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109)

제 2 장

::선인(仙人_)::

선인은 불에 타지 않고 물에 젖지 않으며 바람과 구름을 밟고 다

니고 벼락을 무기로 쓰는 불멸자다. 선인의 거처는 저 아득한 하늘

위에 있어 범인은 삼생이 지나도록 밟아보지 못하고. 윤회를 거듭

하며 선업을 쌓은 자들만이 선골을 지닌 몸으로 다시 태어나 선계

에 입문한다.

선인에 대하여 널리 알려진 바는 이러하다. 그러나 이것은 극히

일부일 뿐이며 그릇된 이야기도 적지 않다. 허황한 이야기를 좋아

하는 저잣거리의 입들이 말하는 바를 어찌 모두 옳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선인을 직접 만나서 들은 이야기가 아니라면 어찌 믿을 수

있을 것인가.  ㅡ선학박사 울지명.[선인록]

2-1.

하늘 꼭대기와 땅 끝처럼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함께 사는 백

일이 무사평온할 리 없다. 당장 첫날밤부터 말썽이 일어났다.

천군은 백 일 동안 이른 새벽부터 밤까지 저승샘에 몸을 담그고,

늦은 밤에는 안전한 곳에서 쉬어야 한다고 했다. 안전한 곳이란

되도록 사방이 막힌 공간을 말하는데, 그래야 요수들이 그나마

그의 냄새를 맡기가 어렵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가스라기는 밤이 되자 천군을 제 굴로 데려왔다. 원래는

짐승이나 살기 적당한 토굴이다. 천장이 낮아서 천군은 들어올 

때 엉거주춤 허리를 굽혀야 했다. 게다가 좁다. 가스라기 혼자

살 때야 큰 불편을 몰랐지만 둘이 들어서니 꽉 찬다.

그래도 가스라기는 신이 났다. 털가죽 이불을 탈탈 털어 펼치고

잠자리를 만드느라 부산을 떨었다. 천군은 그건 거들떠보지도 않

고 굴 안쪽으로 들어가서는 등을 꼿꼿이 세우고 앉더니 눈을 지그

시 감았다. 가스라기는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안 자?"

대답이 없다. 또 물었다.

"안 잘 거야, 하늘님?"

눈을 뜨지 않은 채 천군은 대답했다.

"이게 자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러고는 다시 입을 다물어버렸다. 가스라기는 슬그머니 하늘

님 옆에 다가가 비슷한 자세로 앉아보았다. 등과 허리도 세우고,

천군을 흉내 내어 아랫배 앞에 두 손도 모았다. 눈도 반쯤 감았다.

얼마 못 가 허리가 아프고 엉덩이가 배겼다. 잠이 올 리가 없다.

금세 싫증이 난 가스라기는 흉내 내기를 집어치우고 천군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며 파고들었다. 천군은 불에 덴 듯이 펄쩍 놀라

며 그녀를 밀어냈다. 가스라기는 눈이 동그래져서 물었다.

"왜 그래?"

어이없는 얼굴로 가스라기를 바라보던 천군은 말없이 손으로

반대편의 털가죽 이불을 가리켰다. '가라'고 말하는 것이다. 가스

라기의 대답은 명쾌했다.

"싫어."

요구도 명쾌했다.

"하늘님하고 붙어서 잘래. 그게 좋아."

뿐인가. 핑계도 확실했다.

"그리고 어차피 좁아서 붙어 자야 한단 말이야."

천군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더니 몸을 일으켰다.

"내가 나가마."

가스라기는 놀라서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안 돼! 왜 나가? 위험하다며. 요수들이 냄새 맡는다며?"

"차라리 그게 낫다."

가스라기는 당장 울상을 지었다.

"그렇게 싫어?"

"싫은 게 아니라‥‥‥."

답답하고 난감한 표정을 짓던 천군은 도무지 설명할 수가 없었

던지 그냥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안 돼."

파고들 틈을 주지 않는 단호한 거절이었다. 가스라기는 주둥이

를 쑥 내밀었다.

"알았다, 뭐."

그러고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굴 입구를 향해 터덜터덜 가더

니 털썩 주저앉아서 한없이 불쌍한 모양으로 쪼그려 앉았다.

