이다가

물었다.

"마셔볼 테냐?"

가스라기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나도?"

"그래."

"어떻게?"

"어떻게라니. 물을 마시는 것과 똑같다."

가스라기는 어정쩡하게 두 손바닥을 오므려서 천군 앞으로 내밀

었다. 손으로 술을 받아 마시겠다는 듯이. 천군은 웃었다.

"술은 적당한 술잔이 있어야 맛이 제대로 나는 법이지."

가스라기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잔이 없는걸."

"어디 보자. 늦게까지 핀 들꽃이나 넓은 잎사귀 같은 것이라도

있으면 그럭저럭 술잔을 삼을 만하겠구나."

선계에서 이따금 벌어지던 술자리의 도락을 떠올리며 천군은

무심코 한마디 했다. 그러자, 가스라기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

"그런 것도 없어. 요즘 이상해. 꽃들은 일찍 시들고, 잎사귀는

다 말라비틀어졌어."

그 말에 천군은 잠시 표정을 굳혔다가 말을 돌렸다.

"그럼 할 수 없지. 옛말에 술잔이 없으면 목구멍을 술잔으로

삼으라고 했으니 그냥 이렇게 마시자."

그는 조잡하게 술병 아가리를 틀어막고 있는 천 뭉치를 뽑아내

고 한 모금 들이켰다. 독주가 불길처럼 퍼져갔다. 쓰라리면서도,

그 쓰라림만큼 기분이 좋았다. 선계의 술과는 다른 묘미가 있었다.

신기하다는 듯이 보고 있는 가스라기에게 그는 술명을 내밀었다.

가스라기가 움찔했다. 그는 장난스레 더 내밀었다. 가스라기는

눈치를 슬금슬금 보다가 두 손으로 술병을 받았다. 다시 한 번

천군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더니, 조심조심 입술을 오므려 술병

입구에 대고는 기울였다. 술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동안 가스

라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기침을 하며 토해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가스라기는 한

모금을 다 마시고는 술병을 입에서 떼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우와아아아, 아파."

그것이 난생처음 술을 마셔본 가스라기의 감상이었다.

"아프다고?"

"응, 아파. 여기, 여기, 여기!"

매운 음식을 먹은 것처럼 입에 손부채질을 하면서, 가스라기는

목과 가슴과 배를 가리켰다. 단번에 얼굴이 새빨개지고 숨도 쌕쌕

거렸다. 그런데 눈빛은 더욱 초롱초롱했다.

"그래서, 마시기 싫으냐? 그럼 이리 주고."

"아니!"

제가 생각해도 아니라고 대답하는 목소리가 너무 컸던지, 가스

라기는 제풀에 꺄르르 웃더니 술병을 잡고 물었다.

"한 번 더 마셔도 돼?"

천군은 짐짓 엄하게 대답했다.

"안 돼."

가스라기는 당장 울상이 되었다.

"왜?"

"술은 예를 지켜서 마셔야 하는 법. 내가 한 모금 마시고 난

다음이 네 차례다."

가스라기는 주둥이를 내밀고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술병

을 천군에게 돌려주었다. 하지만 눈빛이 반짝거리는 걸 보니 술병

을 돌리는 이 놀이가 꽤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일배, 부일배. 술잔은 없지만 목구멍을 술잔 삼아 둘은 계속해서

술병을 주고받았다. 새콤달콤한 떡수단, 보리수단을 안주로 술병

반을 비울 때쯤, 가스라기는 얼굴은 물론이고 목덜미와 손발까지

새빨개졌고 천군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있잖아, 하늘님."

"응?"

"하늘님이 원래 살던 곳‥‥‥. 뭐랬지?"

"선계."

"아, 그래, 거기. 거기도 이런 술이 있어?"

"술은 있지."

"거기 술도 이렇게 매워?"

"선계에서 이런 술은 마셔본 적이 없다."

이렇게 풍미 없고 그저 독하기만 한 술은 없지.

"와아, 그럼 이 술 좋은 거야?"

말귀 어두운 녀석.

"그래."

"웃는 거 보니까 정말 좋은 거구나. 나도 좋아. 술 좋아할래!"

술꾼이라도 된 것처럼 목구멍을 술잔 삼아 다시 일배, 부일배.

"하늘님."

"응?"

"하늘님 살던 곳은 어떤 곳이야? 좋아?"

"좋은 곳이지."

"어떻게?"

"지나친 기쁨이나 지나친 슬픔이 없는 곳이다."

"그게 뭐가 좋아?"

"그럼 뭐가 좋은데?"

"으음, 배고프지 않거나 춥지 않거나."

"춥지도 않고 배고프지도 않은 곳이긴 하지."

"그럼 좋겠네! 어, 아냐, 아냐. 맛있는 것도 못 먹고 안 좋겠다."

