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숲 사이로 쏟아지는 밝은 빛 속에서, 그 빛보다 더 밝은 거대한
형상이 천군을 향해 걸어 나왔다. 얼핏 보면 거대한 사자와 비슷하
게 생겼다. 하지만 보통 사자가 아니라 불꽃, 그것도 하얀 불꽃으
로 만들어진 사자다. 이글거리는 몸뚱이에서 이따금 불똥이 가시
덤불에 타닥타닥 떨어지는데 묘하게도 불이 옮겨 붙지는 않았다.
하얀 불꽃으로 이루어진 전신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눈이다.
화안금정(火眼金睛), 눈자위는 불길을 닮은 붉은색이고, 눈동자는
녹아드는 금빛이다. 아름다우면서도 위풍당당한 짐승의 눈이었다.
요수와는 정반대로 태곳적부터 존재한 신성한 기운의 집합체인
신수(神獸), 그중에서도 화안금정수(火眼金睛獸)라고 불리는 짐승이
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똑바로 쳐다보기도 어려울 만큼 무섭도록
아름다운 눈으로 화안금정수는 천군을 쏘아보았다.
"꼴좋군."
화안금정수의 소리는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뱃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것처럼 들렸는데, 그 소리조차 이글대는 불길
같은 느낌이었다. 이글거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시시시, 비웃어대
는 말투였다.
"하긴 너희 선인 나부랭이들은 하계의 계집들에게 각별히 약했
지. 지금처럼 선기가 약해져 있을 때는 더욱 그렇고 말이야."
화안금정수는 천군의 주변을 약 올리듯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거대한 덩치인데도 불구하고 풀잎 밟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먹어버리지 그랬나? 아직 어려 보이긴 하지만 허리도 엉덩이도
튼튼해 보이는 것이 잡아먹을 만하겠던데."
"닥쳐."
표정은 차갑게 굳었지만, 아직 호흡이 가쁘던 천군은 울컥 한마
디를 뱉어냈다가 심기가 크게 흔들려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모습을
보고 화안금정수는 커다란 입을 벌리고는 소리 없이 웃어댔다.
흰 불꽃으로 이루어진 몸뚱이와는 대조적으로 입속과 혀는 선홍색
으로 붉었다.
"동하고 있지? 하긴 마지막으로 음계를 열어본 것이 언제였나?
참기 힘들 때도 되었을 텐데, 응? 하고 싶지? 하고 싶겠지? 응?"
유혹하는 요수처럼 은근한 말투로 채근하면서, 화안금정수는
굵은 꼬리를 음란한 움직임으로 배배 꼬아댔다. 그러면서 천군의
반응을 예의주시했다.
천군이 질끈 감고 있던 눈을 마침내 떴다. 화안금정을 마주
쏘아보는 천군의 검푸른 눈동자는 그사이에 차분하고 냉정한 빛을
되찾고 있었다.
"쳇."
화안금정수는 실망했다는 듯이 혀를 찼다. 배배 꼬았던 꼬리도
스르륵 풀렸다.
"음담이나 늘어놓으려고 하계까지 나를 쫓아온 거냐?"
"그럴 리가 있나. 네놈을 비웃어주려고 온 거지. 얼마나 멍청했
으면 그렇게까지 당하냐? 게다가 야구자의 시체까지 남겼더군.
제대로 된 선인 나부랭이라면, 그 정도 요마는 네 모습을 본 것 만으
로 녹아 없어졌어야지. 뭐 덕분에 잘 먹긴 했다만."
"앞으로도 종종 먹게 될 거다. 요기가 남지 않도록 깨끗이 치워."
화안금정수가 눈을 번득거렸다.
"멋대로 명령하지 마라! 이 몸은 네가 키우는 개가 아니다."
천군은 짧게 대꾸했다.
"아직은 아니지."
화안금정수는 목젖을 울리며 으르렁거렸다.
"아직은이라고? 아마 영원히 그럴걸. 네놈 꼴을 봐라. 비검은
깨졌지, 부상은 깊지, 선계에 소식을 전할 비합전서를 부를
힘조차 없지 않나? 나를 부리기는커녕 당장 선계로 돌아갈 수도
없을 것 같은데?"