"여기 있을게."

눈물도 흘리지 않으면서 괜히 마른코를 훌쩍거렸다. 천군이 휴

하고 다시 자리에 앉아 눈을 감으려는 순간에 또 한마디 쫑알거렸다.

"하늘님이 안 된다니까 참는 거야."

"잘 생각했다."

천군은 눈을 감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가스라기는 입을 삐죽

거렸다.

"아마 못 잘 거야."

"잘 자라."

"못 잔대도."

천군은 다시 바위처럼 입을 다물어버렸다.

"못 자. 안 자. 진짜야."

가스라기는 끈질기게 투덜거렸다. 하지만 천군은 아예 대답을 

안 하기로 작심했는지 입을 열지 않았다. 안자면서 자는 척하는

고집불통과, 졸려 죽겠는데 안 자려고 기를 쓰는 고집불통. 둘이

한 굴속에서 첫 밤을 지새웠다.

날이 밝았다. 햇귀가 얼굴을 들이밀자 천군은 눈을 뜨고 벌떡

일어나다가 익숙하지 않은 낮은 천장에 하마터면 머리를 부딪칠

뻔했다. 팔을 들어 천장을 짚는 탁 소리에, 앉은 채로 휘청휘청 

졸던 가스라기가 번쩍 눈을 떴다. 전혀 안 졸았던 것처럼 자세를

꼿꼿이 세우고 주둥이 근처에 흐른 침을 쓱 문질러 닦는 와중에

천군이 그녀의 앞을 가로질러 굴 밖으로 나갔다. 가스라기도 허둥

지둥 뒤따라갔다.

"따라오지 않아도 돼. 샘에 가는 거니까."

"갈 거야!"

주둥이를 한껏 내밀고 있는 대로 고집스럽게 말했다. 못하게

하려면 해보라는 기세였는데, 천군은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한껏

기세를 올린 게 머쓱해져서 가스라기도 샘에 도착할 대까지 입을

다물었다.

저승샘 앞에 도착한 가스라기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샘 앞에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어제 잡은 야구자인가 뭔가 하는 그 요마의

시체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숲의 짐승들이 먹어치운 거라면

뼈나 가죽이라도 남아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도 없다. 아예 처음부

터 그런 시체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자리가 말끔했다.

천군은 조금도 놀라지 않은 표정이었다. 마치 이렇게 ㅗ딜 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하도 태연한 표정을 하고 있으니 묻기도

뭐하다. 가스라기는 시큰둥해져서 저승샘 옆에 털썩 쪼그리고 앉았다.

"뭘 하는 거지?"

"응?"

"왜 거기 앉는 거냐?"

이번에는 가스라기 쪽이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하늘님 목욕할 거잖아. 내가 지켜주기로 했잖아. 그러니까 여

기 앉는 거지."

천군은 잠시 입을 꾹 다물고 가스라기를 빤히 바라보다가 인내

의 무게가 느껴지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나는 옷을 벗을 거다."

"응."

천군은 잠시 더 기다렸으나, 가스라기는 그저 눈만 깜빡거리며

보고 있었다.

"세속의 예법이기는 하다만, 혹시 남녀유별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느냐?"

그리 기대하지 않는 말투였다. 과연, 가스라기는 '응?' 하고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천군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스라기가

미간에 주름을 모았다.

"왜 그래, 하늘님? 뭐 걱정되는 거 있어?"

천군은 '걱정되는 거 많다'라고 쓰여 있는 눈으로 가스라기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가스라기는 그 시선을 말똥말똥 받아내다가

물었다.

"왜 목욕 안 해? 걱정하지 마. 아무것도 못 오게 내가 지켜준다

니까."

"그게 아니라‥‥‥."

돌려 말해서는 백날이 지나도 변화가 없겠다는 결론을 내린

천군이 드디어 할 말을 하려는데,

"아, 알았다! 왜 그러는지 알았다."

가스라기가 갑자기 손뼉을 딱 마주치더니 깔깔 웃었다.

"수줍어서 그러는구나! 맞지?"

천군은 뻣뻣하게 굳었고, 가스라기는 계속 키득거렸다.