"먹긴 먹어. 안 먹는다고 죽는 게 아닐 뿐이지."

"그래도 재미없겠네. 거긴 다 하늘님 같은 사람만 살아?"

"아닌 사람도 있지. 하지만‥‥‥."

"하지만?"

"선기가 있는 사람만이 살 수 있다."

"그게 뭐야?"

"선계의 기운을 말하지. 선골이든가. 선정이 있다던가, 선총을

입었다던가."

"‥‥‥골? ‥‥‥정? ‥‥‥총? 그게 다 뭐야?"

"선골이란, 선인이 될 수 있는 자질이다."

"헤에? 그건 어떻게 알아?"

"선인이 보면 안다."

"하늘님도 알아?"

"그래."

"나는? 나는 그거 있어?"

천군은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가스라기의 선기를

본 적이 없다. 선안(仙眼)을 돋우어 사람을 보면, 선인은 그 사람의

선골 여부라든가, 선정의 농도를 알 수 있다. 그동안은 선안을

돋우는 데 쓸 여력이 없었으므로 미처 확인해볼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어디 한번 보자."

그렇게 말하고 천군은 정좌한 채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가스라기는 그의 검푸른 눈동자에서 푸른빛이 더욱 짙어진 것을

볼 수 있었다.

잠시 후, 그 푸른빛이 사라졌다. 가스라기는 기대에

찬 표정으로 물었다.

"어때?"

천군은 잠시 대답을 못했다. 선골은 기대도 안 했지만, 선정이라

도 짙기를 그도 내심 바라고 있었다. 선골은 당장 현생에 선인이

될 수 있는 몸을 말하고, 선정은 선계와의 인연이 몇 생을 거듭해

꾸준히 쌓여 기운으로 뭉친 것을 의미한다. 선안으로 보면 선정이

쌓인 인간의 미간에는 점 같은 것이 보이는데, 선골에 가까운 인간

일수록 그 점이 짙다. 가스라기의 미간은 티 한 점 없이 깨끗했다.

선인인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까지 했지만, 가스라기는 지금까지의

생에서 한 번도 이런 선연을 맺어본 적이 없는 모양이다.

만약 약간이라도 선기가 보였다면 가스라기를 위해서는 무척이

나 좋은 일이므로, 천군은 내심 안타까웠다.

"없어?"

표정을 읽었는지 가스라기가 물었다. 천군은 천천히 고개를 끄

덕였다.

"쳇."

툴툴거리기는 하지만 의외로 많이 실망한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녀에게 선기가 있기를 바란 것은 가스라기보다 천군

자신 같았다. 천군은 가슴 밑바닥이 잔잔히 흔들렸다.

'내가 그걸 바란 건, 이 아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이 편하

기 위한 것이었던가.'

"그럼, 저기, 그건 뭐야? 선총?"

쉴 틈을 주지 않고 가스라기는 바로 물었다. 천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것만은 묻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응? 그게 뭐냐니까, 하늘니이임."

"술 쏟아진다. 잡아당기지 마."

"대답을 해줘야지이이."

"선총이란‥‥‥."

"응."

"선인이, 선기가 없는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야."

"정말?"

당장 눈을 반짝였다.

"아무한테나 막 주지는 않아."

"쳇."

주둥이를 내놓고 불만을 표했지만 천군이 외면해버리고 더 이상

그 이야기를 하지 않자, 심심하지 몸을 좌우로 까딱까딱 흔들어대

던 가스라기가 문득 아, 하고 입을 열었다.

"참, 참, 하늘님, 나 이상한 거 봤어."

무슨 소린가 쳐다보니 가스라기는 손을 허우적거리면서 무엇인

가를 표현하려고 애썼다.

"샘가에서 봤어. 이렇게 크고, 불꽃같고‥‥‥ 냄새도 불꽃같은 거."

천군이 대답하지 않자, 가스라기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잘못 본 건가?"

천군은 짚이는 바가 있었다. 그래서 더욱 놀랐다. 지난 한 달간,

가스라기가 제 딴에는 운기 중인 천군을 지킨다고 저승샘 옆에

바싹 붙어 있었지만 실제로 요수를 만난 적은 그리 많지 않다.

정작 요수들이 가까이 오기 전에 화안금정수가 막아버렸기 때문이

다. 비록 잠깐일망정 가스라기가 화안금정수의 모습을 본 게 분명

하니 놀라운 일이었다. 신수는 하계인에게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면 능히 자취를 감출 수 있다. 때문에 근처에서 얼씬거리면서

도 한 번도 속세인의 눈에 띄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가스라기는 그것을 '보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냄새

도 맡았다'고 한다. 보면 볼수록 신기한 가스라기다. 아직까지

가스라기가 어떻게 점혈을 풀 수 있었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천의

를 잘라낸 것도 마찬가지다.