천군이 대꾸하지 않자 화안금정수는 한층 의기양양했다.
"어떠냐? 네놈이 한 가지만 약속해준다면 이 어르신께서 도와주지.
선계에 네놈의 소식을 전해줄 수도 있고. 아니, 당장 네놈을 태우
고 선계로 돌아가 줄 수도 있다. 물론 네놈이 선계로 들어갈 수 있
을만큼 힘을 회복한 후의 이야기지만. 어쨌거나 혼자 돌아가는
것보다는 훨씬 쉬울 거다."
"원하는 게 뭐지?"
천군이 반문하자 화안금정수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내가 뭘 원하는지, 네놈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천군은 잠시 침묵했다. 화안금정수는 금빛 눈동자를 불안하게
굴리며 답을 기다렸다. 사실 이 신수는 천군이 하늘에서 싸우던
모습도, 가스라기가 그를 데려다가 샘에 담그는 것도 숨어서 다
지켜보며 때를 기다려왔다. 천군에게서 반드시 얻어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윽고, 천군의 입술이 열렸다.
"생각해보겠다."
긍정이 아니라 유보였음에도 불구하고, 화안금정수는 반색하며
눈을 크게 떴다. 이것만 해도 큰 진전이었다.
"정말이냐?"
"당연히."
천군은 대답했다.
"좋아. 네놈도 명색 선인인데 거짓 약속은 하지 않겠지. 믿겠다!
그럼 당분간 네놈 주변으로 몰려드는 요수들을 맡아주지. 네놈은
선기부터 회복하도록 해."
화안금정수는 흔쾌히 말했다. 한결 기분이 좋아졌는지 목구멍
깊숙이 그르릉 소리를 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천군이
불쑥 물었다.
"혹시, 가스라기의 점혈을 풀어준 것이 너냐?"
화안금정수가 일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천군을 바라보았다.
"가스라기? 그 하계의 계집?"
"그래."
"내가 왜 그런 귀찮은 짓을 해?"
"분명히 점혈을 했고, 풀어줄 틈도 없이 정신을 잃었는데 나를
여기까지 옮겨왔다. 누군가 대신 해혈을 해준 것이 아니라면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어. 네가 아니란 말이냐?"
화안금정수는 짐짓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선인이라면 나는 신수다. 거짓말은 하지 못해. 아마 네놈
이 힘이 없어서 제대로 혈을 점하지 못한 거겠지."
"그런가?"
천군은 더 묻지 않았지만,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이 남아 있었다.
천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화안금정수가 시시시 웃었다.
"뭐야. 너 정말 그 계집에게 관심이 있는 거로구나? 하긴 그
계집, 힘 하나는 세더구나. 탄탄하고. 맛있게 생겼어."
금빛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실 같은 금정이 붉은 눈자위를 가로
로 갈랐다.
"인간 계집은 먹음직해. 그 한 조각 천만 찢어버리면 보드랍고
매끄러운 살이 드러나지. 부끄럽고 무서워서 작고 가는 팔다리로
아등바등하겠지만 꼼짝 못하게 눌러버리는 건 손바닥 뒤집기보다
쉽지. 그다음엔‥‥‥."
처음엔 천군을 도발하려고 시작했던 게 분명한데, 어느덧 화안
금정수는 자기 말에 자기가 취해버린 모양인지 몸을 배배 꼬기
시작하더니 등짝을 땅에 대고 부비적거렸다.
"한입에 삼켜버리는 거야. 으적!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한 계집
이니 비린내도 안 나겠지. 살은 연하고 뼈는 오독오독할 거야!
씹어 삼키는 대로 핏물이 나오겠지! 일단 제일 연한 부분부터 먼저
먹겠어! 그러고 나서 실컷 피를 마셔주지. 아직 뜨거울 때 마시는
게 좋아. 그때가 제일 신선하거든!"
뚝. 짐승의 벌건 아가리에서 끈적끈적한 침이 흘러내렸다. 후르
릅. 침이 땅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짐승은 재빨리 들이마시고 앞발
로 주둥이 근처를 문질렀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웃지 마!"
천군은 웃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무표정하고 냉담한 얼굴
이 한심하다고 말하는 것 같아 화안금정수는 더욱 발끈했다.
