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피비가 내린 날로부터 열흘. 귓도리골은 죽 끓는 곹처럼 난리였
다. 가스라기를 쫓아내려고 숲에 들어갔던 젊은이들이 생전 처음
보는 괴물을 만나 도망쳐 나온 후, 마을 근처에 온갖 해괴한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이 손에 잡힐 리 없으니 낮이면 모두 촌장 집에 모여 오들오들
떨며 간밤에 본 무서운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한 사람이 '내가 본 것은 머리에 뿔이 난데다 키가 세 척을
넘는 거인이었다'고 말하면 또 누군가는 '팔다리가 없고 뱀처럼
기어서 움직이는데 얼굴은 분 바른 여자처럼 생긴 괴물을 보았다'
고 말했다. 다들 가까이에서 제대로 본 적은 없지만, 말을 하면서
도 덜덜 떨고 있었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마을 근처를 맴돌다가
귓도리숲으로 들어가서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행히 신령나무
경계 안쪽으로는 들어오지 않아 아직 마을 사람이 해를 입은 바는
없지만, 생전 처음 보는 괴이한 짐승들이니 겁을 먹지 않을 수가
없다.
"도대체 그것들이 다 뭐랍니까?"
아무도 답을 모르니 서로 얼굴만 말똥말똥 쳐다볼 뿐이었다.
그때 촌장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혹시 그게 아닐까?"
"그거라뇨?"
"그‥‥‥ 나도 직접 본 적은 없고 어려서 어르신들한테 이야기만
들었던 건데, 아주 오래전에는 요수라고 해서 사특한 짐승들이
있었다더군. 환주에 나라님이 서신 후로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되었지만 말이지."
"요수요?"
젊은 사람들은 그런 말도 들어본 적이 없기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게 뭐래요? 가스라기 같은 겁니까?"
"아니, 좀 다르지. 아무튼 아주 삿되고 요망한 짐승들인데 사람
도 잡아먹고 곡식도 망치고‥‥‥."
"아이고! 이걸 어쩐대. 그럼 우리 마을은 이제 완전히 끝장이겠네
요?"
마을 사람들은 사색이 되었다.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는 요수
가 왜 하필 이 마을에 나타난 것일까 하는 의문에 대한 답은 '이
모든 게 가스라기 탓'이라는 말로 쉽게 구해졌다. 애초에 가스라기
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었다며 다들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이제는
내쫓을 엄두도 내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 일을 어찌하느냐는 둥,
조만간 가스라기가 그 요수들을 다 이끌고 마을로 쳐들어와 사단
을 낼 거라는 둥, 앞날 깜깜한 소리들만 해댔다. 아무도 대책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곰곰 생각에 잠겨 있던 촌장이 입을 열었다.
"방법이 없지는 않네."
늙은 생강이 맵다더니 과연 그랬다. 마을 사람들은 구세주라도
되는 듯이 촌장의 입만 빤히 쳐다보았다.
"젊은이들 중에 누가 위험을 무릅쓰기만 해주면 말이지."
가스라기는 손에 땀을 쥐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따. 지금은
아주 중요한 순간이다. 닫힌 꽃봉오리가 막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가스라기는 숨도 쉬지 않고 지켜보았다. 나비 날개처럼 얇은 꽃잎
이 감질나도록 천천히 벌어진다. 꽃술이 빛으로 만들어지기라도
한 듯, 영롱한 빛이 조금씩 그 안에서 새어나온다. 움직임이 너무
나 느려서 백 년은 걸릴 것 같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팍, 꽃잎이 완전히 벌어지고 빛이 흘러나왓다. 가스라기는 저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다.
"피었다!"
그러자 천군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동시에 그의 머리 위에
피었던 아지랑이 꽃의 형상이 스르륵 사라졌다. 가스라기는 놀라
서 제 입을 손으로 가렸다.
"나 때문이야?"
천군은 잠시 아쉬운 표정을 떠올렸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오늘은 이 정도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저승샘에서 몸을 일으켰다. 천의가 그의 몸을 감싸
는 동안 가스라기는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사실은 보고
싶었지만, 하늘님은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밤이 늦었구나. 이만 돌아가자."
샘에서 나온 천군과 가스라기는 굴을 향해 함께 걸었다. 숲의
땅은 요즈음 전에 없이 붉은빛을 띠고 있다. 천군이 이 숲에 온
날, 피비가 내린 날 이후부터 그렇게 된 것인데 가스라기는 이상하
다 생각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지금도 그 붉은 땅에는
별 관심 없이, 걷는 내내 천군만 힐끔힐끔 바라봤다.
"하늘님은 참 신기해."
"음?"
생각에 잠겨 걷던 천군이 가스라기가 불쑥 내뱉은 소리에 문득
시선을 돌렸다.
"머리 위에 꽃도 피고."
가스라기는 그렇게 말하면서 제 머리 위의 허공을 손으로 휘휘
저었다. 천군은 담담히 웃었다.
"그건 꽃이 아니다."
"그럼?"
"삼화(三華)의 정기가 응축된 거지."