어째서일까. 분명히 선골도 아닌, 작고 보잘것없는 한 마리 들짐

승 같은 하계의 인간 계집이 선인으로서 그가 가진 모든 상식들을

하나하나 부수고 있었다. 어쩌면 '하계의 계집들을 조심하라'는

것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일까.

"에헤헤, 잘못 봤나 보다. 하긴 요새 자꾸 어지럽고 헛것도 자주

봐. 이히히."

술에 취하자 가스라기는 웃음이 많아졌다. 웃다가 앉은 자세도

지키지 못하고 옆으로 풀썩풀썩 쓰러지곤 했다. 쓰러졌다가는 오

뚝이처럼 다시 일어섰지만 이내 반대 방향으로 또 쓰러졌다. 그러

고는 뭐가 재미있는지 킥킥 웃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천군은

다시 한 모금을 마시고 술병을 내밀었다. 그러나 가스라기의 손은

술병 앞에서 허우적거리기만 할 뿐 잡지 못했다. 몇 번 허우적거리

다가 포기했는지 손을 내리더니, 느닷없이 바닥에 냅다 누웠다.

"나 졸려."

혀 꼬인 소리고 그렇게 말하고는 누운 채로 꼼틀거렸다. 저러다

곧 잠이 들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천군의 심경은

복잡했다.

자신이 흘린 피로 인해 병든 대지, 그 대지로 인해 조금씩 죽어

갈 가스라기, 가진 것도 없으면서 뭐든지 주려고 하는 작은 하계의

계집. 그에 비하면, 자신은 명색 선인이라면서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너무나 없었다.

가스라기가 눈을 감은 채 털가죽 이불에 얼굴을 비비며 불편한

자세로 잠을 청하려고 궁싯거렸다. 문득 천군은 한 가지 생각을

했다. 아직은 이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이제는 꽤나 많은 힘이

회복되었으니 어쩌면 괜찮을지도 모른다.

천군은 비스듬히 옆으로 몸을 눕혔다. 가스라기가 그 기척에 

부스스 눈을 떴다.

"이리 와."

천군이 한 팔을 내밀며 불렀다. 취기로 몽롱하던 가스라기의 

눈이 둥글게 커졌다. 제 귀로 들은 말이 술기운 탓인가 믿을 수

없어서 순간 반응을 못했다. 무색해진 천군이 무뚝뚝한 얼굴로

말했다.

"싫으냐?"

그러면서 팔을 치우려 하자, 가스라기는 놓칠세라 후다닥 그

팔을 벴다. 천군은 잔뜩 긴장해서 단전에 힘을 모았다. 다행히,

전처럼 음욕이 온몸을 치달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확실히

힘을 많이 회복한 것이다.

가스라기는 한동안 말없이 술에 취해 화끈한 얼굴을 천군의 

서늘한 팔에 부비기만 했다. 그러다가 눈을 감은채 중얼거렸다.

"아, 좋아. 정말 좋아."

천군은 더욱 무색해져서, 눈을 어디 둬야 할지 몰랐다.

"술이 그렇게 좋으냐?"

"아니."

가스라기가 대답했다.

"술 말고, 하늘님이 좋아."

천진한 고백에 천군은 그저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하늘님이 너무 좋아. 엄마만큼 좋아."

이 아이에게 나는 남자도, 선인도 아니고 그저 사별한 어미의

대신이로군.

그렇게 생각하니 가스라기가 몹시 애처로워서, 천군은 저도 모

르게 작은 등을 감싸 안고 다독였다. 갑자기 훌쩍훌쩍, 가스라기의

어깨가 들먹였다.

"하늘님, 가지 마. 떠나지 마. 엄마처럼 가스라기 버리고 가버리

지 마‥‥‥."

가슴에 내뿜는 숨이 뜨거웠다. 훌쩍이는 음성이 촉촉했다. 거짓

말을 할 수도 없고, 달리 위로할 말도 없어서, 천군은 묵묵히 가스

라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 손길을 느끼고 가스라기는 힘

겹게 눈을 떴다.

"하늘님."

무구하고 고집 센 눈이 코앞에, 팔 안에 있었다. 저 눈으로 바라

보면서, 가지 말라고 조른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천군은 답을

알지 못했다. 가스라기는 불러놓고 한동안 그를 바라만 보다가

불쑥 엉뚱한 소리를 했다.

"나, 술 줘."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천군은 머리맡에 놓아둔 술병을

잡아 가스라기의 손에 쥐어주려 했다. 그러나 가스라기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술잔에 마실래."

"술잔이 없구나."

가스라기의 요구는 하도 당돌해서 이번에도 천군을 놀라게 했다.