"너, 너, 이 어르신을 비웃는다면 약속이고 뭐고‥‥‥."
"쓸데없는 소리 할 힘 있으면 근처에 다른 요수는 없는지 살펴보
기나 해."
천군은 휙 돌아서며 덧붙였다.
"하계인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고."
화안금정수가 날렵하게 뛰어 천군 앞에 내려섰다. 거대한 동체
에서 사뿐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네놈이야말로 조심해라. 지금 음계를 어기면 살계도 어기게
된다는 것, 잊지 않았겠지? 그랬다가는 선기 회복이고 뭐고 다
물 건너간다."
"알고 있어."
천군이 창백한 얼굴로 대답하자 짐승은 씨익 웃더니 그 자리에
서 천천히 빛 속으로 사라졌다. 모습을 감춘 것이지만, 항상 근처
를 맴돌 것이다. 천군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고 굴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걸음은 마치 살얼음 위를 미끄러지는 것처럼 조용
했다. 그러나 마음은 무겁기 이를 데 없었다.
두려웠다. 화안금정수의 말대로, 선인들은 하계 여자의 육체에
면역력이 없다. 상대가 아무리 여인의 매력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풀머리 선머슴 어린애에 지나지 않더라도 마찬
가지다. 힘이 온전할 때는 물론 괜찮다. 하지만 지금은 곤란했다.
유혹에 져서 음계를 어기면 선기를 잃게 된다. 한시바삐 힘을
되찾아 선계로 돌아가야 하는 그에게는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다.
가스라기의 몸에 손끝 하나 대는 것조차 그는 두려웠다.
무엇보다도 두려운 것은, 화안금정수가 마지막으로 한 그 말이
었다. 음계를 어기면 살계도 어기게 된다는 말. 선인이 품어버린
하계의 여자는 십중팔구 살아남지 못한다. 더군다나 아까처럼 상
대의 목숨조차 돌아보지 못할 만큼 자제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황이라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역시, 떠나는 편이 낫겠다.'
분명히 이 숲은 그가 힘을 회복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가스라
기가 저승샘이라고 부르는 저 명천 덕분이다. 명천(冥泉)이란 선인
의 말로 명계의 샘을 이른다.
명계는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곳, 하계인들의 말로는 저승이라
고도 하고, 황천이라고도 하는 곳이다. 그곳에서 흘러나온 물에는
생명과 죽음의 기운이 담겨 있어 얼핏 보면 물빛이 탁하고 냄새가
역하지만 생명을 치유하는 영약이 되기도 하고 잘못 쓰면 독약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어리석은 하계인이나 미물들은 그 쓰임새를
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기껏해야 상처를 치유하는 약수 정도로
쓰지만, 천군과 같은 선인에게는 손실한 힘을 열 배는 빠르게 회복
할 수 있는 효능이 있었다.
이런 장점이 있는 장소를 버리고 떠나는 것은 아쉬운 일이었으
나, 자신뿐 아니라 상대에게도 참혹한 결과를 믿을지 모를 위험을
안고 함께 머무는 것은 더욱 원치 않는 바였다. 그렇게 원망하며
뛰어가버렸으니, 아마도 가스라기 역시 질릴 만큼 질렸을 거라고
내심 생각했다. 하계인들이란 본래 인내심이 없는 존재가 아닌가.
말없이 이대로 떠나버려도 사실 상관없는 일이었다. 삼라의 넓
은 대지에 이만한 숲이 없을까. 일단 화안금정수와 약속을 했으니
요수의 위협도 당분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천군이 그대로
훌훌 떠나지 않고 가스라기의 굴로 돌아간 것은, 그녀에게 요구받
아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어찌되었건 가스라기는 그를 구했다. 선인의 목숨을 구한 것은
은원의 율법에 따라 보답을 받을 일이었다. 즉, 가스라기는 천군에
게 소원을 하나 빌 권리가 있고, 천군은 그녀의 소원을 들어줄
의무가 있었다. 선인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하계인이라면 누구
나 이 사실을 알고, 이런 기회를 잡는 것을 꿈꾼다. 그래서 선인들
은 하계인에게 도움을 받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은원의
빚이 생기기 때문이다.