"걱정 마. 벌써 다 봤는데 뭐!"

얼굴을 손으로 덮으며 돌아서는 천군의 입에서 체념 어린 말이

흘러나왔다.

"오래 걸릴 테니 저쪽 나무 그늘에서 기다려라."

가스라기는 자신이 얼마나 말을 잘 듣는지 보여주려는 듯이,

재빨리 나무 그늘로 달려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턱을 괴고는 빤히 샘 쪽을 바라보았다. 밤을 거의 꼬박 지새웠건만,

충혈된 눈에 졸린 기색도 없이 말똥말똥했다.

하늘님이 옷을 입은 채로 샘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한 발 한 

발 옮기는 사이에 하늘님의 옷이 어깨에서 흘러내린다. 샘 깊은

곳에 몸을 가라앉힐 때쯤 옷은 완전히 벗겨져 물 위에 둥실 떠오른

다. 그걸 지켜보는 가스라기는 넋이 반쯤 나간 듯했다.

천군은 못 본 체하고 눈을 감았다. 이제 잡념을 끊고 운기(運氣)

에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가스라기가 가만 내버려두지를 않았다.

"하늘님, 하늘님."

못 들은 척하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 옷 뭐로 만든 거야? 참 신기해. 저절로 벗겨지고 저절로

입혀지는 것 같네."

가스라기가 이렇게 꼬치꼬치 캐물을 때는 빨리 호기심을 풀어주

는 편이 낫다는 것을 배운 천군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천의란 본래 그런 것이다."

"천‥‥‥."

"하늘 옷이라는 뜻이야. 천의는 여의(如意)라. 주인의 뜻에 따라

저절로 입혀지고 형태를 바꾸기도 한다. 때 묻지 않으며, 젖거나

타지 않으며, 하계의 쇠붙이에는 절대로 베이지 않는다."

가스라기는 입을 삐쭉거렸다.

"잘만 찢어지던데?"

천군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건 아직도 답을 알 수

없는 문제였다. 물론 천의는 입은 자와 기가 교통하는 신물이라,

천군 자신이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 어느 정도 그 영험이 떨어졌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래도 명색 선계의 보물이다. 주인 없는 천의

라고 해도 하계의 명검인들 쉽게 잘라낼 수 없는 물건인 것이다.

하물며 칼이 아니라 막대기라 하는 쪽이 더 어울릴 뼛조각 따위에

잘릴 리가 만무하다. 하지만 개어났을 때 천의의 한쪽 소매가 거의 

잘려져 있던 것을 그도 분명히 보았으니 말도 안 된다고 무시할

수도 없었다.

"진짜야. 분명히 내가‥‥‥."

가스라기는 제 말을 못 믿는 줄 알고 더 말을 늘어놓으려 했다.

"됐다."

천군은 그녀의 말을 잘랐다.

"이제 운기에 들어가니 대답하지 못한다."

운기라는 건 또 뭔지 궁금해 죽겠지만, 하늘님이 저런 표정으로

입을 굳게 다물어버리면 대답을 절대 안 한다는 걸 간밤에 배운

가스라기는 주둥이를 댓발쯤 내밀고 하릴없이 풀꽃을 쥐어뜯으며

지켜볼 도리밖에 없었다.

가만 보자니 참 요상하다. 하늘님의 몸 주변에서 김이 모락모락

솟고 있다. 원래 저승샘의 물은 뜨거워서 항상 김이 서려 있긴

하지만, 하늘님의 몸에서 솟는 김음 그것과는 색이 다르다. 푸르스

름하고 보일 듯 말 듯한 것이 봄날의 아지랑이를 닮았다.

제일 짙은 김은 하늘님의 머리 꼭대기에서 솟는데, 계속 보고

있자니 마치 아지랑이로 만든 꽃송이 같다. 흐려졌다가 짙어졌다

가, 꿈처럼 몽롱해서 모양이 확실하지는 않다.

사람의 머리위에 아지랑이로 만든 꽃이 피어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지만, 가스라기는 하늘님이라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여겼다. 온몸에서 향기가 나고, 저렇게 빚은 듯이 예쁜

사람이니 꼬치 아니라 무엇인들 피우지 못할까.