"하늘님 손을 술잔 할래."

거절의 말을 뱉으려다가, 천군은 마음을 바꿨다. 한 팔은 팔베개

를 해주었고, 나머지 한 손으로 술잔을 삼아야 하니 술병을 들

자리가 없었지만, 어느 정도 힘을 회복한 그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술병을 손끝으로 가리키자, 그것은 곧 허공에 떠올랐다.

손가락을 움직이자 그에 따라 술병도 기울어졌다. 흘러내린 술이

그의 손바닥에 고였다. 꿈꾸는 것 같은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

고 있던 가스라기가 약간 고개를 들고 그의 손바닥으로 입을 가져

갔다.

따스한 입과 혀과 그의 손바닥을 간질이며 술을 핥아갔다. 천천히,

천천히. 마시는 것보다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는 술이 많았지만,

천군도 가스라기도 신경 쓰지 않았다. 손바닥에 남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샅샅이 핥고 나서야, 가스라기는 겨우 입을 뗐다.

그럴 바라보고 힘없이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하늘님한테서는 댓잎 냄새가 나."

가슴 깊은 곳을 뜨거운 바늘로 쿡 찌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위험한 징조였다. 천군은 가까스로 호흡을 정돈하고 차분하게

농담을 던졌다.

"술맛이 각별하겠구나."

가스라기도 히죽 웃었다.

"응."

그러고 나서 가스라기의 고개가 힘없이 툭, 팔 위로 떨어졌다. 이내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잠이 든 것이다. 천군은 후우, 한숨을 내쉬었

다. 

잠든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연약하고 애처로워 보였다. 이런 어

린아이에게 음욕을 느꼈던 자신, 그리고 언제든지 그럴 가능성을 가

지고 있는 선인의 한계를 생각하니 입맛이 썼다. 살계와 음계는 선인

에게 계율인 동시에 한계다. 원래 인간은 다른 생명을 죽이는 살생의

업을 타고난 존재다. 음양을 맞춰 야합하여 새 생명을 낳고 들불처럼

제 종족을 번식하는 존재다. 애초에 인간으로 태어났다가 그 인간의 

허물을 벗은 선인은 그 두 가지 번뇌로부터 벗어났지만 완전히 자유

롭지는 못하다. 수천 년에 한 번, 수만 년에 한 번 살계와 음계의 묵

은 때를 씻어주지 않으면 수행이 깨어지기도 한다. 그때마다 하계에

는 커다란 전쟁이 일어나고 그 뒷수습을 하는 것 또한 선인들에게 지

워진 짐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사이 무심결에 그의 손은 가스라기의 머리카락

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러다가 굴 입구에서 기척을 느끼고 손을 멈췄

다. 그것은 화안금정수의 기척이었다.

"그림 좋군."

 굴 입구의 어둠 속에서 그르르 목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태양이 뜨

는 낮에는 빛 속에 숨고, 밤에는 어둠 속에 숨는 화안금정수라 지금

은 검은 불꽃의 사자처럼 보였다. 오늘도 변함없이 놀려대는 듯한 어

조였다.

"군자인 척하는 건 집어치우고 그 계집에게 선총을 내려주기로 작심

한 거냐?"

천군은 힐끔 시선을 던졌다가 도로 거뒀다.

"쓸데없는 소리나 하니 명색 신수씩이나 되어서 하계 계집의 눈에 

띄는 것이 아닌가."

"뭐?"

금빛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그 계집이 설마 나를 봤다고 했단 말이냐?"

"봤을 뿐 아니라 냄새도 맡았다더군."

"말도 안 되는 소리!"

화안금정수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버럭 불길을 곤두세웠다. 천군이 

별 부정도 하지 않자 오히려 더욱 당황한 기색이었고, 앞발로 땅을 

두어 번 파더니 투레질까지 해댔다.

"시끄러워."

천군이 홱 고개를 돌려 노려보았다. 검푸른 눈에서 날카로운 한광이

번뜩였다. 화안금정수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천군의 눈동자에는

이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을 주눅 들게 하는 어떤 힘이 있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화안금정수는 천군이 온전한 힘을 되찾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건 아니었다. 천군의 시선이 천천히 가스라기를 향해 내려

갔다. 그리고 나직이 말했다.

"깨겠다."

화안금정수는 퍼뜩 정신을 차렸고, 자신이 짧은 시간이나마 천군의

눈빛에 제압되었다는 사실에 더욱 화가 났다.

"너, 너, 너! 선인씩이나 되어서 거짓말을 하고 그러면 못쓴다! 난 

안 믿어!"

그렇게 되는대로 뇌까리고 짐승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천군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세상에 다시없는 편안한 잠자리에 든 

것처럼 곤히 잠든 가스라기의 얼굴을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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