"삼화?"
"정(精), 기(氣), 신(神)을 일컫는 것이고, 정을 옥화, 기를 금화,
신을 구화라고 한다. 삼화가 정수리에 모이면 그 기운이 마치 꽃처
럼 피어나게 되는데‥‥‥."
가스라기는 눈이 뱅글뱅글 돌 것 같았다.
"무슨 꽃이 그렇게 어려워? 그게 다 피면 어떻게 돼?"
"삼화가 모두 맺혀야 선계로 들어갈 수 있다. 아직은 한 송이뿐
이지. 세 송이가 모두 피어야‥‥‥."
천군은 문득 말을 끊고 고개를 들어 숲 위로 뜬 달을 바라보았
다. 만월이다. 만월을 바라보며 읊조리는 그의 음성에서 가스라기
는 깊은 그리움을 들었다.
"세 송이가 다 피면 하늘님 몸이 다 낫는 거야?"
천군은 달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래."
가스라기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꽃이 다 피면 하늘님은
저 달로 돌아가게 되는 것일까? 달을 바라보는 천군의 표정은
너무나 아스라해서, 금방이라도 달빛 속으로 스며들어버릴 것 같
았다. 가슴을 콩닥거리면서 지켜보던 가스라기는 문득 이상한 점
을 발견했다.
오월의 만월은 등처럼 밝아서 가스라기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
렸다. 그런데, 가스라기의 그림자만 있고 천군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좀 전까지 분명 있었던 것 같은데 가뭇없이 사라졌다.
가스라기는 놀라서 짤막한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 천군이 달에서
시선을 떼고 가스라기를 돌아보았다.
"왜?"
가스라기는 어, 어 하면서 천군의 발치를 가리키다가 다시 말문
이 막혔다. 그림자가 도로 생겨난 것이다.
"없었는데‥‥‥."
가스라기가 우거지상을 하고 그림자를 가리키며 말하자, 천군
은 이내 무슨 뜻인지 알아듣고 빙그레 웃었다.
"놀랐구나?"
가스라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천군의 허리를
덥석 안고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없어지는 줄 알았어!"
가스라기와 몸이 닿자 천군은 본능적으로 움찔했으나 물러서지
는 않았다. 불과 열흘 남짓에 삼화취정(三華聚頂)에 진전을 보일
만큼 힘이 회복된 터라, 이 정도의 접촉만으로 흔들리지는 않았다.
게다가 가스라기는 여자가 남자에게 안기듯 그렇게 매달리는
것이 아니다. 마치 어미의 품으로 파고드는 짐승 새끼 같았다.
"하늘님이 통째로 사라지는 줄 알았어. 무서웠어."
다행히 울지는 않았다. 가스라기는 지금껏 한 번도 그에게 우는
얼굴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울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
있다는 걸 천군은 알고 있었다. 그건 크게 울음을 터뜨리는 것과
진배없었다. 마른 눈물이며, 소리 없는 통곡이었다.
"무서워할 것 없다. 그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천군은 잠시 주춤거렸다.
선인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는 가스라기가 백일무영(白日無影)이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을 리 만무하다. 선인 중에 가장 높은
천선의 경지에 이른 자는 대낮에도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다. 왜냐
하면 진인이 서 있는 곳은 그 자리가 어디든 세계의 중심, 곤륜(崑
崙)이기 때문이다.
방금 그의 그림자가 사라졌던 것은, 그가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 선계를 사무치게 생각했던 탓이다. 일시적인 일이었을 뿐,
아직 백일무영의 경지는 멀다. 힘을 잃기 전의 그도 도달하지 못했
던 경지다.
하지만 천군은 그런 설명으로 가스라기를 달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차피 그는 언젠가는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몇 십일 후건, 그보다 더 늦게건 일어나게 되어 있는
일이다. 한 치 앞을 못 보는 하계인이라고 해도, 부질없는 희망으
로 위로를 해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위로할 말을 잃고 입술을
깨물었다.
오히려 가스라기가 곤경에 빠진 그를 도왔다.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손을 놓더니 헤헤 웃고는 머리를 긁는다.
"헛것을 봤나 봐. 눈 나빠졌어. 큰일이야. 얼른 가자, 하늘님.
졸려."
그러고는 달빛 비치는 숲길을 앞서 걸어갔다. 짐짓 기운을 내려
는지 발걸음도 씩씩하다. 가스라기의 뒤를 따라 걸으며 천군은
문득 생각했다. 선계에 있는 그의 친구가 했던 말이다. 벗 또한
선인이며, 그보다 더 오랜 세월을 살아온 자다
ㅡ하계의 여자들은 참 신기하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고, 어리석기
그지없어 보이지만 때로는 그 무엇보다도 강하고 질겨. 삼라의 만상
중에 가장 알 수 없는 것이 들판의 꽃이라는 말, 허언이 아니야.