기꺼운 일은 아니지만 빚은 해결하고 떠나야겠기에 무거운 걸음
을 옮겨 굴에 도착했을 때, 뜻밖의 일이 천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굴 안쪽에서 부스럭거리고 있던 가스라기가 천군을 보더니 반색
을 했다. 토라진 척하거나 정말로 화를 낼 줄 알았는데 반색이라
니. 게다가 그가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갑자기 털썩 부릎을
꿇더니 두 손을 모아서 머리 위로 치켜들고 삭삭 비는 것이 아닌가.
"미안, 미안! 하늘님, 내가 잘못했어. 하늘님 아파서 그런 건데
다 내가 잘못했어. 미안."
천군은 말문이 막혔다. 가스라기는 빠끔히 고개를 들어 천군의
눈치를 살폈다.
"화났어?"
화가 날 리 없다. 그렇다고 기쁜 것도 아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가스라기가 잔뜩 긴장한 눈으로 바라보며 답을
구하고 있기에, 천군은 엉겁결에 고개를 저었다. 가스라기가 환히
웃었다.
"다행이다! 배고프지? 먹을 거 차려놨어. 같이 먹자, 응?"
그러면서 천군의 소매를 잡아당겨, 좀 전까지 부스럭거리며 늘
어놓던 것 앞으로 데려갔다. 어젯밤에 이불로 쓰려던 털가죽 위에
는 떡이며 과일이며 말린 짐승 고기 같은 것이 잔뜩 올려져 있었다.
가스라기가 아껴둔 음식인데 태반은 마을에서 훔쳐온 것이다.
"먹어봐. 맛있어."
천군은 그 보잘것없는 음식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가스
라기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왜 그래?"
생각해보니, 이 하계의 계집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계속 그를
놀라게 했다. 점혈이 통하지 않았던 것도 그렇고, 천의를 잘랐다고
하는 것도 그렇다. 하지만 가장 그를 놀라게 한 것은 그녀가 계속
무언가를 주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무구한 친절을 그는
받아본 적도 베풀어본 적도 없었다. 그의 세계는 은(恩)과 원(怨),
주는 것과 받는 것이 엄격하게 계산된 세계였다.
기묘하게도 불편한 느낌이 명치 근처를 맴돌았다. 뭐라고 설명
하기 힘든, 어찌 생각하면 불쾌하기까지 한 무게감이었다. 이게
바로 은원의 빚이 가지는 무게일까.
"하늘님?"
음식을 앞에 두고도 그저 얼굴만 빤히 바라보자 가스라기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녀가 그를 처음 발견한 날로부터 나흘이 지났
다. 그동안 무엇 하나 입에 넣은 적이 없으니 배가 무척 고플
텐데 왜 먹으려고 들지 않을까. 가스라기는 그저 걱정이 되었다.
너무 아프면 먹을 생각도 나지 않는데 하늘님이 그런 건 아닐까,
하고.
"너는 왜 묻지 않지?"
물끄러미 가스라기의 얼굴만 보던 천군이 문득 입을 열었다.
"응? 뭘?"
"내가 누군지. 어디서 왔는지. 왜 다쳤는지‥‥‥."
가스라기는 눈을 깜짝이더니 물었다.
"왜 다쳤어?"
천군의 입가에 피식, 엷은 웃음이 떠올랐다가 가셨다.
"싸우다가."
가스라기는 그 대답으로 충분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궁금하지 않으냐?"
"어떤 거?"
"내가 누구인지."
"하늘님이잖아."
"그거 말고."
"그럼?"
대화를 나누면서, 천군의 표정은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
씩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그건 이름이다. 이름이 아니라‥‥‥. 그래, 이런 것 말이다.
네 이름은 가스라기지만, 너는 사람이지. 그런 것처럼‥‥‥."
"나는 사람이 아냐. 가스라기야."
천군은 잠시 아뜩한 표정으로 가스라기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 아이는 뭘까. 사람이 분명한데도 저 스스로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아무리 배운 게 없는 하계인이라도 그를 이만큼 가까이에서
보았다면 선인이라는 사실을 눈치 채야 하는데 그것도 아니다.