아마 저렇게 머리 위에 아지랑이로 만든 꽃을 피우는 것이 운기

라는 것인가 보다. 가스라기는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구경하는 사이에 몸이 뻐근해졌다. 간밤을 그리 새운 탓인 모양

이다. 가스라기는 일어나서 팔다리를 좀 흔들어보다가, 문득 눈을

반짝이더니 입고 있던 옷을 훌렁훌렁 벗어던졌다. 그리고 알몸이

되어 쪼르르 저승샘으로 들어갔다.

첨벙, 발 담그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머리 위의 꽃 아지랑이가

팟 사라지더니, 천군이 번쩍 눈을 떴다. 막 샘 속으로 들어서려는

가스라기를 보더니 표정이 굳어졌다.

"뭐 하는 거냐?"

"응? 나도 같이 멱 감게."

"안 돼."

"왜 안 돼?"

가스라기는 볼멘소리로 물었다. 천군의 눈썹이 부르르 떨렸다.

"너는 도대체‥‥‥."

약간 올라가던 목소리를 진정시키려는 듯, 천군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천천히 물었다.

"정말 씻고 싶은 거냐?"

약간 주눅이 든 채 바라보던 가스라기는 그 질문에 눈을 반짝거

렸다. 어쩌면 허락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응!"

사실 팔다리가 뻐근해서 씻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 천군을 이리 데려온 날 뜨거운

물속에서 꼭 끌어안고 있던 촉감을 잊을 수가 없었다. 가스라기는

한 번 더 그 따뜻함을 맛보고 싶었다.

"방해 안 할게. 물장구 안치고 가만히 있을게."

천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허락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 씻어라. 내가 나갈 테니."

가스라기는 화들짝 놀라 샘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냐, 아냐! 잘못했어. 내가 나갈게. 나중에 씻을게. 하늘님

병 고쳐."

깡마른 안몸이 물보라를 튀기며 햇빛 아래 드러나자 천군은

눈을 돌렸다. 그리고 차갑게 말했다.

"잘 생각했다."

가스라기는 천군의 얼굴을 보며 입술을 실룩거렸다.

'하늘님 미워!'

그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절대 뱉지는 못했다. 하늘님

은 뭐든지 안 된다고만 한다. 팔베개도 안 해주고, 같이 멱도 못

감게 한다. 가스라기가 포기하면 잘 생각했다고 말하는데 그 말투

가 정말 차갑다. 미워하고 싶어 죽겠다. 그런데 도무지 미워지지가

않는다.

가스라기는 한숨을 푹 내쉬고, 물을 뚝뚝 흘리며 옷 벗어놓은

곳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싸늘한 말로 냉정하게 거절당한 탓인

지, 햇볕도 따뜻한데 으슬으슬 추웠다. 나달나달한 저고리와 치마

를 대충 챙겨 입었다. 그래도 추웠다. 뼛속까지 시렸다.

"어?"

이상할 정도로 추웠다. 가스라기는 제 팔을 감싸 안으려 했다.

그런데 팔을 들 수가 없다. 정말로 얼어붙은 것이다.

"하으‥‥‥."

하늘님을 부르려고 했다. 입과 혀도 반쯤 얼어서 말이 잘 안

나왔다. 돌아서고 싶지만 몸을 돌릴 수가 없었다. 가스라기는 눈동

자를 내려 한쪽 소매만 꿴 제 팔을 내려다보았다. 손등에 성에가

하얗다. 빈 소맷자락 사이에서 뭔가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뱀?'

투명할 정도로 하얗고 가는 실뱀이다. 혀를 날름거리며 쉭쉭하

는데 갈라진 혀에서 허연 냉기가 뿜어졌다. 그걸 쐬니 심장까지

얼어붙는 것 같았다. 뱀은 꼼짝도 못하는 가스라기의 팔을 타고

스르륵 올라왔다. 움직이지 못하는데도 소름은 오싹 끼쳤다. 목을

사륵 감더니 반쯤 열린 채 굳어 있는 가스라기의 입을 보고 또

혀를 날름댄다.

'이, 입속으로 들어오려나 봐!'