이제 가스라기는 더 이상 붙어 자겠다고 조르지 않는다. 천군은
토굴 안벽 쪽에 정좌하고, 가스라기는 털가죽 이불 위에 웅크려
눕는 것이 약속처럼 되어 있다. 하지만 여전히 미련이 남았는지
가스라기는 아무리 피곤해도 누워서 곧바로 잠드는 법 없이 종알
종알 말을 걸곤 했다. 그 시시콜콜한 질문들에 이것저것 대답해주
고서야 천군은 겨우 조식(調息)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
은 어쩐 일인지 천군이 먼저 말을 걸었다.
"언제부터였지?"
뒤척이며 잠을 청하려던 가스라기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벽에 기대 있던 천군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
다. 가스라기는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뭐가?"
"너 혼자 이곳에서 살게 된 것이."
가스라기는 '아아' 하더니 손가락을 헤아려보았다. 하지만 많은
숫자를 세지는 못했다. 언제부터 혼자 살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것은 포기하고, 그녀는 말했다.
"원래는 엄마랑 같이 살았어."
"그런데?"
"엄마가 죽었어."
가스라기의 말투가 하도 담담해서 천군의 가슴이 오히려 덜컥
내려앉을 지경이었다.
"그다음부터 혼자 살았어. 쭉."
"외로웠겠구나."
무심코 말했다가 천군은 후회했다. 몇 살 때부터인지 모르지만,
저 어리석은 아이 혼자 살아온 세월이야 당연히 힘들고 외롭지
않았을까. 거기에 무슨 말을 보탠들 그 외로움이 덜어질 리 없다.
헛된 위로일 뿐이다.
그러나 가스라기는 그 말을 듣고 헤죽 웃었다. 하늘님이 제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 그저 고맙고 기뻤다. 헛된 위로라고 해도
그녀에게는 소중했다.
"그래도 있지, 엄마가 죽고 나서 꿈에 나타났었어. 그때 나 살쾡
이한테 물려서 무지 아팠는데, 엄마가 꿈에서 저승샘 가르쳐줬어.
처음엔 뭔지 몰랐는데 다친 여우랑 오소리가 와서 목욕하는 거
보고 나도 따라했더니 다 나았어. 신기하지? 거짓말 아니다. 진짜
다!"
명계의 삼도천에서 흘러나온 물이라는 명천. 저승샘의 유래를
알고 있는 천군은 그 말을 듣고 의심은커녕 오히려 납득했다. 원래
이런 지고의 보물은 인연이 없는 자의 눈에는 띄지도 않는다. 아마
도 이 아이의 어미가 남겨둔 딸을 걱정해 떠도는 혼이 되어 나타났
던 모양이다. 혼자 숲에서 살아가야 하는 어린 딸에게는 명천만큼
귀중한 유산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있지, 나 지금도 엄마랑 같이 있어. 봐."
그러면서 가스라기는 제 허리춤에 늘 매달고 다니던 뼈칼을
끌러 천군 쪽으로 불쑥 내밀었다. 천군도 그녀가 늘 그 칼을 달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제대로 보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무심코 그를 향해 겨누어진 칼끝을 보는 순간,
천군은 온몸의 신경을 조이는 불쾌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몹시
상서롭지 못한 기운이었다.
"이거, 엄마 뼈로 만든 칼이야."
가스라기의 말을 듣는 순간 소름이 오싹 끼쳤다. 제 어미의
뼈를 갈아 만든 칼이라니! 그래서 이렇게 느낌이 좋지 않았던 것인
가. 천군은 시선을 홱 돌렸다.
"치워라."
그의 목소리가 몹시 차갑게 들린 탓에, 가스라기는 놀라서 칼을
치웠다. 그리고 우물쭈물 말했다.
"그래도 이게 있으면 좋아. 가죽도 벗길 수 있고, 고기도 썰
수 있고‥‥‥. 꼭 품고 자면 엄마랑 안고 자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
아직도 불쾌한 표정이 남아 있는 천군의 눈치를 살피며 가스라
기는 조심스레 물었다.
"하늘님은 엄마 없어?"
그의 표정이 실소와 함께 살짝 풀렸다. 엄마라니.
"나 또한 선인이 되기 전에는 인간이었으니, 당연히 모친의 몸
을 빌려 세상에 태어났겠지."
마치 남의 일처럼 말했다.
"그런데?"
"등선하면 속세의 일은 모두 잊게 된다. 대부분‥‥‥."
천군은 말끝을 흐렸다. 자잘한 속세의 인생사는 모두 잊었다.
부모의 이름도, 그 존재도 잊었다. 하지만 아직 그에게는 질긴
악연의 끈이 남아 있다. 그 끈으로 인해, 그는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이다.
돌아가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가서 그 끈을 자신의
힘으로 끊어버려야 한다. 천군은 마음을 다잡고 눈을 감았다.
"그만 자자. 너무 늦었다."
가스라기는 고분고분 도로 누워 잠을 청했다. 천군이 막 조식에
들어가려는 순간, 어둠 속에서 그녀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소
리가 들렸다.
"하늘님도 외로웠겠네. 엄마도 잊어버리고."
천군은 듣지 못한 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