그녀는 숫제 선인이 무엇인지, 사람이 무엇인지도 구별 못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상대에 대해 더 알려고 노력해야 하는 건 가스라
기가 아니라 자기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라서, 천군은
희미하게 웃었다. 가스라기는 그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
리다가 물었다.
"그럼 하늘님은 누군데?"
궁금해서가 아니라, 원하니까 물어봐준다는 듯한 태도였다. 지
상의 수많은 공경대부(公卿大夫)들이 꿈에라도 한 번 보기를 원하
는 존재인 선인, 천군은 기가 막힌 웃음을 입가의 주름에 간신히
가둬두고 천천히 대답했다.
"나는 선인이다."
가스라기는 두어 번 눈을 깜빡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뿐이다. 감격하거나 놀라거나 하지도 않는다. 가스라기가 '선
인'에 대해 아는 것은 귓도리골의 계집애들이 주고받는 대화 속에
서 얼핏 들은 것뿐이다. 계집애들이 타는 그네를 같이 타고 싶어
했을 뿐이지, 하늘 오르기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아아' 한 번 하고는 만다. 천군이 빤히 얼굴을 보니 좀
더 아는 체를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는지 한참 뒤늦게 덧붙였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사람 말이지, 응?"
"그래."
"그럼 하늘에서 온 거지?"
"그래.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
정확히는 선계에서 온 것이지만, 선계나 하늘이나 이 무지몽매
한 하계의 계집에게는 큰 차이가 없으리라 생각하며 천군은 그리
대답했다.
"그러니까 하늘님 맞네."
가스라기는 배시시 웃더니 음식을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어서 먹어. 배고프잖아."
말만 하는 게 아니라 떡 하나를 집어 들고 천군의 손에 쥐어주려
했다. 천군은 떡이 아니라 그녀의 손을 되잡고 지그시 눌렀다.
그리고 말했다.
"선인은 먹지 않아도 된다."
가스라기는 그 말을 듣고야 비로소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정말?"
천군이 고개를 끄덕이자 우와, 우와 몇 번이나 소리를 내며
감탄한다.
"배도 안 고프고?"
"그래."
"그럼 아무것도 안 먹어?"
"먹을 때도 있지만, 살기 위해서 먹는 것은 아니다."
"그럼?"
천군은 잠시 생각을 더듬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기뻐하거나 슬퍼할 일이 있을 때, 친우와 함께 나눌 이야기가
있을 때, 천지가 내놓은 소산을 맛보며 살아 있다는 의미를 느껴야
할 때‥‥‥."
천군은 이런 조잡하고 비린 음식이 아니라, 천상의 향기로 가득
한 선계의 차와 술, 과일들을 떠올렸다. 하계인이 한 모습, 한입만
맛보아도 수명이 늘고 만병이 치료된다는 선계의 음식들이다.
가스라기는 옛일을 그리워하는 그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덥석 손을 잡아 억지로 떡을 쥐어주었다.
"그럼 먹자."
천군이 다시 그녀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배 안 고파도, 기쁜 일 있으니까 먹자. 오늘만."
"기쁜 일이라?"
"응, 하늘님이 나랑 만났잖아. 우리 이제 같이 살잖아."
"백 일뿐이다."
"백 일이나 같이 살잖아. 와! 신난다!"
장난스레 말하는 어린 짐승 같은 두 눈 속에 천군의 얼굴이
비쳤다. 이윽고, 천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네 말대로 하자."
가스라기가 환히 웃는 가운데, 천군은 손에 쥔 떡을 뜯어 입에
넣었다. 거친 음식이라 입 안부터 깔깔했고, 목으로 넘기는 것도
매끄럽지 않았다. 마치 그가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가스라기의 친
절처럼 무거운 음식이었다.
음계를 어기면 살계도 어기게 된다. 이 무람없는 하계 계집과
함께 지내는 것은 엄청난 시련이 될 것이다.
하지만 백 일, 고작 백 일이 아닌가. 백 일 동안의 시련이라면
이겨낼 수 있다. 아까도 이겨내지 않았던가. 백 일이면 상처를
치료하고 선계로 돌아가 잘못된 것들을 모두 되돌릴 수 있을 것이
다. 천군은 그렇게 믿기로 했다. 그와 같은 선인에게 백 일이란
찰나에 불과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