생각만 해도 끔찍해서 가스라기는 어쩔 줄 몰랐다. 눈이라도

질끈 감고 싶은데 눈꺼풀도 얼어버렸다. 하얀 뱀이 머리를 막 들이

밀려는 순간, 어깨 뒤에서 손 하나가 넘어오더니 두 손가락으로

뱀의 머리를 잡았다. 하늘님의 손이었다.

손가락에 힘이 가해지는가 싶더니 파삭 소리와 함께 뱀은 얼음

으로 만든 조각처럼 산산조각이 났다. 동시에 온몸을 사로잡고

있던 차가운 기운도 누그러들었다. 움직일 수 있게 되자마자 가스

라기는 돌아서서 하늘님의 품에 안겼다.

"무, 무서워, 무서워. 뭐, 뭐야, 하늘님, 저거?"

"빙백귀사(氷白鬼蛇)라는 요정(妖精)이다. 심장에 파고들어 사람

의 혼을 얼리지."

하늘님의 몸에는 아직 저승샘의 뜨거운 물기가 남아 있었다.

따뜻한 물에 들어간 얼음처럼 온몸이 사르르 녹아들었다.

"무서웠어. 저런 뱀 처음 봐‥‥‥."

"이제 괜찮아."

하늘님의 손이 그녀의 등을 다독였다. 가스라기는 겨우 안심하

며 그 품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얼마나 서둘러 왔던지, 하늘님은

옷도 입지 않고 알몸 그대로였다. 가스라기는 기분이 좋았다. 징그

럽긴 했지만 그 흰 뱀에게 고마운 생각마저 들었다.

다정하게 등을 다독이던 손길이 우뚝 멎었다. 하늘님의 숨소리

가 이상해졌다. 가스라기는 어라, 고개를 들어 하늘님을 바라보았다.

'이상하다?'

하늘님의 얼굴이 붉었다. 얼굴뿐인가. 몸도 붉게 달아올랐다.

수접어서 얼굴을 붉히는 정도가 아니다. 눈빛도 달랐다. 열에 들뜬

것처럼 보였다. 숨소리도 거칠다.

"왜 그래, 하늘님?"

걱정이 되어 얼굴을 좀 더 살펴보려고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가스라기의 몸을 꽉 붙드는 하늘님의 손길이 심상치 않다. 우악스

러운 힘에 그녀의 작은 몸뚱이는 꼼짝도 못하고 붙잡혔다.

"하늘님‥‥‥."

빙백귀사로 인해 잠시 얼어붙었던 숲의 공기가, 천군의 뜨거운

숨결과 함께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천군이 가스라기를 한사코 멀리하려고 했던 것에는 사실 이유가

있다. 수줍음 같은 터무니없는 이유는 물론 아니었다. 그가 원래의

힘을 지니고 있다면 크게 문제될 일은 없겠지만, 부상을 당하고

힘을 잃은 상태이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조심한다고 했으나

모든 게 틀어져버렸다.

'낭패다!'

빙백귀사에게 심장을 물리면 되살릴 방도가 없기에, 너무 서둘

렀던 탓이다. 천군은 머리가 아찔했다. 이제라도 가스라기를 밀어

내야 한다. 그런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온몸이 열로 들끓는 것처럼 뜨거워지고, 몸 깊은 곳에서 짐승

같은 욕망이 물씬물씬 피어올랐다. 사물이 모두 불그스름하게 보

였다. 콧속으로 울컥 피비린내 같은 것이 끼쳤다. 몸 곳곳에서

충혈을 일으키는 그 자신의 피 냄새였다.

"하늘님, 또 아파?"

고개를 든 가스라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걱정하는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천군은 이를 악물었다.

후욱, 후욱,

천군은 어떻게든 욕망을 다스리기 위해 호흡을 고르려고 했다.

그러나 숨쉬는 것마저 자꾸 박자를 놓칠 만큼, 찰싹 달라붙어 있는

가스라기의 작은 몸뚱이에 대한 감각만 선명했다. 그 몸뚱이도

숨을 쉬고 있다. 선인들에 비해 인간의 맥박은 훨씬 빠르다. 작은

몸뚱이 안에서 파닥파닥 뛰고 있는 심장이 마치 손에 잡힐 듯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이제 막 돋아나기 시작한 이 자그마한 가슴속

에 바로 그 심장이 고동치고 있을 것이다. 물기에 젖은 이 낡은

옷을 찢어버리고, 따뜻한 살맛을 느끼고 싶었다.

'안 돼! 안 돼. 그러면 모든 게 헛수고가 된다. 정신 차려라,

천군!'

그가 한사코 버티기 위해 애를 쓰는 동안 바보 같은 가스라기는

아무 낌새도 눈치 채지 못하고 목에 두른 팔을 더욱 단단히 감더니,

거듭 물었다. 세상에 관심을 가질 가치가 있는 일은 오직 그것

하나뿐이라는 듯이.

"하늘님, 대답 좀 해봐. 아파? 많이 아파?"

천군은 물론 대답할 수 없었다. 어서 도망가라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입을 함부로 열 수도 없었다. 입을 여는 순간

억누르고 있던 모든 욕망이 한꺼번에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천군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스라기도 그의 무릎위에 앉았다. 천군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역효과였다. 가스라기의 몸이 눈을 보는 것보다 더 또렷

하게 느껴졌다.

천군이 몹시 아파 보였던지 가스라기는 더욱 바싹 다가앉았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어떤 방어막도 되지 못할 정도로 얇았고,

게다가 물에 젖어 있었다.

속옷 따위는 입고 있지도 않았다. 옷을 벗기고 어쩌고 하는

번거로움조차 필요 없었다. 그냥 어깨를 꽉 잡아 내리누르기만

해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준비 없이 음계(蔭戒)를 어기면 공력을 잃게 돼.

그러면 앞으로 닥쳐올 요수들을 당해낼 수가 없어.'

한사코 이성을 돌려놓으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요수

따위 무슨 상관인가. 지금 바로 앞에 이 지독한 욕망을 해소할

수 있는 상대가 있는데, 앞으로의 일 따위 무슨 상관인가. 범하겠

다. 여린 속살을 파고들어 닥치는 대로 쑤시고 헤쳐 놓고 말겠다.

이 몸속에 꽉 차 있는 욕망을 다 토해버리겠다. 떠오르는 것은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더 이상 어쩔 수 없을 정도로

커져버린 욕망의 덩어리 속으로 천군의 혼이 빨려 들어갔다.

가스라기는 여전히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천군이

가는 신음을 내뱉으면서 어깨를 잡자, 조금 놀라워 눈을 동그랗게 

떴을 뿐이다.

'끝이다. 모두 끝이다. 음계를 어길 수밖에 없다‥‥‥."

무방비 상태로 열려 있는 가스라기의 다리 사이로 천군이 자신

을 들이밀려는 그 순간,

ㅡ 끝을 내볼까, 라는 쪽이 어울리겠군. 그렇지요, 형님?

불현듯 그 말이 귀청을 때렸다. 천군은 퍼뜩 눈을 떴다. 불그스레

하게 보이던 가스라기의 얼굴 위에, 그를 하늘에서 떨어뜨린 얼굴

이 겹쳐 보였다. 그 자신과 똑같은 얼굴,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천군은 가스라기를 힘껏 밀어냈다.

가스라기의 몸이 떨어져 나가자 억눌렸던 천군의 호흡이 터져

나왔다. 하아, 하아. 그는 마치 인간처럼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왜 그래?"

가스라기의 얼굴이 점점 맑게 보였다. 주위의 사물도 더 이상

불그스레하지 않았다. 천군은 겨우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겨낸 것이다. 간신히.

"그렇게 싫어?"

퍼뜩 정신이 들었다. 가스라기가 땅바닥에 나동그라진 채 그를

원망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하늘님이 하나도 안 싫은데, 하늘님은 내가 싫어?"

금방이라도 와앙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천군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가스라기는 부르르 떨리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숲 저편으로 뛰어가버렸다. 쫓아가려면 못 쫓아갈

것도 없지만 천군은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샘 위에 떠 있던 천의가 바람을 타고 날아와 그의 몸에 감겼다.

어수선한 마음을 여미는 기분으로 옷자락을 가다듬었다. 이글거리는

열기와 함께 큭큭, 웃음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천군은

표정을 굳히고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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